금기와 규율을 넘어 생의 심연을 조명하는 프랑스 문학의 정수
서로 다른 결핍과 뒤얽힌 욕망으로 파국을 맞이하는 연인의 이야기를 그려내 프랑스 문단에 화제를 일으킨 《불》이 한국 독자를 찾는다. 저자 마리아 푸르셰는 파리 제12대학교에서 사회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06년부터 2014년까지 파리 제10대학교에서 문화사회학을 가르쳤다. 사회적 현안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온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불》에서 빛을 발한다. 《불》은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등 금기와 규율을 넘어 생의 심연을 조명해온 프랑스 문학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그 안에 여성의 성욕과 세대 담론, 자리를 잃은 남성성 등 오늘날 떠오르는 첨예한 쟁점을 자연스레 녹여냈다. 또한 두 화자를 번갈아 내세우면서 펼쳐낸 상반된 문체와 일인칭과 이인칭을 넘나드는 시점 등 치밀하고 입체적인 구조로 이룩한 뛰어난 작품성에 “미셸 우엘벡과 로맹 가리 스타일로 아니 에르노의 탐구를 새롭게 이어가는 작품” “간단하면서도 수천 가지 의미로 타오르는 다층적인 제목이 시사하듯, 조각칼로 세밀하게 빚어낸 아름다운 소설” 등의 찬사를 받았다. 본작은 2021년 평론가들이 뽑은 가장 독창적이고 진보적인 소설에 수여하는 파리 리브고슈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공쿠르상, 르노도상, 플로르상, 데상브르상 등 프랑스 대표 문학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활활 타오르다 소멸하고, 잿더미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기까지.
불은 사랑의 모든 형태를 보여준다.”
_마리아 푸르셰(출간 인터뷰에서)
메마른 시대에 작열하는 일그러진 사랑
“오랜 세월 쌓은 품위와 관습, 원칙, 규범, 정절……
너는 이 모든 걸 단 하나의 문장에 불태워버린다. 당신을 원해요.”
사회과학 교수인 로르는 반년 뒤에 열릴 심포지엄의 발언자로 초청하기 위해 은행가 클레망을 만난다. 속이 다 비칠 듯 새하얀 피부, 툭 불거진 혈관, 가느다란 손목…… 가냘픈 외형과 상반되는 단단한 목소리로 현시대의 쟁점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그에게 로르는 순식간에 빠져든다. ‘얼른 눈 돌리지 못하겠니.’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죽은 엄마의 비난을 흘려들으며 로르는 치솟는 정염에 뛰어들고, 돌이킬 수 없는 불길이 두 남녀를 휘감는다.
신념을 가로막는 온갖 체제에 저항하는 첫째 딸과 한창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 둘째 딸,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억지로 이어가는 남편. 아등바등 지켜내던 가정을 로르가 스스로 허무는 동안, 클레망은 학대받던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또 다른 결핍에 신음한다. 서로를 향한 일그러진 욕망이 뒤얽히는 가운데, 조금씩 드러나는 저열한 비밀. 찬란하게 솟구친 불길 뒤엔 언제나 까맣게 탄 재가 남듯, 연인은 파멸을 향해 전진한다.
끊임없이 일렁이며 불타오르는 사랑의 맨얼굴
파멸 끝에 사그라드는 오늘과 그 안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불꽃
타인을 향한 공감과 연대보다 생존을 위해 저마다의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는 현대인들. 메마른 이 시대에 《불》은 퇴폐적인 사랑을 앞세워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욕망의 불길을 되살려낸다. 미혼모로서 딸을 키우며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다 허울뿐인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대학교수 로르와 학대받던 유년기로 인해 온전한 관계 맺기에 실패하는 은행가 클레망. 상대가 지닌 깊은 상처에 공감하며 이끌리고, 그 상처로 다시 멀어지며 파국을 맞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사랑이 왜 ‘불’에 비유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포근한 온기가 삶을 송두리째 태워버리는 재앙으로 번지기까지, 《불》은 사랑의 양면성을 빠짐없이 그려낸다.
로르와 클레망의 금지된 사랑에 《불》은 세대 담론을 겹쳐 더욱 복합적인 갈등 구조를 빚어낸다. 로르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는 지나간 세대의 가부장적 질서를 재현하고, 사회 전반에 팽배한 차별을 향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시위를 주동하는 첫째 딸 베라는 다음 세대의 정신을 보여준다. 로르와 클레망이 파멸 끝에 사그라드는 지금의 시대를 상징한다면, 베라는 그 재 속에서 새롭게 피어오르는 또 다른 불꽃이다. 초라하게 저무는 오늘 뒤엔 어떤 빛깔의 새벽이 밝아올까. “마리아 푸르셰가 문학의 근원을 다시 불태웠다”라는 〈르몽드〉의 평가처럼, 《불》은 현실을 향해 엄숙한 비판을 가하는 굵직한 소설을 기다려온 독자들의 문학을 향한 애정에 열기를 더할 것이다.
“두 인물의 관점을 교차시킨 《불》의 구성은 발화에서 진화에 이르는 이 묘한 과정을 긴장한 채 따라가게 만든다. 마리아 푸르셰의 사랑 이야기가 뻔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그 불길 안엔 이 시대가 녹아 있다. 마리아 푸르셰는 매 작품에서 독창적인 방식으로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문제들을 다루는데, 《불》에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이 시대의 한 단면이 담겨 있다.”
_옮긴이의 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갸름한 그의 얼굴에 아주 잠깐 경계심이 사라진다. 처음으로 너는 뭔가 취약하고 상처 입은 어떤 것이 마치 표류하는 난파선의 한 조각처럼 그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걸 발견한다. 그 배가 난파하기 전엔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진다. 처음엔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이목구비도 그럭저럭 평범하다고 생각했음에도, 지금 너는 그가 아주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제발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두고 일이나 해라. 죽도록 일한 유능한 여자들, 무보수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지하 세계에서 네 엄마가 짜증스럽게 말한다.
10p
“뭐? 담배 하나 달라고?” 베라가 놀라며 묻는다.
“안 될 거 있니?”
너도 바로 이 나이였다. 너도 이 아이처럼 견고하고 고집스러운 것으로 이뤄진 삶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너는 삶이란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것임을 배웠다. 타협하고, 반복하고, 더러 잊어버리면서, 혹은 치유되면서……. 그때의 나이와 지금의 나이, 그 둘 사이에서 오랜 잠을 잔 것 같다.
37p
난 녀석을 파파라고 부른다. 몹시도 거룩하신 나의 어머니는 눈곱만치도 반응하지 않지만, 난 어머니가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는 꼴을 보려고 그렇게 이름 붙였다. 파파, 즉 ‘아빠’는 일반적으로 가정의 가장을 의미하니까. 난 이 ‘일반적인 경우’에서 이미 너무 많은 실패를 맛보았기에, 어느 날부턴가 이제 그만두겠다고 다짐하고 선언했다. 자, 이제부터 우리 집의 ‘아빠’는 개야. 이렇게라도 다시 시작해야지.
39p
이건 사랑 이야기가 아니야. 완전히 가면무도회지. 이제 조금도 야하지도 않아. 나는 그녀가 차라리 휴대전화를 안 갖고 오길 바랐어. 저녁 시간 내내 그 덩치가 로르에게 큰딸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문자를 보내는 통에, 그 식탁에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았거든. 로르에게 제발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틈조차 찾지 못했지. 마침내 로르는 그 성가신 남자에게 가브리엘의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대답했어. 내겐 물어보지도 않고.
나는 가브리엘이 아니고, 우리 집도 여인숙이 아니야.
212p
너는 그 아우성을 찬가처럼 듣는다. 너의 아이를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너는 생각한다. 그래, 계속하렴.
우리의 아이들에게
태어남과 동시에 두려움에 차 비명을 지르는 그들에게
사랑을 부르짖는 그들에게
피 묻은 그 손으로
북을 두드리며.
33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