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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오늘’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은혜롭고 눈물겹게 다가옵니다!
첫 번째 독서 히브리서를 봉독하고 묵상하던 중 오늘따라 ‘오늘’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은혜롭고 눈물겹게 다가옵니다.
오늘이 그저 그런 하루,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영양가 없는 하루가 될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마음먹는가에 따라서 오늘이 일생일대 가장 큰 축복의 날이요 구원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돌아보니 부끄럽게도 오랜 세월, 수많은 ‘오늘’을 그냥 허송세월하며 살아왔습니다. 얼마나 금쪽같은 오늘인데, 그 소중한 오늘을 즐기지도 만끽하지도 못하고 소모시켜 왔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이라는 표현에 얼마나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베트남 공산화 이후 공산당 정권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간 구엔 반 투안 대주교님은 구속 영장도, 그 어떤 절차도 없이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됩니다. 그리고 장장 13년 세월 동안 옥고를 치룹니다.
첫해가 지나가면서 대주교님은 은근히 기다렸습니다. 쥐구멍에도 볕들날이 있다고, 무슨 방법이 있겠지. 마냥 이 음습한 독방에 갇혀있지는 않겠지. 누군가가 반드시 도와주겠지. 조만간 풀려나겠지. 무슨 방법이 있겠지.
그러나 2년, 3년, 5년, 10년이 지나도 그날이 오지 않았습니다.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 중에 대주교님은 마침내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
그러나 어떻게? 그 뒤로 대주교님은 독방을 주교좌 성당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을 담당한 교도관을 예수님으로 섬겼습니다. 사이공 대교구 주교로서 자신이 담 밖의 교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거룩한 미사를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물론 독방에서 혼자서, 양손 바닥 위에 작은 빵조각 하나, 포도주 한 방울을 올려놓고 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 말씀처럼 오늘이 구원의 날이니, 오늘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오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이웃들에게 충만한 기쁨을 선사하는 하루로 엮어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내 입에 나오는 말 한마디, 손짓 한번, 전화 한 통화, 결정 하나 하나가 나의 삶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매일 매 순간이 기적입니다. 살아온 날이 기적이고, 살아갈 날이 기적이며,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너무나 큰 죄인이고 큰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어제의 나를 거두어가시고, 어제의 내 부족함을 용서하시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다는 가장 뚜렷한 표징인 새로운 하루 앞에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내 기도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아보는 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어떻게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보여줍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올바른 기도의 목적과 방법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가 잘 안 된다고 하고 어떤 분은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하면 우리는 나의 기도가 잘 가고 있는지, 혹은 지금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복음에서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그리스도께서 ‘하고자 하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곧 창조자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그만큼 많은 것을 보고 알 수 있기에 그만큼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은 본래 인간의 모습에서 멀어진 죽은 모습입니다. 이 원형이 본래의 창조 모형인 그리스도처럼 회복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과 사랑이 요구됩니다. 이 지식과 사랑을 회복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원형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결과를 낳는 게 기도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잘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분심이 안 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도는 힘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신 것이 기도의 원형입니다. 변화는 힘이 듭니다.
영화 ‘리얼 스틸’(2011)은 공상과학 영화지만, 쓸모없어서 버려진 주인공 로봇이 어떻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기도를 통해 우리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아톰은 버려지고 잊혀진 로봇으로, 쓰레기장에서 묻혀 있던 한때는 유용했지만 이제는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맥스가 아톰을 발견하면서, 아톰의 회복과 더불어 원래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이는 오늘 복음(마르코 1,40-45)에서 예수님을 만난 나병환자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과정과도 닮아 있습니다. 영성의 단계로 말하자면, 이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첫 단계인 ‘구송 기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아톰은 자율적으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단지 외부 명령에 반응할 뿐입니다. 이는 구송 기도에서 우리가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말을 내뱉으며 시작하는 모습을 반영합니다.
이 초기 단계에서, 맥스는 아톰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톰은,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듯, 끊임없이 주목을 요구합니다. 맥스는 마지못해 아톰을 경기장에 데려가고, 아톰은 경기에서의 활약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합니다. 이는 소개의 단계입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첫 목소리입니다.
아톰이 수리되고 훈련되면서, 그 성장 과정은 다음 단계인 ‘듣기’로 전환됩니다. 이제 아톰은 단순히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넘어, 맥스와 찰리의 의도를 해석하며 목적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아톰의 행동은 점점 더 그들과 조화를 이루고, 주인에게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이는 영성에서 묵상 기도에 해당하는 단계로, 영혼이 말을 한 후 주님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이해가 깊어지고, 아톰이 조종자의 지시를 듣고 동작을 세밀히 조정하듯, 영혼도 신적 인도를 들으며 자신을 정제해 갑니다.
아톰의 변모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은 바로 챔피언 ‘제우스’와의 대결에서입니다. 이 전투에서 아톰은 더 이상 외부의 명령에만 의존하지 않고, 맥스와 찰리의 움직임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아톰은 마치 찰리의 복싱 기술을 거울처럼 따라하며 둘이 하나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아톰은 최고의 가능성에 도달하며, 이는 영혼이 관상 기도를 통해 단어와 행동을 초월하여 하느님과 일치되는 단계와 유사합니다. ‘보기’ 혹은 관상의 단계는 침묵 속에서 주님의 본질을 흡수하고 이를 모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아톰의 성장은 단지 더 나은 로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목적과 가치를 회복하는 여정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만난 뒤 깨끗하게 되어 회복된 나병환자의 여정과도 같습니다. 구송, 묵상, 관상의 각 단계는 이러한 회복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나 자신을 봉헌하고 그 자리에 주님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먼저 구송기도, 혹은 소리기도를 통해 나를 드러냅니다. 숨어있어도 되지만,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나에게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냥 혼자 있으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봉헌하지 않으면 그만큼 문둥병에서 나아질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그다음은 묵상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나를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들어야 합니다. 내 정신까지도 그분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집중해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그만큼 더 문둥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마지막은 관상 기도인데, 그분을 바라본다는 말은 이제 나를 완전히 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 자신을 완벽히 봉헌하는 이 기도는 가장 큰 고통의 시간이자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분의 모습을 완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내가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됨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높은 기도를 하고 싶어도 다 순서가 있습니다. 나의 수준을 잘 알아서 힘들다고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 되고, 힘들지 않다고 그 자리에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더 힘든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분의 모습으로 변하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효과는 기도가 끝난 이후에 확실히 나타납니다. 좀처럼 감정의 동요가 이전의 자신이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힘이 활동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를 멈출 수 없게 됩니다. 또 고통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조금 더 나병에서 치유되며 온전한 창조된 원형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40-45: 깨끗하게 되어라
한센병 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하셨다. 그러자 한센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한센병 환자를 만지셨다.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한센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예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이미 한센병은 치유되었다. 주님의 손은 한센병 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 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손은 한센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 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침묵을 요구하셨지만 오래 감추어지지는 못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면서, 기도하면서 자신이 하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뜻과는 반대로 그 활동이 알려지기도 한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인정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시고 사제에게 보내 예물을 바치게 하셨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치유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죄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갈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청하면서 항구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라고 합니다. 남녀 간의 만남을 다루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그 역사는 199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결혼이 목적인 청춘남녀들이 맞선을 하는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사랑의 스튜디오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형태의 프로그램 숫자도 늘어났고, 특히 비연예인 출연진으로 현실감을 높인 연애 프로그램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런 연애 프로그램이 왜 끊임없이 인기를 끌까요? 어차피 여기에 나오는 연애란 결국 나의 연애가 아니라, 남의 연애가 아닙니까? 남의 연애사에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질까요? 하긴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교생 선생님이 오시면 첫사랑 이야기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나네요.
이를 심리학자들은 ‘감정전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출연자가 매력적인 상대를 만나 느끼는 설렘이 말과 표정과 몸짓으로 모두 표현되니, 이에 시청자도 자연스럽게 설렘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쩌다 친구 따라 성당에 나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너무 좋다고 해서 왔는데, 너무 엄숙해서 자기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좋게 말해서 엄숙한 것이지, 어쩌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행복해 보이지도 않고, 기쁨도 없고, 그저 마지못해 자리만 지키는 신자들의 모습에 처음 온 사람들은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감정전이가 되지 않아, 전혀 설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자기 자리에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전교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거리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의 표정 하나도 전교의 큰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표정만으로도 주님의 뜻에 함께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치유된 그를 돌려보내시면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면서 단단히 이르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이후 행동에 대해 이렇게 복음은 전합니다.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마르 1,45)
나병의 치유를 널리 알려야 주님을 더 믿고 따를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널리 알리고 퍼뜨린 것은 오히려 잘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알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건강을 알리는 것이 더 큰 목적이 아니었을까요?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 자체가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나의 표정 하나에서도 주님을 충분히 전할 수 있으며, 주님과 진심으로 함께하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같이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우리 삶에 따스한 것은 없다(이정하).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히브 3,10)
하느님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마음이 빗나간 자들이여,
주님을 향하여
앞으로 나란히.
우리의 마음은
항상
주님의 마음과
합해져야 한다네.
지금
혼돈 속에서
마음이 빗나가
방황하고 있는 자들이여,
모두
주님을 향하여
양팔을 내밀고
앞으로 나란히.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지금 여기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비하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 자신을
부정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 자신을
능력이 없는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 자신을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지니셨던 그 사랑과 인내의 마음으로,
애틋함을 지니고 그 상처에 손을 대고 싶습니다.
그래야 내가 감염되지 않고
그 사람의 상처가 낫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구원될 것입니다.
그래야 나의 나병도 나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서로 격려하십시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3,7-14
형제 여러분, 7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8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
9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며 시험하였다.
10 사십 년 동안 그리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세대에게 화가 나 말하였다.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11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2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13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14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