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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주)블루윙즈풋볼클럽
사고기 MD-11 기체 번호 : HL7373
당신이 앞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립습니다.
1999년 4월 14일 오후,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쨌든 난 OC빌딩 8층에 있었다. 복도에 나란히 붙어있는 각종 게시물들을 성의 없이 훑어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야!"
"아, 형 오랜만이에요, 비행 나가요?"
"아니…… 내일 비행 가는데, 미리 공부 좀 하려고."
"오~ 대단한데,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나는 빈정거리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그는 뒤로 한발 물러나며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처음 가보는 곳이라서 그래. 너 혹시 상해 가봤니?"
"상해? 지난주에 갔다 왔는데! 저번 달에도 갔었어."
"잘됐다. 나 브리핑 좀 해줘라."
그는 어린애 같은 밝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내 팔을 잡아 끌었다.
"중국은 정말 짜증나…… 형도 조심해요. 여긴 정말 잘 해야 본전이야.”
“글쎄 SID(Standard Instrument Departure: 표준 계기 출발 절차)가 말이야, 6마일까지 1000피트로 가게 되어있어. 진짜 어이없어!"
나는 자질구레한 이야기까지 섞어가며 상해 홍차오 공항에 대한 경험담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어디선가 구해온 이면 복사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이것저것 적어나갔다.
만족스런 얼굴로 브리핑을 마친 후 그는 캔 커피를 사주었고 나는 담배도 안 피는 그를 옥상으로 끌고 가서는 함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형수님 병원 다시 다니세요? 둘째는 이제 백일 지났어요?"
"백일 지났지……. 야, 둘째 낳으니까 첫째랑 또 느낌이 틀리더라. 너무 예뻐. 너도 빨리 둘째 낳아라. 물론 애 엄마가 좀 힘들지만……."
"사실 저도 둘째 생겼어요. 몇 주 안됐지만……."
"야! 축하한다. 너 닮은 놈 나오면 안 되는데!"
"크…… 그건 맞는 말씀이네요!"
쓸데없는 잡담을 너무 많이 한 탓인가? 마지막으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마지막 그의 얼굴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이 너무 원통하다.
다음날 오후, 나는 한가롭게 집에서 쉬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TV 리모컨을 들고 방바닥 PF 노릇을 하고 있었다. (PF: Pilot Flying 즉, 조종하는 조종사. 통상 조종실에는 두 명의 조종사가 근무하는데, PF와 PM으로 업무를 구분한다. PM은 감시하며 서포트 하는 조종사, 즉 Pilot Monitoring이다.)
오후 4시쯤…… 재미없는 방송들을 스캔하며 병적으로 채널을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방송에서 차임 소리와 함께 뉴스 속보가 떴다.
‘대한항공 화물기 상해에서 추락’
"……"
잠시 동안 멍하니 TV화면 아래에 써있는 글자를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서서히 뒷머리가 쭈뼛이 서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잠시 후 두 번의 차임소리와 함께 다시 새로운 자막이 떴다.
"대한항공 MD-11 화물기 상해에서 이륙 직 후 추락, 기장 홍성실 부기장 박봉석, 탑승자 3명 전원 사망"
오, 하느님 차라리 정말‘박봉석’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단 몇 초도 견디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원통하게도 MD-11 부기장 중에‘박봉석’은 없다.
그렇다면, 바로 어제 만났던, 둘째가 그렇게 예쁘다고 팔불출을 떨어대던 ‘박본석’ 선배가 상해에서 죽었단 말인가?
망연자실함과 공포감이 차례로 머리 속을 들쑤시고 있었다. 얼마 후 전화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부모님, 친구 그리고 기타 친지들이 차례로 나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내 목소리를 듣고 안심하는 그 들에게 나는 괜찮다며 위로를 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의 위로를 하고 있는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얼마 후 대학교 동문선배로부터 긴급한 연락이 왔다. 본석이 형 집으로 어서 오라고. 대학 선배였던 본석이 형이 결국 이렇게 대학 동문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내가 본석이 형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떨어져 어둠이 깔려있었다. 허름한 빌라 앞에는 벌써 흰색 천막이 쳐 있었고 제주생수가 여기저기 분배되고 있었다.
낯익은 회사사람들도 많다. 이 사람 저 사람 보는 대로 정신 없이 인사를 나눈 후, 이윽고 눈치를 살피며 형수님을 찾아보았다.
물론 좁은 집에서 형수님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 녀는 이미 실신해 방에 누워 있었고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장난감을 두 손으로 조물락 거리는 세 살짜리 아이와 배냇저고리로 둘둘 감겨있는 갓난아기가 누워 있었다.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어쩌란 말인가?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돌아가신 고 홍성실 기장님 역시 지난해 하반기에 나와 함께 시뮬레이터를 탔던 분이셨다. 나뿐만 아닌 모든 MD-11식구들에게 그 분의 죽음 역시 매우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었다. 그런데 워낙 친하고 따랐던 본석이 형의 죽음은 나에게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큰 충격이었다.
그는 비행에 열정을 가진 멋진 조종사였다. 남자다운 강한 성격 이면에 순진하고 촌스러움이 숨어있어 더욱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핀잔을 주면 금새 발끈하기도 하고 칭찬해주면 또 어느새 아이 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술도 잘 마셨는데, LA에서 통닭과 맥주를 사주며 나에게 이런저런 야단도 많이 쳐주었던 기억이 난다.
사건이 발생한지 몇 주 후, 나는 우연한 계기로 회사 내 ‘안전보안 실’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본석이 형과 같은 MD-11을 타다 보니 태스크포스인 ‘상해사고조사 팀’에도 합류했다.
일을 시작하자마자 우선 CVR부터 들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헤드폰을 귀에 걸고 녹음기의 플레이버튼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그리고는 정적이 흐르는 동안 눈을 감은 채 연필을 돌리면서 긴장을 가라앉혔다. 곧 이어 리시버에서 홍기장님과 본석이 형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마치 오래 동안 헤어진 가족과 만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저런 일상적인 얘기가 흘러나왔으며, 이륙 후에는 사투를 벌이는 대화들과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마지막 추락 직전의 절규하는 목소리와 테이프가 끊어지는 순간에 급습하는 적막은 극적인 허무함과 공포감을 동시에 일으켰다.
몇 번이고 다시 들었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계속 듣다 보니 본석이 형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마치 귓속말로 나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가만히 리시버를 내려놓고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의자를 밀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고개를 들어 다시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귓속에서 맴돌던 메아리는 어느새 사라졌고 눈앞에 펼쳐진 파란 하늘은 무심하게도 대지를 따뜻하게 덮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1999년 12월, 크리스마스가 이미 지난 연말 어느 날이었다. 모두가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21세기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하던 그 때, 나는 런던 교외의 한 호텔에 있었다. 불행히도 12월 22일 발생했던 런던 스탠스태드 공항 대한항공 화물기 추락 사고의 현장 대책본부에 합류했던 것이다.
또 한번의 끔찍한 사고였으나, 다행히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런던교외의 한 화물기 추락 사고는 큰 이슈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무심하게도 런던 시내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숫자인 ‘2000’을 환호하는 축제가 연일 벌어지고 있었으며, 본부사무실의 각종 컴퓨터 장비에는 ‘Y2K Proof’ 라는 스티커들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당시 안전보안 실에는 사고현장을 많이 다니셨던 베테랑 S 모 과장님이 근무하셨는데, 물론 상해사고 현장에도 계셨던 분이다. 며칠째 함께 사고현장을 돌아 다녔는데, 그 날 이 분이 그 동안 수습했던 유해 중 가장 큰 부분을 찾았다. 그 날 저녁식사 후, S과장님과 함께 맥주 몇 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텁텁한 기네스 한 잔을 쭉 들이키시더니 발그스레 취한 얼굴로 대뜸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 박본석씨를 봤어."
"네? 본석이 형을요? 언제요?"
"어제 밤에……."
"꿈속에서 말씀이세요?"
"응……. 지수씨, 박본석 부기장이 오늘 시신 찾아 준거야."
"……."
안 그래도 추운데, 두껍게 껴입은 잠바 속으로 솜털이 쭈뼛이 서는 것을 느꼈다.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S과장님은 상해에서도 본석이 형 유해의 가장 큰 부분을 찾았던 분이었다. 뒷머리와 목덜미에서부터 어깨와 등에 이르는 상체 부분이었는데 넥타이까지 그대로 매어져 있었다고 했다.
잊고 있었던 본석이 형이 다시 생각났다. 그 동안 지지부진 진전이 없었던 상해사고조사도 서서히 걱정되었다. 아마도 본석이 형이 원통한가 보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거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나한테 오지 않고 S과장님께 가셨나…….’
길게 한숨을 쉬며 연거푸 검은 기네스를 들이키는데, 도무지 취하지도, 잠이 오지도 않았다.
서울로 돌아와, 어느 정도 런던 스탠스태드 사고가 정리되었을 무렵, 나는 다시 상해사고조사 팀에서 분주하게 일을 했다. 2000년 1월 4일에는 본석이 형이 축복해 주었던 둘째 아이도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내가 런던에 있는 동안 낳아서, 그만 녀석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지금도 부부싸움 할 때 집사람이 뽑아 드는 비장의 카드이다.
어쨌든 우리 둘째 아이는 나를 닮지 않아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착하다. 모두 본석이 형 말대로 되었다.
상해사고는 FDR마저도 파손된 매우 미스터리하고 풀기 어려운 사고였다. 낡아빠진 미쓰비시 군용 레이더가 기록한 레이더 트랙과, 힘들게 복구되어 일부가 손상된 CVR만으로 비행경로를 재구성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던 와중에 마침내 상해에서 불길한 소식이 도착했다. 우려했던 대로 사고 원인을 조종사의 고도 착각으로 단정하는 분위기였다. 중국CAAC(중국의 교통부)와 미국NTSB(미국의 교통안전 위원회)는 박본석 부기장이 남긴 "천오백 피트요!" 라는 말 한마디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우리는 반박을 위해 정신 없이 자료를 만들었고, 상해에서 열렸던 최종 한-중-미 합동미팅에 이 모든 자료를 들고 참석하였다. 미팅에서 우리는 열심히 우리의 주장을 폈고, 중국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식으로 경청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 모두 물거품이 되었고, 중국 CAAC는 사고 원인을 조종사 과실로 규정한 사고조사보고서를 발표하여 ICAO(국제민간항공기구)에 제출하였다. 우리의 주장은 오직 ‘기체고장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짤막한 한 줄의 문장으로 보고서의 결론 한 구석에 첨부되었다.
다행이 중국으로부터 취항 금지 조치는 없을 것으로 확답을 받았으나 대신 건설교통부(지금의 국토해양 부)로부터 노선 취소 결정이 내려질 것이며, 회사는 노선을 지키기 위해 행정 소송에 들어갈 분위기였다.
상해에서의 마지막 업무는 중요 증거물을 선별하여 보관한 후, 나머지 잔해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고가 난지 1년이 넘어 처음으로 직접 비행기 잔해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폐 공항 공터에 경비원까지 세워 관리했다는 잔해 더미는 초라하기 그지없이 쌓여 있었으며, MD-11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게 잔해의 양이 줄어 있었다. 주변의 주민들이 몰래 들어와 하나씩 훔쳐 고물상에 팔았기 때문이다.
비참하게 누워있는 파란 꼬리 날개 위에 불에 그을린 태극마크와 HL7373 글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또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칠삼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렇게 멋지고 아름다웠던 모습이 어떻게 이 꼴이 될 수 있는 거야?!……’
날카로운 알루미늄 합금과 컴포짓 조각들이 내 손가락을 찌르는 것도 모르고 여기저기를 손으로 헤집어댔다. 눈물 글썽이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혼자 멀리 떨어져 작업을 해야 했다. 행여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나중에 거울을 보니 얼굴은 검은 얼룩으로, 그리고 손바닥은 상처로 말이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예상대로 건설교통부의 노선 취소 처분이 내려졌고, 우리는 행정 소송에 들어갔다. 1심에서 나는 정신 없이 일했다. 홍기장님과 본석이 형의 명예를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고, 조종사 실수를 의심하는 회사 내 분위기도 바꿔야 했다. 재판장에서는 조종사 과실을 단정하려 하는 건설교통부와 옆에서 이를 지원하고 부추기는 모 경쟁사에게 적개심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해를 넘기며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고인들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었다. 재판장에서 ‘조종사’라는 말은 수백 번이고 언급 되었지만 그 ‘조종사’는 영혼이 없는 단어처럼 느껴졌다. 어디에도 더 이상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의 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서로 물고 물리는 도그 파이팅 속에서 나는 서서히 동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결국 재판에서도 우리는 패배 하고 말았다.
나는 능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고, 항소한 2심부터는 비상근으로 전환되어 팀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리고 결국 안전보안 실도 떠났고 상해조사 팀에서도 하차하였다.
다행이 계속 이어진 2심과 3심에서 승소하여 고인의 명예를 찾을 수 있었다. 2심과 3심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해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재판장 밖에서 승리의 소식을 들어야 했으며, 결국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해 지금도 형을 볼 낯이 없다. 지칠 대로 지친 싸움 속에서, 마음 속으로 마저 도 형을 편히 보내지 못한 채 결국 주저앉아 울고 말았던 것이다.
‘이해해 주세요……. 조사나 재판 따위 아예 처음부터 하지 말걸 그랬어요.’
그저 남들처럼 추모하고 기도하며, 시간 내서 형수님과 애들이나 한 번 더 보러 갈걸 그랬다. 그랬다면 오히려 마음속에 고이 담아 아름답게 보내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명예도 노선도 찾았지만, 어째 내 마음은 더 많은 빚을 떠안은 것 같았다.
너무나 오래 전 일이다.
상해사고는 이제 12년이 넘었고, 2009년 12월 23일 우리 회사는 학수고대하던 무사고 10년을 맞았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쾌거이다.
서로 자신의 성과인 것처럼 우쭐하여 축배의 잔을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고란 것 자체를 역사책 속에 있는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의 고난쯤으로 생각하는 신세대도 있을 것이다. 과장된 생각일지 몰라도 이제는 ‘사고’하면 슬픔이나 연민보다는 주가나 업무 스트레스 혹은 휴가 스케줄의 차질 등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 회사의 안전을 발전시킨 시스템과 문화 그리고 정신의 개혁……. 단기간 동안 많은 투자가 이루어 졌으며, 그 만큼의 눈부신 성과를 만들어 냈다. 우리의 훌륭한 일꾼들이 인내와 노력으로 깃발 꺾인 대한항공을 다시 세운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뭐가 무사고10년인가? 과연 기뻐서 축배를 들 일인가 말이다. 그 사람들은 죄인인가? 아니면 희생자인가? 왜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는가?
1999년 4월 15일 운 좋게 비행기 컨트롤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홍기장님과 본석 선배가 살았다면……
1997년 8월6일 괌에서도 ILS(정밀계기착륙장치)가 정상작동 하고 있었다면 ……
99년 12월 22일 런던에서도 그 날 마침 바깥이 훤히 내다 보이는 쾌청한 날씨상황이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을 것이고, 이렇게 슬프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본석이 형은 B777기장 정도 되어 있겠지…….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지금 우리가 맘껏 누리고 있는 이 소중한 ‘안전’ 또한 결코 쉽게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어려웠던 시절, 그들이 앞서 죽었기 때문에……
뒤에 가던 우리들이 겁에 질려 살기 위해 발버둥 친 것뿐이다.
첫댓글 글을 읽는 내내 글쓴이의 진심이 느껴져 울컥 하게 만드네요...ㅠㅠ
마음아프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번 화물기 사고도 너무나도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