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반 *
십년 동안
꽃 한번 피우지 않은
춘란을 뒷산에 버렸다
더 이상
배반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 한번이라도 꽃 피기를
간절히 기도했으나
기도는
언제나 나를 배반하고
나는
언제나 기도를 배반했다
그래도 혹시 내가 춘란을
배반한 게 아닌가 싶어
며칠 뒤
봄비가 그친
뒷산에 올라갔다
깨어진 화분 틈으로 춘란이
허옇게 뿌리를 드러낸 채
꽃을 피우고
저 혼자 빙긋이 웃고 있었다
* 춘란 이야기 *
10년 동안 정성껏 키우던 춘란을 아파트 인근 야산에 내다 버렸다.제때에 물주고 아무리 정성을 기울여도 꽃 한번 피우지 않는 게 너무나 밉고 야속했기 때문이다. 내가 정성을 들이면 언젠가는 향기로운 꽃을 피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순간 그러한 내 믿음을 춘란이 철저히 배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도 인간도 배반한 이에게는 더 이상 내 마음의 정성을 기울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거실에 춘란이 보이지 않자 집안이 텅 빈 것 같아 애써 그런 생각을 하며 춘란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춘란을 버렸다는 사실이 후회되었다.
10년 동안 죽지 않고 내 곁에 살아 있었다는 그 자체가 바로 한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운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꽃은 피우지 않았지만 건강한 생멸력을 지니고 언제나 내 곁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춘란은 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라고 여겼다.
춘란은 나를 배반한 게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꽃피우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도 나는 눈에 보이는 꽃을 피우는 것만이 춘란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춘란을 화분에서 꺼내 그대로 산속에 버려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10년이 되도록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춘란이 실패한 삶을 산것이라도 생각했다.
꽃을 피워야만 춘란의 삶이 성공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열심이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춘란은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춘란이 꽃을 피우지 않은 실패의 삶을 삶으로써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쓰레기 버리듯 버렸다. 춘란이 나를 배반한 게 아니고 내가 춘란을 배반한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는 그동안 내가 눈에 보이는 사랑만 사랑이라고 여겨왔던 탓이며, 살패와 성공의 단순한 이분법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었던 탓이다. 또 실패한 삶을 산다고 생각되는나 자신과 꽃을 피우지 않는춘란의 삶을 동일시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눈에 보이는 춘란의 꽃을 바랐듯이 오늘을 사는 많은 이들이 눈에 보이는 사랑과 성공을 바란다.
그러나 성공은 눈에 잘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단순히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도 거대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소한 데에 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섬세하고 작은 일을 통해 사랑의 신뢰가 더 깊어진다. 성공과 사랑은 형식과 물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삶에 대한 이해와 긍정 속에 있다.
사실 건강한 육체와 마음을 지니고 열심히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비록 돈도 많이 못 벌고 실패한 삶을 산다고 생각되더라도 내일을 기약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부富란 바닷물과 같앗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마르다고 하지 않는가.
성공이란 큰 것에 있지 않고 작은 데에 있는 것임에도 늘 큰 것만 지향하다가 작은 것을 보지 못하고 지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불행이 시작된다. 나는 인생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인생의 성공을 논해야 한다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은 삶의 과정 속에 있지 결과 속에 있지 않다 오늘 하루도 내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성실하게 살고 있다면 내 삶은 성공한 삶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다는 이유로 성공과 실패를 꼭 돈이라는 물질으 잣대로 나눈다. 또 높은 지위와 권력이라는 잣대로 나눈다.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벌었으면 성공한 사람이고, 돈을 많이 못 벌었으면 실패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어떤 사람이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올랐 있으면 성공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돈도 많이 못 벌고 높은 지위도 차지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실패한 사람인가.
아니다. 인생에 굳이 성공를 규정짓는 잣대가 필요하다면 그 잣대는 사랑이라는 잣대로 바뀌어야 한다 사랑이는 잣대로 가늠해봤을 때 내 인생이 사랑이 풍부한 인생이면 성공한 인생이며, 사랑이 결핍되거나 부재된 인생이면 실패한 인생이다. 내가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지금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것만큼 더 큰 인생의 성공은 없다.
인생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외형적 삶에 자신의 삶을 비교하지 말아야 하다. 남과 나를 피교힘으로써 가장 가난해지고 비참해지고 불행해진다. 자기 자신의 내면적 삶을 찾는 데에 주력하지 않고 남의 외형적 삶을 들여다보고 부러워하면 실패라는 불행이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는 다들 실패를 두려워하는 암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만 해도 실패를 두려워하는 암에 걸린 말기환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실패 없는 삶은 없다, 삶은 끊임없는 실패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성공하지 못하면 인생이 곧 끝난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실패가 인생의 시작이다. 실패를 통해 인생은 완성된다.
얼마나 실패했느냐에 따라, 그 실패를 통해 얼마나 긍정하고 이해하고 노력했느냐에 따라 성공에 다다른다,보다 실패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실패를 통해 슬픔과 비애보다는 기쁨과 감사를 얻을 수 있어야한다. 그래야만 실패에서 성공의 향기가 난다. 나는 춘란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빈 화분에 다시 춘란을 사서 키웠다.
그런데 이번에 산 춘란은 연분홍 꽃대가 두 대나 미리 올라와 있었다, 기다리지 않고 꽃을 볼 수 있다는생각에 무척 들뜨는 마음이었다. 생각대로 꽃은 피었다. 조그마한 자홍색 꽃이 여간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 난초에 꽃이 피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마음은 생각보다 그리 기쁘지 않았다.꽃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노력해서 키운 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마음과 정성이 들어가야 꽃도 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 정 호 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