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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
요20:19-31
유명한 철학자인 테카르트는 이른 아침시간에 오솔길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산책을 하는데 길에 뱀 한 마리가 또래를 틀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상했지만 뱀을 피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그곳에 똑같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피해갔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도 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테카르트는 화가 나서 ‘오늘은 너를 그냥두지 않겠다.’생각하고 지팡이로 힘껏 내려 쳤습니다.
그런데 내려치고 보니까 그것은 뱀이 아니었고 밧줄이 감겨져 있는 것이 뱀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때 데카르트는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 눈이 나를 속였구나.
눈으로 보는 것이 다 옳은 것 같아도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구나.
그러면 도대체 내가 무엇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인가?’
그 후에 데카르트는 회의주의 철학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눈으로 본다고 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또 눈으로 볼 수 없다고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만 믿는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흔히 말하는 대로 공기도 볼 수 없고, 사랑도 볼 수 없고, 하나님도 볼 수 없고, 천국과 지옥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못 믿겠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요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믿어야 그 사람이 복된 사람인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예전과 같이 많은 군중 앞에 나타나시지 않으셨습니다.
수만 명이 모였던 벳세다 광야 같은 곳에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소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나 예수를 따르던 여자들 그리고 11명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제자들에게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들이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을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맞지만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정확한 부활의 의미는 죽었다가 다시 산 것 뿐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이 3번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에서 살아났지만 그러나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날 뿐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고 지금도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앞으로도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을 찾아오셔서 평강을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을 죽인 저들이 이제는 누구를 죽일 것인가?
당연히 자기들의 차례가 될 것이고 조만간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 닥칠 것이라는 생각에 문을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들에게 평강을 선언하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무서운 공포는 죽음의 공포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생긴 죽음의 공포는 모든 인간의 가장 큰 공포일 뿐 아니라 모든 크고 작은 두려움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죽음의 공포를 이기면 우리는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공포에서, 그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실 수 있는 분이 누구겠습니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 한 분 밖에는 없는 줄 믿습니다.
그 분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시기에 세상의 어떤 누구도,
세상의 어떤 무엇도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이런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축복을 받는 자가 가장 행복한 자인 줄 믿습니다.
이 축복을 어디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의 많은 것을 소유했어도 이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이 축복을 우리에게 주지 못할 줄 압니다.
이 축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한 분 밖에는 없는 줄 믿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이 축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둘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오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요,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을 때 그 모임가운데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첫 번째로 만나지 못한 것은 제자들의 모임가운데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시 제자들의 모임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보잘 것 없는 모임이었을 것입니다.
‘언제 군인들이 자기들을 잡으러 올까? 언제 죽게 될까?’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모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모임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가장 보잘 것 없고 가장 하찮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 오셨습니다.
성경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그들 중에 함께 있느니라.”
주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 하십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만 하면 그곳에 주님은 함께 하셔서 역사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오늘 현대 기독교인들의 잘못은 무엇보다도 모이기를 폐하는데 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많이 모이지 않고 적게 모이려고 합니다.
모이지 않기에 신앙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모임 속에, 예배 속에 함께 하시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때는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보잘 것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여자들 몇 명이 모이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눠 봐도 별 얘기가 없고
찬송을 불러도 제대로 음이 나오지도 않고
거기에다 아기들은 떠들지 이런 모임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더 좋은 모임, 더 세련된 모임, 더 교양 있는 모임을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크고 좋은 모임만이 아니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모임 속에도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도마와 같이 모임을 떠나서 은혜를 놓치는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하시고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를 힘입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셋째로, 의심을 하고 믿지 못하는 자들을 찾아오셔서 확신과 믿음을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십자가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죽으신 그 분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도마에게는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게 하시는 일이 부활하신 주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어령씨가 공개적으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받겠다고 한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 딸이 미국 유학을 가서 검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승승장구하는데 어느 날 갑상선 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1차, 2차 수술을 받았는데 계속 재발했습니다.
병세가 악화되어 망막이 파괴되어 실명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딸이 아버지에게 ‘저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무리 무신론자이지만 딸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어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살아계신 신이라면 제 딸을 고쳐주세요.
그러면 제가 당신을 믿고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한국으로 데리고 와서 치료를 받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 서울 큰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정밀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선생님의 따님은 수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었던 시신경과 세포가 다 살았습니다.”
이어령씨는 너무 감사해서 “우리 딸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나도 섬기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딸의 질병을 통하여 이어령씨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믿지 못하는 자들을 찾아오셔서 지금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임을 믿게 하시고 구원을 받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 자리에 없던 도마를 만나자 우리가 주님을 만났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고 살아난 그 사람을 만났다고 할 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활의 경험을 하고도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는 전도는 정말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 줄 압니다.
때로 전도가 의무가 될 수 도 있고, 억지로라도 해야 할 일입니다만
그러나 주님을 만난 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이고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요한 일서 5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분명 우리 가운데 증거가 생기는 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처럼
분명 부활하셔서 오늘도 살아 계시는 주님을 믿으면 우리 안에 반드시 증거가 있는 줄 믿습니다.
평안의 증거가 있을 것이고, 치유의 증거가 있을 것이고, 축복의 증거가 있을 것이고, 사랑의 증거가 있을 것입니다.
증거가 있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내가 경험한 그 증거를 자연스럽게 전하는 것이 전도요 간증입니다.
다른 것을 말하지 마시고 내가 경험한 것, 내가 느낀 것, 내가 받은 것 그것을 자연스럽게 전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 힘 있고 설득력 있는 전도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증거를 가지고 전도를 해도 도마와 같이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10명의 제자들이 말해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내 손가락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스스로 증거 하십니다.
그 분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확신을 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게 하시고 영접하게 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그 일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열심히 내가 경험하고 내가 만나고 내가 체험한 주님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증거를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주님이 하십니다.
그 분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과 더불어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이자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그 이후에 도마는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주후 52년경 남인도로 넘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1500년경에 유럽의 군인들이 남인도 지방을 방문했는데 그 곳에 성 도마교회가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지금 남인도 지역에는 성 도마교회 소속이라고 믿는 신자가 150만 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도마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이런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도마는 전했고 부활하신 주님이 역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시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오셔서 평안을 주실 것이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2023.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