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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묵상글 ( 연중 제7주간 금요일, - 원망은 하느님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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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연중 제7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원망은 하느님께.
“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오늘 야고보서는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권고하는데
저는 사람에게 원망하지 않는 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 때문에 아버지가 한번 원망스러운 적이 있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버리고 가셨다면 아버지를 원망하겠지만
하느님께서 아버지를 데려가신 것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원망이건 무엇이건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게 된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원죄입니다.
시시하게 아담과 하와가 원죄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만든 분이시고,
인간은 그렇게 된 존재입니다.
‘잘되면 자기 공, 안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로
조상 탓하지 말고 자기가 자기 인생 책임지라고 하지만
저는 사실 많은 것이 조상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유전 인자를 준 것도,
그렇게 키운 것도 다 부모이고 조상의 대물림입니다.
그래서 책임 있는 부모는 자식이 잘못한 것을 다 자기 책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 부모가 이럴 진데 하느님 아버지는 더 근본책임이고 무한 책임입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사람을 별로 원망하지 않고 하느님을 더 원망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에게 꽂혀 있는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려고 애쓰고,
가능한 한 빨리 원망을 기도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부부의 인연을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서로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서로 좋아 택한 것 같아도 실은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부부간에 문제가 생겨도 서로 원망하지 말고 자기 잘못을 반성할 뿐 아니라
왜 내가 저런 인간하고 결혼했지? 내가 눈이 멀어도 한참 멀었어!라고 생각지 말고
왜 저런 인간을 제게 주셨습니까? 하고 하느님을 원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이렇게 화살을 하느님께 돌린 다음,
그러나 우리가 신심 깊은 신앙인이라면 원망만 하지 말고,
주님께서는 왜 이런 인간을 내게 주셨지? 이렇게 생각해야 하고,
더 나아가 이 인간에게 나를 보내신 것은 아닐까? 하고 주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아무튼, 원망을 기도로 돌리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 뜻을 찾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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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며칠 전에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대형마트에 갔다가 인상 깊은 장면을 하나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어린이가 장난감 코너에서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아주 심한 경우 아이가 매장 바닥에 누워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지요. ‘또 그런 일이 생기겠군.’라고 생각하면서 지나가는데, 아이 엄마가 아이의 눈을 마주치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장난감이 갖고 싶구나. 그런데 이 장난감과 같은 것이 집에 있는 것 같은데?”
“아니야. 여기 팔 부분이 다르단 말야.”
“그래. 팔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팔 조금 다르다고 전 장난감을 버리면 그 장난감이 서운하지 않을까? 그럼, 우리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같이 생각해 보자.”
그 뒤는 저 역시 바빠서 듣지 못했지만, 잘 해결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 엄마가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보통은 “집에 똑같은 것 있잖아! 안 돼!”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하고 나면 아이는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엄마는 아이가 계속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었습니다.
주님도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계속 생각해서 우리가 직접 행동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 자체를 스스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하고, 이런 식의 부정적인 마음만 계속 키워나갑니다.
주님의 일에 대해 우리가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계속 물음표를 던지면서 주님의 뜻에 가까워져야 합니다. 섣부른 마침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물음표를 던진 것 같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율법에 이미 이혼장만 써 주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되어 있으니까요. 이 율법의 규정이 아내에 대한 불공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아내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불가해소성’. 즉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면서 그들의 단정 지어 버리는 마침표를 지우십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 할 수 있는 가정 안에서도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 있고, 또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침표를 찍어 버리면 가족 안에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떠올리면서 물음표를 던지면서 주님 안에서 일치할 수 있는 삶을 우리 가정 안에서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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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하거나 하지 않은 것만 있을 뿐, 해보려 한다는 건 있을 수 없어요(영화 ‘스타워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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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을 떠나 유다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군중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결혼에 대한 진정한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10,3)고 되물으시고, 그들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해준 이유가 이혼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모세가 그렇게 한 것은 여성이 이혼장이라는 서류도 없이 버림을 받게 될 경우, 여성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생활하다 붙잡히게 되면 간통죄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내의 사소한 일을 꼬투리로 잡아 이혼하는 일이 많아 사회적 문제꺼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혼이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10,9)는 창조 때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이라고 번역한 “짝 지우다”라는 단어의 원래 뜻이 “함께 멍에를 매다”라는 뜻이기에, 결혼은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일치를 향한 공동의 운명을 지니고 함께 협력하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결혼이란 ‘한 몸’, 곧 일치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일치를 이루기 위한 조건적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고’ ‘하나 됨’에로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 10,7)는 말씀을 교부들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로,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로 해석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하여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하여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이처럼,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과 인간은 한 몸을 이루어나가야 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실, 교회의 일원이 되는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맞이하는 혼인성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과의 이 깊은 관계가 우리를 가장 품위 있는 존재로 부각시켜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8)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더불어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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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연중 제7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의 보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아주 가깝다는 표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바로 혼인 관계입니다. 온전히 하나가 되어서 새 창조를 이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과 이혼의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결혼문제는 단순히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신랑이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로서(예레31,3).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서 한 마음 한뜻으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강의장에서 강사가 물었습니다. “여러분!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남편이나 부인과 결혼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한 남자가 손을 들더니 말했습니다. “난 지금의 부인과 살겠습니다.” 여기저기서 감탄하는데 강사가 물었습니다. “부럽습니다! 그럼 만약에 부인이 싫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남자 왈, “그럼… 고맙지요. 뭐∼!” 그랬답니다. 속마음이 다들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어떤 분은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같이 살고 싶다고 하는데 배우자가 아주 싫어한다고!
바리사이들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당시는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로 취급되었습니다. 당연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과는 맞지 않는 결혼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어떻게 가르쳤느냐고 물으십니다. 문제의 답을 항상 성경 안에서 찾도록 안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받았을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실 모세가 이혼장을 써주라고 한 것은 남자의 권위 아래에서 여성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한 것입니다.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에 이혼을 허락하여 자유를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사업에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자도 여자도 똑같은 피조물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똑같은 하느님의 고유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서로는 각각의 아름답고 고유한 특성이 있지만 혼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고, 반드시 상대방의 도움을 통해서만이 채워져야 할 부족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완전함을 만들며 서로의 거들 짝을 만나서 부족함을 채워가는 것이 결혼의 삶입니다. 서로를 도와주는 동반자로서 협력해야지 일방적인 자기 요구만을 상대방에게 강할 때 한마음 한뜻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에게 ‘여보’라고 합니다. ‘여보’라는 말의 어원이 女寶 또는 如寶에서 비롯됐다는데, 부부는 ‘보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부님들, 서로를 보물처럼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원수처럼 대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배우자! 서로에게 배우자! 결혼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관계이지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의 의무와 권리를 가진 동반자입니다. 서로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서로의 보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 우리의 만남도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 수십억 가운데 자기 짝을 만나는 일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결혼을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결혼해야 하고 사랑이 없는, 신의 없는 결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그렇게 소중한 관계입니다.
자녀와의 관계를 봅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 떠남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놓아주는 능력, 이기심이나 독점욕, 지배욕을 버리고 자립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또한 자녀는 부모로부터 독립 해야 합니다. 기대지 말고, 의존하지 말고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스스로 서야 합니다. 부모에게 짐이 되지 말고 떠나야 할 때 떠나야 합니다. 부모도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내야 합니다.
이혼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서로의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하는 데서 오는 아픔입니다. 성격 차이를 1순위로 꼽고 있지만 ‘너는 나의 것’이라는 일방적인 소유욕에서 불행이 시작됩니다. 서로에게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인격이 ‘우리’라는 공동체를 형성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 수는 늘어났지만 참 신앙인은 많지 않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자, 영성체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세례때 서약한 우리의 의무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미사참례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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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부활 성야에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세례 대상자 중에 사회에서 혼인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관면혼배’가 필요하여서. 먼저 관면혼배를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본당 신부가 관면혼배를 할 수 있도록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미국에서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습니다. 혼인성사를 담당하는 부제님이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의견을 주었습니다. 한국은 선교지역이기에 관면혼배의 권한이 본당 신부에게 주어졌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오는 신부님이 미국의 사정을 잘 모르고 관면혼배를 줄 때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 절차상의 문제가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모두 세례를 받은 신자이고, 댈러스 교구 소속인 경우에만, 본당 신부가 혼배성사를 집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먼저 교구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혼인무효도 절차가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교포 사목 본당에서 혼인무효 절차를 하려면 한국의 교회법원에 문의하는 것이 더 빠르고, 쉽게 해결된다고 합니다.
교우들과 면담하면서 ‘혼인장애’로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부의 인연이 끊어진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괴롭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싶지만, 주변의 시선이 부담되기도 합니다. 인연을 만나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지만, 교회의 법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교황님께서도 그런 분들이 공동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사목적인 관심과 돌봄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국가에는 ‘사면’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운전면허가 취소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서는 꼭 운전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용되면 안 되겠지만 국가에서 ‘사면’을 통해서 다시 운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피선거권이 박탈된 사람에게도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성서에도 ‘희년’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희년에는 빚을 탕감해 주기도 합니다. “약자는 속박으로부터, 강자는 탐욕으로부터 해방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성경 속 희년의 의미입니다. 2023년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혼인은 19만 4천 건이고, 이혼은 9만 2천 건이라고 합니다. 결혼 대비 이혼율이 47.4%로 세계 3위에 해당한다고 보도했습니다. 신자들의 이혼 비율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의 권한과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교회에서도 이런 상황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은 생일이 2월 29일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날 중에 2월 그것도 29일입니다. 그래서 생일을 찾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본인이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생일을 몇 년에 한 번씩밖에는 기억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도 제 몸에 대해서 아쉬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키가 조금 작은 것입니다. 다른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면 제 몸에 맞는 제의가 거의 없는 편입니다. 영화를 볼 때,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키가 크면 화면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생일이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도, 키가 작은 것도 어찌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이라도 편한 것 같습니다. 교우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사랑하며 지내야 하는데 때로 불신과 반목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의 시작도 사소한 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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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연중 제7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바리사이들이 주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은 이혼장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의 질문에서 자꾸 제 마음에 걸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버린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버린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쓰레기를 버린다든지, 혹은 물건을 버린다든지, 어떤 마음을 버린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버린다.’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버려지는 대상이 온전히 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아내를 두고 ‘버린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아내를 온전히 남편의 소유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창조 때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남편과 아내는 한쪽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버려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많은 것을 쉽게 버리거나 포기합니다. 사랑도 그렇게 가정도 그렇습니다. 신앙도 그렇고 삶도 그렇습니다. 조금만 힘들거나 맞지 않으면 버리거나 포기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서로 서로가 소유물로 여기지 마십시오. 아내는 남편의 소유가 아니며 남편도 아내의 소유가 아닙니다. 자녀 또한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러니 서로에게 이내로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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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엔 비
(햇빛촌)
낮부터 내린 비는 이 저녁 유리창에
이슬만 뿌려 놓고서
밤이 되면 더욱 커지는 시계 소리처럼
내 마음을 흔들고 있네
이 밤 빗줄기는 언제나 숨겨놓은 내 맘에 비를 내리네
떠오는 아주 많은 시간들 속을 헤매이던 내 맘은 비에 젖는데
이젠 젖은 우산을 펼 수는 없는 것
낮부터 내린 비는 이 저녁 유리창에
슬픔만 뿌리고 있네......
하루종일 비가 오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유리창엔 비‘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날, 그 시간, 그곳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선곡이었습니다.
위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 삶에 비가 그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리고 내려 숨겨놓은 마음속에도 비를 내리기도 합니다. 우산을 펴고 싶은데 너무 젖어버려 펴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요.
만약 정말 우산조차 펴기 힘들다면 가만히 비를 맞아 보면 어떨까요? 그저 마음 저 구석까지 젖을 수 있도록 맞아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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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혼인과 이혼
하느님 중심의 미완(未完)의 부부가정공동체
성모성월 5월은 계절의 여왕이자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다. 가정의 달과 연관된 날도 참 많습니다. 5월5일 어린이 날, 5월8일 어버이날, 5월11일 입양의 날, 5월15일 스승의 날이자 가정의 날, 5월20일 성년의 날, 5월21일 부부의 날등 정말 가정의 달같습니다. 저의 경우도 매해 10년째 스승의 날 전후로 저를 찾는 60세된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이 있고, 어버이날 전후로 거의 30년째 저를 찾는 두 자매도 있습니다. 30대 중반의 젊었던 자매가 지금은 60대 중반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 어려운 것이, 답이 없는 것이 공동생활입니다. 부부가정공동생활도, 수도가정공동생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늘 새롭게 시작하는 길뿐이 없습니다. 이혼율, 자살율, 노인빈곤율, 출산율이 세계 꼴찌인 한국이라 합니다. 요즘 결혼은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하며 본당에서 결혼하는 경우도 1년 한둘 정도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과 이혼”이 주제입니다. 성서의 예수님이나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창조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바로 이 말씀 안에 부부일치의 비결이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부부공동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 믿는 이들의 부부공동체뿐 아니라 수도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달라도 바라보는 방향이 같기에,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기에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의 신뢰와 우정과 더불어 부부간, 수도자간 신뢰와 우정이 깊어질 때 진정한 공동체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부부가 평생 함께 살아가는 것은 수도자가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더 힘들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이들 보기도 힘들지만 함께 사이좋게 살아가는 부부도 보기 참 힘듭니다. 이들을 보면 저절로 기분이 좋고 자주 눈길이 가곤합니다. 함께하는 부부에게 자주 드리는 격려 말씀도 생각납니다.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이렇게 함께 끝까지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입니다.”
그리고 부부는 혼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합하여 평균점수 60점이 넘어야 함께 천국입장이라고 말합니다. 때로 저절로 넋두리처럼 나오는 말도 있습니다.
“결혼은 아무나 하나? 부부는 아무나 하나? 부모는 아무나 하나? 결혼자격 시험, 부부자격시험, 부모자격시험좀 있었으면 좋겠다. 자격미달되는 경우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가 너무 많다.”
그러나 자격 갖춰하기로 하면 자격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평생 자격을 갖춰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부모가, 수도자가 되는 것 역시 평생 과정입니다. 참으로 평생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며, 경청과 겸손, 배움과 노력의 자세로 살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예전 자주 들었던 예화도 생각납니다.
“10대 부부는 신나게 살고, 20대 부부는 꿈속에 살고, 30대 부부는 사랑하며 살고, 40대 부부는 싸우며 살고, 50대 부부는 미워하며 살고, 60대 부부는 불쌍해서 살고, 70대 부부는 고마워서 산다.”
애정이 우정이 변화로 바뀌어가는 부부간의 내적성장과정은 수도자들 역시 흡사합니다. 세월흘러가면서 불쌍해서 고마워서 살아가는 신뢰와 연민의 사랑, 우정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쉽사리 이혼할 것이 아니라 서로 때가 될 때까지 끝까지 기다려주는 지극한 인내와 관용이 필수입니다. 혼인 주례때 자주 인용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라는 책에서 “결혼에 대하여” 라는 잠언이 부부관계뿐 아니라 공동체내의 인간관계에도 깊은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말라.
그보다 너희 영혼과 영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의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참으로 서로의 자리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자유롭게 할 때 더불어 깊어지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일 것입니다. 반면 무례하고 불손하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거친 언행은 얼마나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며 관계를 파괴하는지요. ‘사랑’이란 제 옛 글도 생각납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사랑은 아무나 하나?” “부부생활은 아무나 하나?” “부모는 아무나 하나?” “수도생활은 아무나 하나?” 예로 들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완성을 향해가는, 그러나 아직은 미완의 공동체라는 예술작품입니다. 부부공동체든 수도공동체든 평생 공동체 건설에 관용과 겸손과 인내와 지혜를 다해 한결같이 배움의 여정에 충실함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도 참 적절합니다.
“원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대해 들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무엇보다는 맹세하지 마십시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말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는 이들은 원망도 절망도 실망도 하지 않습니다.
이혼하여 혼자 살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가정인 교회공동체를 떠나선 안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며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끝까지 삶의 중심인 주님을 닮아 인내와 관용, 겸손과 진실, 배움의 자세로 공동체 삶을 살아가십시오.
죽어야 끝나는 공부요 영적전쟁입니다.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주님을 따라 사랑의 학인, 사랑의 전사, 사랑의 순례자, 사랑의 수행자로 살아가십시오. 날마다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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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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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연중 제7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8)
그리스도인의 혼인
교회가 묶고, 봉헌으로 굳건히 하고, 축복으로 봉인하고, 천사들이 선포하고, 아버지께서 확증하시는 혼인의 행복을 어떤 말로 적절히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지상에서조차 아버지의 동의 없이는 자녀들이 정해진 규범과 현행법에 따라서 혼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희망, 하나의 열망, 하나의 규율, 하나의 섬김으로 일치된 두 그리스도인과 같은 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에페 4,4 참조) 이 둘은 형제이며, 각자의 소임에서 동등합니다! 그들 사이에는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갈라짐이 없고, 참으로 “둘이 한 몸입니다”(창세 2,24; 마태 19,5; 에페 5,31). 몸이 하나이면 마음도 하나입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 앞에 함께 엎드리고, 함께 단식하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권고하고, 서로 위로합니다. 둘 다 교회 안에서 완전히 동등하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합니다(참조; 로마 12,15; 15,6; 갈라 3,28; 1코린 12,12). 하느님의 잔치에서 완전히 동등하고, 환난과 박해속에서도 완전히 동등하며, 위로를 받을 때에도 그러합니다. 서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상대방에게 소홀하지도 않으며,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습니다(필리 1,27 참조).
-테르툴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본성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본성에서 흘러 나온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본성을 본떠서 행동할 수 있다”고 어떤 학자는 말했습니다. 흘러 나옴의 첫째 방법은 뿌리 내림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뿌리가 나무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흘러 나옴의 둘째 방법은 결합을 통한 창조입나다. 결합을 통한 창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성령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흘러 나오는 방법입니다. 둘째 흘러 나옴은 성령과의 결합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성령과의 결합은 사랑의 결합입니다. 이 결합은 성령 안에서 스스로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유래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본성에서 흘러 나온다는 것을 자신들의 행위로써 증명합니다.(175)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세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운 생활 자세를 취해야
이제부터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새롭게 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이 진부한 것이 아니라 바오로 성인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는 새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선사받은 것이 새롭고 특별한 것이란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이전에는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형편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금보다 더 빛나는 존재가 되었고, 천상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모든 은사들은 영적인 것들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영적인 것이고 먹는 음식도 그러하며 마시는 음료도 그러합니다. 그 결과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이루어 놓는 작업들과 행동들도 모두 영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대로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갈라 5.22 이하).
이것은 아주 좋고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일을 행하는 사람은 계명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계명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성서에 “율법은 올바른 사람들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 아니다”(1티모 1,9 참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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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10,6.9)
우리나라가 당면한 미래 문제들이 참으로 많지만, 그중에서도 인구 감소와 출산율 저하입니다. 근본 요인은 바로 젊은 세대가 예전과 달리 결혼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제 주변에도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조카들과 아는 분들의 자녀들도 참 많습니다. 2023년 8월 말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조사로 살펴본 청년의 의식변화'에 따르면, 19∼34세 청년 가운데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이 좋다, 고 답한 비중은 지난해 기준 36.4%였습니다.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의 비율은 28.0%에 불과했습니다. 남성 43.8%가 결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 주된 이유로 '결혼 자금 부족'(33.7%)을 가장 많이 꼽았습니다. 이어 '결혼의 필요성을 못 느낌'(17.3%), '출산과 양육 부담'(11.0%) 등의 순이었습니다. 성별로 보면 남성은 '결혼 자금 부족'을 꼽은 비중(40.9%)이 월등히 높았습니다. 여성의 경우 금전적인 이유(26.4%) 못지않게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23.7%) 결혼하지 않으려 한다고 답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결혼 적령기를 맞는 청년 2명 중 1명 이상 (53.5%)이 결혼을 한다고 해도 자녀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의 생각을 들어보면 다양한 이유가 많더군요. 첫째로, 사회 문화적인 변화가 결혼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성들의 활발한 경제 활동으로 경제적 자립 여지가 넓어지면서, 결혼 전에 직업을 선택하고 경력을 쌓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늦추거나, 결혼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난 것입니다. 둘째로, 결혼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결혼이 일종의 사회적 의무로 여겨졌지만, 현재에는 개인의 선택으로 보는 추세입니다. 과거에는 결혼과 가정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강하였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셋째로 경제적인 부담이 증대되어 결혼에 대한 낭만이나 관심이 거의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많은 청년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 (=아파트 값과 전세비 상승)에서 결혼하기 어려워졌고, 결혼 비용 부담 금액이 상승한 이유에서 결혼을 미루거나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넷째로 취미나 여가 활동의 활성화입니다. 청년들은 과거 기성세대와 달리 취미나 여가 활동을 중요시하고, 많은 청년이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며, 결혼을 필수적인 선택사항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섯째로 연애 패턴의 변화입니다. 연애의 패턴이 과거와 달리 다양해졌습니다. 기존의 고정적인 연애 패턴에서 벗어나고, 다양한 형태의 연애를 즐기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연애 패턴으로 인해 결혼을 미루거나 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행했던 노래, ‘아모르파티’의 영향으로 다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 대로 하면 돼> 라고 큰 소리로 합창합니다. 농담이지만, 출산율을 높이려면 나라에서 이 노래 금지해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참, 이런 주장은 ’순수 예술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죠. 미안합니다. 김연자씨)
문제는 이런 결혼관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가톨릭 혼인교리와 가르침이 얼마나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가톨릭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교회는 심각하게 숙고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일원론적인 세상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가톨릭 혼인교리가 다원화된 세상에서 혼인을 앞둔 가톨릭 젊은이들이, 가톨릭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10,7) 라는 말씀이 바로 가톨릭 혼인의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곧 교회법 규정에 따라 합법적이고 유효하게 이뤄진 혼인의 끈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결코 풀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를 교회 혼인의 첫째가는 특성인 ‘혼인의 불가해소성’입니다. 가톨릭 혼인의 다른 특징은 ‘혼인의 단일성’입니다. 즉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 곧 일부일처여야 하며, 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함께 살거나 반대로 한 여자가 여러 남자와 함께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은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예수님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남녀의 결합으로 이뤄지는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으로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을 특징으로 하는 가톨릭 혼인은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성사, 곧 하느님 은총의 표지라는 것입니다. 혼인 생활 자체가 성사이고, 따라서 혼인 성사는 일회적이 아니라 부부의 연이 끝날 때까지 지속됩니다. 혼인의 유대가 이렇듯이 깊고 부부 사랑이 이토록 강하기에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 비유해 왔습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바쳐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시며, 신부인 교회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분을 증언합니다. 혼인 성사 생활을 시작하는 부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런 사랑의 관계를 평생 지속하며 살아가야 할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심오한 혼인 곧 결혼생활이건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느님과 가족들 앞에서 두 사람이 약속, 서약도 희석되어 가기 마련입니다. 그 요인은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이겠지만 사실 자신에 대한 이해 부족과 혼인의 참된 가치에 대한 몰이해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유일한 존재이고 그에 따라 가치관(=세계관, 종교관 등)의 차이, 태어난 가족과 환경의 차이, 성격과 성의 차이를 바탕으로 부부가 물리적인 일심동체 차원이 아니라 화학적 융합을 이루어 ‘한몸 한마음’을 이루어 나가지 못하면, 함께 살면서 배우자의 인간적인 약점이나 성격 차이의 노출로 인한 갈등과 실망에서 흔히 말하는 결혼 지옥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신앙심도 없고 부모의 뜻을 거절하지 못하고 성당에서 혼인은 했지만, 인스탄트식 문화에 익숙한 젊은 부부들이 문제 직면해서 해결할 성숙도 부족하다 보니 인내하고 용서하기보다는 이겨내지 못하고 쉬운 방법을 찾게 되다 보니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사회적 인식 또한 예전과 같지 않다 보니 쉽게 이혼을 결정하게 된다고 봅니다. 교회는 이혼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느님 중심의 혼인관이 사라지고 사람 중심 곧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삶 때문에 이혼율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삶에서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말처럼 이혼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저는 교회법이 허용할 수 있는 한 이혼은 절대 불가능하다고만 압박하고 강요하기보다 헤어질 결심을 하고 실행하려는 부부에게 앙심과 원한을 품지 않고 헤어지게 해 줄 길을 모색하고, 실패했다가 다시 인연을 만나 결합하려고 하는 부부들에겐 함께 살 수 있도록 길과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법 이전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기본인 구원 상태는 행복 여부에 달려 있고. 혼인도 행복하기 위한 하느님의 초대라고 봅니다. 이는 수도원에서 나가는 형제들을 보면서 저의 시선의 변화입니다. 입회도 퇴회도 그가 참으로 행복하기 위한 결심이고 결정이라면 그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는 받아들이실 거라고 저는 이제 믿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완고한 마음을 없이 하여 주시고 당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마음을 열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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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연중 제7주간 금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창조 때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의도하셨던 불가 해소성과 단일성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맺는 모든 관계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기에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관계’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이미 ‘둘이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와 진심 어린 관계를 맺으면 서로의 생명이 살아나고, 그러한 관계를 맺지 못하면 죽은 상태처럼 되고 맙니다.
관계의 ‘상호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실함’입니다.
영어에서(다른 많은 서양 언어에서도) ‘신실함’을 뜻하는 fidelity는 라틴어 fides(믿음, 신앙)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가 신앙의 선물임을 어원에서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관계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인 이유는, 이 관계를 통하여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여정은 수난과 고통, 죽음과 부활을 반드시 포함합니다.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이나 불화, 후회와 좌절은 우리가 걷는 구원 여정에서 요구되는 감정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 여정을 걷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은 행복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모든 관계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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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5월 20일부터 어제, 23일까지 묵상글을 올려주신 박찬영 베드로 형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개인형편으로 묵상글을 공유할 형편이 못되여 부탁드렸는데 흔쾌히 동의해 주셔서 다시 한번 더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평화와 선
김춘기 루도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