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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 있는 삶 (외 9편)
김지향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꾼다. 행복한 삶이란 옛부터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으로 알려져 있다. 부귀영화를 갖춘 사람은 그야말로 금상첨화 같은 행운아이겠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다. 그 중 한 가지만 있어도 행복으로 아는 것이 우리네 실정이다. 그러고 보면 행복이란 얼마나 갖추기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행복이란 생각하기 나름이다. 소위 말하는 ‘오복(五福)’을 다 갖추었다 해도 본인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불행한 것이다. 다 갖추고도 남의 행복을 부러워한다면 갖추지 않음만 못할 것이다. 반대로 남이 볼 땐 ‘복(福)‘이라곤 한 가지도 갖지 않았음에도 살아있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즐거워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일 것이다. 하긴 바랄 것 없이 다 갖춘 사람은 앞으로 소망할 꿈도 희망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현실적인 불평과 불만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못 가진 사람은 바라볼 미래가 있다. 희망이 있고 꿈이 있는 것이다 희망이 있는 삶, 꿈이 있는 삶, 그것이 바로 삶다운 삶, 값진 삶이 아니겠는가.
농부가 봄에 씨를 뿌려놓고 가을을 기다리는 소망과 흐뭇한 만족감 같은 것을 생각해 보라. 가을에 대한 기대와 계획과 꿈이 있을 것이다. 꿈이 있는 한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곳간이 넘치도록 풍족하게 가진 사람은 그 꽉 찬 자만심으로 하여 꿈이 들어설 곳이 없는 것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하루하루가 얼마나 지루하고 무료하겠는가. 하지만 곳간이 빈 사람은 날마다 땀 흘려 일하는 보람이 있을 것이다. 아침엔 기대에 찬 발걸음을 옮겨놓을 것이고 저녁엔 만족감에 찬 귀가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꿈을 성취시키는 길은 평탄치만은 않다. 한 날의 날씨도 햇빛과 구름과 비가 뒤섞여 올 때가 있다. 햇빛과 구름이 교차하면서 날씨를 만든다는 사실은 우리가 날마다 체험하는 일기이다. 꿈을 향해 한 계단 올라가면 올라간 만큼 어려움이 따른다는 사실도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놓고 주신다고 하지 않는가. 반드시 연단이란 과정을 거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한 단계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다. 쉽게 올라간 언덕은 쉽게 미끄러져 내린다는 말도 있다. 때문에 올라가면 미끄러져 내리는 그 연단과정을 꿋꿋이 참고 견디는 의지가 있어야 소망하는 꿈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시골의 한 청년은 대학을 나오지 못한 탓으로 도시의 대기업에 입사하는 희망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반드시 대기업에 입사하는 길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희소가치의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재능은 반드시 대학에 가야만 개발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신념도 있었다.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는 그로선 대학에 가지 않아도 재능개발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좋은 결실을 맺는다는 믿음도 있었다.
하루는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하느라 밤을 꼬박 새운 것이다. 그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있다는 칭찬을 받은 사실이다. 산에서 주워온 나무토막을 가지고 평상을 만들어 마을 정자나무 아래 갖다놓고 마을 어른들이 앉아 놀게 했더니 어른들로부터 손재주가 있다는 칭찬을 받은 일이다. 그때 목수 일을 해보라는 권유도 받았었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그 일을 하려고 결심했다. 날이 새기 바쁘게 동네 한 목수 아저씨를 따라나섰다. 처음엔 집짓기의 심부름꾼으로 따라다녔다. 그러나 처음은 일을 배우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다. 기둥세우기, 서까래 깔기, 등 쉬운 일부터 시작했다. 수 삼년 후엔 그는 정식 목수가 되었다, 게다가 일꾼 몇을 거느리는 팀장이 되었다. 그러나 한 때는 건축업이 불황이어서 빚을 지고 넘어지기도 하고 때론 지붕에서 떨어져 병원신세도 지는 등 끼니 잇기도 힘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고 꿋꿋이 일어서는 칠전팔기의 노력으로 지금은 어느 건축설계소의 전속설계사가 되었다고 한다. 건축업이 인기가 있는 요즘은 매우 안정된 직종으로 생활이 윤택해지고 보니 평생의 숙원이었던 대학생이 되었다고도 한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 옛말이 있다. 소질을 따라 소망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면 반드시 성공의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좋은 예가 되리라 본다.
삶의 슬기
일찍이 쇼펜하우어는 인간존재의 목적을 ‘고뇌‘라고 했다. 사실 인간 삶에 고뇌가 없다면 인간의 가치를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측도도 바로 이 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인간은 고뇌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뇌란 바로 인간이 살아있음을 확인시키는 바로미터이며 인간에게 삶의 역경을 타개해나가는 슬기를 개발시키는 윤활유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멀고 험한 인생길에 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충실히 사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목숨을 끝까지 성실히 사는 일이 소중하며 여기엔 삶의 슬기가 필요하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장애물이 있게 마련이다. 저 들판의 싱그러운 나무도 어느 날 갑자기 불의의 태풍을 만나 쓰러지는 역경을 당하는가 하면 변함없이 흐르는 시냇물도 바윗돌을 만나는 고난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장애물에 희생되지 않고 굳건히 일어서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인간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 인간의 삶도 장애물을 딛고 일어서는 데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내일을 내다보지 못한다. 내일 어떤 일이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지 모를 뿐 아니라 불행이란 단어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 때도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위험과 싸우는 데에 존재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투쟁의 연속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상대는 언제나 적이기 때문이다. 적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가까운 데에 있으며 또한 그것은 내 안에 있는 나 자신일 수 있다.
하지만 적을 적으로 보지 않고 친구로 포용하는 데에 삶의 승리가 있다. 그러나 적을 포용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여기엔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이란 말할 것 없이 사랑일 것이다. 적을 사랑하는 지혜, 그것이 바로 삶의 슬기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무상으로 주신 은혜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쉽게, 또는 가볍게 사랑이란 말을 함부로 내뱉곤 한다. 여기엔 아무런 의미도 책임도 부여하지 않는다. 너무 흔한 말이다 보니 생각 없이 휴지 버리듯 하는 모양인데 실은 사랑이란 깊이 생각할수록 기막히게 아름다운 말이다. 사랑의 속성을 학자들은 크게 세 종류로 분류도 하는데 에로스, 아가페, 필리아로 구분 짓는 듯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필리아 곧 이웃 사랑을 말한다.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느끼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문명의 발달에 따라 보다 다른 차원의 어려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우리는 이 어려운 시대를 개탄만 할 것이 아니라 타개해나갈 방법을 강구해야할 것이다. 현실의 불행을 적으로 간주할 때, 이 적은 주먹으로도 지식으로도 기술로도 퇴치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필요하며 사랑으로 감싸는 감화력을 발휘할 때만 적은 나의 친구가 되며 또한 나와 하나가 될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무쇠도 녹이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실천함으로써만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본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사랑을 품고, 주어진 여건을 아름답게 승화시킨다면 원초적인 삶의 고뇌는 해결되리라 본다.
영곤이의 꿈
내 고향은 농촌이지만 고향을 떠나온 지 50여년이나 된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늘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어릴 때 자라던 고향 농촌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이나 포근한 정서, 정겨운 사람들의 후한 인심은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산업사회, 도시문명의 각박한 세파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을 때마다 더욱 그립고 더욱 생각나는 게 고향인심인 것이다.
호박잎이나 옥수수를 길러 이웃과 나눠먹는 인심, 어쩌다 별미를 만들면 담 너머로 넘겨주는 인심, 마을에 길흉대사가 닥칠 땐 서로 자기 일 처럼 다투어 앞장서는 인심, 이 얼마나 순박하고 아름다운 풍경인가. 얼굴에 분가루 하나 바르지 않아도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자연미가 넘쳐나는 이러한 아름다운 여성이 도시에는 흔하지 않다. 조금도 꾸밈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이를테면 도시사람의 세련된 세련미에 비길 수 없이 거칠고 울퉁불퉁한 마치 다듬지 않은 도자기 같은 것이 시골사람들의 외모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종일 밭에서 거름 질을 한다거나 김을 매고 밤늦게 돌아와도 피곤한줄 모르는 건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체력을 유지하는 데는 다름 아닌 마음속에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되고 이 내면미는 많은 도시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소비성향이 짙은 도시 사람들이 사치를 부릴 때 시골 사람들은 차곡차곡 알찬 생활을 쌓아간다. 그것은 바로 생산과 저축일 것이다. 알뜰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생활태도야말로 삶을 성공시키는 비결이며 이는 곧 시골 사람들의 상징어가 될 것이다.
그들은 저축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며 또한 저축은 그들의 꿈을 가꾸는 밑거름이 된다. 그래 그런지 집집마다 저금통장 안 가진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집은 식구수대로 저금통장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실질적이고 가능한 꿈을 가꾸어나간다. 차곡차곡 거름을 주어 농사를 짓듯 꿈을 키우는 것이다.
내가 아는 영곤 이란 청년은 학교선생님이 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을 흠모하고 존경했을 뿐 아니라 선생님 되는 것이 소망이었다. 그러나 환경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학교선생님과는 요원한 길로 가고 있었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 한 분만 남으셨다.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그러나 꿈은 버리지 않았다. 군 생활에서 익힌 의지대로 ‘불가능은 없다’라는 표어를 책상머리에 붙여놓고 날마다 외우며 들에 나가 일을 하곤 했다.
논밭과 집 사이를 오가며 소고삐와 쟁기 줄을 잡고 씨름하느라 학교공부는 전혀 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밤이면 책과 씨름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야무진 청년이 되었다. 그는 곡물농사 외에도 가축을 치는 일로 꽤 바빴으며 뜻대로 잘 되었다. 조금씩 저축도 하게 되었다. 푼돈으로 시작한 저축이 목돈이 되었다. 영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나 곰곰 생각하다가 옳지! 하고 무릎을 쳤다 ‘야학‘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거다 하고 소리 쳤다 그에겐 선생님이 될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못간 아이들을 끌어 모았다. 그리곤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노인정 한 모퉁이를 빌어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이웃 마을에 까지 퍼져나가 아이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노인정이 비좁을 정도며 노인네들 까지도 한 몫 끼어앉아ABC를 배우게 되었다.
‘ 영곤이는 선생님의 꿈이 성취되는 바람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즐겁고 보람된 삶을 향유하느라 신명이 났다. 그렇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성현들이 말했듯이’‘불가능은 없다‘라는 생각 그 자체가 성공의 길로 이끈 지팡이가 아니겠는가. 때때로 나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공한 삶의 사례를 듣거나 읽을 적마다 내 고향 시골의 영곤이를 생각하곤 한다.
오늘을 충실히
바다가 그리운 계절이다. 누구나 바다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일생에 한두 번쯤 바다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때문에 바다는 늘 우리 마음에 향수 같은 그리움으로 살아있다. 특히 외로울 때, 세상 삶에 지쳐 고달플 때 사람들은 바다를 생각하고 바다를 찾아간다. 그 때 마다 바다는 어머니 같은 모성적 너그러움으로 포근하게 품어주는 듯 광대무변한 가슴을 느끼게 한다. 뿐더러 바다는 생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우렁찬 생명의 약동을 느끼게도 한다.
프로이드는 생명의 근원을 물에서 찾았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 전래신화에도 인간의 혼이 물에서 나와 태어나는 아이에게로 들어간다는 설화를 읽은 적이 있다. 수로부인의 경우도 그러한 것이다. 시인 노천명은 고향 두메마을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몽금포 바다 위에 떠가는 배를 보고 이름 모를 향수에 젖으며 아름다운 상념으로 시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바다는 생성의 의미뿐 아니라 인간에게 넓은 상념과 너그러운 마음과 따뜻한 사랑의 눈을 뜨게 해 준다. 사랑은 물론 넓은 심성에서 우러나는 속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맹자(孟子)는 인간은 날 때부터 사랑의 마음을 타고 난다고 했다. 모든 사물에 측은한 마음이 되는 점에 물아(物我)가 일체를 이루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고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했다. 이는 바로 모성적 본능으로 바다에 비유될 수 있다. 그래서 도심지에서 자란 사람보다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이 포용력이 있으며 도량이 넓다는 말을 듣는다.
나는 바다에서 작업을 하는 해녀를 볼 때 넓은 도량뿐 아니라 어딘지 강인한 의지를 느낀다. 그 의지는 여성을 보석처럼 귀하고 빛나게 한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물너울에 시달리며 수심 깊숙이 들어가 해초를 캐내는 힘은 남자에 비길 바가 못 된다. 물너울에 시달려 의지가 단련이 되었다고나 할까. 도시에서 자란 사람을 온실의 샐비아꽃에 비긴다면 바닷사람은 야산에 핀 들국화 꽃에 비길 수 있으리라.
들국화는 모진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지만 샐비아는 소낙비 한 줄기에도 그만 넘어지고 말지 않는가. 때문에 시련과 고통을 겪으며 수련을 쌓은 사람은 아무리 거치른 세파나 적지에서도 꼿꼿이 일어서는 성향이 있지만 고난의 수련 없이 자란 사람은 가느다란 미풍에도 넘어지는 나약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했다. 영원히 아름다운 삶의 길을 가려면 먼저 시련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시련을 극복하는 길은 현실을 똑 바로 직시하는 눈이 없어서는 어려운 일이다. 현실을 비관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다면 고난이전에 쓰러지고 말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자기분수를 지키지 않을 때 생기는 것이다. 신라 때 충담사(忠談師)가 쓴 안민가(安民歌)에 보면 ‘자기답게 살라’는 구절이 있다. 자기답게 산다는 것은 바로 분수껏 산다는 얘기다.
인간은 가끔 허욕을 부리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분수를 지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옛말에 ‘지족자행(知足者幸)'이란 말도 있다. 곧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자만이 행복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칫 현실에 만족해버리면 발전이 없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현실만족은 곧 미래를 약속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고 오늘에 만족할만한 삶을 영위해갈 때 목표한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다. 현실에 불만이 있는 사람에게 어찌 미래가 있겠는가. 그러나 안주해버려서는 안될 현실이 있긴 하다. 자기탈피, 자기반성, 자기개혁이 필요한 현실이 그것이다. 시간이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때문에 어제의 시간이 오늘의 시간과 다르고 내일의 시간 역시 오늘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일상이 어재와 같다고 해서 시간도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충실히 만족하게 사는 일 만이 중요하다고 본다.
다시 읽고 싶은 <상록수>
독서는 젊은 시절에 하는 것이 좋다. 기억에 오래 남기 때문이다. 젊을 때만큼 기억력이 왕성한 때가 없으며 젊은 때만큼 감수성이 예민한 때도 없다. 그러므로 젊은 때 받은 감동이나 충격은 인생의 전기를 가져올 만큼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법이다. 내 경우도 지금껏 기억에 남아있는 사건이나 감동은 모두 젊은 시절에 읽은 책이나 문화유산에서 얻은 것들이다.
젊은 시절은 누구나 독서광이 된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 넘긴다. 그러다보면 좋은 구절이나 좋은 내용이 뒤섞여 기억되는 수도 있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뒤섞일지라도 좋은 구절이나 내용이 인생코스에 길잡이가 될 때가 많다.
내가 젊은 시절에 읽은 책 가운데 심 훈의 ,<상록수>.는 나의 인생코스에 한 전기를 마련해준 계기가 되었다. 많은 문학작품 가운데 왜 하필 <상록수>일까? <상록수>는 내가 십대에 읽었고, 십대의 여린 감수성을 <상록수>만큼 크게 자극한 작품은 없었다고 본다. 밤을 새우며 연거푸 세 번을 읽었으며, 주인공 채영신의 사정이 기가 막혀 가슴을 쥐어짜며 통곡을 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채영신(실재 인물; 최용신)은 신학생이었다. 박동혁 이란 남자 주인공과 함께 농촌봉사대를 조직, 방학을 이용한 학생 농촌봉사활동을 전개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요즘 같으면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의 어린 나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채영신은 청학동이란 벽촌에서 계몽활동을 전개한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문맹을 퇴치시키는 일이었다. 우선 글을 못 배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야했다. 학교가 없는 미개지여서 마을 빈터에 웅덩이를 파놓고 아이들을 모았다. 그런데 여름철이었고 비가 잦았다. 그때마다 웅덩이는 우물이 되어버렸다. 영신은 동네 유지들의 양해를 얻어 공회당을 빌어서 한동안 쓰기도 했으나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배우러 사람들이 몰려오는 통에 장소가 비좁아졌다. 게다가 일제치하여서 ‘관’의 간섭도 잦았다. 영신은 동네 청년들과 합심해서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재정이 없었다.
동네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학교 세우는 일이 시급함을 설명하고 도움을 호소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랜 유학의 관습에 젖은 유지들에겐 영신의 호소가 먹혀들어갈 리 없었다. 오히려 이 고지식한 유지들 눈엔 여성의 활동이 상식 밖의 일로 눈살이 찌푸려지기만 했다. 도와주기는커녕 모옥을 당하기 일쑤였다. 영신은 하루 세끼 끼니를 메울 형편도 못되어서 굶주려 뼈만 남은 몰골로 결심했다. 동네 청년들과 함께 직접 벽돌을 져다 나르며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건물은 일어서고 드디어 상량식 날이 왔다. 그 때 채영신은 맹장염에 장패색 증까지 겹쳐 몸져눕게 되었다. 약도 없는 벽촌이어서 치료도 부실한데다 영양실조로 점점 실망상태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로 누워서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은 잊지 않았다. 드디어 건물은 완공되고 입당예배 드리는 날이 왔다. 영신은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식장에 나갔다. 단 위에서 “도와주신 여러분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쓰러졌다. 그 길로 영신은 영원한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가 남겨놓은 회당은 현대식 학교가 되고 그녀의 삶터였던 청학동은 아름다운 전원도시로 발전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30년대에 있었던 흔한 계몽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흔한 대중소성이 나에겐 주인공 채영신의 집념과 의지가 대단히 높이 평가받아야할 값진 보석으로 보였다. 당시 어느 작품에서도 이만한 의지의 여성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고난과 역경을 감수했으며 미개한 고을의 계몽에 목숨을 걸 수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희생이 눈물겹도록 감동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당시 법관지망생이었던 내가 교육에 투신할 결의와 각오로 밤을 지새웠으며 또한 채영신처럼 힘 있는 여성이 되려면 나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였다. 하긴,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교회에 발을 들여놓긴 했지만 실지론 무신론자였던 내가 스스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상록수>의 채영신 때문이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젊은 시절의 독서는 인생의 전기와 목표를 세워주는 길잡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남의 철학
우리의 삶은 만남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만남으로 시작해서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 집안에서, 거리에서, 직장에서 우리는 무수한 사물과 인간 사이를 왕래하며 만남의 연속선상을 걷는다. 만남의 종류나 유형도 복잡 다양하다. 사람과의 만남, 사물이나 자연과의 만남, 자기 자신과의 만남, 혹은 기쁨의 만남, 슬픔의 만남, 원한의 만남, 경쟁의 만남, 위로의 만남, 오해의 만남 등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만남이든 동기가 순수하지 못할 때 실패한 만남이 되고 그런 만남은 뜻 없는, 말하자면 시간낭비의 만남이 될 뿐이다 .삶이 혹은 세월이 덧없다는 사람은 만남을 성공시키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마음의 자세에 있다고 본다. 만남의 의미를 발견하는 눈이 없이는 삶을 성공시키지 못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만남은 자신과의 만남이지만, 이는 보통 마지막 날에 오는 만남이며 엄숙한 만남이다. 직장에서나 거리에서 옷깃만 스쳐도 불가에선 만남의 인연이라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만남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만남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만남의 소중함을 모르고 산다. 좋은 만남이든 나쁜 만남이든 만남의 한 순간이 일생을 좌우한다고도 하지 않는가. 여기서 유명한 작품 속의 만남을 한 가지만 들어보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여주인공 안나는 제정 러시아 고관의 부인으로서 절세의 미모와 뛰어난 교양미와 세련된 정신미를 갖춘 귀족부인이었다. 그녀의 교양의 폭은 높고 넓은 것이어서 가히 초월적이었다. 예술에서 정치 문화 경제에 이르기 까지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기차나 버스 간에서도 늘 유명한 유럽의 명작 소설 아니면 음아. 미술책이 손에 들려있었고 저자바구니를 끼고도 책을 읽는 그야말로 촌음을 아껴 쓰는 맹렬 독서광으로서 지혜가 출중한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위험한 만남의 순간이 왔다. 매사에 지혜로웠던 그녀도 만남의 철학은 알지 못했는지 젊은 미모의 여인답게 끓어오르는 정열이 있었고 절제 못하는 나약함도 있었다. 그녀 앞에 나타난 젊은 귀족출신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 러시아 귀족사회에 파문을 던졌다. 부론스키로 인해 안나는 불모지였던 감정의 한 부위가 개발되었으며 꿈이 현실로 실현되는 환희를 맛보기는 했지만 너무도 빨리 무너져 자기 자신과의 엄숙한 대좌(對.坐)를 가졌고, 꿈이 현실로 부딪치는 고뇌에 시달렸다.
결국 기차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지만 오늘날 그녀를 부정한 여인으로 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다만 만남이 잘못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만남은 명작에서뿐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대신 좋은 만남으로 성공하는 삶도 너무나 많음을 우리는 안다. 시인 하이네는 철학자 마르코스를 만남으로 일약 세계적인 시인이 되지 않았는가. 어떻든 자기 자신과의 대좌시간에 떳떳하고 자랑할 만한 삶을 보이려면 평소 일상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한 순간의 잘못된 만남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사실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강인한 의지
봄이 되면 죽은 나무등걸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들에도 산에도 초록물감을 뿌려놓은 듯 세상은 온통 푸른 천지가 된다. 겨울동안 말라죽은 듯 침묵을 지키던 앙상한 나무등걸에서 뾰족뾰족 싹이 돋아나온다. 생명은 강인한 것이다. 살고자하는 의지만 있다면 식물이든 동물이든 돌 틈에서 길바닥에서 팔을 흔들며 일어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강한 것은 생명을 향한 자유의지라 하지 않는가.
몇 해 전 친구에게서 얻어온 조그만 나무토막이 하나 있다. 나는 그냥 나무토막인줄만 알고 어디 쓸모 있는 곳을 찾다가 그대로 화단 한 구석에 방치해 두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다. 그런데 지난여름 담장에 욱어진 담쟁이 넝쿨 순을 치다가 화단구석에 있는 그 나무토막을 보고 깜짝 놀랐다 썩은 줄 알았던 그 나무토막에서 새파랗게 잎이 돋아나 줄기를 뻗고 있지 않은가. 알고 보니 화분에 담아놓고 물주며 가꾸는 나무토막이었다. 참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썩은 줄 알았던 나무토막에서 싹이 나다니! 어찌나 반가운지 화분에 곱게 옮겨다가 하루 두 번씩 물을 주었더니 잎사귀가 줄기를 타고 주렁주렁 아래로 늘어져 집안 분위기를 한층 싱그럽게 하는 장식품이 되었다. 나는 때때로 이 나무토막을 보며 사람의 생명의지도 이렇게 강할까, 나는 언제 희망을 포기하려 한 적은 없었던가 하고 늘 자기의 의지를 점검하는 교훈을 얻는다.
사람은 생명의지뿐 아니라 자유의지도 갖고 있는 줄 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구속받기를 싫어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자유’라는 낱말을 남용하는 습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자유의지, 자유결혼, 자유연애, 자유이혼, 자유경쟁, 자유시장, 자유무역 등 ‘자유’라는 어휘를 쓰지 않으면 말을 못할 만큼 자유를 사랑하는 것이 인간 속성인 것 같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자유라는 말만 들어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고 한다.
영화 “빠삐용”의 경우, 주인공 스티브 맥퀸은 자유를 찾아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를 거듭하는 바람에. 형무소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다 허비하게 된다. 하지만 쓸모없는 황혼기에 이르러서까지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끝내 나무 조각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자유의 나라 고국으로 귀향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는 인간에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며 특히 자유의지가 얼마나 큰 집념을 낳는가를 말해 주고 있는 듯 하다. 이런 일은 비단 작품 속에서 뿐이겠는가. 우리는 바로 이웃나라에서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사례를 종종 보아오고 있지 않은가..
‘이성(理性)이 자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을 자유’라고 말한 칸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성을 설복시킬 만큼 자유는 강한 힘을 내포하고 있으며 바로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자유가 지닌 그 본래의 힘을 발휘하려면 오랜 수련의 기간이 필요하므로 하루아침에 빛을 발할 순 없을 것이다. 인간은 강하면서 나약한 존재이므로 강인한 의지는 어려서부터 훈련하기 나름인 것으로 안다.
인간의 의지는 날로 새로운 것을 향해 강해지는 속성이 있다. 가을 나뭇잎의 낙하나 겨울의 추위를 견디는 나무등걸이 새봄에 돋아날 새싹을 위한 의지의 지향으로 볼 때 인간의 의지도 이에 비견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계곡 물소리의 향수
세상 피조물 중엔 산이 가장 육중하고 무게 있게 보인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으며, 마치 성자의 침묵처럼 입 다물고 서서 그러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채 인간의 도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사람치고 산을 경원하거나 증오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일상의 말 가운데 산을 한번도 들먹거리지 않은 사람은 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산에서 목숨을 잃는 이가 없지는 않다. 등산객의 실족사라든가 알피니스트의 조난사 같은 횡액이 도사리고 있긴 하다.
나는 어렸을 때 산을 보지 않으려했다. 그림만 보아도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가을만 되면 큰 아이들을 따라 뒷산에 밤을 따러 자주 가곤했는데 하루는 대여섯 명의 꼬마들이 망태기 하나씩을 끼어 차고 산엘 올라갔다. 밤을 따러간 것이다. 마악 밤송이를 가지째 꺾어서 두 발 사이에 넣고 끝이 뾰족한 나뭇가지로 알밤을 발겨내느라 신명이 날 때였다. 갑자기 어디서 주먹만한 돌멩이가 내 발 앞에 날아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무래기들 밖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한 이백 미터 전방 밤나무 사이로 얼룩무늬 짐승이 보였다. 그 때 한 아이가 “아, 호랑이!” 했다. 깜짝 놀란 우리는 잽싸게 산 아래로 내달았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어렸던 나는 달리기를 할 줄 몰라 신발을 벗어든 채 주저앉아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중 큰 아이가 내 입을 틀어막으며 “호랑이가 들으면 달려온다. 조용히 해”하면서 손을 잡아끌며 엎치락 뒷치락 마을로 내려온 적이 있다. 그 날 밤부터 나는 일주일씩이나 심한 몸살을 앓았고 그 뒤부터 산이라면 눈을 감아버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산과 친근한 사이가 된 건 대학시절부터였다. 6.25후여서 대부분의 대학이 서울로 돌아오긴 했어도 가교사에서 강의를 진행할 때였다. 나는 학교 가교사와 가까운 옥인동에 살면서 인왕산과 친해졌다. 산이 낮은 탓인지 호랑이도 밤나무도 없었다. 그 대신 깨끗한 공기가 있었다. 해뜨기 전의 새벽공기는 얼음냉수 한 잔 보다 더 상쾌했다. 게다가 산에서 질러보는 고함소리는 메아리로 들을 때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쪽에서 지르면 저쪽에서 마치 천사의 화답처럼 신기하게 대답했다.
여름철이면 나는 거추장스런 피서 짐을 지고 먼 해수욕장을 찾아가지 않는다. 우선 교통이 불편하고 복작대는 사람의 대열에 부대끼기 피곤하기 때문이다. 마치 피난행렬 같은 피서지행에서 오히려 몸살을 앓고 오느니보다 차라리 가까운 산으로 가는 피서 법을 택한다. 자하문 밖 산턱이나 구파발 뒷산에 오르면 우거진 숲 속에서 은방울 소리 같은 새소리가 구르고 시원한 나누 그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박하 내를 실어 오는 듯 향기롭기까지 하다. 게다가 계곡을 흐르는 물에 발을 잠그고 앉아 수박 한 쪽을 먹노라면 심신의 피곤이 말끔히 가신다. 이 보다 더 좋은 피서가 어디 있겠는가. 계곡물 소리는 자세히 들으면 어머니 목소리 같기도 하고 군에 간 아들의 합창소리 같기도 해서 오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삭막한 시대에 향수를 일깨워주는 계곡물소리가 있다는 것은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열매 맺는 삶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유수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가을을 보낸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또 가을이다. 나는 가을을 좋아하지만 보통은 가을을 슬픈 계절이라고들 한다. 그것은 아마도 전통적인 가을 이미지로서 낙엽에서 받는 인상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낯선 한 문학도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아마 학생인 듯 했다.내용인즉, 자기는 시를 잘 모르지만 나뭇잎이 흩날리는 계절에만 시를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 가을에 주워 모은 나뭇잎을 책장 속에 넣어두었더니 이렇게 예쁜 수집품이 되었노라 며 박제된 나뭇잎을 한 장 사연과 함께 보내왔다, 나는 그 나뭇잎에 ‘열매’라고 썼다. 그리고 장식장 속에 넣어두고 때때로 감상하면서 그 학생을 생각하곤 한다.
그렇다. 열매라면 가을이 생각난다. 아마 그 학생도 가을을 좋아하는 눈치다. 게다가 마른 나뭇잎을 모았으니 메마르고 깔깔한, 성냥을 그어대면 금방 활활 타오를 것 같은 이미지를 좋아하는 듯했다. 나는 그 나뭇잎에 <가을바람>이란 시를 썼다.
가을바람은/불씨를 갖고 있다/바람이 건드리는 잎새 마다 /불이 켜지고/잎새를 줍는 가슴마다/불에 덴다/가을은 머리가 없고/가슴만 솟아나 있어/가을 가슴에 우리 가슴이 얹힐 때/우리는 없어져버린다/세상은 온통 불덩이로 떠오르고//
여름동안 싱그럽던 나뭇잎에 가을바람만 불면 어느새 불쏘시개처럼 메말라버린다. 학생이 보내온 불쏘시개 이미지의 나뭇잎을 보면서 잠시 삶의 이치를 생각해본다.
톨스토이는 인생이란 광야를 걸어가는 나그네라 했다. 그렇다. 나그네에겐 괴로움이나 즐거움, 좌절과 성취가 있게 마련이고 또한 광야엔 빛과 어둠, 굴곡과 평탄이 있으며, 같은 나그네라도 목적지가 분명한 나그네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나그네도 있을 것이다. 목적지를 바로 앞에 두고 멀리 돌아서 가는 우회인생도 있을 것이고 직 코스로 가는 인생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 코스의 단거리 선수가 되고자 한다. 그것도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중도에서 떨어지고 마는 인생코스가 아닌 끝까지 달려서 목적지를 손쉽게 탈환하는 인생코스를 달리고자 한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지에 순조롭게 도착하고 못하고는 각자 방향을 잡는 삶의 지혜에 있다고 본다. 방향을 잘 잡는 데는 자신의 현재의 발걸음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바른 눈이 있어야할 뿐 아니라, 현재 잘못 걷고 있는 발걸음을 재빨리 바로 잡는 용기와 의지가 있어야 한다. 때문에 인생의‘목적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곧 살아가는 과정이며 이 과정동안 시시가각으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는 투철한 의지의 힘이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사람마다 받은 삶을 다 살고 마지막 날을 장식했을 때 그가 어떤 죽음을 죽었느냐에 의미를 두지 않고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앵글을 맞추는 것도 여기에 있다.
인간 세상은 복잡하고 잡다한 인생들이 모여 살거니와 삶의 양태도 각양각색이다. 노동자에서 위정자에 이르기까지 천태만상의 삶이 있다. 그러나 노동자가 위정자를 꿈꾸지 말라는 법이 없고 위정자가 노동자를 꿈꾸지 말라는 법도 없다. 다만 ‘꿈’이라는 그 고지를 향해서 달려갈 때, 얼마나 성실하게 진지하게 노력했느냐에 삶의 성패가 있을 뿐이다.
하루의 기상도 눈, 비, 바람으로 변화를 일으키게 마련인데, 길고 먼 인생길에 비바람과 노도가 없을 수 없다. 성공하는 삶이냐 아니냐의 척도는 이러한 비바람, 노도와 악전고투할 수 있는 투지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성. 어거스틴은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를 일생의 마지막 날 같이 여기며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침부터 밤까지 삶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듯 최선의 노력을 경주시켜야 하며 ‘최선의 노력’ 그것만이 성공의 비결이 될 것이다. 시간이란 한번 가버리면 다시는 찾을 수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함께 가버리면 다시는 인생이란 무대에 설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남은 날을 아끼면서 작든 크든 보람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할 것이다. 보람이란 바로 열매를 남기는 일이다. ‘열매 맺는 삶’ 이것은 바로 열매를 남기고 불쏘시개로 떨어지는 낙엽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좋은 삶의 교훈인 것이다.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우리 속담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이 있다. 당연한 이치다. 속담이란 원래 평범한 가운데 진리를 일깨워 주는 것이지만, 이 속담만큼 사리에 맞고 과학적인 것도 없을 것 같다. 바른 스승 밑에서 바른 제자가 나고 그릇된 스승 밑에서 그릇된 제자가 난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독일의 시인이며 소설가인 헤르만 헤세의 소설<나르치스와 골트문트>는 이 속담을 뒷받침해 주며 , 스승의 사상이 제자의 정신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명백히 증명해 주고 있다.
주인공 골트문트는 마리아부론 수도원 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어머니는 골트문트를 버리고 가출했다) 편부슬하에서 거칠게 자랐었다. 때문에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규율이 엄격한 수도원 학교에 입학시켰던 것이다. 그는 입학 첫날부터 급우들과 싸우는 등 말썽을 부렸다. 그러나 끝까지 싸우는 그 강인한 투지가 그 곳 나르치스 교사의 마음을 끌었다. 마침내 총애를 받게 되고 나르치스 교사의 끈질긴 설득에 감화되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골트문트 소년은 얌전한 모범생이 되었다. 하지만 주위엔 불량한 학생들이 있어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밤중에 수도원을 빠져나가 건너 마을 농가에서 소녀들과 술을 마시는 등 즐기다 돌아왔다. 이튿날 골트문트는 창백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왔다. 직감력이 강한 나르치스 교사는 금방 눈치 챘다. 소년은 어젯밤 그 농부의 딸을 생각했다. 그 소녀에게서 처음으로 약동하는 생명과 꿈과 환희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소년은 고민에 빠졌다. 나르치스 고사는 사제간의 두터운 담을 헐고 소년을 다정한 친구로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것이다.
소년은 교사에게 고해하듯 자기의 고민을 고백했다. 교사는 ‘성자적 생활에의 한 첩경이 육욕적인 방탕한 생활‘ 이라는 말로 위로해 주었다. 나르치스 교사는 골트문트 학생이 남달리 지혜롭고 사랑스럽고 총명하고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회의했다. 골트문트가 왜 세상의 자유를 피해 수도원의 금욕생활에 스스로 발을 묶는가. 아버지에 의해 조장된 것이 아닌가. 하고. 아버지에 대해 다각적으로 캐물었다 .결국 나르치스는 골트문트에게 어떤 마음의 깊은 상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때문에 그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는 어떠한 교육도 그에겐 무용하다는 것을 느꼈다.
“자네는 학사도 수사(修.士 )도 아니야, 그러나 학사나 수사가 될 수 있어, 자네는 스스로 학문이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있어, 자네는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을 뿐이야." 고 충고했다. 그리고 다시 ”자네의 꿈속에는 소녀가 보이지만, 나의 꿈속엔 소년이 보이지. 그게 나와 자네가 다른 점이야.“ 라고 했다. 골트문트는 숨이 차 왔다. 독약을 마신 것처럼 괴로웠다. 소년은 죽고 싶은 고통이 극에 달해 정신을 잃었다, 소년은 육욕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꿈을 꾸었다. 그 농부의 딸이 어머니가 되어 나타나는 환영을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색은 줄곧 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일관되었다. 아버지에 의해 잊어버리기를 강요당했던 어머니의 기억을 되찾았던 것이다.
나르치스 교사는 골트문트가 어머니의 기억을 되살린 것을 보고 “골트문트! 장차 수사가 될 자네를 내가 망쳤는 진 몰라도 그 대신 비범한 운명에의 길을 자네의 마음속에 열어주었어, 가령 내일 자네가 이 수도원을 불질러버린다 해도, 미치광이 같은 사고를 세상에 퍼뜨린다 해도 나는 자네를 도와서 그 길로 향하게 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걸세. 라고 말했다. 그 후 나르치스 교사는 수사로 승진하여 교실엔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나르치스 교사를 볼 수 없는 골트문트 학생은 고독했다. 수도원이 삭막해지고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그는 드디어 수도원을 떠나 유랑의 길에 올랐다. 18세 소년이 세상의 끝없는 숲 속을 걷기도하고 황량한 눈밭을 헤매기도 했다. 황폐한 들녘에서 약초를 캐고 있을 때였다. 집시 여인 리이제를 만났다. 그에겐 두 번째 여인이었다. 그러나 금방 버림을 당했다.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수없이 쓰러졌다. 그 때마다 골트문트는 나르치스 선생님을 생각하며 독백을 했다.
”선생님, 세상은 죽음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는 선생님이 보고 싶어 쪘다. 그가 묻힐 곳은 세상이 아니라 선생님의 품속이란 것을 절감했다.. 그는 수많은 세월과 어둠의 골짜기를 돌아 결국 나르치스 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도중에 어느 낯선 수도원을 지나다 뜰에 세워진 성모상(像)의 미학적 이미지에 감동을 받았다. 그때 조각가 리콜라우스를 만나 조각 공부를 했다. 돌트문트의 뛰어난 예술성을 발견한 니콜라우스는 그에게 요한상(像.)을 조각케 했다. 그는 그의 정신세계에 큰 변화를 준 나르치스 교사의 사상이 응고된 요한상을 완성, 스승의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곳에 정착하지 않고 나르치스 곁으로 돌아갔다 인생의 눈을 뜨게 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나르치스 수사는 이미 승진하여 요한원장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요한은 골트문르의 예술 활동에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골트문트는 허전했다. 무상과 허무감으로 병이 들고 말았다. 영원히 고칠 수 없는 깊고 깊은 병이었다. 그는 드디어 “어머니가 없으면 죽을 수도 없어요” 라는 고통의 말로써 나르치스 원장(요한)과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골트문트는 그의 고통을 덜어주던 어릴 때의 선생님을 찾아 돌아왔지만 스승은 제자에게 ‘어머니’를 일깨워주기만 했을 뿐 ‘어머니’는 되어주지 못했다. 넓은 세계를 순례함으로써 정신적 육체적 경험을 쌓게 하여 스스로 옳고 그름을 자각케 한 회초리만 되었다. 나르치스 교사는 골트문트 제자를 훌륭히 키운 것이다.
인간성 회복이 시급한 이 과학문명시대에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같은 고전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어머니‘의 위대한 은혜를 깨닫게 해주는 커다란 숲이며 분수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 김지향 :우당(佑堂) -------------------------------------------------------------------------
시인, 문학박사.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등 역임.
한국시인협회 자문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지도위원,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증경회장
신광감리교회 장로,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원,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계간<한국크리스천문학>주간
시집; [때로는 나도 증발되고 싶다] [리모콘과 풍격] [발이 하는 독서]등 24권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 연구]등 다수.
수상; 대한민국문학상, 제1회시문학상, 제1회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크리스천문학상 등 외 다수
ㅡ<마음의 양식>국방부 군종정책팀 발행 2007. 가을호 제99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