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중학생 때 배웠던 이야기와 관련된 것이지만, 다양한 삶의 상황 속에서 항상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내 행동이나 습관이 조건반사인지, 아니면 무조건반사적인 행동인지 하는 것이다.
조건반사는 학습에 의해서 대뇌가 판단하는 반사이고, 무조건반사는 척수나 연수, 중뇌가 중추가 되어서 일정한 조건이 주어지지 않아도 자극에 대해서 저절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이다.
러시아의 생리학자인 파블로프의 연구에 의해 정립된 개념이 조건반사. 예컨대 레몬 같은 신 것을 보면 저절로 입 안에 침이 고이고, 심하면 입술 밖으로 질질 흐르는 현상이다. 실제로 필자는 유난히 신 것에 예민해서 귤만 봐도 침이 옆으로 삐질삐질 나온다.
파블로프는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을 치고, 나중에는 먹이도 주지 않고 종을 쳐서 침을 흘리게 했다니, 좀 치사스럽다. 먹는 것 앞에 의 난다고 먹을 것 갖고 장난 쳐서야 어디 될 일인가. 흘린 침이 얼마나 헛헛할까?
조건반사가 이렇게 일정하게 자극이 반복적으로 주어질 때 후천적으로 습득된 반응인 반면, 무조건반사는 의식과는 상관없이 자극이 주어졌을 때 선천적으로,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무릎을 나무망치로 살짝 두드리면 저절로 근육이 반응해서 다리가 펴진다거나, 뜨거운 물체에 손이 닿으면 저절로 움츠리거나, 하품이나 재채기, 딸꾹질, 빛을 보면 동공에 변화가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 모두 무조건반사이다.
무조건반사야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기에, 정말 흥미로운 것은 조건반사이다. 필자는 수영을 못한다. 어렸을 적에 동네 저수지에 빠져서 죽을 뻔한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잘 생각은 나지 않는데, 다만 정말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공포이다. 몸이 허공에 떠 있고, 마치 부드럽지만 차가운 물이 몸을 옥죄어 오는 것 같은 느낌. 어디 디딜 데가 없다는 것이 전혀 내 생명이 기댈 곳이 없다는, 내던져진 느낌을 주었고, 그것은 곧 임박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후부터는 동네 목욕탕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가다가 잠깐 물 속에서 발을 헛디뎌도 당시의 생생했던 공포가 잠깐씩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뚜렷한 형체도 없는 죽음에 대한 이런 공포는 물 속에서 뿐만 아니라, 터널 속에서 잠깐 대기 중인 지하철에서, 남산 위를 오르는 케이블카에서도 떠오르고, 전원이 나간 엘리베이터에서는 거의 실신을 할 지경이 된다.
파블로프의 실험은 조건자극을 조절해 무조건 반응을 유도하거나 제거해 학습의 강화나 소거(消去)를 시도했다. 종소리를 울린 뒤 먹이를 반복해서 주면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린다. 하지만 종소리를 아무리 울려도, 이어서 먹이를 주지 않는 일이 반복되면 더 이상 침을 흘리지 않게 된다. 이는 아주 기초적인 형태의 학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사와 세상사, 인간의 조건과 신앙생활은 결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물 속에서 떠올린 죽음의 공포는 물 밖에서도 이어지고, 심지어 인간 관계나 삶의 자세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조건반사로서의 그 두려움은 쉽게 소거되지도 않는다. 개인적 일상 삶에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 생활 속에서도, 고차원의 정신활동에서도, 일단 학습된 조건반사적 반응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와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어떤 자극을 주고 받으며 어떤 반사적인 반응을 보이는지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행동들이 다른 그리스도인이나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어쩌면 괜히 종만 울리고 먹이는 주지 않는, 괜시리 침만 흘리게 만드는 텅빈 종소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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