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월봉가족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매화골
Ⅰ. 광주는 「빛고을」
조선시대 말 전라도에는 전주, 나주, 남원, 제주의 4개 부(府)가 있었다. 광주목(牧)은 나주부에 속했다. 1896년 8월 정부가 전국 8도를 13도로 나누면서 전라도를 전라남・북도로 나누었는데, 그 해 여름 「단발령 항거」가 심했던 나주의 관찰부를 폐지하고 전라남도 관찰청을 광주에 둠으로써 광주가 전남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광주가 「빛의 고을」 또는 「빛고을」로 불리는 데는 유래가 있다. 무등산의 절경인 돌무더기 중에서 입석(立石), 서석(瑞石), 규봉(圭峯)을 으뜸으로 치는데 입석群 을 서석, 즉 「빛나는 돌」이라고 해서 예로부터 신성시했다. 이에 연유해 고려 때 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지금의 사직공원 자리에 있던 석서정에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광주를 「光之州」라고 표현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를 「民物多賢」, 즉 물자가 풍부하고 어진이가 많다고 했다.
Ⅱ. 개화기의 광주
일제의 조선 침략에 광주도 예외일 수 없었다. 선봉장은 오쿠무라(奧村)남매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85년 일본 승려로 한국에 와 국내사정을 정탐하여 본국에 보고했던 오쿠무라 죠싱(奧村淨信)의 7대손인 오쿠무라 엔싱(奧村圓信)은 1870년대부터 조선에 들어와 전국을 돌아다니며 절을 세우는 등 일본식 불교 포교에 열을 올렸다. 그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는 일본의 폭력조직인 黑龍會를 뒤에 업고 광주에 들어왔으며, 얼마 뒤 이오코의 둘째 딸(光子)과 사위까지 광주에 와 정착한다. 이렇게 해서 처음 광주에 정착한 일본인은 8명이었으나 이듬해인 1898년 1백여명으로 늘어났다.
일본인들은 주로 불로동・황금동을 거쳐 광주에 들어와 광주 북쪽에 일본식 부락인 「극락촌」을 만들어 집단으로 거주했다. 불로동・황금동에 음식점과 요정이 많았던 것은 광주에 드나드는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식민정책의 강화와 아울러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용상인과 민간인들을 광주에 속속 정착시켰다. 이와 함께 조금씩 개화의 물결도 밀려들어왔다. 인력거가 등장했고, 일본식 여관・요정・양조장・은행・병원 등이 잇따라 문을 열었으며,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도 개교했다. 또 1917년 8월 처음으로 전기가 켜졌고, 1920년에는 상수도 공급, 1922년 7월에는 광주~송정 간에 철도가 개통됐다.
1900년대 들어 광주에 찾아온 외국인은 비단 일본인뿐만이 아니었다. 양림동에 세칭 「서양촌」을 이룬 이들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이었다. 광주 최초의 교회와 숭일・수피아 학교를 세운 유진 벨(1868~1925 한국명 裵裕祉), 「오원기념관」으로 흔적이 남아 있는 오웬(한국명 吳元) 선교사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 중 광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엘리자베스 쉐핑(1880~1934 ・한국명 徐舒平)이다.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에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고 고아를 등에 업은 단발머리 미국 처녀로 광주 사람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던 서서평은 선교뿐만 아니라 「이일학교」를 설립해 여성들의 문맹 퇴치에 앞장섰다. 그녀가 죽자 광주 사람들은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러 광주를 위해 22년간 봉사한 고귀한 뜻을 기렸다.
일본인들과 서양 사람들의 정착으로 개화의 바람이 일자 이 지방의 선각자들과 토착세력인 지방 개화 인사들은 자강・자립의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계몽운동에 나섰다. 주요 인사로는 최성기(최태군의 부친), 최종섭(최호연의 부친), 최원택(광주전등회사・무양서원의 창설 참여), 김인수(김양균의 조부), 정인준 등이 있다.
이들은 먼저 농민들의 자족의식을 일깨우고 소득증대를 기하기 위하여 제일극장 건너편에 잠농사(蠶農社)를 설립, 농사 개량운동에 나섰다.
또 지금의 충장로 3가에 있었던 최성기 상점에 대동의무소(大同義務所)라는 간판을 내걸고 금연, 단주, 금반지・금비녀 모으기(탈지환 운동), 반찬 줄이기(감선 운동), 좀도리 등의 운동을 통하여 국채보상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고 결국 강제로 해산 당하고 말았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김인수(金仁洙), 정인준(鄭仁俊)등의 창극을 최초로 공연했던 상설극장 양명사(楊明社)의 창극운동도 이 지역 계몽운동의 큰 흔적이 아닐 수 없다. 이 양명사는 이름난 명창, 명기, 광대들이 춘향전・심청전・흥부전・삼국지 등을 창극화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원래 예향이던 이 고장은 우리나라의 근대 국악운동을 선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7년 7월에 순종황제 즉위 때는 사직공원에 모여 축하 국악경창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때 부른 노래가 전해져 오고 있다.
성절이라 성절이라 개원기념 성절이라
7월성절 좋을시고 성수무강 하오리다
만세만세 만만세요 천세천세 천천세라
대한제국 만만세요 천세천세 천천세라
Ⅲ. 전국 의병 46%가 전남 ・・・ 일제 토벌 집중
일제의 침략 기도에 맞서 싸운 한말 의병은 전국에서 3만8천5백 여명으로 추산됐다. 이 중 46%인 1만7천5백 여명이 전남에 집중돼 있었고, 광주는 의병들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일본군들의 남한 토벌 작전은 전남에 집중됐다. 두 달에 걸친 작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육 당했고 작전이 끝난 뒤 4천 여명이 포로로 체포됐다.
이 고장의 이 같은 구국 애족정신은 3・1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고종황제의 승하 때는 온 시민들이 흰옷을 입고 백립(白笠)을 썼으며 온 시가를 철시하고 사직단에 모여 북쪽 하늘을 향해 통한의 망곡제(望哭祭)를 올렸다.
1919년 3월 10일 광주 천변 부동방장의 작은 장날 오후 3시 반에는 사직산에서 울려 퍼지는 나팔소리를 신호로 광주고을 사람들이 장터로 모여들었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독립성
십년을 참고 참아 이제 터졌네
삼천리 금수강산 이천만 민족
살았구나 살았구나 이 한소리에
만세만세 만만세 조선독립 만만세
목청이 터지도록 노래를 불렀고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성안 광주경찰서쪽으로 전진하며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에 맨손으로 맞서 싸웠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독립운동은 그 규모나 파급력에 있어 3・1운동과 쌍벽을 이루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날은 한일합방 당시의 일본천황 메이지(明治)의 탄생기념일인 명치절이었으며 우리에게는 음력 10월 3일로 국조단군이 개국하신 개천절이었다. 광주에서는 이날이 부동교 근처에 있었던 광주 작은장 장날로 “전남산 누에고치 6만석 돌파 도민 경축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 참가한 도민들이 학생독립운동에 합류함으로써 더욱 사태가 가열되었고, 또 마침 이 대회에 취재차 내려온 동아・조선・주외일보등의 민족계 신문기자들이 상황을 신속히 취재 보도함으로써 급속도로 전국에 확산 될 수 있었다.
이 운동에는 전국의 거의 모든 학교인 194개교 5만4천 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중 580명이 최고 5년의 체형과 퇴학처분을 당했으며 2천3백3십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 학생독립운동은 1943년 5월 광주서중의 동맹휴학을 계기로 한 제2차 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Ⅳ. 총각들 설레게 했던 “가네보”의 여공
광주 최초의 학교는 1895년 개교한 전남관찰부공립소학교에 이은 광주공립보통학교(현재 광주서석초등학교의 전신)이다. 광주공립보통학교는 광주 향교에서 문을 연 뒤 1927년 지금의 서석초등학교 자리로 옮겼다. 광주공립보통학교는 광주・전남 계몽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를 무수히 배출한 인재의 요람이었다. 광주서중 및 광주일고의 전신인 광주고등보통학교는 1920년 4월에 개교했다.
지금 광주의 대표적 번화가의 하나인 충장로에 한인 상권이 형성된 것은 192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전에 광주천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큰 장인 공수방(公須坊)장, 작은 장인 부동방(不動坊)장이 합쳐진 사정시장이 1932년 2월 문을 열었다. 시장이 들어서자 시장으로 통하는 거리를 중심으로 상가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일본 상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던 충장로에 최초로 진출한 한국 상인은 가구점을 하던 林鶴雲이었고, 주단 포목점으로 호남지방 상권을 주름잡았던 남창상회의 심덕선도 있었다. 충장로 상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金世羅. 최초의 여자 상인으로 도자기와 고무신을 취급하는 金世상회를 운영했던 金씨는 金活蘭(이화여대 총장 역임), 金弼禮 (수피아・정신여고 교장 역임)와 함께 「3金여사」로 불렸던 여류명사였다.
일제는 1935년 8월 광주에 가네보(鐘紡)를 설립했다. 1920년대 전남 산업의 특징은 「3白2黑1靑」이라고 했다. 3白은 면화・누에고치・쌀이었고, 2黑은 김과 무연탄, 1靑은 죽제품이었다. 일본이 면화와 잠사의 고장에 대규모 방직공장을 세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네보는 日新방직과 全紡으로 이어지고 있다.
가네보는 섬유를 원료로 하는 장갑・양말・메리야스 산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가네보의 여공들은 당시 대표적인 신여성들로 광주 총각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현재 광주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무등경기장 자리도 가네보가 시민공원을 조성하려던 터였다. 1935년 5월 순수한 민족자본에 의해 설립된 무등양말은 일제 때 쌓은 명성을 지금도 잇고 있다.
광주의 잠사(蠶絲)공업은 1926년 5월 전남도시제사공장이 설립된 이래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잠사공업은 광주학생독립운동과도 인연이 있음은 앞서 적은바와 같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그 맥이 이어졌고 충의의 고장의 정신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했다.
Ⅴ. 문화의 전당 “오원 기념관”
광주에서는 1907년 전국 최초로 금융조합이 설립된 것을 비롯, 1920년 8월에는 전남의 지주자본과 상업자본이 공동 참여한 민족계 은행인 호남은행이 설립되는 등 금융기관의 발달이 무척 빨랐다. 그러나 호남은행은 일제의 갖은 탄압 끝에 1942년 4월 동일은행에 합병됐고, 동일은행은 1943년 10월 한성은행과 합병해 오늘의 조흥은행이 됐다.
호남은행의 설립을 주도했고, 2대 두취(행장)를 맡아 인재를 끌어 모으는 등 은행발전의 초석을 다졌던 撫松 玄俊鎬는 광주번영회장으로 광주 근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광주시 호남동은 玄俊鎬의 저택이 있어 왜정 때 호남은행의 창설자인 그에 대한 예우로 동네 이름을 호남정이라고 붙였다. 또 일본인들은 호남지방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그를 위해 호남동 18번지에 있던 저택 앞으로 도로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집은 1963년에 팔렸고, 지금은 호남동 천주교 성당이 들어서 있다. 집이 헐릴 때 광주의 노인 6백 여명이 몰려들어 눈시울을 적시며 가슴 아파했다.
광주에 서구식 연극이 도입된 것은 서양촌이라고 불리던 양림동에 오원기념각이 세워지면서부터였다. 이 곳은 광주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했다.
1925년 11월 현대식 극장 「광주좌」가 개관하면서 본격적인 영화・연극 공연이 이루어졌다. 관객들은 다다미방에 앉아 화로에 손을 얹고 간식을 먹으며 공연을 구경했다. 그러나 광주좌는 불타 없어졌고, 이듬해 생긴 제국관이 해방 후 이름을 바꾸어 지금의 무등극장이 됐다.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은 1935년 10월에 문을 연 광주극장이었다.
광주에서 체육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을 언급하려면 金厚玉부터 살펴봐야 한다. 그는 광주 최초의 보이스카우트 창시자이며, 유도・권투 등 근대 스포츠를 보급한 선각자였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부터 뛰어난 만능선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1930년부터 광주 YMCA에서 후배들에게 운동을 가르쳤다. 金斗漢이 그를 형님으로 모셨다고 한다. 金厚玉과 함께 광주・전남 체육사의 3대 거봉으로 꼽히는 인물이 金卜實과 朱奉植 이었다. 김복실은 광주에 야구와 축구 붐을 일으켰고, 주봉식은 권투사범으로 수많은 선수들을 길러냈다.
광주에 요릿집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08년 지금의 황금동에 문을 연 기타무라로(北村樓)였다. 일본 기생인 게이샤가 술을 따르고 춤을 추는 요릿집이었다. 한국식 요릿집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0년 新光園이었다. 신광원은 광주의 고급사교장이었는데, 강연차 광주에 들렀던 島山 安昌浩나 夢陽 呂運享도 초청 받은 적이 있었다.
Ⅵ.「뽐뿌집」「콩집스탠드바의」추억
1920년 기생들은 藝妓組合을 결성했고, 이것이 나중에 주식회사 형태의 법인체인 광주권번이 됐으며, 해방 후인 1951년 순수 국악인 교육기관인 광주국악원으로 바뀌었다. 1930년대 광주 기생의 화대(술시중・노래・춤의 대가)는 시간에 따라 정해졌는데 첫 시간이 1엔50전, 다음 한 시간에 1엔씩 추가됐다. 당시 쌀 한말에 2엔50전이었다. 태평양전쟁 말기부터 요릿집 손님의 발길이 끊어졌고, 1944년 3월 권번이 폐쇄되면서 기생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일제시대 광주에서 가장 인기 있고 규모가 큰 한식 요릿집은 황금동 舊 미국문화원 자리에 있던 춘목암이었다.
당시 요릿집은 기생을 불러 영업하는 갑종과 여급을 두는 을종으로 구분됐다. 을종 중에서 성북관의 애저요리가 유명했고, 계룡관의 닭곰탕과 동문관의 추어탕, 백수관의 탕반, 다래관의 비빔밥, 창경원과 농춘원의 설렁탕이 손꼽혔다.
광주의 술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졌던 명물 「뽐뿌집」은 6・25이후 30여년 동안 명성을 떨쳤다. 이 집은 광주 세발낙지와 홍어탕의 원조였다. 또 전국으로 퍼진 광주식 스탠드바의 효시는 콩 안주에 정종을 홉술로 팔았던 충장로3가의 「콩집스탠드바」였다. 가난했던 60년대에도 황금동은 마음의 풍요가 넘쳤고, 술집 주인들도 외상 손님들에게 싫은 내색 한마디 없이 술을 내놓던, 인심이 후한 동네였다.
6.25이후 황금동 뒷골목 초가집에서 개업한 청미장(淸美莊)은 광주가 자랑할 만한 격조 높은 한정식집이었다. 이 집 주인 李여사는 玄俊鎬의 생질녀로 밥상과 술상을 겸한 교잣상을 한정식 메뉴로 내놓아 광주의 명물이 되었다. 청미장이 이름을 떨치자 한정식집이 잇따라 생겨, 광주가 맛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광주 사람들도 광주를 대표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망설이게 된다. 애저라고도 하고 추어탕이라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무등산 닭죽이나 송산교의 용봉탕이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애저가 광주의 특산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애저 요리로 가장 이름난 곳이 3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대의동의 「또식당」이다.
무등산의 春雪軒을 아는 사람이라야 茶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 춘설헌의 삼애다원 차밭은 예부터 증심사에서 공양을 위해 가꾸어 온 것인데,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상품화, 일본과 동남아로 수출해 꽤 재미를 봤다. 이 다원을 해방 후 毅齊 許百鍊이 인수해 「春雪」이라는 상표를 붙였고, 그의 화실 이름을 春雪軒이라고 했다. 무등산 춘설헌은 우리나라 茶人들의 영원한 고향으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Ⅶ. 의향과 예향의 새로운 도전
개화기의 광주를 되돌아보면 이 고장이 애국충절의 고향임을 새삼 깨우치게 한다. 임란 의병에 이은 동학의 농민혁명이나 또 항일 의병항쟁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본고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항일독립운동을 선도했고 해방 이후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민주화 운동의 주도세력으로 앞장서 왔다.
1980년도의 광주민주화운동은 이 나라 민주화운동의 금자탑이 아닐 수 없다.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부당한 탄압과 무력적 위협에 맞서 대항할 수 있다는 국민저항권을 보여준 것으로써 2백48명의 사망자와 156명의 행방불명자, 3천6백54명의 부상자, 6천명에 달하는 연행자, 4백81명의 실형자 중 사형언도를 받은 자가 5명에 이른 이 나라 민주화 운동 사상 최대의 항쟁이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과 한말 의병항쟁, 3・1운동, 광주학생운동과 4・19혁명 정신을 면면히 잇는 민족자결과 민주화의 큰 봉우리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고장은 불의와 억압에 항거하는 의향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제일의 예향으로 일컬어져 왔다. 자고로 사림문학의 본고장이며 분청사기로 대표되는 도자기 문화의 본산이요, 가사문화와 판소리・회화의 원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 천년의 21세기 첨단 정보산업사회에 살면서 이러한 의향으로서, 또는 예향으로서의 향맥의 자리매김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우리가 만일 의향과 예향의 토양 위에서 풍요로운 내일을 판가름하는 첨단 정보산업시대를 꽃피울 수만 있다면 옛 농도의 영화는 물론 예향의 예맥을 꽃피울 것이요, 첨단산업사회의 풍요와 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대오에서 낙오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70년대의 소비도시적 병폐의 나락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광주첨단과학산업단지와 전통 예향으로서의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수용하고도 남을 양질의 두뇌집단과 탄탄한 교육기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의향과 예향의 자랑스러운 시민의식으로 새로운 시대적 도전에 맞서야 할 것이다.
2006.09.13 11:47 |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