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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 70년 인연을 되돌아보며
서울인 2018 겨울호
이충호 동문. 오른쪽은 재학 당시 모습
글_ 이충호(6회, 83세)
/1948년 9월 입학, 3학년 때 6.25 발발/
서울중고등학교 6회 졸업생인 우리 동기들은 올해 입학 70주년을 맞이했다.
나는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일본식 연호 소화(昭和) 10년)에 출생했다. 출생 당시 이름은 이충호였지만, 194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 미야무라 타다요시(宮村忠良)란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었고, 불행하게도 1945년 8월 15일 해방 때까지 그 이름을 사용해야 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내 이름은 되찾았으나 해방된 조국은 정부가 수립되지 못하고 남한은 미군이, 북한은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각자가 점령한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비로소 나라를 가진 국민이 된 셈이다. 우리 6회 동기들은 정부수립 보름 뒤인 1948년 9월 서울중학교(6년제) 1학년에 입학했다.
1950년 서울중학교 3학년에 진급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사흘 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되어 공산 치하에서 숨 막히는 시기를 보냈다. 같은 해 9월 28일 우리 국군과 연합군에 의해 수도 서울이 수복되면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셈이 되었다.
연호(年號) 또한 일제강점기에 소화(昭和)라는 일본 연호, 해방 후 미군정 시기에는 서기(西紀), 정부 수립 직후에는 단기(檀紀), 1962년 1월 다시 서기(西紀)로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
화폐의 단위도 일제강점기‘원’에서 6.25 동란 중에‘환’으로 바뀌었다가 1962년 6월, 다시‘원’으로 환원되었다.
/1951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학제(學制) 변경/
지금의 초등학교는 당시‘국민학교’라고 했는데, 나는 일제강점기 소화 17년(1942년) 4월 1일에 입학했다. 당시 학기는 4월~8월, 9월~12월, 1월~3월의 3학기로 나뉘었다. 해방 후 미군정은 미국의 학기 편제에 맞춰 신학기를 9월에 시작하고, 다음 해 8월에 마치는 것으로 학제를 변경했다.
이에 우리 6회 동기들이 서울중학교(당시는 6년제)에 입학한 것은 단기 4281년(서기 1948년) 9월 1일이었다. 우리가 중학교 2학년 때 9월에 신학기가 시작되는 것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새 학년 신학기를 4월로 환원하기로 하되, 바로 실시하게 되면 해당 연도에는 한 학기가 없어지므로 이를 절충하여 1950년에 한하여 6월 1일을 신학기로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 해가 6.25 전쟁이 발발한 해로, 우리 동기들은 중학교 3학년으로 진급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전란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1951년부터는 학제가 중학 6년제에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의 학제로 분리되었다. 서울중학교 역시 교명이 바뀌어 서대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당시 우리 6회 동기들은 6.25 전쟁으로 인한 혼란으로 고교 입학시험 없이 자동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단기 4287년(서기 1954년) 3월 3일 서울고등학교 제3회 졸업생이 된다. 따라서 우리 동기들은 중학교 입학을 기준으로 하면 6회이고, 고등학교 졸업을 기준으로 하면 3회 졸업생이 되는데 총동창회에서는 졸업기수로 인한 혼란을 없애기 위해 이후 우리는 6회 졸업생이 되었다.
여기에서 졸업기수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
우리 6회 동기들이 졸업 50주년을 맞아 기념문집‘졸업 50, 인생 70’이라는 기념문집을 발간하였다. 당시 편집책임자였던 필자는 모교 역사관을 찾아가 담당교사에게“우리는 휴전 전에 졸업하느라 졸업앨범도 없고, 반별로 찍은 사진 한 장이 전부”라고 했더니 6회 졸업앨범이 분명히 있다고 하며 자료실에서 찾아 주는데, 앨범 표지에는 분명히‘서울고등학교 6회’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기실 통합 기수로 따지면 9회 졸업앨범이었던 것이다.
/나의 중학시절/
우리 동기는 총 384명으로 한 반이 64명씩 총 6개 반으로 이루어졌다. 본 교사(校舍)가 모자라 1반부터 3반까지 3개 반은 본교사 서쪽 별채의 판잣집과 같은 3개 교실에 배정됐다. 필자는 2반이었는데 한가운데 끼인 교실로 3면이 막히고 창문이 뒤편에 있어 궂은 날이면 어두워서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 조명시설은 기대하기 어려웠던 시기였다. 나는 시골(충북 영동)에 있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했기에 혼자였지만, 학교 주변 덕수, 수송, 재동, 혜화 국민학교 출신들은 출신학교 별로 10~20명씩은 되다 보니 서로 잘 어울려 그 모습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의 담임선생님은 지리과목을 가르치셨던 김용묵 선생님이셨는데, 수유여중에서 정년 퇴임하실 때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시골 출신이었던 필자는 밴드부가 멋있어 보여 가입하고 싶었으나, 방학 중에도 연습을 한다기에 꿈을 접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유학생이니 적어도 방학 중에는 고향에 계신 어머님을 뵙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대신 보이스카우트를 지원했다. 단복이 있고, 미군이 쓰던 접이식 모자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시골소년에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1년 선배였던 이순재(탤런트)씨도 같은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했는데, 6.25 직전 중앙대학교 뒤편 삼락사에서 1박 2일 동안 캠핑한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하다. 이순재 선배와는 나중에 홍은동 골목에 같이 살아, 아이들 등교를 위해 학교버스를 태우는 곳에서 간간이 조우했는데 가끔씩 옛이야기를 나누며 학창시절의 추억에 빠지곤 했다.
당시 보이스카우트 지도교사는 필자의 3학년 담임이셨던 김영실 선생님(2006년 작고)이셨는데 문일 중고등학교와 안양대학교의 설립자이시기도 하다.
/6.25 전쟁/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방송에서 38선에서 교전이 시작되었다고 휴가 장병은 급히 귀대하라고 하며 우리 국군은 서울을 사수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6월 27일 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고, 다음 날 아침 북한군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거리에 나타났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상황이 바뀌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모든 학생은 등교하라는 방송이 계속되었다. 나는 시골에서 어렵게 합격한 서울중학교인데 퇴학당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 등교를 했다. 출석 학생은 반도 되지 않았다. 교실수업은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었고 적기가(赤旗歌)나 김일성 장군의 노래들을 가르쳤다. 게시판에 북한 헌법이 붙었는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도는 서울’이라고 씌어 있던 기억이 난다.
보름쯤 지났을까? 7월 어느 날 전교생을 체육관에 집합시켜 학년 구분 없이 키순서로 정렬시키고 내 앞 대여섯 칸 앞에서 대열을 끊어 수송국민학교로 행진시켰다. 나중에 들으니 그 길로 의용군에 지원시켰다고 한다. 나는 3학년이었지만 키가 작아 뒤편에 섰다가 체육관 청소를 하라기에 투덜댔는데, 결국은 작은 키로 인해 살아남은 셈이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작은 키를 원망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그 길로 1주일을 걸어 고향에 갔지만, 가족들은 이미 피난을 떠난 뒤였고 나를 맞아준 것은 덩그마니 빈 집뿐이었다.
/고3 때 복교/
6.25 전쟁으로 고향에 내려가 중학교 3학년 후반기와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그곳 학교에 위탁생으로 다녔다. 고등학교 3학년에 진급할 때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시골학교보다는 기차 통학이 가능한 도시 학교가 나을 것 같아 대전고등학교를 찾았다. 그곳에서 서울중학교의 체육교사이셨던 권혁조 선생님을 조우했는데 반갑게 맞아주며 언제라도 받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생각이 많던 터라 기왕 옮길 바에는 본교인 서울고등학교에 복교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싶어 당시 부산 송도에 있던 임시 교사를 찾아갔다. 그때는 서울 수복 전이라 부산에 본교가 있고, 서울 본교는 분교가 되어 있었다. 김원규 교장선생님께서 타교의 성적은 인정할 수 없으니 1년 유급하여 2학년으로 편입하라고 하셨다. 나는 유급은 싫다고 계속 고집했다. 국어, 영어, 수학 3과목의 테스트를 치르고 나서야 3학년 편입이 허용되었다. 기쁜 소식을 안고 고향에 갔는데, 집에서는 연고가 없는 부산보다는 생활기반이 있는 서울이 오히려 학업을 하는 데도 좋고, 경제적 부담이 적다고 서울로 갈 것을 권유하셨다.
당시 기차는 서울까지 운행되었지만 전란 중이라 일반 승객은 영등포역에서 전원 하차하여 도강증이 있는 사람만 한강철교를 넘어 서울역에 갈 수 있었다. 미군 군용 철도 수송 사무소(RTO)에서 도강증을 발급받고 서울에 입경하여 서울 분교를 찾았다. 본 교사와 운동장은 영국군이 병영지로 사용하고 있었고, 학교는 수영장 옆 도서관을 교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리 선생님이셨던 교감선생님이 부산에서와 똑같이 타교 성적은 인정할 수 없으니 1년 유급을 하라고 하셨다. 나는 부산에서 테스트에 통과하여 3학년 편입이 허가되었다고 말씀 드렸으나 내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란 중이라 통신상태가 원활치 않아 전화로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또다시 강하게 3학년 편입을 주장하자 부산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어, 영어, 수학 3과목의 테스트를 거친 후에야 고3 편입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고3은 부산 본교와 서울 분교가 각각 문과, 이과 1개 반씩 운영되다가 그 해 9월 부산 분교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통합되었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졸업식 때 우등상을 받았으니 3학년 편입을 고집했던 내 주장이 무리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훌륭한 선생님들/
김원규 교장선생님은 우수 학생을 선발하는 것과 더불어 우수한 교사의 유치에도 심혈을 기울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교 교사이셨던 은사님들은 대학으로 많이 자리를 옮기셨다. 체육교사이셨던 조영식 선생님은 신흥대학을 인수하여 경희대학교를 개교하셨고, 지리과목을 담당하셨던 박노식 교감선생님, 영어의 양병택 선생님, 생물의 이일구 선생님, 음악의 서수준, 이성삼 선생님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영어의 안병욱 선생님은 숭실대로, 국어의 김광식 선생님은 경기대학교로, 생물의 현재선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수학의 이준목 선생님은 양영학원을 설립하셨고, 영어의 안현필 선생님도 영어학원을 개설하여 크게 성공하셨다.
/졸업/
6회 동기들의 졸업식은 단기 4287년(서기 1954년) 3월 3일 도서관 앞 작은 노천 마당에서 거행됐다. 졸업식에는 당시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 민의원 의장이 내빈 축사를 했고, 야당의 거목이었던 조병옥 박사(조순형 동문의 부친)가 참석했다. 졸업생은 총 247명이었으며, 234명이 대학에 지원했다. 대학 지원자의 80%가 서울대학교에 지원했고, 지원자의 80%가 실제 합격을 했으니 전란으로 인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 동기들이 얼마나 우수한 재원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날 졸업식에서 김원규 교장선생님이 목발을 짚고 축사를 하셨다. 늘 엄격하셨던 김 교장선생님은 지각하는 학생들을 교문에서 되돌려 보내셨는데 한 학생이 학교 뒷담을 넘어 들어오는 것을 쫓아가다가 실족하여 다리가 골절되신 일화는 당시 서울고에 재학했던 재학생들은 물론, 이후 후배 동문들에게까지 내려오는 전설이다. 바로 우리가 고3 때 일어난 일이었다.
/동기회/
우리 동기회처럼 구성이 복잡한 동기회도 드물 것이다. 졸업생은 247명인데 동기회원은 340명이 넘었다. 바로 6.25 전쟁 때문이었다. 정상적으로 1948년 서울중학교로 입학하여, 1954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동기, 1951년 서울고등학교로 입학하여 1954년 졸업한 동기, 1948년 함께 입학은 했으나, 이런저런 사유로 학업이 늦어져 본교 7회 또는 8회로 졸업한 동기, 1948년 함께 입학했으나 전란으로 인해 본교로 복귀하지 못하고, 피난지 또는 다른 지역에서 졸업한 동기, 1948년 이전 선배기수로 입학했으나, 역시 학업이 늦어져, 1954년 우리들과 함께 졸업한 동기 등 그 구성이 다양하다. 이러한 경우에도 대부분 입학 동기를 찾아가는 경우가 많지만 입학기수와 졸업기수 두 기수 동기회를 모두 찾아가는 열성파들도 간혹 있다. 자녀들의 결혼식에 참석해 보면 두 동기회의 화환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우리 동기들은 유난히 미국으로 이민 간 동기들이 많아 그 수가 3분의 1에 달한다. 모교가 해방 후에 새로 개교하다 보니 이북에서 내려온 동기들이 많았는데, 전쟁을 겪자 한국에 정착하기보다, 이민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동기들이 많았다. 동기들 중에는 의사가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미국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은 미국에 정착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8월 말 현재 작고한 동문이 122명, 생존 회원이 185명으로 파악된다. 그 중 미국 거주 동기가 56명이니 생존 회원의 30%에 달한다.
우리 동기들이 사회에 진출했던 시기에는 선배 동문들이 너무 귀했다. 내 경우 산업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서울고 선배는 행원 2명뿐이었다. 반면 경기고 출신은 30여 명이 있었는데, 임원부터 부장, 차장까지 다양한 직급에 동문들이 포진해 그 모습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하지만 우리 모교도 70년이 지난 오늘은 동문의 수가 5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니 든든한 생각이 든다.
입학 70년을 회고해 보았다. 격변의 시대를 살았으나, 훌륭하신 스승 밑에서 수학한 행운아였다. 주머니 없는 교복 바지는 엄격했던 교풍의 상징이었으며,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는 김원규 교장선생님의 가르침은 우리 동기 모두의 인생에 큰 이정표가 되었다.
지각생을 쫓다가 다리를 다치신 후 목발에 의지하던 모습 1954년 3월 6회 졸업식
이충호 동문이 졸업식에서 받은 졸업장과 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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