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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5일(월)
* 시작 기도
(대상 21: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주님...
다윗은 자신이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소년으로 블레셋의 장수인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 왕을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음에도,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을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부하들에게 자신의 의를 드러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백전백승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자자하게 들었습니다.
그는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자였습니다.
그의 전쟁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군사의 숫자가 많기 때문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이 때를 사탄은 놓치지 않고 그를 향하여 교만의 화살을 쏘았습니다.
그 화살을 다윗은 낚아챘고 요압에게 이스라엘을 계수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기를 원했습니다.
사탄이 다윗을 향하여 쏜 교만의 화살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행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나 역시도 순간순간 넘어져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교만의 화살을 낚아채었으며 나를 드러내곤 했는지요.
이런 나도 마땅히 죽어야 할 자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긍휼로 덮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한 주간을 시작하는 새날입니다.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살아가는 주의 날의 연속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계 3:14-22
제목 :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나의 묵상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서 요한을 통하여 이제 일곱 교회 중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행위를 아는데, 네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구나.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한다.
네가 이처럼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겠다.
너는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하면서 너무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너는 너무 비참하고 불쌍하며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너에게 말한다.
나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너를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너의 벌거벗은 것을 가릴 것이며, 안약을 사서 발라 눈을 밝게 하여라.
나는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니 너는 열심을 내어 회개할 것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도 나와 더불어 먹을 것이다.
이기는 자에게는 마치 내가 이기고 내 아버지와 함께 보좌에 앉는 것 같이 내가 그도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이 도시는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와 함께 리쿠스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인 라오디게아는 주전 250년에 안티오커스 2세가 그의 아내 라오디케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라오디게아는 에베소로부터 동방으로 통하는 무역로의 요충지인 만큼 부를 축적하였고 그에 따라서 은행이 성행하였다.
또한 검은 양털로 짠 화려한 옷들을 팔아 부를 축적하였다.
주전 4세기 경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유명한 의과 대학도 있었는데 이곳에서 생산된 ‘부르기아 안약’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의약품에 속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는 것이 이들의 사회적 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과 사회적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대부분 두 가지 적대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하나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탄의 회로부터 받는 배도의 위협이었다.
또 하나는 이세벨을 대표로 하는 니골라당의 영향으로 인해서 우상숭배와 음행의 위협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만은 이 두 가지 위협으로부터 자유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의 물질적 풍요를 넘어서 영적 은사의 풍요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부로부터 어떤 특출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는 오히려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고린도 교회와 같은 각종 은사가 넘쳐서 사역이 아주 활발한 교회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무리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영적 은사가 넘치는 풍요로움을 자랑할지라도 주님이 보시기에는 비참한 자요, 가난한 자이며 눈이 먼 자요 벌거벗은 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부요하지도 않고 건강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갈증과 목마름에 시달린 자들이다.
이들은 진리 안에서 보아야 할 것 곧 영원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눈 먼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영적으로 부요하기 위해서는 외적 은사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자신을 부요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불로 연단한 금이란 곧 정금 같은 믿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적으로 부요한 자는 모든 시련과 고난을 수용하되 그 고난을 통하여 그 믿음이 정금 같아지므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는 흰 옷을 사 입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서 입을 예복이다.
흰 옷 곧 하나님 나라의 예복은 무조건 주어지는 영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 곧 주의 죽으심과 장사됨 그리고 부활에 연합된 자를 말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옷 곧 보혈의 옷을 입음으로 주님과 연합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안약을 발라 눈을 뜨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서 지각의 눈이 밝아지고 그 결과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한다.
(엡 1:17-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렇다면 이들이 영적으로 부요해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주님은 택한 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되 책망과 징계를 통하여 회개하기를 촉구하신다.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여기서 열심을 내라는 것은 일이나 사역에 열심을 내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책망과 징계를 통하여 회개하는데 열심을 내라는 말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며 그들을 부르신다.
그럴 때 그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은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과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신다.
19절과 20절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은사의 부요함을 자랑하기보다 존재로 계시는 주님과 더불어 날마다 참된 양식을 먹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귐을 원하신다.
이 사귐은 하나님과 아들과 함께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사귐이며, 이는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한 실재이다.
(요일 1: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을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또한 이기는 자는 주님이 그러하시는 것처럼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서 천상을 누리며 이 세상을 넉넉히 지배하게 하신다.
오늘날은 이와 같은 외적 사역에 중점을 두고 행하는 교회들이 많다.
그래서 그 사역의 부요함을 자랑하며 그 교회가 입는 옷이 된다.
많은 교회들은 그런 교회를 부러워하며 그렇지 못한 자기들도 그런 사역의 옷을 입기 원한다.
돈과 재력이 있는 사람이 장로가 되어야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바로 오늘날 많은 교회의 논리이다.
이는 하늘의 논리가 아니라 땅의 논리이며 만물 안에서 영적 풍요를 논하는, 논리의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교회야말로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교회이며 이런 교회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하늘을 찌를 듯이 웅장한 예배당이 있고 그 교회를 목회하는 자부심과 그 교회의 성도라는 자긍심이 있더라도 그것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오직 복음 곧 그리스도와 연합된 정금 같은 믿음이 없다면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전철을 밟는 것이다.
그들은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비참하고 불쌍하며 눈이 멀고 벌거벗은 자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 안에서 그들은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아니라 심히 결핍되고 목마른 자이다.
나 또한 이런 사역에 목숨을 걸었던 자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역 중심의 교회를 지향해서 성도들을 자신의 은사에 따라 사역을 배치하여 다른 교회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물망을 촘촘히 쳤던 자이다.
그런데 사역 중심의 교회를 지향하는 것 자체가 내 욕심이요 나의 義의 발로가 아닐 수 없었다.
남들이 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거기에 사역의 열매가 나오는 것을 보면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역시 거부할 수 없는 미끼였던 것이다.
나도 사역에 미쳤었고, 교회 또한 그런 사역적인 교회로 세워나갔으나 결국 관계도 깨지고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사역이 아니라 영원한 사귐이요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우리 주님께서 책망과 징계를 통하여 고난과 시련 가운데로 몰아넣으시고 그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며 그를 부르고 계시겠는가?
그가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기까지 잠잠히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사역을 다 마칠 때까지가 아니라 깨닫고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위하여 문을 열기까지이다.
나는 주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내 뜻을 주님의 뜻이라 여기면서 목회를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는 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다.
나는 이처럼 모래 위에 집을 지어놓고 그 집이 무너지지 않게 해달라고 얼마나 부르짖으며 기도했었던가?
이는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뜻을 듣지 않으려 귀를 막고 눈을 닫는 자였던 것이다.
이런 나를 주님은 당신의 주권으로 심판하시고 깊은 무덤에서 시련의 나날을 보내게 하셨다.
그런 주님의 손길은 거칠고 두려웠지만 그 분의 눈길은 얼마나 따스하고 자애로웠는지 모른다.
진정 나를 살리기 위한 주님의 손 그림자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생명이 주께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나의 나 된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믿는다.
이제 사역의 탑을 쌓기보다 주님과의 영적 사귐의 징검다리를 날마다 놓는다.
그리고 그 징검다리 위에서 주님의 피 묻은 손을 잡고 주님과 함께 거닌다.
이것이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임을 알게 하신 그 크신 은혜 앞에 조용히 머리를 조아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어린 아이라, 작고 어려서 출입을 알지 못하나이다.
어린 아이가 엄마의 품속에서 안정을 누리듯 오늘 이 시간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의 품속에 들어가 그 안에서 참된 쉼과 평강을 얻나이다.
지금 이 자리, 곧 말씀으로 나아가는 이 자리가 아버지의 품속이요 또한 당신의 나라임을 믿습니다.
쇠락의 법칙에 의하여 없어지고 사라지고 썩어질 만물 안의 것들, 심지어 영적 은사까지도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도구임을 알게 하시오니 거기에 목숨 걸게 마시고 오직 주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의 불로 연단한 정금 같은 믿음으로 부요한 자 되게 하시고 주님 나라에서 날마다 입을 예복인 흰 옷 곧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을 입혀 주옵소서.
안약을 사서 발라 병든 눈을 뜨게 하소서.
나와 성도들의 연약함이 오히려 주님의 강함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주의 강함으로 덧입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