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형 세단은 자동차 산업의 정수다. 높은 기술 장벽 때문에 아무나 만들기 어렵다. 지금도 초대형 세단 보유국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그런데 우리는 한창 자동차 산업 새내기였던 20세기, 이미 걸출한 초대형 세단을 두 종이나 거느렸다. 바로 대한민국 F 세그먼트 세단의 시작점, 쌍용 체어맨과 현대 에쿠스다.
글 윤지수 기자, 사진 각 제조사
아직 충분히 기술력이 무르익지 않았던 1990년대, 우리는 어떻게 초대형 세단을 만들 수 있었을까? 체어맨과 에쿠스 두 차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봤다.
벤츠마저 시샘한 체어맨
1988년은 동아자동차가 쌍용자동차로 거듭난 해. 이때부터 쌍용차는 꿈의 행보를 시작했다. 국내 최초 스테이션왜건 코란도 훼미리, 우리나라 유일무이 클래식 로드스터 칼리스타를 연달아 출시했다. 1990년엔 훗날 무쏘로 결실을 맺는 ‘FJ(Future Jeep)’ 프로젝트의 시동을 건다. 그 거침없는 발걸음의 결정판이 바로 체어맨이었다.
당시 SUV와 상용차만 만들던 쌍용차의 목표는 종합 자동차 메이커였다. 그러나 세단 시장은 이미 경쟁사가 꽉 붙들고 있던 상황. 쌍용차는 특단의 결정을 내린다. 1992년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F 세그먼트 대형 세단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1991년 이미 쌍용차는 메르세데스-벤츠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기술이 절실한 쌍용과 아시아 지역 거점이 필요했던 벤츠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동맹이었다. 그 관계를 바탕으로 1993년 벤츠로부터 가솔린 엔진 기술, 그리고 세단 기술 제휴를 약속받는다. 첫 세단 빚을 토대에 세계 최고의 기술을 끌어왔다.
벤츠로부터 오늘날 E-클래스 전신인 124 시리즈의 플랫폼을 받아왔다. 1984년 첫 등장한 한 세대 전 기술로 만든 플랫폼이었다. 벤츠는 외부 디자인도 쓰라고 하지만, 쌍용 측은 “우리 차니까 우리 손으로 만들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우리만의 고유 모델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프로젝트에 대대적인 투자가 이어졌다. 영국 켄 그린리 교수와 벤츠 수석디자이너 갈리첸 도르프를 영입해 두 개의 디자인 팀을 꾸렸다. 벤츠 역시 차체설계 기술자, 승용개발 기술자 등 여러 기술자를 우리나라로 보내 ‘W-car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목표는 벤츠 기술 강점을 살린 ‘최고의 안전성 확보.’ 시험주행 차로 전 세계 명차와 겨뤘고, 독일, 스페인, 스웨덴, 사우디 등 9개국에서 극한의 내구성을 실험한다.
1997년 10월 14일, 1993년부터 4년여간 4,500억 원을 들인 W-car 프로젝트가 마침내 체어맨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밑바탕은 E-세그먼트였으나, S-클래스 버금갈 만큼 중후했고, 공기저항계수는 당대 최저였던 Cd 0.29를 기록한다. 40% 부분 충돌에 대응한 안전 차체와 싱글암 와이퍼 등 ‘국산차 최초’ 타이틀도 즐비했다. 백미는 보닛 아래 품은 벤츠의 직렬 6기통 3.2L 엔진(M104). 시속 200㎞로 5만㎞를 쉴 틈 없이 달릴 수 있고, 100만㎞ 이상 주행도 문제없는 빼어난 내구성을 자랑했다.
벤츠도 놀랐다. 체어맨 시험주행 차가 벤츠를 포함한 동급 세단과 겨룬 제동능력 테스트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내자, 시험 결과를 비밀에 부쳐달라고 당부했다. 더욱이 미국, 유럽 등에 수출할 때는 벤츠와 사전에 협의해달라며 요구하기도 한다.
벤츠 기술 듬뿍 품은 체어맨의 등장에 대형 세단 만들던 국산차 업계는 물론, 수입차 업계도 잔뜩 긴장했다.
20세기 국산차의 정점, 에쿠스
현대차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986년 초대 그랜저로 철옹성 같던 대우 로얄 시리즈를 무너뜨리고 고급차 시장을 장악했다. 이어 1992년 2세대 그랜저까지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고급차 시장 절대 강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경쟁사 움직임이 심상찮았다. 1993년 쌍용차는 벤츠와 기술 제휴 맺고 W-car 프로젝트를 시동 걸었고, 기아자동차는 1994년 마쓰다 기함 센티아를 바탕으로 T3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여기에 수입차 시장은 전면 개방까지 맞이한 상황. 현대차는 이참에 도약을 다짐한다. E 세그먼트 세단을 밑바탕 삼은 경쟁사와 달리, 세계 최고 럭셔리 브랜드와 어깨를 겨룰 본격 F 세그먼트 대형 세단을 계획한다.
그랜저 만들 때처럼 이번에도 미쓰비시와 함께했다. 그러나 현대차의 위상은 이전과 달랐다. 연달아 일본 대형 세단 시장에서 고배를 마신 미쓰비시와 달리 현대차는 잇따른 성공을 거뒀다. 현대차는 동등한 입장에서 1994년 10월 초대형 세단 프로젝트 LZ를 시작한다. 이전 1·2세대 그랜저가 미쓰비시 설계에 현대 기술을 더했다면, LZ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 개발이었다.
플랫폼부터 새로 짠다. 급을 초월하는 최고의 세단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원가절감은 뒷전이었다. 당시 이원순 현대차 남양연구소장 전무는 “LZ는 탱크와 같은 튼튼한 차체를 목표삼았다”며, “그래서 무게가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취향도 뚜렷하게 반영했다. 가령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버금가는 방진·방음재를 곳곳에 두른다. 심지어 앞 유리창 양쪽 기둥 A필러와 뒷 유리창 양쪽 기둥 C필러까지 두꺼운 흡음재를 욱여넣었을 정도다. 덕분에 LZ는 뒷바퀴 구동축 없는 앞바퀴 굴림임에도 굵직한 철판과 흡음재가 어우러져 무게가 2t에 육박했다.
스타일 역시 현대와 미쓰비시가 대등하게 겨룬다. 현대 3회, 미쓰비시 4회 등 총 7번 실물 크기 모델 평가를 거쳐 최종 스타일을 완성했다. 겉모습은 롤스로이스처럼 거대하고 웅장한 스타일을 원했던 미쓰비시 스타일이 뽑혔고, 실내는 말쑥한 구성의 현대의 안이 뽑혔다.
1999년 4월, 4년 7개월 만에 5,200억 원을 투자한 LZ 프로젝트의 결과물 에쿠스가 등장한다. “20세기 한국 자동차 공업을 마무리할 결정판.” 당시 에쿠스 개발담당자의 자랑이다. 그 자랑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에쿠스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대한민국 최장, 최대, 최고 기록을 모두 새로 쓴다. 길이 5,065㎜, 너비 1,870㎜ 크기는 종전 가장 컸던 체어맨을 각각 10㎜, 45㎜씩 넘어섰고, 국내 최초 V8 4.5L 엔진을 얹었으며, 세단 기준 6,360만 원 최고가 기록을 세운다.
온갖 최초 기술도 빠짐없다. V8 4.5L 엔진엔 세계 최초 직분사 기술이 들어갔으며, 국내 최초 차체 자세 제어장치, 타이어 공기압 경고 시스템과 함께 노면 충격을 흡수하는 역위상제어 현가장치 등이 달렸다. 더욱이 급제동 시 앞쪽이 내려앉는 ‘노즈 다이브’ 현상을 억제하는 안티 다이브 컨트롤 기술도 품었다.
에쿠스를 개발하며 한껏 고무된 현대차는 사실 판매망을 분리하고 별도의 브랜드를 출범할 계획까지 짜고 있었다. 그러나 출시 직전 무산됐고, 에쿠스만 별도의 엠블럼을 쓰는 정도로 절충한다. 에쿠스에 현대 엠블럼이 없는 이유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에쿠스를 직접 탄 후 “당장 수출하라”고 지시할 만큼 에쿠스에 대한 현대차의 기대는 대단했다.
엎치락뒤치락 박빙의 승부를 겨루다
1997년 등장한 체어맨은 현대 다이너스티와 기아 엔터프라이즈, 대우 아카디아가 경쟁하던 대형 세단 시장에 변화의 돌풍을 일으켰다. 출시 첫날만 1,000대 계약고를 올린다. 쌍용차가 잡았던 첫해 판매 목표 2,000대 중 절반을 하루 만에 달성한 셈이었다.
체어맨은 초기 소음 문제와 내장재 조기 마모 등의 문제가 있었으나, 워낙 상품성이 독보적이었기에 판매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쌍용차는 체어맨으로 이룩한 달콤한 열매를 맛보지도 못한 채, 1998년 1월 대우 그룹 품으로 들어간다. 무리한 자동차 사업 확장 때문에 재정적 균열이 생긴 까닭. 그래도 체어맨은 승승장구했다. 대우차 품 안에서 대우차의 널찍한 판매망을 밑바탕 삼아 시장을 확장한다. 1998년 2,911대, 1999년 4,162대를 판매하며 성장세를 이어갔다. 특히 체어맨은 1999년 4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의전차로 쓰이면서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차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 4월 등장한 에쿠스가 대형 세단 시장을 뒤집는다. 출시 첫해 5,637대 판매고를 올리면서 단숨에 체어맨을 꺾고 대형 세단 시장 선두를 차지한다. 에쿠스 역시 V8 직분사 엔진을 고급 휘발유로 조율해 놓은 국내 시장과 어울리지 않는 설계 등의 이유로 품질 문제가 떠올랐지만, V6 3.5L 엔진을 주력으로 내세워 결함에 상관없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2000년, 2001년 2년간 판매량은 2만4,054대. 같은 기간 체어맨은 1만2,895대 팔렸다. 체어맨이 한 대 팔릴 때, 에쿠스는 두 대씩 팔렸다.
2002년엔 에쿠스 역사상 최다 판매량을 찍는다. 2002년형으로 바꾸며 V8 엔진을 직분사에서 멀티 포인트 분사(MPI)로 바꾸어 결함을 보완했고, 2002 월드컵 공식 의전차로써 주목받기도 했다. 한 해 동안 1만6,984대를 판매했다. 그래도 체어맨 역시 만만치 않았다. 1만1,791대를 팔면서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2003년 10월 만년 2등이었던 체어맨이 부분변경을 감행한다. 세단 기준 길이 5,135㎜로 역대 최장 길이를 자랑했으며, 전동 트렁크와 13개 스피커를 울리는 사운드 시스템을 품어 역전을 노린다. 결과는 이듬해 즉각 나타났다. 2004년 총 1만4,105대를 판매해 처음으로 1만2,776대 판매한 에쿠스를 넘어섰다. 에쿠스 역시 신형 체어맨 출시 후 한 달 만에 부랴부랴 부분변경 신차를 출시해 맞불을 놓았음에도 대세는 이미 체어맨으로 기울었다.
체어맨은 첨단 장비로 기세를 이어갔다. 2005년 3월 국내 최초 전자식 주차 브레이크(EPB)와 함께 전자 제어 에어서스펜션(EAS) 등을 넣은 ‘뉴 체어맨 뉴 테크’를 선보인다. 2005년 역시 1만5,283대 판매고로 1만3,896대를 판매한 에쿠스로부터 한판승을 거뒀다.
현대차는 자존심 회복에 나선다. 2005년 2월 현대차가 독자 개발한 V6 3.8L 람다 엔진을 에쿠스에 얹는다. 2020년 지금까지도 사용 중인 현대·기아차 6기통 주력 엔진이다. 결정타는 2006년 2월 등장한 V6 3.3L 람다 엔진. 가변흡기 시스템과 가변밸브 타이밍 등 온갖 최신 기술을 넣어 고출력, 고효율을 이뤄냈다. 3.3L 배기량으로 최고출력 247마력을 냈을 정도다. 에쿠스 중 가장 작은 엔진이었음에도 과거 3.5L 엔진의 210마력을 훌쩍 넘고, 체어맨 최대 크기 3.6L 엔진의 248마력 최고출력과 대등한 수준의 성능을 뽐냈다.
에쿠스의 반격은 치명적이었다. 에쿠스는 2006년, 2007년 체어맨으로부터 연달아 완승을 거둔다. 2년간 판매량은 에쿠스 2만6,234대, 체어맨 2만1,300대. 1999년부터 2007년까지 누적 판매는 사실상 에쿠스의 승리지만, 2년 먼저 등장했던 체어맨도 잘 싸웠다.
시간을 거스르다
1세대 에쿠스는 2008년 2세대로 세대교체를 거치며 역사의 마침표를 찍는다. 1999년부터 10년간 현역으로 뛴 셈. 개발비 비싼 대형 세단인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례적으로 수명이 길었다. 이전 브랜드 플래그십이었던 그랜저는 7년 주기로 신차가 나왔고, 후계자인 2세대 에쿠스마저도 8년 만에 수명이 끝났다. 에쿠스는 국내 초대 F-세그먼트 세단으로서 오랜 시간 정점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체어맨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2008년 독자 플랫폼을 바탕으로 빚은 체어맨 W에 기함 자리를 물려주고 체어맨 H로 거듭나 아래급 시장을 겨냥한다. ‘H’의 뜻은 한결 욕심을 덜어낸 ‘하이오너.’ 모델 개수가 부족했던 쌍용차로서는 오래된 모델로 손쉽게 시장 확장을 노리는 전략이었다.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체어맨 H는 국내 최고의 세단 ‘체어맨’ 이름과 저렴한 값으로 누릴 수 있는 대형 세단이라는 매력을 내세워 꾸준한 판매고를 올린다. 2009년 2,683대, 2010년 3,589대를 판매한다. 같은 기간 신차 체어맨 W 판매량은 2,778대, 4,664대였다. 그러나 수명이 다한 체어맨 판매량은 2011년 한차례 부분변경을 거쳤음에도 내리막을 걷는다. 결국 2014년 12월 31일부로 18년 기나긴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쌍용 체어맨과 현대 에쿠스. 초대형 F-세그먼트 세단을 만들 기술도, 경험도 부족했던 그때, 우리 손으로 세계 최고 수준 세단을 만들겠다는 열망과 투지가 이룩한 결과물이었다. 밑바탕은 해외 기술력이었다. 그럼에도 체어맨과 에쿠스는 당시 한국 자동차 산업의 자랑거리였을 뿐 아니라, 선진 기술과 대형 세단 만들 경험을 쌓는 값진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