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융봉에서 바라본 청량산 준봉들. '만산홍엽'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듯하다. 장인봉(왼쪽) 옆 선학봉과 자란봉(오른쪽) 사이에 설치된 가느다란 하늘다리가 위태롭게 보인다. 봉화군청 제공
'청량(淸凉)'의 진가는 만추에 이르러서야 드러나는 것일까. 청량이란 말에는 무더위를 제압하는 '서늘함'만이 아닌, 날이 추워질수록 더욱 '맑아'지는 기상도 깃들어 있음을 지난달 27일 경북 봉화·안동의 청량산에 가서 깨달았다. 청량산은 두 겹이다. 수십~수백 m의 깎아지른 벼랑을 몸에 두르고 푸른 하늘로 우뚝 솟은 열두 봉우리가 첩첩 포개진 자연의 산이 한 겹이라면,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 그리고 그들의 문인과 후학들이 갈고닦은 호연지기가 켜켜이 쌓인 인문의 산이 다른 한 겹이다.
청량산은 전체 둘레 40㎞ 남짓, 최고봉의 높이가 870m에 불과한 작은 산이지만, 풍광이 자못 수려하고 웅혼해 소금강으로 불린다. 선비들은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심신수양처로 꼽았다. 현존하는 유산기(遊山記)만 100여 편으로 조선 시대 전체 유산기(650여 편) 중 금강산과 지리산 다음으로 많고, 시 또한 1000여 수에 달하는 데서도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선비들의 시문은 청량산에서 가을의 전설이 되어 청량하게 빛난다. 그 전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인생의 혹한을 이겨낼 정신의 불씨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책 읽기와 산 유람은 같다
응진전에서 바라본 청량사. 우뚝 솟은 봉우리는 연화봉이다.
청량산 유람 코스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기자는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의 고산정(孤山亭)에서 시작했다. 고산정은 퇴계의 제자인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1530~1604)가 청량산 12봉 중 가장 남쪽에 자리한 축융봉(845m)을 등지고 있는 가송협(佳松峽) 아래에 지은 정자로 고즈넉한 풍광이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가송협은 짙푸른 솔숲 머리를 한 수십 m의 수직 벼랑이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명승지로 안동팔경의 하나다.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나서 안동 수성에 헌신했던 성재는 이곳에서 유교 경전을 연구하며 여생을 보냈다.
고석정을 뒤로하고 가송협을 따라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가뭄 탓인지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투명한 강물은 청량산 입산 지점인 광석나루터까지 3~4㎞에 이르는 굽이진 협곡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맑은 그림자로 수면에 띄워 놓았다. 광석나루터 좌우에는 학소대와 금강대가 성곽을 이루고 있고, 그 위에는 12봉이 탑을 쌓듯 앞 봉우리의 어깨에 올라타고 층층이 솟아 있었다.
가송협 아래 자리잡은 고산정.
'책 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지만/산 유람이 책 읽기와 같네/공력을 다했을 땐 스스로 내려오고/깊고 얕음 아는 것 모두 저로부터 말미암네/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 보며 묘리를 알게 되고/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높이 절정을 찾아가길 그대들에게 기대하며/노쇠하여 중도에 그친 나를 깊이 부끄러워하네'. 청량산 입구에 세워 놓은 퇴계시비에 새겨진 시는 청량산이 인문의 산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청량산은 퇴계의 성리학 연구소나 다름없다. 그는 13세(1513년)부터 64세(1564년)까지 백운암과 연대사 등 청량산 내 암자에서 5차례 독서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퇴계는 아예 청량산을 불가에 대비되는 유가의 산이라는 뜻에서 '오가산(吾家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선경에 노는 일이 아직 흐리지 않았거늘/늙은 이 몸이 꿈속에 허무하게 들었던가/어찌 알았으랴 신선의 목침을 베고/꿈속에서 아름다운 청량산에 다시 올라간 것을'. 퇴계는 꿈속에서도 청량산을 그리워했다.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받들어 스승이 공부했던 곳에 '오산당(吾山堂)'을 짓고 '오가산지(吾家山誌)'를 편찬했다.
◇ 선을 따르는 건 등산과 같다
청량사 길목 바위에 설치된 주세붕 시화.
퇴계시비와 청량폭포를 지나 선학정에서 청량사에 이르는 산길은 가팔랐다. 뒤로 밀리는 무게중심을 앞으로 끌어내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멀리서 보면 청량사 일대의 산세는 연꽃을 닮았다. 절집은 연꽃 꽃술, 주위 봉우리들은 연잎에 해당한다. 가람터에 '연대(蓮臺)'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청량산 서쪽 장인봉으로 이어지는 청량사 유리보전 뒤편 자드락길은 더욱 가팔랐다. 특히 하늘다리와 자소봉 사이 뒷길고개까지 800m 구간은 심리적 경사도로 따지면 거의 직각에 가까운 것 같았다.
하지만 온 산을 불태울 듯 붉게 물든 단풍에 취해 그리 힘들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무판에 새겨 산길 중간중간 걸어놓은 시화 작품들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제공했다. 산을 오르는 중에도 낙엽은 바람에 실려 끊임없이 계곡과 비탈에 쌓였다. 만추의 절경은 등산객의 마음을 선(善)으로 물들이는 것인가. 하늘다리로 가는 능선길가에 앉아 사과를 깎아 먹으며 쉬던 한 중년 여성이 땀 흘리며 지나가는 기자를 불러세우곤 불쑥 사과 한 쪽을 내밀었다. 청량산은 인심도 청량했다. 선을 따르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는 옛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늘다리는 해발 800m 높이의 선학봉과 자란봉 사이에 가설돼 있었다. 길이 90m, 너비 1.2m로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현수교라고 했다. 천 길 벼랑 위에 달아맨 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늘다리 아래 두 봉우리 사이의 골짜기는 얼마나 깊은지 까마득했다. 가을은 흔들리며 깊어 가는 것일까. 다리가 출렁거릴 때마다 단풍의 바다 위에 뜬 산은 일렁거렸다. 나무들은 마지막 힘을 다해 가을을 토해냈고, 산은 장엄세계를 펼쳐냈다.
◇ 청량산이 낳은 명필 김생
청량산 입구에 세워진 퇴계시비.
이날 기자의 청량산 유람은 최고봉인 장인봉에서 끝을 맺었다. 청량산의 다른 명소들에 대한 소개는 눈 밝은 선인들의 유산기로 대신한다. 먼저, 신재의 유산기부터 보자. 1544년에 쓰여진 그의 글은 최초의 청량산 유산기인 동시에 최고의 명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퇴계는 신재의 유산기에 대해 "청량산이 임자를 만나 진가를 인정받았다"며 "위대하다"고 극찬했다. 신재는 현재 불려지는 청량산 12봉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김생굴로 나아갔다. 벼랑의 잔도가 썩고 끊어져 손으로 등나무 줄기를 잡고 기어서 이끼 낀 벼랑을 몸을 떨면서 올라갔다.…김생 글씨의 획은 모두 뾰족하고 굳세어 바라보면 여러 바위가 빼어남을 다투는 듯하다. 지금 이 산을 바라보니 김생이 바로 여기에서 글씨를 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서예가 김생(金生·711~791)은 청량산 동쪽 금탑봉 위의 굴에서 10년간 서도를 연마한 끝에 명필의 경지에 올라 송나라 사람들로부터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렸다. 신재는 김생을 당나라 서예가 장욱(張旭·675~750 추정)에 비교했다. 장욱은 칼춤에 능했던 기녀 공손대랑의 혼탈무를 보고 깨달아 독특한 초서 서체를 터득했다고 한다. "춤과 산을 어찌 가릴 것인가? 세상은 모두 장욱의 초서가 춤에서 나왔다는 것만 전하지, 김생의 필법이 산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신재의 한탄은 청량산의 절경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금탑봉 아래 어풍대의 돌 틈에서 솟아나는 총명수(聰明水)에 얽힌 이야기에는 해학이 담겨 있다. 신라의 대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미상)이 이 물을 마시고 총기를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때문에 청량산에 유람 온 선비들은 대부분 이곳에 들러 총명수를 마셨다고 한다. 한 선비는 똑똑해지고 싶은 욕심에 온종일 물을 마셨는데, 음용량이 과했던지 그만 총기가 떨어져 애지중지하던 부채를 놓고 가 다른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됐다는 우스개도 전해진다.
퇴계의 숙부 송재(松齋) 이우(李堣·1419~1517)는 이 우스개를 소재로 시를 써 청량산으로 공부하러 떠나는 퇴계 형제와 자신의 사위들로 하여금 경계지표로 삼도록 했다. '돌 틈에 졸졸 맑게 솟으니/스님은 말하기를 마시면 총명이 생긴다네/우습다 그때 나도 수없이 마셨는데/혼미함 깨치지 못하고 늙은이가 되었구려'. 탐욕이 그렇듯 탐미도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것일까. 하지만 만추의 청량산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지나친 탐미라도 관용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가슴이 있기에.
# 청량사 하늘다리 청량폭포…선비들처럼 詩 읊듯 유람
■ 청량산 '5色' 산행 코스
청량산의 산행 코스는 5가지가 있다. 1코스는 안내소에서 출발해 축융봉, 오마도터널, 경일봉, 자소봉, 하늘다리, 장인봉, 금강대를 거쳐 안내소로 돌아오는 최장구간으로 거리는 12.7㎞, 소요시간은 9시간이다. 2코스는 입석에서 시작해 응진전, 김생굴, 자소봉, 하늘다리, 장인봉, 금강대를 경유해 안내소로 내려오는 것으로 거리는 1코스의 절반 수준인 6.4㎞, 소요시간도 4시간 적은 5시간이다.
3코스는 입석에서 올라가 청량사, 뒷실고개, 하늘다리, 장인봉을 거쳐 청량폭포로 하산하는데 거리는 5.1㎞, 소요시간은 3시간이다. 4코스는 산성입구를 출발해 밀성대, 축융봉, 학소대를 차례로 돌아 안내소에서 산행을 끝내는 것으로, 거리는 3코스와 같은 5.1㎞이나 소요시간은 30분 적은 2시간30분이다. 5코스는 입석에서 청량사로 올라갔다가 선학정으로 내려오는 최단구간으로 거리는 2.3㎞, 소요시간은 1시간에 불과하다.
이들 코스는 청량산 내부를 대상으로 해서만 짠 것으로, 조선 시대 선비들의 유람경로보다는 범위가 훨씬 좁다. 선비들은 안동시 도산면 단천동에 있는 단사협(丹砂峽)을 청량산 유람의 시작지점으로 봤다. 단사협은 고산정이 자리한 가송협의 아래에 있는 협곡이다. 1614년 가을, 이 경로로 청량산을 유람했던 수암(修巖) 유진(柳袗·1582~1635)은 유산기에 이렇게 썼다. '퇴계를 돌아서 남쪽으로 1리(약 400m)쯤 가니 붉은 벼랑이 병풍처럼 서 있고 녹수가 맑은 거울처럼 흐르며 단풍과 하얀 모래가 펼쳐져 있어 신선이 사는 곳과 같았다'. 단사협이라는 이름은 퇴계가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퇴계는 제자들에게 단사협 유람을 명한 뒤 돌아온 제자들에게 유람에서 지은 시를 암송하게 했다. 호연지기를 기르는 체험학습인 셈이다.
선비들이 단사협을 청량산 유람의 시작지점으로 잡은 것은 풍광이 빼어난 점도 있지만, 스승 퇴계가 걸었던 도학의 길이기 때문이었다. 선비들은 유람에서조차 스승의 발자취를 기리고 살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