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받는 종을 보라
이사야 50:4-9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일이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환영했다고 해서 붙여진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는 당시 보통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어느 곳에도 예수님이 나귀를 타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단 한 군데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년 동안의 공생애 가운데 한 번 나귀를 타신 일이 기록되었다면 여기에는 무엇인가 깊은 의미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마태는 이사야 62장 11절과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는데요,
먼저는, 예수님은 왕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왕은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볼 때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누가는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는 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눅19장)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귀를 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말이 전쟁의 상징이라면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겸손의 왕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또한 평화의 왕이심을 선포하기 위하여 나귀를 타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평화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평화는 정착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전쟁은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같이 나귀새끼를 타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고 반대로 늠름한 말을 타려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더 빠른 말, 더 강한 말, 더 멋있는 말을 타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압도하고 이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점점 요원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보이는 명예, 물질, 권력 그것이 성공이요 그것을 얻기 위해서
남을 이겨야 된다는 무한 경쟁의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이 세상은 절대로 평화가 정착될 수 없습니다.
말을 버리고 나귀를 타는 예수님의 모습을 배울 때만이 이 세상은 평화의 삶으로 정착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2이사야에 나타난 4개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 가운데 하나입니다.
4개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오늘 본문 외에 이사야 52장 53장, 그리고 42장과 49장에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모습에서 그런데요, 첫째는, 고난 받는 모습이 같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고난 받는 종은 등을 맞았고 수염을 뽑혔고 뺨을 맞았고 모욕과 침 뱉음의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당하셨던 고난과 너무나도 일치하는 모습입니다.
둘째로, 고난을 받는 모습이나 자세가 우리 주님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은 고난을 받아도 전혀 대들지 않습니다.
반항하지 않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고난 받는 종은
수염이 뽑혀도,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전혀 대항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또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이 고난 받는 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나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왜 이 종이 이렇게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본문 4절과 5절에 보면, 이 고난 받는 종이 한 일은 하나님이 주신 학자의 혀를 가지고 곤고한 자를 말로 도와주고 깨우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곤고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으로 위로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을 한 사람이 이런 모욕과 어려움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로부터 말씀을 듣고 배워서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리고
소외되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여호와의 종이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무엇을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예언자들, 예수 그리스도, 사도들이 이 고난의 종과 마찬가지로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치고 고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12:7-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면 우리도 고난을 받고 징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을 이상한 일같이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이 고난 받는 종은 이런 고난 속에서도 전혀 반항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그 고난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편 강도가 너무 힘들고 화가 나서 막 소리를 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하라 너무 힘들어 죽겠다’이것은 고난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힘드니까 소리칠 수 있고요 반항할 수 있고 욕하고 대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난의 종은 소리치고 반항하는 대신에 비폭력적이고 무저항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종의 모습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성경은 이런 종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그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받아들이고 고난을 나의 것으로 삼을 때 누군가가 평화를 누릴 수 있고 나음을 입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았다고 고난으로 갚아주고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
악순환이 계속될 때 이 세상은 절대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고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악순환을 끊었던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 엄청난 십자가의 고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감당하셨기에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졌고, 모든 백성이 구원받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평화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대만에 가면 대부분의 지역이 다 불교권임에도 불구하고
한 지역만은 유독 기독교인들이 80%이상 되는 곳이 있습니다.
가이드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곳은 원래 사람을 잡아먹는 원주민들이 사는 곳이었는데,
목숨을 담보하고 그곳에 들어와 선교를 하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그 잘못된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는 추장이 사람을 하나 더 잡겠다고 했을 때,
선교사는 ‘이번 한번만’이라는 조건을 달고 몇 시에 어디에 가면
어떤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갈 터인데 그 사람을 잡으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선교사가 말했던 그런 사람이 다가오자 매복하고 있던 원주민들이 급습하여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잡고 보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들이 그렇게 존경하던 선교사였습니다.
이후에 그들에게서 이런 야만적인 일이 없어지고 이 지역이 전부 기독교 지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고난과 희생과 헌신으로 이 땅에 평화와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평화가 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자로 부르셨습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들의 사명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일 종려주일입니다.
주님은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러나 그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나귀새끼를 타야 합니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힘들고 조금 귀찮아도 나귀새끼를 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하고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아니 힘들고 박수도 받지 못하고 비난과 조롱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이 주님의 모습이요 주님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칭찬하시는 모습이요 천국에서 진정 큰 자로 인정받을 모습입니다.
고난의 주님을 바라보며 어린 나귀를 타시고 겸손한 자의 삶을 살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드리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고난 받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성찬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2023.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