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3일(토)
* 시작 기도
주님...
하나님의 명에 불순종한 요나는 바다 깊은 곳 곧 큰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께 기도합니다.
(욘 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스올(음부)이라 불리는 큰 물고기의 뱃속, 그곳은 우리 주님이 내려가신 지옥에 다름 아닙니다.
(벧전 3:19) 그(예수 그리스도)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셔서 그의 영은 지옥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십자가에 죽으심이 실패요 패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탄의 머리를 박살낸 것이며 그 승리를 선포한 곳이 바로 지옥 곧 음부였습니다.
내가 가야 할 지옥의 아랫목에 있던 영들에게 주님은 승리를 선포하셨고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천명하셨습니다.
그 주님을 오늘도 나는 믿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육신으로 향하려는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음부에서 선포하셨던 그 승리의 선포가 오늘 이 죄인 중에 괴수인 나의 삶에도 온전히 선포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계 3:1-6
제목 :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나의 묵상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시는 주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시다.
그 분께서는 내가 너의 행위를 안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런 너는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있지만 실상은 죽은 자이다.
너는 복음의 말씀에 순종할 것이다.
그것은 곧 완전히 죽기 전, 아직 조금이라도 남은 힘이 있을 때 깨어 네 자신을 일으켜 세워라.
네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선하지 않다.
네가 받은 것과 들은 것을 기억하여 회개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도둑 같이 너희를 찾아갈 것이다.
더구나 네가 생각지도 못할 때에 너에게 이를 것이다.
이처럼 사데 교회가 전체적으로 타락한 가운데서도 신앙의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 다니게 될 것을 격려하신다.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고 그 이름을 아버지와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사데는 옛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을 정도로 정치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일찍이 양털 가공업과 염색 공업이 발달하여 무역업이 성행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경제적으로 큰 부를 누리는 도시였다.
지역적으로는 천혜의 방어 조건을 갖추었다.
이런 모든 조건들이 사치와 향락을 부추겼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교만한 심성까지 갖게 하였다.
이처럼 사데 지역의 풍조는 그곳에 세워진 교회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로 인하여 그 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명목상 성도들로만 그 신앙의 위치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한 마디로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었던 실상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것이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주님께서 지적하는 말씀 그대로이다.
(1b)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신앙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기 전에 남은 신앙의 불씨를 살릴 것을 촉구하신다.
그 남은 신앙의 불씨를 살려서 온전한 신앙의 모습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동시에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임할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도 경고하신다.
이런 사데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와 더불어 칭찬을 듣지 못하고 책망만 들은 교회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책망을 들었음에도 그들 가운데 소수의 의인이 있다는 희미한 소망을 열어두신다.
그래서 그 남은 신앙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
단 조건이 있다.
그들이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죽은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몇 명이 있었다.
이들은 주님이 주신 흰 옷 곧 세마포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회개와 순종이 그 조건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회개와 말씀에 대한 순종이 구원의 조건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회개와 말씀에 대한 순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나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회개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3가지 비유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께로 가까이 나왔다.
그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가리켜 수군거리며 비난한다.
그 이유는 예수가 죄인을 영접하여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 때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다.
(눅 15: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파라볼레, 단수)로 이르시되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신다.
비유를 개체로 보면 세 개(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두 아들 비유)이지만 전체 문맥으로 보면 3절에서 말한 것처럼 한 개다.
따라서 이 세 개의 비유는 결국 한 가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눅 15:4-7절까지는 잃은 양 비유다.
양 100마리가 있는 주인이 그 중 한 마리를 잃었다.
그러면 99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온 들과 산으로 다니다가 잃은 양을 찾으면 기뻐서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이웃과 함께 즐길 것이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인함보다 더 기뻐하신다는 말씀이다.
눅15:8-10절까지는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다.
한 여자가 열 드라크마 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었다.
그는 그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하여 집안을 열심히 쓸면서 찾는다.
그리고 찾아낸 후에는 이웃을 불러서 함께 즐긴다.
이에 또한 주님이 말씀하신다.
이처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 기쁨이 된다.
눅 15:11-32절까지는 일명 탕자의 비유다.
이 본문에서는 회개에 대해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문맥을 따라 봐야 하기에 앞의 두 비유가 회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면 마지막 세 번째 비유 역시 회개를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3절에서 비유 하나(파라볼레, 단수)를 말씀하신다고 하신 것이 바로 그 이유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하여 집을 나갔다.
아들이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할 때 어떤 아버지가 순순히 주겠는가?
하지만 이 아버지는 달라는 유산을 준다.
그것은 곧 그를 못 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네가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 집을 나가 살면 그 삶이 어떤지 배우라는 것이다.
그 둘째는 그렇게 집을 나가서 결국 허랑방탕하여 가진 재산을 다 허비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얻을 요량으로 돼지치기를 자처하였다.
하지만 그마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둘째 아들은 수년 간 거지의 삶을 살았다.
그 때 너무 곤한 나머지 아버지가 생각이 난 것이다.
무엇보다 아버지 집에 있는 종들은 먹을 걱정 없이 잘 살고 있을 것인데 자기 꼴은 이게 무어란 말인가?
아들은 아버지 집이 생각나서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 눅 15:17절에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라는 문구가 있다.
이것을 회개라고 말들을 한다.
또한 여기 문구의 뉘앙스로 보면 마치 둘째 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회개의 주체가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회개의 주체는 아들에게 있지 않고 아버지에게 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앞의 두 비유에서 양을 잃은 것이나 드라크마를 잃은 것은 주인이 잃은 것이다.
무엇보다 양이나 드라크마가 주인을 찾아오지 않았다.
주인이 찾고 또 찾도록 다녔고 집안을 또 쓸고 쓸면서 찾은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이 역시 아들이 나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가도록 허락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돌아온 것은 자신의 회개로 인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하심으로 인함이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일하심으로 그 마음에 돌아올 마음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것이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주님의 능력이요 일하심이다.
나는 회개에 대하여 심히 오해한 자였다.
무엇보다 나의 회개를 통하여 영생에 이르는 줄 알았고 내가 온전히 회개하지 않으면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회개마저도 나의 힘과 의지가 아닌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어찌나 힘이 나던지...
구원은 결코 나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통하여 되는 것이며 그것은 영생이며 그 영생은 창세전 언약에 근거한다.
어떠한 경우도 나를 드러내는 나의 의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나를 얼마나 드러내기를 좋아했던지...
하지만 나는 창세전 언약을 통하여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 하나님을 이 시간 찬양하며 영광을 올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머리가 커지고 내가 하는 일이 잘 될수록 나의 의가 드러날 뿐입니다.
마치 그런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믿으며 나를 잘 되게 하려는 나를 봅니다.
무엇보다 이런 것(잘 되는 나 또는 긍정의 힘)을 책으로 써서 자기들의 의를 드러내도록 권장하는 이들을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일 수도 없고 나아가 생명일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누구를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른 복음을 알고자 할 뿐입니다.
생명을 얻는 회개의 진정한 의미를 바르게 알고 깨닫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하루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동행하는 한 날이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