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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芳秀(양방수)1950年(년) 6월 25일에 일어난
6.25 戰爭(전쟁)을 찾아 가다.
6.25 戰爭(전쟁) 當時(당시) 寫眞(사진).
날짜,1950年(년) 6月(월) 25日(일) ~ (1953年(년) 7月(월) 27日(일)부터) 休戰中(휴전중)
場所(장소). 韓半島(한반도), 東海(동해), 黃海(황해)..
結果(결과),休戰協定(휴전협정) 締結(체결),休戰線(휴전선)의 形成(형성).
兩側(양측)의 對立(대립)深化(심화)
兩側(양측)의 中央集權(중앙집권) 强化(강화)(分斷(분단)의 長期化(장기화).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은 開城試(개성시) 및 甕津半島(옹진반도) 占領(점령), 大韓民國(대한민국)은 江原道(강원도) 4,000㎢의 地域(지역)을 占領(점령).
https://www.youtube.com/watch?v=PYY7pDNExG0
https://www.youtube.com/watch?v=xyVILJ1rwCE
https://www.youtube.com/watch?v=okW7Qol0IYc
交戰國(교전국)
大韓民國(대한민국)
美國(미국)
유엔(UN)
戰鬪(전투) 派兵國(파병국)
美國(미국)
英國(영국)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캐나다(Canada)의 旗(기)
뉴질랜드(New Zealand)의 旗(기)
콜롬비아(Columbia)의 旗(기)
터키(Turkey)의 旗(기)
태국의 旗(기)
네덜란드(Netherlands)의 旗(기)
룩셈부르크(Luxembourg)의 旗(기)
벨기에(Belgium)의 旗(기)
프랑스(France)의 旗(기)
에티오피아(Ethiopia) 帝國(제국)의 旗(기)
그리스(Greece) 王國(왕국)의 旗(기)
필리핀(Philippines)의 旗(기)
남아프리카(South africa) 聯邦(연방)
덴마크(Denmark)
이탈리아(Italy)
醫療(의료) 支援國(지원국)
印度(인도:India)
이스라엘(Israel)
이탈리아(Italy)
노르웨이(Norway)
덴마크(Denmark)
스웨덴(Sweden)
서독(西獨:West Germany)
物資(물자) 支援國(지원국)
과테말라(Guatemala)
도미니카(Dominican) 共和國(공화국)의 旗(기)
라이베리아(Liberia)의 旗(기)
레바논(Lebanon)의 旗(기)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의 旗(기)
멕시코(Mexico)의 旗(기)
모나코(Monaco)의 旗(기)
바티칸(Vatican) 市國(시국)의 旗(기)
베네수엘라(Venezuela)의 旗(기)
미얀마(Myanmar)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의 旗(기)
스위스(Swiss)의 旗(기)
스페인(Spain)
시리아(Syria)
아르헨티나(Argentina)의 旗(기)
아이슬란드(Iceland)의 旗(기)
아이티(Haiti)의 旗(기)
에콰도르(Ecuador)의 旗(기)
엘살바도르(El Salvador)의 旗(기)
오스트리아의 旗(기)
온두라스(Honduras)의 旗(기)
우루과이(Uruguay)의 旗(기)
이란(Iran)
이집트(Egypt) 왕국의 旗(기)
인도네시아(Indonesia)의 旗(기)
日本(일본:Japan)의 旗(기)
자메이카(Jamaica)의 旗(기)
中華民國(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의 旗(기)
칠레(Chile)의 旗(기)
캄보디아(Cambodia)의 旗(기)
코스타리카(Costa Rica)의 旗(기)
쿠바(Cuba)의 旗(기)
파나마(Panama)의 旗(기)
파키스탄(Pakistan)의 旗(기)
페루(Peru)의 旗(기)
헝가리(Hungary)의 旗(기)
支援意思(지원의사) 表明國(표명국)
니카라과(Nicaragua)의 旗(기)
볼리비아(Bolivia)의 旗(기)
브라질(Brazil)의 旗(기)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旗(기)
蘇聯(소련:Soviet Union)
醫療支援國(의료지원국)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의 旗(기)
東獨(동독:East Germany)의 旗(기)
폴란드(Poland)
헝가리(Hungary)
루마니아(Romania)
其他(기타) 支援國(지원국)
몽골(Mongolia)
印度(인도:India)의 旗(기)
指揮官(지휘관)
大韓民國(대한민국) 이승만(李承晩)
大韓民國(대한민국) 신성모(申性模)
大韓民國(대한민국) 채병덕(蔡秉德) †
大韓民國(대한민국) 정일권(鄭一權)
大韓民國(대한민국) 白善燁(백선엽)
大韓民國(대한민국) 金錫源(김석원)
大韓民國(대한민국) 이종찬(李鐘贊)
大韓民國(대한민국) 김종오(金鍾五)
大韓民國(대한민국) 김홍일(金弘壹)
大韓民國(대한민국) 손원일(孫元一)
大韓民國(대한민국) 崔用德최용덕(崔用德)
美國(미국)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美國(미국)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유엔(UN)美國(미국)(United Nations)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UN)美國(미국) 월턴 워커(Walton Walker) †
유엔(UN)美國(미국) 매슈 리지웨이(Matthew Ridgeway)
유엔(UN)美國(미국)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
유엔(UN)美國(미국) 마크 웨인 클라크(Mark Wayne Clark)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김일성(金日成)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박헌영(朴憲永)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최용건(崔庸健)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김두봉(金枓奉)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南逸(남일)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김책(金策) †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김책(金策) †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김무정(金武亭)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毛泽东(모택동)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펑더화이:蓬德怀(봉덕부)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덩화:登化(등화)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저우언라이:周恩来(주은래)
蘇聯(소련:Soviet Union)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斯大林(사대림) †
蘇聯(소련:Soviet Union)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尼基塔·赫鲁晓夫(니기탑·혁로효부)
兵力(병력)~UN軍(군) 司令部(사령부):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 602,902名(명)
美國(미국) 326,863名(명)
英國(영국) 56,000名(명)
프랑스(France) 3,421名(명)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8,407名(명)
뉴질랜드(New Zealand) 3,794名(명)
캐나다(Canada) 25,687名(명)
네덜란드(Netherlands) 5,322名(명)
필리핀(Philippines) 7,420名(명)
터키(Turkey) 14,936名(명)
콜롬비아(Columbia) 5,100名(명)
벨기에(Belgium) 3,498名(명)
태국(Thailand) 6,326名(명)
그리스(Greece) 王國(왕국) 4,992名(명)
에티오피아(Ethiopia)帝國(제국) 3,518名(명)
남아프리카(South africa) 聯邦(연방) 826名(명)
룩셈부르크(Luxembourg) 83名(명)
醫療(의료)部隊(부대) 目錄(목록)
노르웨이(Norway) 623名(명)
이탈리아(Italy) 128名(명)
스웨덴(Sweden) 1,124名(명)
덴마크(Denmark) 630名(명)
印度(인도:India) 627名(명)
總計(총계): 1,078,433 名(명)
共産軍(공산군):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450,000 名(명)
中共軍(중공군) 1,350,000 名(명)
蘇聯軍(소련군): 26,000 名(명)
總計(총계): 1,826,000 名(명)
被害規模(피해규모)
大韓民國(대한민국)~軍人(군인)~149,005名(명) 戰死(전사)
710,783名(명) 負傷(부상)~132,256名(명) 失踪(실종)
民間人(민간인)~373,599名(명) 死亡(사망)~229,625名(명) 負傷(부상)
303,212名(명) 失踪(실종)
總計(총계)
522,604名(명) 死亡(사망)
940,408名(명) 負傷(부상)
435,468名(명) 失踪(실종)
美國(미국)
36,574名(명) 戰死(전사)
103,284名(명) 負傷(부상)
3737名(명) 失踪(실종)
4439名(명) 捕虜(포로)
總計(총계) 137,250名(명)
英國(영국)
1078名(명) 戰死(전사)
2674名(명) 負傷(부상)
179名(명) 失踪(실종)
997名(명) 捕虜(포로)
總計(총계) 4908名(명)
그 外(외)
프랑스(France)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캐나다(Canada)
뉴질랜드(New Zealand)
필리핀(Philippines)
터키(Turkey)
네덜란드(Netherlands)
벨기에(Belgium)
룩셈부르크(Luxembourg)
그리스(Greece) 王國(왕국)
남아프리카(South africa) 聯邦(연방)
콜롬비아(Columbia)
에티오피아(Ethiopia) 帝國(제국)
泰國(태국:Thailand)
노르웨이(Norway)
印度(인도:India)
總計(총계): 1,500,000명 以上(이상)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軍人(군인)
294,000명 戰死(전사)
226,000명 負傷(부상)
120,000명 失踪(실종) 및 捕虜(포로)
民間人(민간인)
406,000名(명) 死亡(사망)
1,594,000名(명) 負傷(부상)
680,000 名(명) 行方不明(행방불명)
總計(총계)
700,000名(명) 死亡(사망)
1,820,000名(명) 負傷(부상)
800,000名(명) 失踪(실종)
總計(총계) 3,320,000名(명) 死傷(사상)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197,653名(명) 戰死(전사)
383,500명 부상
25,600名(명) 失踪(실종) 및 捕虜(포로)
總計(총계) 592,000여명 사상 및 실종&포로
蘇聯(소련)
315名(명) 戰死(전사)
500名(명) 負傷(부상)
總計(총계) 815名(명)
總計(총계): 1,190,000名(명) ~ 1,577,000名(명) 以上(이상).
6.25 戰爭(전쟁)
6.25 戰爭(전쟁) 또는 한국 전쟁(韓國戰爭, 標準語(표준어): 6·25 戰爭(전쟁), 六二五(육이오) 戰爭(전쟁), 韓國戰爭(한국전쟁), 文化語(문화어): 朝鮮 戰爭(조선전쟁)/祖國解放戰爭(조국해방전쟁), 英語(영어): Korean War, 中國語(중국어) 正體(정체): 韓戰(한전)/朝鮮戰爭(조선전쟁), 러시아(Russia)語(어): 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은 1950年(년) 6月(월) 25日(일) 午前(오전) 4時(시)에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이 奇襲的(기습적)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을 侵攻(침공)하여 勃發(발발)한 戰爭(전쟁)이다.
유엔軍(군)(UN forces)과 中國人民支援軍(중국인민지원군) 等(등)이 參戰(참전)하여 世界的(세계적)인 大規模(대규모) 戰爭(전쟁)으로 悲話(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年(년) 7月(월) 27日(일) 22時(시)에 締結(체결)된 韓國休戰協定(한국휴전협정)에 따라 一段落(일단락)되었다. 休戰(휴전) 以後(이후)로도 現在(현재)까지 兩側(양측)의 有無形迹(유무형적) 葛藤(갈등)은 持續(지속)되고 있다.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以後(이후), 共産(공산)·反共(반공) 兩國(양국) 陣營(진영)으로 對立(대립)하게 된 世界(세계)의 冷戰的(냉전적) 葛藤(갈등)이 熱戰(열전)으로 爆發(폭발)한 代表的(대표적) 事例(사례)로, 냉전(冷戰)인 同時(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同時(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複雜(복잡)한 性格(성격)을 가졌다.
이는 國際聯合軍(국제연합군)과 醫療陣(의료진)을 비롯해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과 蘇聯(소련)까지 關與(관여)한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以後(이후) 最大(최대)의 國際戰(국제전)이다. 또한 韓半島(한반도) 休戰協定(휴전협정)으로 戰爭(전쟁)을 쉬고 있다. 그래서 全世界(전세계)에 남은 마지막 冷戰地域(냉전지역)이다.
Montage of images from the Korean War. Clockwise from top: U.S. Marines retreating during the Battle of the Chosin Resevoir, U.N. landing at Incheon, Korean refugees in front of an American M-26 tank, U.S. Marines, led by First Lieutenant Baldomero Lopez, landing at Incheon, and an American F-86 Sabre fighter jet.
韓國戰爭(한국전쟁) 이미지의 몽타주. 위에서부터 時計(시계) 方向(방향)으로 : 조신貯水池(저수지) 戰鬪(전투) 中(중) 後退(후퇴)하는 美(미) 海兵隊(해병대), 유엔(UN) 仁川(인천) 上陸(상륙), 美國(미국) M-26 戰車(전차) 앞의 韓國(한국)亂民(난민), 발도 메로 로페즈(Valdomero Lopez) 中尉(중위)가 이끄는 美(미) 海兵隊(해병대), 仁川(인천) 上陸(상륙), 美國(미국) F –86 세이버(Saber) 戰鬪機(전투기).
目次(목차)
1 槪要(개요)
2 多樣(다양)한 名稱(명칭)
3 背景(배경)
3.1 韓半島(한반도) 分斷(분단)과 軍政實施(군정실시)
3.2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의 狀況(상황)
3.2.1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의 支配力(지배력) 强化(강화)와 戰爭準備(전쟁준비) 交涉(교섭)
3.2.2 蘇聯(소련)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戰爭支援(전쟁지원) 約束(약속)
3.2.3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의 戰爭準備(전쟁준비)
3.3 大韓民國(대한민국)의 狀況(상황)
3.3.1 大韓民國(대한민국) 內部(내부)의 混亂(혼란)
3.3.2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戰爭 對備(전쟁대비)
3.4 韓國戰爭(한국전쟁) 前(전)의 여러 戰鬪(전투)
3.5 軍事力(군사력) 比較(비교)
4 原因(원인)
4.1 南侵(남침)
4.2 過去(과거)의 韓國戰爭(한국전쟁) 原因(원인) 假說(가설)
4.2.1 스탈린(Stalin) 主導說(주도설)
4.2.2 韓美(한미) 共謀說(공모설)
4.2.3 內亂(내란) 擴戰說(확전설)
5 經過(경과)
5.1 勃發(발발)과 서전(緖戰)
5.1.1 甕津半島戰鬪(옹진반도전투)
5.1.2 開城(개성), 汶山(문산) 戰鬪(전투)
5.1.3 議政府(의정부) 戰鬪(전투)
5.1.4 春川(춘천) 및 洪川(홍천) 戰鬪(전투)
5.1.5 江陵(강릉) 戰鬪(전투)
5.1.6 陸軍本部(육군본부)의 對應(대응)
5.1.7 서울(Seoul)의 狀況(상황)
5.1.8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서울(Seoul) 占領(점령)
5.2 洛東江(낙동강) 防禦戰(방어전) 5
.2.1 大邱(대구) 後退(후퇴)와 多富洞戰鬪(다부동전투)
5.2.2 UN에서의 說得作業(설득작업)
5.3 UN軍(군)의 總反擊(총반격)
5.3.1 仁川(인천) 上陸作戰(상륙작전)
5.3.2 서울(Seoul) 收復(수복)
5.3.3 中共軍(중공군) 介入(개입)과 長津湖戰鬪(장진호전투)
5.3.4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反擊(반격) 準備(준비)
5.4 制限戰線(제한전선)의 激動(격동)
5.5 大量殺傷武器(대량살상무기)
5.6 休戰協定(휴전협정)
6 餘波(여파)
6.1 休戰協定(휴전협정) 以後(이후)의 衝突(충돌)
6.2 戰後(전후) 國家別(국가별) 實態(실태)
6.2.1 大韓民國(대한민국)
6.2.2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6.2.3 美國(미국)
6.2.4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6.2.5 UN軍(군)
6.3 戰後(전후) 提起(제기)된 問題(문제)
6.3.1 戰爭犯罪(전쟁범죄)
6.3.2 戰爭中(전쟁중)의 拉北者(납북자), 捕虜(포로) 送還(問題(송환문제)
6.4 美國(미국)의 韓國(한국) 援助(원조)
7 갤러리(gallery)
8 其他(기타)
9 韓國戰爭(한국전쟁)을 素材(소재)로 한 作品(작품)
9.1 大韓民國(대한민국)
9.1.1 映畫(영화)
9.1.2 드라마(drama)
9.1.3 게임(game)
9.2 海外(해외)
9.2.1 映畫(영화)
9.2.2 드라마(drama)
10 關聯書籍(관련서적)
11 같이보기(See together)
12 脚注(각주)
13 外部(외부)링크(link)
槪要(개요)
戰爭(전쟁) 以前(이전) 미리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毛泽东)과 소비에트 연방(Soviet union)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의 協助(협조)와 支持(지지)를 얻은 김일성(金日成)은 1950年(년) 6月(월) 25日(일) 새벽 4時(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38度線(도선)과 東海岸(동해안) 연선(沿線) 等(등) 11個所(개소)에서 境界(경계)를 넘어 大韓民國(대한민국)으로 進擊(진격)하였다.
또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大攻勢(대공세)에 戰爭(전쟁)이 1週日(주일)만에 김일성(金日成)의 勝利(승리)로 끝날 뻔 했으나, 유엔(UN)은 美合衆國(미합중국)을 主軸(주축)으로 바로 유엔(UN) 安全保障(안전보장) 理事會(이사회) 決議(결의) 第(제)82號(호)를 議決(의결)하고 이 戰爭(전쟁)에서 大韓民國(대한민국)을 援助(원조)하기로 決定(결정)하고 派兵(파병)하였다.
그리하여 7月(월) 7日(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元帥(원수)를 總司令官(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UN)軍(군)이 組織(조직)되었다. 유엔(UN)은 日本(일본) 도쿄(Tokyo)에 本部(본부)를 세웠다. 人民軍(인민군)은 無防備(무방비) 狀態(상태)였던 中部地方(중부지방)과 湖南地方(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聯合軍(연합군)은 洛東江(낙동강) 防禦線(방어선)에서 背水陣(배수진)의 決戰(결전)을 展開(전개)하였다.
聯合軍(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9月(월) 15日(일) 仁川(인천) 上陸作戰(상륙작전)을 開始(개시)하여 北韓軍(북한군)의 뒤쪽을 攻擊(공격)하여 이를 始作(시작)으로 大大的(대대적)인 反擊(반격)을 하여 10月(월) 10日(일) 平壤(평양)에 이어 鴨綠江(압록강) 附近(부근)까지 이르렀으나, 11月(월) 中旬(중순) 中國人民解放軍(중국인민해방군)이 介入(개입)하여 戰勢(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혜산진 惠山鎭(혜산진)까지 進擊(진격)하던 韓國軍(한국군)은 1月(월) 4日(일)에 다시 서울(Seoul)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3月(월) 15日(일)에 奪還(탈환)하였다. 그 渦中(와중)에 南勞黨(남로당)의 大韓民國(대한민국) 內部(내부) 顚覆(전복)을 위한 活動(활동)과 이를 制壓(제압)하려는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의 衝突(충돌)로 居昌(거창) 良民虐殺(양민학살) 事件(사건), 國民防衛軍(국민방위군) 事件(사건) 等(등)의 여러 悲劇的(비극적)인 事件(사건)들이 일어났다.
以後(이후) 3年(년) 동안 持續(지속)된 戰鬪(전투)로 數(수)많은 軍人(군인) 및 民間人(민간인)이 死傷(사상)하였고, 大部分(대부분)의 産業(산업) 施設(시설)들이 破壞(파괴)되는 等(등) 兩側(양측) 모두가 큰 經濟的(경제적), 物質的(물질적) 被害(피해)를 입었으며, 理念的(이념적)인 理由(이유)로 民間人(민간인)들의 虐殺(학살)이 恣行 (자행)되고 地主(지주)들의 處罰(처벌)과 그 報復(보복)이 反復(반복)되면서 南(남)·北(북) 間(간)의 敵對的(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結果(결과)를 낳게 되었다.
심지어는 38線(선)을 사이에 두고 같은 마을 사람들이 서로 戰爭(전쟁)까지 하는 안타까운 일까지 벌어졌으며 高地戰(고지전) 以後(이후) 1953年(년) 7月(월) 27日(일) 22時(시)에 締結(체결)된 韓國休戰協定(한국휴전협정)으로 因(인)하여 設定(설정)된 韓半島(한반도) 軍事分界線(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休戰(휴전)하였다. 現在(현재)까지 繼續(계속) 이 狀態(상태)가 維持(유지)되고 있어 가장 오래 이어진 戰爭(전쟁)이라는 記錄(기록)을 繼續(계속) 更新(경신)하고 있으며, 休戰協定(휴전협정) 締結(체결) 以後(이후)에도 南北(남북) 間(간)에 衝突(충돌)은 發生(발생)하고 있다.
多樣(다양)한 名稱(명칭)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와 絶對多數(절대다수)의 言論(언론)은 公式的(공식적)으로 6.25 사변(六二五事變) 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이라는 名稱(명칭)을 使用(사용)하고 있다.
內戰的(내전적) 意味(의미)를 强調(강조)하는 境遇(경우)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불린다.
略稱(약칭)으로 부르는 境遇(경우) 6.25(六二五)라고 한다.
六十甲子(육십갑자)를 適用(적용)하여 경인동란(庚寅動亂)이라 부르는 境遇(경우)도 있다.
英語(영어) 原文(원문)의 飜譯(번역)을 通(통)해 한국전쟁(韓國戰爭)이라 부르는 境遇(경우)도 있다.
조선전쟁(朝鮮戰爭)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日本(일본)에서 쓰이는 用語(용어)로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도 가끔 쓴다.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大部分(대부분) 學者(학자)들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부른다.
美國(미국)과 캐나다(Canada)等(등) 西歐(서구) 國家(국가)들은 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과 베트남(Vietnam) 戰爭(전쟁) 사이에 벌어져 젊은 世代(세대)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理由(이유)로 잊혀진 戰爭(전쟁)(The Forgotten War) 혹은 알려지지 않은 戰爭(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부르기도 한다.
背景(배경)
1945年(년) 8月(월) 15日(일) 日本(일본)으로 부터 解放(해방)을 맞은 韓半島(한반도)는 解放(해방) 直後(직후) 他意(타의)에 依(의)해 南(남)과 北(북)으로 分斷(분단)되었다. 美軍(미군)과 蘇聯軍(소련군)의 占領(점령)이 끝나고 韓半島(한반도)에는 大韓民國(대한민국)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政府(정부)가 樹立(수립)되었다. 北韓(북한)은 蘇聯(소련)과 中國(중국)을 說得(설득)하여 韓半島(한반도)를 赤化統一(적화통일)하려는 計劃(계획)을 樹立(수립)하고 準備(준비)를 해 나갔다.
蘇聯(소련)은 蘇聯軍(소련군)이 韓半島(한반도) 38線(선) 以北(이북)에 進駐(진주)한 以來(이래), 아시아(Asia) 共産化(공산화)를 目的(목적)으로 北韓(북한)에 蘇聯(소련)을 代理(대리)할 수 있는 共産正權(공산정권)을 세우고, 韓半島(한반도)의 統一(통일)을 妨害(방해)하면서 侵略(침략)의 機會(기회)를 엿보아 왔다.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은 1949年(년) 10月(월) 01日(일) 中國(중국) 國民黨(국민당)을 大陸(대륙)에서 몰아내고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을 樹立(수립)하였다. 半面(반면)에, 美國(미국)은 駐韓美軍(주한미군)이 撤收(철수)를 完了(완료)1949年(년) 6月(월)하고, 美國(미국)의 極東防衛線(극동방위선)이 타이완(Taiwan:台湾)의 東(동)쪽 卽(즉), 日本(일본) 오키나와(Okinawa)와 필리핀(Philippines)을 連結(연결)하는 線(선)이라고 宣言(선언) 애치슨(Atchison) 宣言(선언), 1950年(년) 1月(월)을 하는 等(등) 大韓民國(대한민국)에 대한 軍事援助(군사원조)를 最小化(최소화)해 나갔다.
이는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時期(시기)였기에, 美國(미국)은 蘇聯(소련) 共産圈(공산권)과의 直接的(직접적)인 軍事(군사) 衝突(충돌)이 第(제)3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을 惹起(야기)할 수도 있다는 國際的(국제적)인 政勢(정세)를 考慮(고려)하였으며, 蘇聯(소련) 亦是(역시) 그러한 理由(이유)로 北韓(북한)에 대한 公開的(공개적)인 支援(지원)을 中斷(중단)하였다.
韓半島(한반도) 分斷(분단)과 軍政實施(군정실시)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當時(당시)에 日本(일본) 帝國(제국)이 聯合國(연합국)에게 降伏(항복)을 拒絶(거절)하자 美國(미국)은 日本(일본) 領土(영토)에 原子爆彈(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蘇聯軍(소련군)은 韓半島(한반도) 北部(북부) 地域(지역)까지 進擊(진격)했다.
이로써 韓半島(한반도)는 1945年(년) 8月(월) 15日(일)에 日本(일본) 帝國(제국)의 植民地(식민지)에서 벗어나 獨立(독립), 光復(광복)을 맞이하였으나, 38線(선)을 起點(기점)으로 하여 日本軍(일본군) 武裝解除(무장해제)를 名分(명분)으로 進駐(진주)한 蘇聯軍(소련군)과 美國軍(미국군)에 依(의)해 南(남)과 北(북)으로 갈라져, 北(북)쪽에 共産主義(공산주의) 國家(국가)인 蘇聯(소련)의 軍政(군정), 南(남)쪽에 資本主義(자본주의) 國家(국가)인 美國(미국)의 軍政(군정)이 始作(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소비에트(Soviet) 聯邦(연방)과 美國(미국)이 韓半島(한반도)를 分割(분할) 占領(점령)하여 理念(이념) 對決(대결)을 벌임으로써 韓國戰爭(한국전쟁)이 勃發(발발)했다는 視覺(시각), 卽(즉), 韓國戰爭(한국전쟁)을 代理戰爭(대리전쟁)으로 理解(이해)하는 視覺(시각)이 있다.
그리고 南北分斷(남북분단) 後(후) 美蘇共同委員會(미소공동위원회)와 모스크바(Moscow)삼상회의[1945年(년) 12月(월)에 모스크바(Moscow)에서 열린 美國(미국)ㆍ英國(영국)ㆍ蘇聯(소련) 三國(삼국)의 外相會議(외상회의).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終戰(종전) 後(후) 여러 問題(문제)의 處理(처리)에 關(관)한 案件(안건)을 議題(의제)로 하였으며, 韓國(한국)에 대한 信託統治案(신탁통치안) 따위를 包含(포함)한 모스크바(Moscow) 協定(협정)이 締結(체결)되었다.]에서 1950年(년)까지 英國(영국), 中華民國(중화민국), 美國(미국), 蘇聯(소련)이 信託統治(신탁통치)를 하는 內容(내용)도 있는데 卽(즉), 38線(선)을 境界(경계)로 南(남)쪽엔 英國(영국)과 美國(미국)이, 北(북)쪽엔 中華民國(중화민국)과 蘇聯(소련)이 占領(점령)하기로 했는데 더 正確(정확)하게 말하면 옛날 百濟(백제)의 首都(수도)가 扶餘(부여)였을 때에 百濟(백제)의 領土(영토)를 英國(영국)이 占領(점령)하고, 나머지 38線(선) 以南(이남)은 美國(미국)이 占領(점령)하기로 했다. 38線(선) 北(북)쪽으로선 蓋馬高原(개마고원: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位置(위치)한 高原(고원)이다. 摩天嶺山脈(마천령산맥)과 낭림산맥[狼林山脈:咸鏡南道(함경남도)와 平安南道(평안남도)의 境界(경계)를 形成(형성)하는 南北(남북) 方向(방향)의 山脈(산맥)] 전령산맥으로 둘러싸인 約(약) 4만km2 넓이의 高原(고원)으로서 韓國(한국)에서 제일 넓은 高原(고원)이다. 高原(고원)의 높이는 700~2,000m이며 南(남)쪽에서 北(북)으로 傾斜(경사)져 있다. 이렇게 높고 넓기 때문에 ‘韓國(한국)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蓋馬高原(개마고원)을 蓋馬高原(개마고원), 자강고원(慈江高原), 백무고원(白茂高原) 等(등)으로 細分(세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蓋馬高原(개마고원)의 面積(면적)은 約(약) 14,300km2다.]을 境界(경계)로 平壤(평양), 開城(개성), 南浦(남포), 新義州(신의주), 海州(해주)을 包含(포함)한 西部(서부) 地域(지역)은 中華民國(중화민국)이 東部(동부) 地域(지역) 元山(원산), 金剛山(금강산), 咸興(함흥), 興南(흥남), 長津(장진), 惠山鎭(혜산진), 淸津(청진), 羅津(나진)을 包含(포함)한 곳은 蘇聯(소련)이 占領(점령)해서 5年間(년간) 信託統治(신탁통치)를 하기로 한 것이다. 1949年(년)에 國共內戰(국공내전)에서 國民黨(국민당)이 共産黨(공산당)에게 敗北(패배)하고 38線(선) 北(북)쪽의 西部地域(서부지역)이 共産黨(공산당)으로 넘어가 西部地域(서부지역)도 共産國家(공산국가)가 되므로 38線(선) 北(북)쪽 全體(전체)가 共産國家(공산국가)가 되는 狀況(상황)이었다. 하지만 1950年代(년대)가 되면 4個國(개국)이 손떼야 되는 狀況(상황)이었는데 美國(미국)은 이와 反對(반대)로 卽時(즉시) 獨立(독립)을 主張(주장)하여 서로 엇갈린 對話(대화) 때문에 전혀 實行(실행)되지 못했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狀況(상황)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內(내)에서 韓國戰爭(한국전쟁)은 김일성(金日成)과 박헌영(朴憲永)의 主導(주도)로 이루어졌으며, 金策(김책), 김무정(金武亭)도 積極的(적극적)으로 贊成(찬성)하였다. 이승엽(李承燁) 等(등) 南勞黨(남로당) 系列(계열)의 人士(인사)들도 贊成(찬성)하였고, 軍事指導者(군사지도자)들인 姜健(강건), 김웅(金雄), 김광협(金光俠), 방호산(方虎山), 李權武(이권무), 김창덕, 유경수 等(등)은 南(남)쪽과의 一戰(일전)을 苦待(고대)하였고 勝利(승리)를 確信(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崔庸健)은 積極的(적극적)으로 反對(반대)하였고, 김두봉(金枓奉), 홍명희(洪命熹), 장시우 等(등)은 反對(반대) 또는 消極的(소극적) 贊成(찬성)을 하였다. 김일성(金日成)은 數(수) 차례 蘇聯(소련)의 支配者(지배자)인 스탈린(Stalin)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統治者(통치자)인 마오쩌둥(毛泽东)을 만나 무려 48回(회)나 南侵(남침) 許諾(허락) 乃至(내지)는 戰爭(전쟁) 支援(지원)을 要請(요청)하였다.
公開(공개)된 舊(구) 蘇聯(소련)의 文書(문서)에 依(의)하면 애초에 스탈린(Stalin)은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絶對的(절대적) 優位(우위)를 確保(확보)하지 못하는 한 攻擊(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人民軍(인민군)의 實力(실력)이 美國(미국)과 大韓民國(대한민국)을 相對(상대)로 아직은 單獨(단독)으로 戰爭(전쟁)을 치를 만한 實力(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美國(미국)과의 直接的(직접적) 摩擦(마찰)을 두려워하여 武力(무력) 行事(행사)를 忌避(기피)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金日成)은 數(수) 次例(차례) 스탈린(Stalin)을 說得(설득)하였고, 一部(일부) 歷史(역사)硏究者(연구자)들이 옛 蘇聯(소련)의 文書(문서)들을 根據(근거)로 主張(주장)하는 理論(이론)에 依(의)하면, 스탈린(Stalin)은 美國(미국)을 試驗(시험)하고 美國(미국)의 關心(관심)을 유럽(Europe)에서 아시아(Asia)로 돌리기 위해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이 戰爭(전쟁)에 대한 援助(원조)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하는 條件(조건)으로 김일성(金日成)의 南侵(남침)을 承諾(승낙)하였으며 이리하여 스탈린(Stalin)은 强力(강력)한 軍事的(군사적) 援助(원조)로서, 蘇聯(소련)의 最新武器(최신무기)들을 大量(대량)으로 提供(제공)하였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支配力(지배력) 强化(강화)와 戰爭(전쟁)準備(준비) 交涉(교섭)
김일성(金日成)은 朝鮮勞動黨(조선노동당)의 一黨獨裁(일당독재)를 基盤(기반)으로 反對派(반대파)(民族主義者(민족주의자), 宗敎人(종교인) 특히 北韓(북한) 樹立(수립) 以前(이전) 隆盛(융성)하던 改新敎(개신교), 地主(지주), 마름, 企業家(기업가), 技術者(기술자) 等(등)을 包含(포함)한 相當數(상당수)의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人民(인민)에 대한 徹底(철저)한 肅淸(숙청)을 通(통)하여 自國(자국) 內(내) 政治的(정치적) 立地(입지)를 强(강)하게 다지고 있었다.
또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最高人民會議幹部會議(최고인민회의간부회의)를 通(통)하여 統一(통일)을 위하여 占領軍(점령군)의 卽刻的(즉각적)인 撤收(철수)를 要求(요구)하여,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駐屯(주둔) 蘇聯軍(소련군)은 1948年(년) 12月(월) 시베리아(Siberia)로 撤收(철수)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蘇聯(소련) 政府(정부)는 모스크바(Moscow)에서 秘密裏(비밀리)에 軍首腦會談(군수뇌회담)을 開催(개최)하여 撤軍(철군) 以後(이후)의 具體的(구체적)인 計劃(계획)을 樹立(수립)하고 '特別軍事使節團(특별군사사절단)'을 通(통)해서 執行(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會議(회의)에는 김일성(金日成) 等(등)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高位(고위) 軍部代表(군부대표)도 參席(참석)하였다. 모스크바(Moscow) 計劃(계획)이라고 불리는 戰爭準備(전쟁준비) 計劃(계획)은 滿洲(만주)에 있던 朝鮮人(조선인) 義勇軍(의용군) 部隊(부대)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歸國(귀국)시켜 5個(개) 師團(사단)을 갖게 하고 以外(이외)에 8個(개)의 前方師團(전방사단)과 優秀(우수)한 裝備(장비)를 保有(보유)한 8個(개)의 豫備師團(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Tank)를 保有(보유)하는 2個(개)의 機甲師團(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年(년) 2月(월) 스탈린(Stalin)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樹立(수립) 後(후) 처음으로 김일성(金日成)과 박헌영(朴憲永)을 모스크바(Moscow)로 불러 蘇聯軍(소련군)의 撤收(철수)로 因(인)한 軍事力(군사력) 空白(공백)과 韓半島(한반도) 情勢(정세)를 論議(논의)하였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首腦部(수뇌부)는 訪問(방문) 期間(기간)인 3月(월) 17日(일)에 유럽(Europe)에서 一般的(일반적)으로 締結(체결)하던 '友好(우호) 방위조약[防衛條約:集團(집단) 安全保障(안전보장)의 必要(필요)에 따라 두 나라 이상이 防衛(방위)를 目的(목적)으로 맺는 國際條約(국제조약)]'이 아닌 '條(조)·素(소) 經濟(경제)·文化協定(문화협정)'을 締結(체결)하였다. 이는 앞선 美軍(미군) 撤收(철수) 發表(발표)에 대한 蘇聯(소련)의 對應(대응)으로 앞으로 있을 韓國戰爭(한국전쟁)의 責任(책임)을 謀免(모면)하기 위한 計劃(계획)이라고 보는 見解(견해)도 있다.
이러한 理由(이유)로 韓國戰爭(한국전쟁) 當時(당시) 蘇聯(소련)은 公開的(공개적)으로 돕지 않는다고 하고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을 通(통)해 戰爭(전쟁)物資(물자) 供給(공급)을 持續(지속)한다.
1949年(년) 8月(월) 12日(일), 김일성(金日成)과 박헌영(朴憲永)은 大韓民國(대한민국)이 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平和的(평화적) 統一案(통일안)을 拒否(거부)하고 있으므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對南攻擊(대남공격)을 準備(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李承晩) 政權(정권)에 대한 大規模(대규모) 民衆蜂起(민중봉기)가 分明(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言及(언급)했다.
김일성(金日成)과 박헌영(朴憲永)은 만약 對南攻擊(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人民(인민)들은 이를 理解(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强調(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李承晩) 大統領(대통령)이 많은 親北從北(친북종북) ‘民族人士(민족인사)’들을 投獄(투옥)시켰지만 北韓(북한)은 아직도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의 蜂起(봉기)를 組織(조직)할 能力(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1949年(년) 南朝鮮勞動黨(남조선로동당) 等(등)의 大韓民國(대한민국) 內部(내부)의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들이 反共政權(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李承晩) 政權(정권)의 共産主義(공산주의) 彈壓(탄압)에 依(의)해 大大的(대대적)으로 檢擧(검거)되었다는 것을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 온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들의 虛威報告(허위보고)로 생각한 까닭이었다.
1949年(년) 8月(월) 27日(일), 北韓(북한) 駐在(주재) 蘇聯(소련) 大使(대사) 스티코프(Stikoff)는 8月(월) 12~14日(일)의 김일성(金日成)과의 面談(면담)內容(내용)을 스탈린(Stalin)에게 報告(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理由(이유)로 北韓(북한)의 對南攻擊(대남공격)이 不可(불가)하다고 結論(결론)을 내렸다.
1. 現在(현재) 韓半島(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存在(존재)하며 그中(중) 大韓民國(대한민국)은 美國(미국) 및 其他(기타) 國家(국가)에 依(의)해 承認(승인)됨.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攻擊(공격)시 美國(미국)은 大韓民國(대한민국)을 武器彈藥(무기탄약) 供給(공급)뿐 아니라 日本軍(일본군)의 派遣(파견)을 通(통)해 支援(지원)할 可能性(가능성)이 있음.
2.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對南攻擊(대남공격)은 美國(미국)이 對蘇聯(대소련) 謀陷(모함)∙宣傳(선전)에 利用(이용)할 수 있음.
3. 政治的(정치적) 側面(측면)에서 北(북)의 攻擊(공격)은 南北韓(남북한) 人民(인민) 大多數(대다수)의 支持(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軍事的(군사적) 側面(측면)에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직 大韓民國(대한민국)에 대해 壓倒的(압도적) 軍事力(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4. 大韓民國(대한민국)은 이미 相當數(상당수) 强(강)한 軍隊(군대)와 警察力(경찰력)을 創設(창설)하였음에도 蘇聯(소련)의 支援下(지원하)에 있는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에 比(비)하여 弱勢(약세)에 있었다.
스티코프(Stikoff)는 김일성(金日成)이 提議(제의)한 江原道(강원도) 地域(지역)의 '解放區域(해방구역)' 創設計劃(창설계획)에는 贊成(찬성)하고 또한 人民軍(인민군)에 의한 甕津占領計劃(옹진점령계획)도 軍事的(군사적)으로 妥當(타당)하다고 보고했으나 南韓(남한)의 反擊(반격)시 이 作戰(작전)이 持久戰(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言及(언급) 스탈린(Stalin)에게 提出(제출)한 9月(월) 15日字(일자) 報告書(보고서)에서, 스티코프(Stikoff)는 “김일성(金日成)과 박헌영(朴憲永)은 現(현) 情勢下(정세하)에서는 平和統一(평화통일)이 不可能(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北(북)이 南韓政府(남한정부)를 武力攻擊(무력공격)하면 南北(남북)양쪽의 人民(인민)들이 이를 支持(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只今(지금) 武力統一(무력통일)을 안하면 統一(통일)이 延期(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南韓(남한) 政權(정권)은 左翼勢力(좌익세력)을 彈壓(탄압)하면서 北進(북진)할 수 있는 强力(강력)한 軍隊(군대)를 만들어 統一(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일성(金日成)은 南進(남진)을 始作(시작)할 때 蘇聯(소련)과 中共(중공)이 援助(원조)해줄 것을 企待(기대)하는 듯하다.”고 썼다.
그의 見解(견해)는 南北(남북)의 內戰(내전)은 北(북)에 有利(유리)하나 北韓軍(북한군)이 南韓(남한) 攻擊(공격)을 開始(개시)하면 蘇聯(소련)이 國際的(국제적) 非難(비난)을 받게 되며 美國(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南韓(남한)을 積極(적극) 支援(지원)할 可能性(가능성)을 排除(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물론 北韓(북한)이 남한에서 빨치산[敵(적)의 後方(후방)에서 通信(통신)이나 交通(교통) 施設(시설)을 破壞(파괴)하거나 武器(무기)나 物資(물자)를 奪取(탈취)하고 人命(인명)을 殺傷(살상)하는 非正規軍(비정규군)] 活動(활동)을 强化(강화)하는 것은 좋다. 甕津作戰(옹진작전)은 有利(유리)한 商況下(상황하)에서는 實施(실시) 可能(가능)하고, 이를 위해 38線(선) 地域(지역)에서 南(남)쪽의 挑發(도발)을 利用(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蘇聯(소련) 共産黨(공산당) 政治局(정치국) 中央委(중앙위)는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南侵(남침)이 時期的(시기적)으로 適切(적절)하지 못하다는 指示文(지시문)을 스티코프(Stikoff)를 經由(경유)하여, 김일성(金日成)에게 傳達(전달)하였다.(1949年(년) 9月(월) 24日(일)
蘇聯(소련)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戰爭(전쟁) 支援約束(지원약속)
1950年(년) 1月(월) 17日(일) 박헌영(朴憲永)의 官邸(관저)에서 열린 晩餐(만찬)에서 김일성(金日成)은 北韓(북한) 駐在(주재) 蘇聯(소련) 大使(대사) 스티코프(Stikoff)에게 南侵(남침) 問題(문제)를 다시 提起(제기)하고 이를 論議(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Stalin)과의 面談(면담)을 希望(희망)한다는 意思(의사)를 披瀝(피력)했다.
이 對話(대화)에서 김일성(金日成)은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이 中華民國(중화민국)을 몰아내고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을 成立(성립)한 것을 契機(계기)로 鼓舞(고무)되어 大韓民國(대한민국)이 차지한 南韓(남한)을 解放(해방)시킬 次例(차례)라고 强調(강조)하고,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紀綱(기강)이 세워진 優秀(우수)한 軍隊(군대)를 保有(보유)하고 있다고 主張(주장)했다.
또 김일성(金日成)은 以前(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南韓(남한)의 先制攻擊(선제공격)에 대한 反擊(반격)만을 承認(승인)한 1949年(년) 3月(월)의 스탈린(Stalin)의 決定(결정)에 不滿(불만)을 토로했다. 1月(월) 30日(일), 스탈린(Stalin)이 署名(서명)한 電報(전보)를 平壤(평양)으로 打電(타전)했다. 電文(전문)에서 스탈린(Stalin)은 김일성(金日成)의 不滿(불만)은 理解(이해)가 되나 '큰일'에 關(관)해 緻密(치밀)한 準備(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實現(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冒險(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點(점)을 理解(이해)해야 한다고 言及(언급)했다.
스탈린(Stalin)은 김일성(金日成)을 接見(접견)해 이 問題(문제)를 論議(논의)할 準備(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支援(지원)할 用意(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3月(월) 20日(일), 김일성(金日成)은 스티코프(Stikoff)와의 面談(면담)에서 4月(월) 初(초)에 自身(자신)과 박헌영(朴憲永)이 스탈린(Stalin)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傳(전)해달라고 要請(요청)하였다. 김일성(金日成)은 이번 訪問(방문)을 46年(년)의 訪問(방문)처럼 非公式(비공식)(秘密(비밀)으로 할 것을 提議(제의)하였다. 김일성(金日成)은 南北(남북)한 統一(통일)의 方法(방법), 北韓(북한) 經濟開發(경제개발)의 展望(전망), 其他(기타) 共産黨(공산당) 內(내) 問題(문제)에 關(관)해 스탈린(Stalin)과 協議(협의)하기를 願(원)하였다. 4月(월), 모스크바(Moscow)에서 열린 스탈린(Stalin)과 김일성(金日成) 間(간)의 會談(회담)에서 스탈린(Stalin)은 國際環境(국제환경)이 有利(유리)하게 變(변)하고 있음을 言及(언급)하고 北韓(북한)이 統一課業(통일과업)을 開始(개시)하는 데 同意(동의)하였다.
다만, 이 問題(문제)의 最終決定(최종결정)은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과 北韓(북한)에 依(의)해 共同(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萬一(만일)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의 意見(의견)이 否定的(부정적)이면 새로운 協議(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決定(결정)을 延期(연기)하기로 合議(합의)하였다.
5月(월) 12日(일), 스티코프(Stikoff)가 김일성(金日成) 및 박헌영(朴憲永)과 面談(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金日成)은 마오쩌둥(Mao Zedong:毛泽东)과의 面談計劃(면담계획)을 밝혔다. “蘇聯(소련)에서 돌아온 後(후) 이두연 駐(주)베이징(北京)大使(대사)로부터 마오쩌둥(Mao Zedong:毛泽东)과의 面談(면담) 結果(결과)를 報告(보고)받았다.
마오(毛)는 ‘朝鮮統一(조선통일)은 武力(무력)에 依(의)해서만 可能(가능)하며 美國(미국)이 南韓(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次(차)大戰(대전)을 始作(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美國(미국)의 介入(개입)을 두려워할 必要(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毛)와 面談(면담)하기 위해 5月(월) 13日(일) 베이징(北京)으로 出發(출발)할 것이다.
마오(毛)는 내가 對南(대남) 軍事行動(군사행동)을 곧 始作(시작)할 생각이라면 非公式(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마오(毛)에게 北韓(북한)으로 移讓(이양)되는 中共軍(중공군) 所屬(소속)의 朝鮮人(조선인) 사단을 위해 中國(중국)이 鹵獲(노획)한 日本(일본) 및 美國(미국)武器(무기)를 提供(제공)해줄 것을 要請(요청)할 計劃(계획)이다.
50年(년) 6月(월)께로 豫定(예정)하고 있는 南侵(남침)計劃(계획)을 具體的(구체적)으로 樹立(수립)하라는 指示(지시)를 北韓軍(북한군) 總參謀長(총참모장)에게 示達(시달)했다. 作戰(작전)이 6月(월)에 開始(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準備(준비)가 完了(완료)될지 自信(자신)이 없다.” 5月(월) 13日(일), 김일성(金日成)과 박헌영(朴憲永)이 베이징(北京)에 到着(도착)하여 마오쩌둥(Mao Zedong:毛泽东)과 面談(면담)하고 스탈린(Stalin)이 모스크바(Moscow) 會談(회담) 때 ‘現(현) 國際環境(국제환경)은 過去(과거)와는 다르므로 北韓(북한)이 行動(행동)을 開始(개시)할 수 있으나 最終決定(최종결정)은 마오쩌둥(Mao Zedong:毛泽东)과의 協議(협의)를 通(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說明(설명)했다.
5月(월) 14日(일) 스탈린(Stalin)은 마오쩌둥(Mao Zedong:毛泽东)에게 보낸 特別電文(특별전문)에서 “國際情勢(국제정세)의 變化(변화)에 따라 統一(통일)에 着手(착수)하자는 朝鮮(조선)사람들의 提請(제청)에 同意(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中國(중국)과 朝鮮(조선)이 共同(공동)으로 決定(결정)해야 할 問題(문제)이고 中國(중국)同志(동지)가 同意(동의)하지 않을 境遇(경우)에는 다시 檢討(검토)할 때까지 延期(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5月(월) 15日(일), 모스크바(莫斯科:Moscow)의 메시지(message)를 받은 뒤 마오(Mao Zedong:毛泽东)는 김일성(金日成) · 박헌영(朴憲永)과 具體的(구체적)으로 意見(의견)을 交換(교환)하였다. 김일성(金日成)은 北韓(북한)이 ‘軍事力(군사력) 增强(증강)-平和統一(평화통일) 對南提議(대남제의)-對(대) 韓民國(한민국)쪽의 平和統一(평화통일) 提議拒否(제의거부) 뒤 戰鬪行爲(전투행위) 開始(개시)’의 3段階(단계) 計劃(계획)을 세웠다고 言及(언급)했다.
마오(Mao Zedong:毛泽东)가 이 計劃(계획)에 贊成(찬성)을 表明(표명)하고 日本軍(일본군)의 介入(개입) 可能性(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金日成)은 日本軍(일본군)이 參戰(참전)할 可能性(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美國(미국)이 2萬(만)~3萬(만)명의 日本軍(일본군)을 派遣(파견)할 可能性(가능성)을 전혀 排除(배제)할 수는 없다고 答辯(답변)했다. 그러나 日本軍(일본군)의 參戰(참전)이 狀況(상황)을 決定的(결정적)으로 變化(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Mao Zedong:毛泽东)는 萬一(만일) 美軍(미군)이 參戰(참전)한다면 中國(중국)은 兵力(병력)을 派遣(파견)해 北韓(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蘇聯(소련)은 美國(미국)쪽과 38線(선) 分割(분할)에 關(관)한 合議(합의)가 있기 때문에 戰鬪行爲(전투행위)에 參加(참가)하기가 不便(불편)하지만 中國(중국)은 이런 義務(의무)가 없으므로 北韓(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北韓(북한)이 現(현) 時點(시점)에서 作戰(작전) 開始(개시)를 決定(결정)함으로써 이 作戰(작전)이 兩國間(양국간) 共同(공동)의 課題(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同意(동의)하고 必要(필요)한 協力(협력)을 提供(제공)하겠다고 했다. 5月(월) 29日(일), 김일성(金日成)은 스티코프(Stikoff)에게 4月(월) 모스크바(Moscow) 會談(회담)시 合議(합의)된 武器(무기)와 技術(기술)이 이미 거의 大部分(대부분) 北韓(북한)에 到着(도착)했음을 通報(통보)하였다. 이 通報(통보)에서, 또한, 김일성(金日成)은 새로 創設(창설)된 師團(사단)들이 6月末(월말)까지 準備(준비) 完了(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金日成)의 指示(지시)에 따라 北韓軍(북한군) 參謀長(참모장)이 바실리예프(Vasiliev:瓦西里耶夫:Васильев) 將軍(장군)과 함께 마련한 南侵攻擊(남침공격) 計劃(계획)을 北韓指導部(북한지도부)가 承認(승인)하였고, 軍(군)組織(조직) 問題(문제)는 6月(월) 1日(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北韓軍(북한군)은 6月(월)까지 完全(완전)한 戰鬪(전투)準備(준비) 態勢(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金日成)은 6月末(월말) 以後(이후)는 北韓軍(북한군)의 戰鬪(전투)準備(준비)에 關(관)한 情報(정보)가 南(남)쪽에 入手(입수)될 수 있으며 7月(월)에는 장마가 始作(시작)된다는 點(점)을 指摘(지적)했다. 6月(월) 8~10日(일)께 集結(집결)地域(지역)으로의 兵力(병력)異動(이동)을 始作(시작)할 것이이라고 보고되었으며, 김일성(金日成)과 面談(면담) 뒤 스티코프(Stikoff)는 바실리예프(Vasiliev:瓦西里耶夫:Васильев) 將軍(장군) 및 포스트니코프(Постников:波斯尼科夫:Postnikov) 將軍(장군)과 意見(의견)을 交換(교환)했다.
그들은 7月(월)에 攻擊(공격)을 始作(시작)하는 것이 가장 時宜適切(시의적절)하나 日氣(일기)關係(관계)로 6月(월)로 變更(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6月(월) 11日(일), 大韓民國(대한민국)은 統一民主祖國戰線(통일민주조국전선)이 提議(제의)한 平和統一案(평화통일안)을 拒否(거부)했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戰爭準備(전쟁준비)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韓國戰爭(한국전쟁)을 準備(준비)함에 앞서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情報(정보)를 相當部分(상당부분) 알고 있었다. 특히 平壤(평양)에서 發見(발견)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情報文件(정보문건)에 依(의)하면 大韓民國(대한민국) 各(각) 行政(행정)所在地(소재지)의 군(郡) 單位(단위)까지 1950年度(년도)의 쌀, 보리 等(등)의 모든 農作物(농작물) 豫想(예상) 收穫量(수확량)이 細密(세밀)하게 記錄(기록)돼 있었다.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은 이 情報(정보)를 바탕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 한 해 동안 確保(확보)할 수 있는 食量(식량)의 規模(규모), 卽(즉) 供出量(공출량)을 計算(계산)한 狀態(상태)였다. 특히 모든 種類(종류)의 主食(주식)은 물론이며 主食(주식)이 아닌 깨까지 郡(군) 單位別(단위별)로 豫想(예상) 收穫量(수확량)과 供出量(공출량)을 매겨 놓았다. 그리고 大韓民國(대한민국) 領土(영토)인 (靑丹郡靑丹地域(청단지역)에서는 解放前(해방전)부터 農業用水(농업용수)로 使用(사용)한 鳩巖貯水池(구암저수지)의 水路(수로)를 北韓(북한)이 一方的(일방적)으로 끊음으로써 靑丹平野(청단평야)의 營農(영농)을 못하도록 하는데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戰爭(전쟁) 보름 前(전) 6月(월) 10日(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典型的(전형적)인 和戰兩面(화전양면)欺瞞術(기만술)의 一環(일환)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이 逮捕(체포)한 김삼룡(金三龍) 및 이주하(李舟河)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抑留中(억류중)이던 조만식(曺晩植)과 38線(선)에서 交換(교환)하자며, 6月(월) 23日(일)을 協商期日(협상기일)로 提案(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副首相(부수상) 兼(겸) 外務相(외무상)인 박헌영(朴憲永)의 强力(강력)한 要求(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50年(년) 6月(월) 16日(일) 이승만(李承晩)은 北(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要求(요구)를 했고, 6月(월) 18日(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同時交換(동시교환)을 主張(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同時(동시)에 交換(교환)하자”라는 攻防(공방)을 되풀이하였다. 또한, 6月(월) 16日(일)에는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最高人民會議(최고인민회의)가 大韓民國(대한민국) 國會(국회)에 平和統一(평화통일) 方案(방안)을 提議(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은 그 裏面(이면)에서 戰爭準備(전쟁준비)를 마무리해 갔다. 卽(즉), 6月(월) 12日(일)부터 人民軍(인민군)은 38線(선) 以北(이북) 10~15km 地域(지역)으로 再配置(재배치)되기 始作(시작)했고, 6月(월) 16日(일)에는 蘇聯大使(소련대사) 스티코프(Stikoff:斯蒂科夫:Стикофф)는 北韓軍(북한군) 總參謀部(총참모부)가 作成(작성)한 侵攻作戰(침공작전) 計畫(계획)을 모스크바(Москва:莫斯科:Moscow)에 報告(보고)했다. 이 計劃(계획)은 1個月(개월) 期間(기간)으로 3段階(단계)로 構成(구성)되어 있다. 6月(월) 20日(일), 스티코프(Stikoff)는 모스크바(Москва:莫斯科:Moscow)에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水陸兩用(수륙양용) 作戰用(작전용) 船舶供給(선박공급)과 蘇聯軍(소련군) 水兵(수병)을 함께 提供(제공)할 수 있는지 與否(여부)를 問議(문의)했다.
모스크바(Москва:莫斯科:Moscow) 時間(시간)으로 午後(오후) 10時(시) 스티코프(Stikoff)는 모스크바(Москва:莫斯科:Moscow)로 電話(전화)를 걸어 모스크바(Москва:莫斯科:Moscow)時間(시간)으로 午後(오후) 11時(시)께 南韓政府(남한정부)가 北韓(북한)에 대해 攻擊(공격)을 始作(시작)하라는 命令(명령)을 내렸다는 諜報(첩보)가 北韓(북한)쪽에 午後(오후) 8時(시) 무렵 入手(입수)되었다고 報告(보고)했다.
스티코프(Stikoff)는 이 諜報(첩보)가 公開文書(공개문서)로 돼 있어 疑心(의심)스럽다고 評價(평가)했다. 6月(월) 21日(일), 스티코프(Stikoff)는 스탈린(Stalin:斯大林:Сталин)에게 김일성(金日成)의 메시지(message)를 傳達(전달)했다. 이 메시지(message)에는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入手(입수)한 各種(각종) 諜報(첩보)에 따르면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侵攻(침공)에 關(관)한 情報(정보)가 大韓民國(대한민국)에 알려졌으며 이와 關聯(관련)해 大韓民國(대한민국)이 戰鬪準備態勢(전투준비태세)를 强化(강화)하는 措處(조처)를 取(취)하고 있다는 內容(내용)이 들어 있다.
김일성(金日成)은 前(전)에 構想(구상)했던 甕津半島(옹진반도)에서의 前哨戰(전초전)을 遂行(수행)치 않고 6月(월) 25日(일) 前(전) 戰線(전선)에 걸쳐 戰鬪行爲(전투행위)를 始作(시작)하는 것이 目的(목적)에 符合(부합)한다고 말했다.
6月(월) 21日(일) 밤에,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은 2次(차)에 걸쳐 北韓(북한)에 대한 戰鬪行爲(전투행위)를 開始(개시)하라는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육군)의 命令(명령)을 라디오(radio)를 通(통)해 捕捉(포착)했다고 主張(주장)하였다. 蘇聯(소련)은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軍艦(군함)에 勤務(근무)할 蘇聯(소련) 水兵(수병) 派兵(파병)要請(요청)에 대해 이는 敵軍(적군)이 介入(개입)할 수 있는 口實(구실)이 되므로 受諾(수락)할 수 없다고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答信(답신)하였다.
6月(월) 22日(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駐在(주재) 蘇聯(소련) 大使館(대사관)에 暗號電文(암호전문)의 交信(교신)은 바람직하지 못하니 向後(향후) 一切(일체)의 暗號電文(암호전문)을 打電(타전)하지 말라는 모스크바(Москва:莫斯科:Moscow)의 指示(지시)가 示達(시달)되었다. 以後(이후) 1950年末(년말)까지 平壤(평양)과 蘇聯(소련) 外務省(외무성)間(간)에는 電報交信(전보교신)이 中斷(중단)되었다.
특히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住民(주민)들이 草家(초가)지붕을 고칠 餘裕(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當時(당시) 大韓民國(대한민국)에 전혀 全無(전무)했던 T-34/85를 確保(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日帝時代(일제시대)에 닦아놓았던 道路(도로)의 幅(폭)을 2倍(배) 以上(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等(등) 徹底(철저)하게 準備(준비)했다. 半面(반면),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는 韓國戰爭(한국전쟁) 하루 전날 兵士(병사)들에게 休假(휴가)를 보내는 等(등)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편,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醫療部隊(의료부대)인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949軍部隊(군부대)는 6月(월) 24日(일) 午前(오전) 1時(시) 38線(선) 附近(부근)에 野戰病院(야전병원)을 設置(설치)하고 醫療要員(의료요원)들을 各(각) 該當(해당) 部分(부분)에 配置(배치)하였다. 6月(월) 25日(일) 午前(오전) 12時(시)까지 治療準備事業(치료준비사업)을 完了(완료)한 病院(병원)은 戰鬪準備(전투준비) 狀態(상태)로 대기하였다. 25日(일) 午後(오후) 2時(시)부터 部隊(부대)는 벌써 전상(戰傷) 患者(환자) 取扱(취급)을 始作(시작)하였다.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商況(상황)~大韓民國(대한민국) 內部(내부)의 混亂(혼란)
大韓民國(대한민국)의 이승만(李承晩) 大統領(대통령)은 歸國(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 內(내)의 政治的(정치적) 混亂(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朴憲永)과 같은 左翼(좌익) 政黨(정당), 또 김구(金九)와 같은 國內派(국내파)의 民族主義(민족주의)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李承晩)과 같은 海外派(해외파)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不信(불신)하였고, 그 決科(결과) 大韓民國(대한민국)은 여러 개의 政黨(정당)이 亂立(난립)되는 等(등) 深刻(심각)한 政治(정치) 社會的(사회적) 問題(문제)에 直面(직면)하고 있었다.
김규식(金奎植) 等(등)은 左右派(좌우파)의 合作(합작)과 協力(협력)을 推進(추진)해왔고 兩者(양자)를 仲裁(중재)해보기 위해 한 차례 平壤(평양)을 訪問(방문)하는 等(등) 努力(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장덕수(張德秀) 暗殺(암살)事件(사건)으로 이승만(李承晩)과 사이가 틀어진 김구(金九)가 同參(동참)하여 힘을 얻는 듯 했으나, 김일성(金日成)이나 이승만(李承晩)이나 모두 强硬(강경)한 態度(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모두 失敗(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美國(미국) 軍部(군부)는 韓半島(한반도)를 '戰略的(전략적)으로 抛棄(포기)할' 計劃(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美國(미국) 軍部(군부) 首腦部(수뇌부)의 思考觀(사고관)에서 '萬一(만일) 蘇聯(소련)이 東北(동북)아시아(Asia)에서 3次(차) 大戰(대전)을 일으킬 可能性(가능성)'이란 疑問(의문)은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價値(가치)를 評價(평가)하는데 가장 核心的(핵심적)인 思考(사고)였다.
萬一(만일) 美國(미국)이 陸軍戰(육군전)을 上程(상정)한다고 생각하면, 韓半島(한반도) 南(남)쪽에 駐韓美軍(주한미군)을 配置(배치)할 수 없었다. 韓半島(한반도)에서 3次(차) 大戰(대전)이 勃發(발발)할 境遇(경우)에 韓半島(한반도)에 投入(투입)될 蘇聯(소련) 陸軍(육군)과 美國(미국)의 陸軍(육군)은 軍事學的(군사학적)으로 根源的(근원적)인 限界(한계)가 있었다.
蘇聯(소련)과 韓半島(한반도)는 땅으로 連結(연결)되어 있지만, 美國(미국) 陸軍(육군)은 韓半島(한반도)에 投入(투입)되기 위해서는 太平洋(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그런 狀況(상황)에서 海軍戰(해군전)과 空軍戰(공군전)을 上程(상정)한다면 亦是(역시) 韓半島(한반도)는 美國(미국) 立場(입장)에서 전혀 必要(필요)가 없었다.
어떠한 作戰(작전)이라도 空軍戰(공군전)과 海軍戰(해군전)은 韓半島(한반도)를 迂回(우회)해서 充分(충분)히 遂行(수행)이 可能(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美軍部(미군부)는 暫定的(잠정적)으로 韓半島(한반도)에서 駐韓美軍(주한미군)을 撤收(철수)시키고, 萬一(만일) 蘇聯(소련)이 大大的(대대적)인 挑發(도발)을 敢行(감행)할 境遇(경우)에는 大韓民國(대한민국)과 中華民國(중화민국)을 抛棄(포기)하고 北太平洋(북태평양)에 있는 알류샨 열도[Aleutian列島: 太平洋(태평양) 北部(북부), 알래스카(Alaska) 半島(반도)와 캄차카(Kamchatka) 半島(반도) 사이에 활 모양으로 늘어서 있는 섬의 무리]와 日本(일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島嶼(도서)防衛線(방위선)을 構築(구축)해 蘇聯(소련)과 3次(차) 大戰(대전)을 遂行(수행)한다는 計劃(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美軍部(미군부)가 1946年(년) 秘密裏(비밀리)에 樹立(수립)한 핀서(Pincer) 計劃(계획)과 문라이즈(Moonrise) 計劃(계획)이다. 핀서(Pincer) 計劃(계획)과 문라이즈(Moonrise) 計劃(계획)의 島嶼防衛線(도서방위선) 構想(구상)이 바로 駐韓美軍(주한미군)의 全面撤收(전면철수)를 明示(명시)한 애치슨 라인(Atchison Line)의 原形(원형)이다. 結局(결국),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의 反對(반대)에도 불구하고 駐韓美軍(주한미군)은 約(약) 500名(명)의 軍事顧問團(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마지막 남아 있던 部隊(부대)가 1949年(년) 6月(월) 29日(일) 撤收(철수)하였다.
김일성(金日成)에게 積極的(적극적)인 군사력 支援(지원)을 提供(제공)한 蘇聯(소련)과 달리, 위와 같이 美國(미국)은 이승만(李承晩)이 强力(강력)한 軍事力(군사력)을 保有(보유)하는 것을 願(원)치 않았고, 그 結果(결과) 大韓民國(대한민국)의 軍事力(군사력)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比(비)하여 매우 脆弱(취약)한 狀態(상태)에 直面(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승만(李承晩) 大統領(대통령)은 韓國戰爭(한국전쟁)이 일어나기 前(전)인 1949年(년) 9月(월) 30日(일) 外信記者(외신기자) 會見(회견)에서 "우리는 北韓(북한)의 실지(失地)를 回復(회복)할 수 있으며 北韓(북한)의 우리 同胞(동포)들은 우리들이 掃蕩(소탕)할 것을 希望(희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等(등) '北進統一論(북진통일론)'을 主張(주장)했다.
또한 채병덕(蔡秉德) 陸軍參謀總長(육군참모총장)은 라디오(radio) 放送(방송)에서 "아침은 開城(개성)에서 점심은 平壤(평양)에서 저녁은 新義州(신의주)에서 먹겠다."며 호전적인 發言(발언)을 하였다. 또한, 이러한 北進統一論(북진통일론)은 韓國(한국) 戰爭當時(전쟁당시) 서울이 今方(금방) 陷落(함락)될 程度(정도)로 軍事力(군사력)이 脆弱(취약)했던 것을 보면 分明(분명)히 實現可能性(실현가능성)이 없는 空想(공상)일 뿐이었으나, 北韓(북한)은 이를 戰爭(전쟁)의 빌미로 利用(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主張(주장)이 있다.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戰爭對備(전쟁대비)
1949年(년) 末(말), 陸軍本部(육군본부) 情報局(정보국)은 1950年(년) 春季(춘계)에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度線(도선)에서 全面的(전면적)인 攻擊(공격)을 할 것이라는 綜合情報報告書(종합정보보고서)를 내놓았다.
이에 陸軍本部(육군본부)는 計劃(계획) 樹立(수립)을 서둘러 陸軍本部(육군본부) 作戰命令(작전명령) 第(제)38號(호) 一名(일명), 國軍防禦計劃(국군방어계획)을 確定(확정) 1950年(년) 3月(월) 25日(일)하고, 隸下部隊(예하부대)에 이를 下達(하달)하여 施行(시행)토록 하였다.
이 國軍防禦計劃(국군방어계획)은 신태영(申泰英) 陸軍總參謀長(육군총참모장)의 指示(지시)로 陸軍本部(육군본부) 作戰局長(작전국장) 강문봉(姜文奉) 大領(대령)이 中心(중심)이 되어 作成(작성)되었다.
戰爭(전쟁) 勃發(발발) 1週日(주일) 前(전)까지 강문봉(姜文奉)이 作戰局長(작전국장)에 있었다. 그는 每日(매일) 적정(敵情)判斷報告書(판단보고서)를 읽었는데 이 報告書(보고서)에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兵力(병력)異動狀況(이동상황)이 昭詳(소상)하게 記錄(기록)되어 있었고 兵力集結(병력집결)이 完了(완료)되면 南侵(남침)할 것이라는 分析資料(분석자료)도 있었다.
이러한 情報(정보)를 신성모(申性模) 國防長官(국방장관)과 채병덕(蔡秉德) 陸軍參謀總長(육군참모총장)에게 報告(보고)했고 美國(미국) 極東軍司令部(극동군사령부)에도 提報(제보), 武力增强(무력증강)의 必要性(필요성)을 强調(강조)했다. 그러나 美國(미국) 側(측)은 "共産軍(공산군)의 南侵(남침)은 없다"고 斷言(단언)하면서 韓國軍(한국군)의 情報(정보)는 軍事援助(군사원조)를 얻기 위한 것으로 輕視(경시)하는 일이 頻繁(빈번)했다.
신성모(申性模)는 大統領(대통령)이 命令(명령)만 내리면 바로 戰爭準備(전쟁준비)를 마치고 北枕(북침)을 하겠다고 妄言(망언)을 했고 戰爭(전쟁)을 願(원)하지 않았던 美軍(미군)은 國軍(국군)의 戰車(전차)와 戰鬪機(전투기) 모두 押收(압수)하고 曲射砲(곡사포)와 對戰車砲(대전차포) 90% 以上(이상)을 押收(압수)했다.
이 일로 因(인)해 北韓(북한)이 南侵(남침)할 名分(명분)이 생겼고 1950年(년) 6月(월) 情報局(정보국)에서 北韓(북한)이 南侵(남침)을 準備(준비)한다는 情報(정보)를 數(수)없이 보냈지만 신성모(申性模)는 北韓(북한)은 절대 南侵(남침)을 하지 않는다고 情報(정보)를 無視(무시)했고 1950年(년) 6月(월) 23日(일) 情報局(정보국)에서 北韓(북한)이 南侵(남침)한다는 情報(정보)를 보냈으나 신성모(申性模)는 南侵情報(남침정보)를 每番(매번) 無視(무시)하였고 채병덕(蔡秉德)에게 命令(명령)내려 全軍(전군) 非常警戒令(비상경계령)을 모두 解體(해체)하였다.
채병덕(蔡秉德)은 國軍將兵(국군장병)들을 休暇外出(휴가외출) 보낼 것을 要求(요구)했고 신성모(申性模)는 이를 許諾(허락)하였다. 國軍兵力(국군병력) 半(반) 以上(이상)을 休暇外出(휴가외출)을 보낸 이 일은 情報(정보)를 받은 北韓(북한)에게는 큰 損失(손실) 없이 南侵(남침)할 수 있는 惟一(유일)한 機會(기회)였고 結局(결국)에는 韓國戰爭(한국전쟁)이 일어난 原因(원인)이 되었다.
한편, 制憲國會(제헌국회)의 任期(임기)가 끝날 무렵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에서는, 政界(정계)는 물론이고 一般(일반)의 물의를 무릅쓰고 第(제)2次(차) 總選擧(총선거) 實施(실시)를 地緣(지연)시키는 한편, 赤字豫算(적자예산)의 編成(편성)을 試圖(시도)하였으나 當時(당시) 이를 反對(반대)하는 美國(미국) 國務長官(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의 覺書(각서) 到達(도달)로 말미암아 政府(정부)에서는 從來(종래)의 主張(주장)을 變更(변경)하여 第(제)2代(대) 國會議員(국회의원) 選擧(선거)를 實施(실시)하였다.(1950年(년) 5月(월) 30日(일) 選擧(선거)의 結果(결과) 無所屬(무소속) 議員(의원)이 國會(국회) 議席(의석)의 過半數(과반수)를 占(점)하여 壓倒的(압도적)인 優勢(우세)를 보이고 몇몇 中間派(중간파) 議員(의원)들이 頭角(두각)을 나타냈으며, 政府側(정부측) 與黨(여당)의 進出(진출)은 微微(미미)했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에 대해, 1949年(년) 6月(월)에 制定(제정)되어 選擧(선거) 直前(직전)인 1950年(년) 4月(월)에 施行規則(시행규칙)을 公布(공포)한 土地改革(토지개혁)법이 유상매수(有償買收) · 유상분배(有償分配)를 原則(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事實上(사실상) 土地改革(토지개혁)의 意義(의의)가 稀薄(희박)하여, 國民(국민)이 露骨的(노골적)으로 政府(정부)에 反感(반감)을 表示(표시)한 結果(결과)라고 速斷(속단)하고 이때에 南侵(남침)을 敢行(감행)하면 틀림없이 大韓民國(대한민국) 國民(국민)의 支持(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判斷(판단)하였다.
1950年(년) 6月(월) 19日(일)의 大韓民國(대한민국) 第(제)2代(대) 國會(국회)가 議長團(의장단) 選出(선출)을 始作(시작)으로 活動(활동)을 始作(시작)한 것은 戰爭(전쟁)直前(직전)이었다.
한편, CIA[1947年(년) 國家 安全保障法(국가안전보장법)에 依(의)하여 設立(설립)된 大統領(대통령) 直屬(직속)의 美國(미국) 國家(국가)情報機關(정보기관)]는 韓國戰爭(한국전쟁) 勃發(발발) 엿새(6日(일)前(전)의 報告書(보고서)에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南侵(남침)可能性(가능성)을 낮게 評價(평가)하고 있었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蘇聯(소련)의 衛星國家(위성국가)로 獨自的(독자적)인 戰爭(전쟁) 遂行能力(수행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根據(근거)였다. 그러나 CIA의 예측과는 달리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백악관은 그 책임을 물어 CIA[1947年(년) 國家 安全保障法(국가안전보장법)에 依(의)하여 設立(설립)된 大統領(대통령) 直屬(직속)의 美國(미국) 國家(국가)情報機關(정보기관)]를 戰爭(전쟁) 勃發(발발) 後(후) 며칠간 白堊館(백악관) 安保會議(안보회의)에서 排除(배제)했고 두 달 뒤에는 CIA의[1947年(년) 國家 安全保障法(국가안전보장법)에 依(의)하여 設立(설립)된 大統領(대통령) 直屬(직속)의 美國(미국) 國家(국가)情報機關(정보기관)] 守將(수장)을 交替(교체)했다. 反共主義者(반공주의자)인 美國(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國務長官(국무장관) 顧問(고문)이 大韓民國(대한민국)을 訪問(방문)하여 38度線(도선)을 視察(시찰) 1950年(년) 6月(월) 20日(일)하는 等(등) 美國(미국)의 北枕(북침)에 대한 威脅(위협)을 느낀 김일성(金日成)이 먼저 南侵(남침)을 決定(결정)했다는 主張(주장)도 있다.
1950年(년) 6月(월) 24日(일) 陸軍本部(육군본부) 情報局(정보국) 局長(국장) : 張都暎(장도영), 北韓班長(북한반장) 金鍾泌(김종필), 文官(문관) 박정희(朴正熙)이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大規模(대규모) 兵力(병력)이 38線(선)에 集結(집결)했다는 報告(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軍(군) 首腦部(수뇌부)는 바로 그 날 非常警戒(비상경계)를 解除(해제)하였다.
그 날은 週末(주말)이라 거의 折半(절반)에 該當(해당)하는 兵力(병력)이 外出(외출)했다. 그 날 저녁 陸軍本部(육군본부) 將校(장교) 클럽(club) 落成(낙성) 파티(party)에는 前方部隊(전방부대) 師團長(사단장)들까지 招請(초청)되었었다.
그 外(외) 戰爭(전쟁)勃發(발발) 2周前(주전) 大部分(대부분)의 指揮官(지휘관)을 交替(교체)하고, 1周(주) 前(전) 大部分(대부분)의 前方(전방) 部隊(부대)의 位置(위치)를 變更(변경)하고, 前方部隊(전방부대)의 重火機(중화기)와 車輛(차량) 中(중) 60% 假量(가량)을 後方(후방)으로 보내는 等(등) 個別的(개별적)으로는 理解(이해)가 가나 綜合的(종합적)으로는 常識(상식)으로는 도저히 理解(이해)할 수 없는 行爲(행위)가 集中的(집중적)으로 일어나 李亨根(이형근)이 著書(저서) 《軍番(군번) 1番(번)의 외길人生(인생)》에서 6.25 初期(초기)의 10대 不可思議(불가사의)를 提起(제기)하며 軍(군) 指揮部(지휘부) 이승만(李承晩), 채병덕(蔡秉德) 參謀總長(참모총장), 김백일(金白一) 參謀長(참모장), 신성모(申性模) 國防部長官(국방부장관) (1949년 3월 21일 ~ 1951년 5월 5일), 장경근(張暻根) 國防部次官(국방부차관) (1950년 5월 14일 ~ 1951년 6월 22일)안에 通敵分子(통적분자)가 있다고 主張(주장)하게 되는 原因(원인)이 되며, 일각에서는 이승만(李承晩) 南侵(남침) 誘導說(유도설)의 근거가 되었다.
(李亨根(이형근)은 軍番(군번) 1番(번) 問題(문제)로 日本(일본) 陸士(육사) 先輩(선배)인 채병덕(蔡秉德)과 個人的(개인적)으로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狀態(상태)이며, 이것은 國軍(국군) 創設(창설) 첫날이자 最初(최초)의 派閥(파벌) 싸움의 始初(시초)가 되었다.)
韓國戰爭(한국전쟁) 前(전)의 여러 戰鬪(전투)
韓國戰爭(한국전쟁)이 勃發(발발)하기 前(전)에도 여러 번의 戰鬪(전투)가 있었다. 韓國戰爭(한국전쟁)이 일어나기 前(전)까지 1949年(년) 1月(월) 18日(일)부터 1950年(년) 6月(월) 24日(일)까지 있었던 戰鬪(전투)횟수는 總(총) 874回(회)였다.
1948年(년) 4月(월) 3日(일): 濟州(제주) 4·3 事件(사건)은 1947年(년) 3月(월) 1日(일)을 基點(기점)으로 1948年(년) 4月(월) 3日(일) 發生(발생)한 騷擾事態(소요사태) 및 1954年(년) 9月(월) 21日(일)까지 濟州島(제주도)에서 發生(발생)한 武力衝突(무력충돌)과 鎭壓過程(진압과정)에서 濟州道民(제주도민)들이 犠牲(희생)당한 事件(사건)을 말한다.
1948年(년) 10月(월) 19日(일): 麗水(여수)·순천사건[順天事件:順天(순천)에서 國軍(국군) 第(제)14聯隊(연대) 一部(일부)가 일으킨 叛亂(반란)事件(사건)
1949年(년) 12月(월) 24日(일): 문경 양민학살 사건(聞慶良民虐殺事件)共匪(공비)를 討伐中(토벌중)이던 國軍(국군) 第(제)2師團(사단) 25聯隊(연대) 2大隊(대대) 7中隊(중대) 2小隊(소대) 및 3小隊員(소대원) 70餘名(여명)이 慶尙北道(경상북도) 聞慶郡(문경군) 山北面(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불을 지르고 男女老少(남녀노소) 住民(주민)들을 殺害(살해)한 民間人(민간인) 大量虐殺(대량학살) 事件(사건)을 말한다.
北韓(북한)의 南侵(남침)을 正當化(정당화)하고자 하는 主張(주장)에 따르면,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이 侵入(침입)한 횟수는 432回(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回(회)는 飛行機(비행기) 侵入(침입), 42回(회)는 艦隊(함대)襲擊(습격)도 包含(포함) 되어 있었다. 물론 大韓民國(대한민국) 空軍(공군)은 地域(지역)의 偵察(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連絡機(연락기) 및 L-5 連絡機(연락기) 外(외)에, 戰爭(전쟁)勃發(발발) 直前(직전) 國民(국민) 誠金(성금)으로 캐나다(Canada)로부터 購入(구입)한 T-6 텍산 10대가 全部(전부)였다.
衝突(충돌)은 黃海道(황해도) 甕津半島(옹진반도)에서 江原道(강원도)의 襄陽(양양)까지 걸쳐져 있어 單純(단순)한 局部的(국부적) 衝突(충돌)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甕津半島(옹진반도), 開城(개성), 議政府(의정부), 春川(춘천) 그리고 江陵(강릉)附近(부근)에서 戰鬪(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地域(지역)들은 1950年(년) 6月(월) 25日(일)에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주 攻擊(공격)地域(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北韓軍(북한군) 第(제)1師團(사단)은 開城(개성) 附近(부근) 到處(도처)에서 마치 韓國軍(한국군)의 戰力(전력)이라도 試探(시탐)하듯 頻繁(빈번)한 挑發(도발)을 恣行(자행)하다가 1950年(년) 봄에 와서는 거의 每日(매일)같이 開城(개성)과 百川(백천)等(등) 38線(선) 延邊(연변)都市(도시)에 迫擊砲(박격포)射擊(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當時(당시) 大韓民國(대한민국)은 全國(전국)을 통틀어 航空機(항공기)는 고작 22대였으며 그것도 分界線(분계선)이 아닌 湖南地方(호남지방)에 있었다. 또한 艦艇(함정)은 36대 保有(보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先制攻擊(선제공격)했다는 當時(당시)의 目擊談(목격담)도 끊이지 않았다.
軍事力(군사력) 比較(비교)
1950年(년) 6月(월) 當時(당시) 北韓軍(북한군)은 13萬(만) 5쳔여명의 地上軍(지상군)을 確保(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때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兵力(병력)은 正規軍(정규군) 6萬(만) 5천여명), 海洋警察隊(해양경찰대) 4천여명, 警察(경찰) 4萬(만) 5천여명 等(등)이었다.]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육군)은 8個(개) 師團(사단) 1個(개) 獨立(독립)聯隊(연대)로 編成(편성)돼 있었다.
最前方(최전방)인 38線(선) 防禦(방어)를 위해 西(서)쪽에서부터 17聯隊(연대)(甕津半島(옹진반도))-1師團(사단)(청단∼적성)-7師團(사단)(적성∼적목리)-6師團(사단)(적목리∼진흑동)-8師團(사단)(진흑동∼동해안)을 布陣(포진)해 놓았다. 後方(후방)인 서울에는 首都警備司令部(수도경비사령부)를 두고, 大田(대전)에 2師團(사단), 大邱(대구)에 3師團(사단), 光州(광주)에 5師團(사단)을 둬 共匪(공비)掃蕩作戰(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部隊(부대)를 統合(통합) 指揮(지휘)한 것은 陸軍總參謀長(육군총참모장) 채병덕(蔡秉德) 小將(소장)이었다. 半面(반면) 北韓軍(북한군)은 民族(민족) 保衛省(보위성)에 崔庸健(최용건) 副元帥(부원수)를 앉히고(1948年(년), 只今(지금)의 韓國(한국) 陸軍(육군) 野戰軍司令官(야전군사령관)에 該當(해당)하는 戰線司令部(전선사령부)를 만들어 김책(金策) 大將(대장)(4星(성)將軍(장군)을 司令官(사령관)에, 강건(姜健) 中將(중장)(2星(성)將軍(장군)을 參謀長(참모장)에 任命(임명)했다.
그리고 戰線司令部(전선사령부) 밑에는 西部戰線(서부전선)을 擔當(담당)하는 1軍團(군단)과 東部戰線(동부전선)을 攻擊(공격)할 2軍團(군단)을 創設(창설)했다. 1軍團長(군단장)에는 김웅(金雄) 中將(중장)을, 2軍團長(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中將(중장)을 任命(임명)했다.
6月(월) 12日(일)부터 北韓軍(북한군)의 38線(선) 配置(배치)를 위한 部隊(부대) 移動(이동)은 始作(시작)되었으나 38線(선)에서 떨어져 있던 部隊(부대)들이 일제히 南下(남하)했다. 23日(일)에 完了(완료)된 北韓軍(북한군)의 38線(선) 配置(배치) 兵力(병력)을 보면 10個(개) 步兵(보병)師團(사단)과 1個(개) 戰車(전차)旅團(여단) 및 3個(개) 警備(경비)旅團(여단) 等(등)으로서 北韓(북한) 共産軍(공산군)의 總兵力(총병력)에 該當(해당)하는 것이었다.
北韓軍(북한군) 1軍團(군단) 麾下(휘하)에는 6師團(사단)-1師團(사단)-4師團(사단)-3師團(사단)-105戰車(전차)旅團(여단)이, 2軍團(군단)에는 2師團(사단)-12師團(사단)-5師團(사단)이 配屬(배속)되었다(西(서)쪽에서부터). 그리고 豫備部隊(예비부대)로 13師團(사단)은 1軍團(군단)에, 15師團(사단)은 2軍團(군단)에 配屬(배속)하고, 10師團(사단)은 總豫備隊(총예비대)로 北韓(북한) 防禦(방어)를 위해 平壤(평양)地域(지역)에 配置(배치)해두었다.
北韓軍(북한군)과 別途(별도)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內務省(내무성)에 北韓(북한) 住民(주민)의 越南(월남)을 막는 部隊(부대)로 38警備隊(경비대)(韓國(한국)의 戰鬪警察隊(전투경찰대)와 恰似(흡사) 3個(개) 旅團(여단)을 編成(편성)했다. 이 中(중)3警備旅團(경비여단)은 國軍(국군) 17聯隊(연대)가 布陣(포진)한 甕津半島(옹진반도) 바로 北(북)쪽에 布陣(포진)해 있었다.
北韓軍(북한군)은 蘇聯製(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戰鬪機(전투기)와 IL爆擊機(폭격기) 200여 대, 各種(각종) 中野砲(중야포)와 中迫擊砲(중박격포)로 武裝(무장)하고 있었다.
半面(반면)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은 韓國戰爭(한국전쟁) 直前(직전)까지 空軍(공군)은 對空砲火(대공포화)가 없는 地域(지역)의 偵察(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連絡機(연락기) 및 L-5 連絡機(연락기) 外(외)에, 戰爭勃發(전쟁발발) 直前(직전) 國民(국민) 誠金(성금)으로 캐나다(Canada)로부터 購入(구입)한 T-6 텍산(Texan) 10대를 追加(추가)한 것이 全部(전부)였다.
陸軍(육군)은 탱크(Tank)와 機甲(기갑)車輛(차량)(裝甲車(장갑차)은 全無(전무)했으며, 有一(유일)한 獨立(독립) 機甲(기갑)聯隊(연대)의 裝備(장비)는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當時(당시)에도 偵察用(정찰용)으로 쓰인 37mm 對戰車砲(대전차포)를 搭載(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greyhound) 裝甲車(장갑차) 1個(개) 大隊(대대)가 全部(전부)였다.
大戰車(대전차) 火力(화력)으로는 步兵用(보병용)의 2.36인치 바주카포(bazooka)와 砲兵(포병) 兵科(병과)의 57mm 對戰車砲(대전차포)가 있었지만, 그것은 性能(성능)이 向上(향상)된 후기형T-34를 상대하기에는 힘든 武器(무기)였다.
또한 現代戰(현대전)의 核心(핵심) 支援(지원) 戰力(전력)인 砲兵(포병)은 105mm 火砲(화포)와 4.2인치 迫擊砲(박격포)만으로 武裝(무장)하고 있었을뿐더러 그나마도 師團(사단) 당 1個(개) 大隊(대대)만 配置(배치)되어 있었고, 砲彈(포탄)도 不足(부족)했다.
實際(실제)로 白善燁(백선엽) 將軍(장군)이 指揮(지휘)한 開城(개성) - 汶山(문산) - 坡州(파주) 軸線(축선)을 防禦(방어)하던 國軍(국군) 1 步兵(보병)師團(사단)은 戰鬪(전투) 하루 만에 砲彈(포탄)이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
全體的(전체적)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은 但只(단지) 15일간 戰鬪(전투) 行爲(행위) 수행이 可能(가능)한 補給品(보급품)만 가지고 있었다.
原因(원인)~南侵(남침)
韓國(한국) 戰爭(전쟁)은 北韓(북한)의 의지로 勃發(발발)하였으며,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Joseph Stalin)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毛泽东)의 支援(지원)을 約束(약속)(김일성(金日成)은 蘇聯(소련)의 支援(지원)이 充分(충분)하므로,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의 支援(지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음) 받고 일으킨 南侵(남침)이며, 이 說明(설명)은 大韓民國(대한민국)과 美國(미국)의 記錄(기록), 公開(공개)된 舊(구) 蘇聯(소련)의 秘密文書(비밀문서)를 通(통)해 證明(증명)되었다.
蘇聯(소련)共産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尼基塔·赫鲁晓夫(Nikita Khrushchev 전(前)書記長(서기장)은 그의 回顧錄(회고록)에서 韓國戰爭(한국전쟁)은 김일성(金日成)의 計劃(계획)과 스탈린(Сталин:Stalin)의 承認(승인)으로 始作(시작)되었다는 點(점)을 밝혔다.
結局(결국) 舊(구) 蘇聯(소련) 秘密文書(비밀문서)의 公開(공개)에 따라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南侵(남침)은 김일성(金日成)이 主導(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支援(지원)을 約束(약속)받은 것도 김일성(金日成)이라는 것이 밝혀져 內亂(내란)擴戰說(확전설), 이승만(李承晩) 主導說(주도설) 等(등)은 그 說得力(설득력)을 잃고 있다.
戰爭(전쟁)記念館(기념관)에서 展示(전시) 中(중)인 러시아(Russia)語(어)로 된 南侵(作戰計劃書(남침작전계획서) 閉鎖的(폐쇄적)인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共産主義(공산주의) 體制(체제)의 特性(특성), 參戰者(참전자) 證言(증언), 舊(구) 蘇聯(소련)의 公開(공개)된 文書(문서)를 考慮(고려)할 때,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主張(주장)하는 이승만(李承晩) 北枕說(북침설)은 說得力(설득력)이 없다.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境遇(경우), 大韓民國(대한민국)과의 修交(수교) 前(전)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主張(주장)인 北枕說(북침설)을 公式的(공식적)으로 同意(동의)하였으나, 最近(최근)의 經濟開放(경제개방)과 大韓民國(대한민국)과의 修交(수교) 以後(이후)에는 南侵說(남침설)을 定設(정설)로 認定(인정)하고 있다.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은 1996年(년) 7月(월)에 韓國戰爭(한국전쟁)의 記錄(기록)을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北枕(북침)에서 北韓(북한)의 南侵(남침)으로 修整(수정)하는 歷史(역사) 敎科書(교과서) 改定(개정)을 하였다.
蘇聯(소련)의 崩壞(붕괴) 以後(이후) 베일(veil)에 싸여 있던 韓國戰爭(한국전쟁) 關聯(관련) 秘密文書(비밀문서)가 公開(공개)된 以後(이후), 韓國戰爭(한국전쟁)의 原因(원인)은 南朝鮮勞動黨(남조선로동당) 박헌영(朴憲永)의 說得(설득)을 받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金日成)이 大規模(대규모)의 大韓民國(대한민국) 侵入(침입)을 計劃(계획)하고 스탈린(Stalin:Сталин)의 裁可(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過程(과정)에서 스탈린(Stalin:Сталин)은 김일성(金日成)의 裁可(재가)를 무려 48번이나 拒絶(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Guerrilla warfare)만 許容(허용)했지만 김일성(金日成)의 强力(강력)한 意志(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結局(결국) 스탈린(Stalin:Сталин)은 南侵(남침)을 承認(승인)하고 말았다. 美國(미국)의 社會學者(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에 따르면, 당초 豫想(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Stalin:Сталин)이 훨씬 더 깊이 介入(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英國(영국) 情報機關(정보기관)에서 나온 文件(문건)에 따르면, 스탈린(Stalin:Сталин)은 김일성(金日成)에게 '美國(미국)은 大韓民國(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戰爭記念館(전쟁기념관)에서 展示(전시) 中(중)인
러시아(Россия:Russia)語(어)로 된 南侵作戰(남침작전) 計劃書(계획서)
過去(과거)의 韓國戰爭(한국전쟁) 原因假說(원인가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中心(중심)이 된 人民解放戰爭(인민해방전쟁)이라는 評價(평가)와 함께 北枕(북침)이라는 見解(견해), 南侵(남침)이라는 見解(견해), 雙方(쌍방) 責任論(책임론)이 過去(과거)에 있었고, 自由民主主義(자유민주주의) 體制(체제)를 修好(수호)한 戰爭(전쟁) 이라는 評價(평가) 等(등)도 있다.
大韓民國(대한민국) 中心(중심) 時角(시각)으로는 軍兵力(군병력)과 警察兵力(경찰병력)의 休暇日(휴가일)을 利用(이용)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武力(무력) 挑發(도발)行爲(행위)이자 南侵(남침)으로 規程(규정)하고 있고, 共産主義(공산주의) 勢力(세력)으로부터 自由民主主義(자유민주주의) 體制(체제)를 修好(수호)한 戰爭(전쟁)이라고도 主張(주장)해 왔다.
다음은 大韓民國(대한민국)과 美國(미국) 等(등)의 國家(국가)에서 過去(과거)에 提起(제기)되었던 韓國戰爭(한국전쟁) 原因(원인)에 대한 여러 假說(가설)과 主張(주장)들이다.
스탈린(Stalin:Сталин) 主導說(주도설)
韓國(한국) 戰爭(전쟁)이 김일성(金日成)이 아니라 스탈린(Stalin:Сталин) 의 意志(의지)로 勃發(발발)했다는 說(설)이다.
그 理由(이유)로 北大西洋條約機構(북대서양조약기구)의 壓力(압력)을 極東(극동)으로 分散(분산), 美日(미일)平和條約(평화조약)의 牽制(견제), 美國(미국)의 威信(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Asia) 地域(지역)의 共産化(공산화)를 促進(촉진)하기 위한 武力(무력)示威(시위),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의 獨自(독자) 路線(노선)에 대한 牽制(견제) 等(등)의 理由(이유)로 韓國戰爭(한국전쟁)이 始作(시작)되었다고 主張(주장)하고 있다.
蘇聯(소련)은 蘇聯(소련)의 支配(지배) 아래 있던 부라야트 소비에트(Бураят Советский:Burayat Soviet) 社會主義(사회주의) 自治(자치) 共和國(공화국)(現(현) 부라야트(Buraya) 共和國(공화국)의 機甲部隊(기갑부대) 軍事(군사) 1,500餘名(여명)을 派遣(파견)했으며, 戰爭(전쟁) 初(초) 서울(Seoul)에 나타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탱크(Tank)는 모두 이들이 操縱(조종)했다는 說(설)도 蘇聯(소련)의 主導(주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스탈린(Stalin:Сталин)은 美國(미국)과의 葛藤(갈등)을 걱정하여 韓國戰爭(한국전쟁)을 反對(반대)하는 立場(입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일성(金日成)은 스탈린(Stalin:Сталин)에게 50여회 가량을 韓國戰爭(한국전쟁)을 勃發(발발)시켜 달라는 裁可(재가)를 要求(요구)하였고, 스탈린(Stalin:Сталин)은 이를 拒絶(거절)하였지만, 結局(결국)은 以後(이후)에 戰爭(전쟁)을 承認(승인)하게 되었다.
韓美(한미) 共謀說(공모설)
이승만(李承晩)의 第(제)1共和國(공화국)의 北進統一論(북진통일론)이 對南(대남)挑發(도발)을 促進(촉진)시켰다는 說(설)이다.
이승만(李承晩)은 여러 차례 武力(무력)北進(북진) 統一(통일)을 부르짖었으며, 美國(미국)의 軍事援助(군사원조)를 공공연히 要請(요청)한 바 있다.
實際(실제)로 1950年代(년대) 初(초)부터 南北(남북)은 競爭的(경쟁적)으로 軍備(군비)를 增强(증강)시키기 始作(시작)했고, 美國(미국)이 國軍(국군)을 强化(강화)시키면 이승만(李承晩)이 武力統一(무력통일)을 推究(추구)할 것이라고 判斷(판단),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豫防的(예방적) 措置(조치)를 取(취)했다는 主張(주장)이다.
하지만 韓美(한미)共謀說(공모설)은 위 項目(항목)에 關聯(관련)된 舊 蘇聯(구소련)의 文書公開(문서공개)로, 提示(제시)된 적 있는 假說(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年(년) 6月(월), 56年(년)만에 公開(공개)된 CIA 極秘文書(극비문서)에서 韓國戰爭(한국전쟁) 勃發(발발) 불과 엿새전인 6月(월) 19日(일), 北韓(북한)의 南侵(남침)可能性(가능성)이 낮게 評價(평가)한 報告書(보고서)를 作成(작성)하였고 北韓(북한)이 蘇聯(소련)의 徹底(철저)한 衛星國家(위성국가)로 獨自的(독자적)인 戰爭(전쟁) 隨行能力(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
內亂(내란) 擴戰說(확전설)
韓國戰爭(한국전쟁)은 6月(월) 25日(일)에 始作(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以前(이전)의 期間(기간)을 包含(포함)해야 한다는 說(설)이다.
1950年(년) 以前(이전)부터 이미 政治的(정치적), 理念的(이념적) 對立(대립)에 따른 局地的(국지적) 武力衝突(무력충돌)이 數十(수십) 次例(차례) 繼續(계속)되었으며 그것이 擴大(확대)되어 韓國戰爭(한국전쟁)이 되었다는 視覺(시각)이다.
實際(실제)로 1950年(년) 6月(월) 25日(일) 以前(이전)에 이미 數(수)많은 局地戰(국지전)과 武力衝突(무력충돌)이 있었으며, 1950年(년) 6月(월) 25日(일)에도 사람들은 旣存(기존)의 局地戰(국지전)의 延長(연장)으로 認識(인식)하여 避難(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視覺(시각)에 따르면, 戰爭(전쟁)期間(기간)은 다음과 같이 區分(구분)한다.
1.작은 戰爭(전쟁)( ~ 1950年(년) 6月(월) 25日(일)): 38線(선) 附近(부근)에서의 局地的(국지적) 武力衝突(무력충돌)이 繼續(계속)됨.
2.制限戰爭(제한전쟁)(1950年(년) 6月(월) 25日(일) ~ 1950年(년) 7月(월) 1日(일): 北韓(북한)이 大規模(대규모) 武力(무력)動員(동원)을 通(통)해 大韓民國(대한민국)의 首都(수도) 서울(Seoul)을 電擊(전격) 侵奪(침탈)하여 不法(불법)으로 統一政府(통일정부)를 樹立(수립)하려 함.
3.全面戰爭(전면전쟁)(1950年(년) 7月(월) 1日(일) ~ 1950年(년) 10月(월): 日本(일본)에 駐屯(주둔)하고 있던 大隊(대대)規模(규모)의 美軍(미군) 스미스(smith)隊(대)가 參戰(참전), 北韓(북한)은 7月(월) 1日(일)부로 戰時國家總動員令(전시국가총동원령)을 發令(발령)함.
4.擴大戰爭(확대전쟁)(1950年(년) 10月(월) ~ 1951年(년) 6月(월): 仁川(인천)上陸作戰(상륙작전)의 成功(성공) 後(후) UN聯合軍(연합군)은 서울(Seoul)을 收復(수복)함.
以後(이후) 降伏(항복)을 再次(재차) 勸告(권고)했으나 對答(대답)이 없어, 國軍(국군)이 最初(최초)로 38線(선)을 넘어 北進(북진) 始作(시작), 곧 유엔(UN)軍(군)도 進擊(진격) 始作(시작), 平壤收復(평양수복), 鴨綠江(압록강)까지 進擊(진격)했으나, 中國人民解放軍(중국인민해방군) 參戰(참전)으로 이어짐. 戰爭(전쟁)이 새로운 局面(국면)으로 접어듦.
5.固着戰爭(고착전쟁)(1951年(년) 6月(월) ~ ): 中國人民解放軍(중국인민해방군)의 2次例(차례)에 걸친 春季攻勢(춘계공세)를 막아내고 聯合軍(연합군)의 莫强(막강)한 火力(화력)에 共産側(공산측)이 停戰協定(정전협정)을 받아들임.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爲主(위주)이거나 그를 中心(중심)으로 評價(평가)하려는 視覺(시각)에 依(의)하면 人民軍(인민군)이 中心(중심)이 된 人民解放戰爭(인민해방전쟁)이라는 評價(평가)와 함께 北枕(북침)이라는 主張(주장), 美國(미국) 等(등) 外國(외국)의 介入(개입)으로 失敗(실패)한 解放戰爭(해방전쟁)이라는 主張(주장)도 있다.
其他(기타) 兩是兩非論的(양시양비론적) 性格(성격)으로 雙方責任論(쌍방책임론)을 提起(제기)하는 意見(의견)도 있다.
經過(경과)
北韓(북한)의 김일성(金日成)의 命令下(명령하)에, 大韓民國(대한민국)이 攻擊(공격)해 왔으므로 부득이 反擊(반격)한다는 虛僞宣傳(허위선전)을 하면서, 蘇聯(소련)에서 支援(지원)한 最新型(최신형) T-34/85를 앞세운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1950年(년) 6月(월) 25日(일) 午前(오전) 4時(시), 38度線(도선)과 東海岸(동해안) 연선(沿線) 等(등) 11個所(개소)에서 境界(경계)를 넘어 大韓民國(대한민국)을 奇襲(기습) 南侵(남침)하였다.
大韓民國(대한민국)은 數的(수적)으로 劣勢(열세)인데다 裝備(장비)도 不足(부족)했다. 午前(오전) 9時(시)경에는 開城(개성)防禦線(방어선)을 擊破(격파)하고 當日(당일) 午前(오전)에 東豆川(동두천)과 抱川(포천)을 陷落(함락)시켰다.
26日(일) 午後(오후)에 議政府(의정부)를, 27日(일) 正午(정오)에는 이미 서울(Seoul) 道峰區(도봉구)의 倉洞(창동)防禦線(방어선)을 넘었다. 倉洞(창동)防禦線(방어선)이 뚫린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은 미아리防禦線(방어선)을 構築(구축)하였으나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戰車(전차)에 의해 崩壞(붕괴)되었다.
28日(일) 새벽에는 서울(Seoul) 市內(시내)가 占領(점령)되고, 午前(오전) 2時(시) 30分(분)에 爆破(폭파)를 맡은 將校(장교) 세 사람에 依(의)해 漢江 大橋(한강대교)가 爆破(폭파)되었다.
美國(미국) 空軍(공군) 航空機(항공기)가 “當時(당시) 美空軍(미공군)이 使用(사용)하던 航空機(항공기) 投下用(투하용) ‘AN-M64’ 美製 爆彈(미제폭탄)”을 漢江大橋(한강대교)와 漢江鐵橋(한강철교)에 投下(투하)했다.
北韓(북한)의 南侵(남침)은 때마침 冷戰(냉전)으로 緊張(긴장)되어 있는 全世界(전세계)에 미친 바, 波紋(파문)은 참으로 前(전)에 없던 것이었다.
戰爭(전쟁)이 勃發(발발)하자 本國(본국)과 連絡(연락)이 杜絶(두절)된 駐美(주미) 韓國大使(한국대사) 兼(겸) UN(유엔) 韓國代表(한국대표) 장면(張勉)은 때를 놓치지 않고서 國難(국난)을 打開(타개)하는 重責(중책)을 짊어지고 祕藏(비장)한 決意(결의)로 6月(월) 24日(일) 當日(당일) 美國(미국)은 韓國(한국)보다 하루 늦음) 우선 美國務省(미국무성)과 徹夜協議(철야협의)한 結果(결과) 韓國(한국)問題(문제)를 翌日(익일) UN(유엔)安保理事會(안보이사회)에 緊急提訴(긴급제소)하여 25日(일)과 27日(일)의 決議(결의)로 北韓(북한)을 侵掠者(침략자)로 規程(규정)하고 卽時(즉시) 38線(선) 以北(이북)으로 撤退(철퇴)할 것과 會員國家(회원국가)는 이 侵掠者(침략자)를 援助(원조)하지 말뿐 아니라 이를 擊退(격퇴)시키는데 協力(협력)할 것을 決議(결의)하였다.
事態(사태)를 重視(중시)한 美國(미국) 大統領(대통령)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은 27日(일) 美海空軍(미해공군)에 出動(출동)을 命令(명령)하고 다시 30日(일)에는 美地上軍(미지상군)의 韓國出動(한국출동)을 命令(명령)함과 同時(동시)에 韓國(한국) 全(전) 海岸(해안)의 海上封鎖(해상봉쇄)를 命(명)하였다.
그 사이, 6月(월) 28日(일) 서울(Seoul)은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에게 陷落(함락)당하였으나 장면(張勉)은 '美國(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放送(방송)을 通(통)해 유엔(UN) 決意事項(결의사항) 等(등)을 本國(본국)에 放送(방송)하였다.
이어 7月(월)7日(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元帥(원수)를 總司令官(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UN)軍(군)이 組織(조직)되었고 8日(일)에는 유엔(UN) 決意(결의)에 依(의)한 유엔(UN) 깃발이 처음으로 戰場(전장)에 나타나게 되었다.
7月(월) 14日(일)에는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의 指揮權(지휘권)이 美軍(미군)에게 넘어갔다.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少將(소장)이 行方不明(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有名(유명)한 大田(대전)戰鬪(전투)(7月(월) 20日(일)를 비롯한 戰爭(전쟁) 初期(초기)에 있어서 美國(미국) 第(제)24師團(사단)과 國軍(국군)은, 壓倒的(압도적)인 兵力(병력)과 裝備(장비)를 갖춘 北韓軍(북한군)의 作戰(작전)에 對抗(대항)하여 遲延作戰(지연작전)으로써 後方(후방)의 韓(한) · 美軍(미군)의 增援(증원)展開(전개)를 위한 貴中(귀중)한 時間(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한편 大田(대전)을 넘어선 北韓軍(북한군)은 進路(진로)를 세 方面(방면)(湖南(호남), 慶北(경북) 倭館(왜관)(洛東江(낙동강), 永川(영천) 및 浦項(포항)으로 侵攻(침공)을 繼續(계속)하였다.
北韓軍(북한군)은 湖南平野(호남평야)를 휩쓸고서 南海岸(남해안) 沿岸(연안)으로 侵入(침입)하는 한편 慶北(경북) 北部(북부) 戰線(전선)과 東海岸(동해안) 戰線(전선)과 呼應(호응)하여 세 方面(방면)으로부터 釜山(부산)-大邱(대구)의 美軍(미군) 補給線(보급선)을 切斷(절단)하여 韓美(한미) 兩軍(양군)을 바다로 몰아넣으려는 作戰(작전)을 强行(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北韓軍(북한군)의 攻勢(공세)에 밀린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는 大田(대전)과 大邱(대구)를 거쳐 釜山(부산)까지 移轉(이전)하였다. 韓(한) · 美聯合軍(미연합군)은 洛東江(낙동강)을 最前線(최전선)으로 東海岸(동해안)의 浦項(포항)으로부터 北部(북부)의 倭館(왜관) 南部(남부) 海岸(해안)의 馬山(마산)을 連絡(연락)하는 워커 라인(Walker line)(釜山(부산) 半月形(반월형) 陣地(진지))를 構築(구축)하고 最後(최후)의 決戰(결전)을 展開(전개)하였다.
北韓軍(북한군)은 8月(월) 15日(일) 大邱(대구)를 侵攻(침공)하고자 大邱(대구) 西南北坊(서남북방)에 6萬(만)의 兵力(병력)과 數十(수십)대의 戰車(전차)를 集中(집중)하였으나 16日(일) 美國(미국) 空軍(공군) B29의 戰略的(전략적) 大爆擊(대폭격)으로 말미암아 完全(완전) 潰滅(궤멸)되었고 한편 이 사이에 聯合軍(연합군) 兵力(병력)은 韓國軍(한국군) 5個(개) 師團(사단)을 비롯하여 美軍(미군) 4個(개)師團(사단), 英國軍(영국군) 2個(개) 大隊(대대), 濠洲軍(호주군) 1個(개) 大隊(대대) 그 밖에 10個國(개국)에서 派遣(파견)된 數萬(수만)의 聯合軍(연합군)으로써 增員(증원)되어 이렇게 北韓軍(북한군)의 主力(주력)을 誘導吸收(유도흡수)한 聯合軍(연합군)은 마침내 9月(월) 15日(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總指揮下(총지휘하)에 仁川(인천) 上陸作戰(상륙작전)을 敢行(감행)하여 成功(성공)하였다.
9月(월) 28日(일)에 洛東江(낙동강) 防禦線(방어선)을 넘어 大大的(대대적)인 反擊(반격)을 開始(개시)했으며, 같은 날 서울(Seoul) 中央廳(중앙청)에서 이승만(李承晩) 大統領(대통령)은 맥아더(Douglas MacArthur) 元帥(원수)를 同伴(동반)하여 서울(Seoul) 收復式(수복식)을 擧行(거행)하였고 비로소 90餘日間(여일간) 죽음에 사로잡혔던 서울(Seoul) 市民(시민)은 다시 自由(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유엔(UN) 總會(총회)는 38線(선) 突破(돌파)에 대한 基本的(기본적)인 目標(목표)를 附與(부여)함으로써 本格的(본격적)인 北進(북진)이 展開(전개)되어 10月(월) 19日(일)에는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首都(수도)인 平壤(평양)까지 다다랐고, 26日(일)에는 國境(국경)地帶(지대)인 초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中國(중국) 人民(인민) 支援軍(지원군) 28萬名(만명)이 戰鬪(전투)에 介入(개입)하여(11月(월) 28日(일) 戰勢(전세)가 搖動(요동)치게 되었으며, 聯合軍(연합군)은 長津湖 長津湖(장진호) 地區(지구)의 血戰(혈전)을 전사(戰史)에 남기고 撤收(철수) 作戰(작전)을 始作(시작)하여 서울(Seoul) 市民(시민)은 또다시 쓰라린 1·4 後退(후퇴)를 겪게 되었다.
그 渦中(와중)에 居昌(거창) 良民虐殺(양민학살) 事件(사건), 國民防衛軍(국민방위군) 事件(사건) 等(등)의 事件(사건)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韓半島內(한반도내)에서 美國(미국), 蘇聯(소련), 中國(중국)까지 介入(개입)하여 韓半島(한반도)에서 모두 맞붙었다.
勃發(발발)과 서전(緖戰)
倭館(왜관) 慶尙北道(경상북도) 漆谷郡(칠곡군) 倭館邑(왜관읍)에서 美軍(미군)이 버려진 T-34/85를 살펴보고 있다. T-34/85는 共産(공산) 國家(국가)의 盟主格(맹주격)인 蘇聯(소련)에서 大量(대량)으로 製作(제작)하여 여러 共産圈(공산권)에 뿌린 關係(관계)로 當時(당시) 北韓(북한) 뿐만 아니라 共産界(공산계)의 主力(주력) 戰車(전차)였다.
倭館(왜관)(慶尙北道(경상북도) 漆谷郡(칠곡군) 倭館邑(왜관읍)에서 美軍(미군)이 버려진 T-34/85를 살펴보고 있다. T-34/85는 共産國家(공산국가)의 盟主格(맹주격)인 蘇聯(소련)에서 大量(대량)으로 製作(제작)하여 여러 共産圈(공산권)에 뿌린 關契(관계)로 當時(당시) 北韓(북한) 뿐만 아니라 共産界(공산계)의 主力(주력) 戰車(전차)였다.
開戰初期(개전초기) 北韓步兵(북한보병)의 基本火器(기본화기)
北韓軍(북한군)은 "先制打擊戰略(선제타격전략)"으로 불리는 戰爭開始(전쟁개시) 作戰計劃(작전계획)에 따라, 1950年(년) 6月(월) 25日(일) 새벽 4時(시)에 人民軍(인민군)은 242대의 戰車(전차)를 앞세우고 38線(선)을 넘어 甕津(옹진) · 開城(개성) · 東豆川(동두천) · 春川(춘천) · 인악(仁岳) 等地(등지)의 陸路(육로)와, 東海岸(동해안)을 돌아 삼척(三陟) · 임원진(臨院津) 等地(등지)에 上陸(상륙)하여 일제히 攻擊(공격)해 왔다.
北韓軍(북한군) 3警備旅團(경비여단)과 6師團(사단) 所屬(소속)의 14聯隊(연대)를 動員(동원)해 甕津半島(옹진반도)에 配置(배치)된 韓國軍(한국군) 17聯隊(연대)를 攻擊(공격)하였고, 北韓軍(북한군) 6師團(사단)과 1師團(사단)은 韓國軍(한국군) 第(제)1師團(사단)을(開城(개성) 文山地區(문산지구), 北韓軍(북한군) 4師團(사단)과 3師團(사단)은 韓國軍(한국군) 第(제)7師團(사단)을(議政府(의정부) 地區(지구), 北韓軍(북한군) 2師團(사단)과 12師團(사단)은 韓國軍(한국군) 6師團(사단)을(春川地區(춘천지구), 北韓軍(북한군) 5師團(사단)은 12사이드카(sidecar)聯隊(연대)를 配屬(배속)받아 韓國軍(한국군) 8師團(사단)(江陵地區(강릉지구)을 밀어붙였다.
단 한 대의 戰車(전차)도 없는 無防備(무방비) 狀態(상태)에서 攻擊(공격)을 당한 韓國軍(한국군)은 全般的(전반적)으로 北韓軍(북한군)에게 밀려 後退(후퇴)하였다.
韓國軍(한국군)은 卽刻(즉각) 週末(주말) 外出(외출) 中(중)인 將兵(장병)들을 全員(전원) 歸隊(귀대)시키고 後方(후방) 師團(사단)들로부터 5個(개) 聯隊(연대)를 一線(일선)에 急派(급파)하였으나 26日(일)에 甕津半島(옹진반도)의 韓國軍(한국군) 17聯隊(연대)는 할 수 없이 撤收(철수)했고, 치열한 공방전(攻防戰) 끝에 議政府(의정부)가 敵(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27日(일) 저녁에는 서울(Seoul) 東北方(동북방) 미아리 高地(고지)를 防禦(방어)하는 韓國軍(한국군) 第(제)5師團(사단) 및 第(제)7師團(사단)의 陣中(진중)에 敵(적)이 浸透(침투)하여 彼此(피차) 敵(적)을 分揀(분간)할 수 없는 肉薄戰(육박전)이 벌어졌다.
이 混亂(혼란) 中(중)에 적 戰車部隊(전차부대)의 一部(일부)는 이미 서울(Seoul) 市內(시내)에 侵入(침입)했으며, 政府(정부)는 大田(대전)으로 後退(후퇴)했다. 28日(일) 새벽 3時(시) 漢江(한강) 人道敎(인도교)가 豫定(예정)時間(시간)보다 앞서 爆破(폭파)되고, 漢江(한강) 以北(이북)의 韓國軍(한국군)은 總退却(총퇴각)을 敢行(감행)해, 北韓軍(북한군) 戰鬪機(전투기)가 上空(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渡河作戰)을 展開(전개)하여 全員(전원) 撤收(철수)하니 28日(일)에는 首都(수도) 서울(Seoul) 이 敵(적)에게 完全(완전) 陷落(함락)되었다.
陸軍本部(육군본부)는 水原(수원)으로 後退(후퇴)하고 渡江(도강)한 韓國軍(한국군) 部隊(부대)들은 統合再編(통합재편)되어 漢江(한강) 남안에 防禦線(방어선)을 構築(구축)했다.
開戰(개전) 初期(초기) 北韓(북한) 步兵(보병)의 基本火器(기본화기)
甕津半島(옹진반도) 戰鬪(전투)~開城(개성), 文山(문산) 戰鬪(전투)
韓國戰爭(한국전쟁) 勃發日(발발일)(1950年(년) 6月(월) 25日(일) 청단(靑丹), 연백(延白), 開城(개성), 고랑포(高浪浦) 一帶(일대)에서는 韓國軍(한국군) 第(제)1師團(사단)師團長(사단장) 白善燁(백선엽)이 第(제)203戰車(전차)聯隊(연대)로 增强(증강)된 北韓軍(북한군) 第(제)1師團(사단) 및 第(제)6師團(사단)과 맞서 싸웠다.
開戰直前(개전직전), 韓國軍(한국군) 第(제)1師團(사단) 麾下(휘하)에는 第(제)11, 12, 13聯隊(연대)가 配屬(배속)되어 있었다.
第(제)12聯隊(연대)는 靑丹郡(청단군)에서 開城市(개성시)까지 80km, , 第(제)13聯隊(연대)는 第(제)12聯隊(연대) 配置(배치)地域(지역)의 西(서)쪽 끝인 禮成江(예성강) 流域(유역)부터 20km(卽(즉), 대원리(大院里)-원당동(元堂洞) 區間(구간)에 이르는 38線(선), 卽(즉) 國境(국경)을 警備(경비)하고 있었고 第(제)11聯隊(연대)는 師團(사단) 豫備(예비)로서 수색에 駐屯(주둔)하고 있었다.
北韓軍(북한군) 第(제)1師團(사단)과 第(제)6師團(사단)이 砲擊(포격)과 그에 이어, 戰車部隊(전차부대)를 앞세워 38線(선)을 넘어 戰鬪(전투)를 開始(개시)하자 第(제) 12聯隊(연대)는 초전(初戰)에 分散(분산)되어 開豊郡(개풍군) 南端(남단)의 漢江(한강) 最下流(최하류)에서 江(강)을 건너 김포반도(金浦半島)와 文山里(문산리)로 撤收(철수)하였다. 第(제)11聯隊(연대)는 수색에서 文山(문산)으로 나아가, 臨津江(임진강) 防禦線(방어선)에서 北韓軍(북한군)을 맞았다. 第(제)13聯隊(연대)는 坡州(파주) 坡平山(파평산)에서 北(북)쪽을 向(향)해 防禦戰(방어전)을 펼쳤다.
다음날(6月(월) 26日(일), 第(제)1師團(사단)의 西(서)쪽에 位置(위치)한 韓國軍(한국군) 第(제) 7師團(사단)이 後退(후퇴)함으로써 西(서)쪽이 脆弱(취약)해지게 되고, 이 틈에 北韓軍(북한군) 第(제)6師團(사단)의 一齊攻擊(일제공격)에 밀려, 第(제)11聯隊(연대)는 臨津江(임진강) 防禦線(방어선)에서 물러났다.
또한 第(제)13聯隊(연대)도 坡平山(파평산)에서 北韓軍(북한군)에 抵抗(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이로써 1師團(사단) 指揮部(지휘부)는 봉일천에 駐屯(주둔)하게 된다.
第(제)12聯隊(연대)를 좇아 北韓軍(북한군) 第(제)6師團(사단)은 金浦(김포)와 서울 陽川區(양천구)까지 進出(진출)하였다.(6月(월) 28日(일)
議政府(의정부) 戰鬪(전투).
6·25 勃發(발발) 直前(직전), 議政府(의정부) 抱川(포천) 地域(지역)의 38線(선)은 第(제)7師團(사단) 師團長(사단장) 劉載興(유재흥)의 例下(예하) 第(제)1 · 9聯隊(연대)와 砲兵(포병), 工兵(공병)이 防禦(방어)를 擔當(담당)하고 있었다.
第(제)1聯隊(연대)는 東豆川(동두천) 正面(정면) 西(서)쪽), 第(제)9聯隊(연대)는 抱川(포천) 正面(정면) 東(동쪽)에 配置(배치)되었다.
한편 北韓軍(북한군)은 鐵原(철원)-漣川(연천)-議政府(의정부)를 거쳐 서울(Seoul)을 조기 占領(점령)하려는 計劃(계획)하여 第(제)1軍團(군단)의 2個(개) 師團(사단)이 議政府(의정부) 正面(정면)을 集中(집중) 攻擊(공격)할 準備(준비)를 해 두었다.
勃發(발발) 當日(당일), 營內(영내)에 待機(대기)하고 韓國軍(한국군) 第(제)9聯隊(연대)를 北韓軍(북한군) 第(제)3師團(사단)이 攻擊(공격)을 始作(시작)하였다.
境界任務(경계임무) 中(중)이던 第(제)9聯隊(연대) 第(제)2大隊(대대)는 北韓軍(북한군)의 砲擊(포격)에 後退(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第(제)2大隊長(대대장)의 戰況(전황) 報告(보고)를 받은 第(제)9聯隊長(연대장)尹春根(윤춘근)은 議政府(의정부)邑內(읍내)에 대기 中(중)이던 第(제)1 · 3大隊(대대)로 하여금 抱川(포천) 신북면 만세교 附近(부근)에서 陣地(진지)를 構築(구축)하게 하고 防禦戰(방어전)을 펼쳐 北韓軍(북한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北韓軍(북한군) 第(제)3師團(사단) 第(제)7·9聯隊(연대)는 호국로를 따라 南侵(남침)을 繼續(계속)했다.
이에, 第(제)1·3大隊(대대)는 끝내 흩어지고 다음날 議政府(의정부) 等(등)에서 集結(집결)했다. 한편, 首都警備司令部(수도경비사령부) 例下(예하)의 第(제)3聯隊(연대)가 抱川(포천)에 急派(급파)되어 소흘읍 송우리 附近(부근)에서 防禦戰(방어전)을 펼쳤으나 이 亦是(역시) 北韓(북한)의 機械化部隊(기계화부대)에 밀려서 소흘읍 이동교리 축석령으로 後退(후퇴)를 거듭했다.
以上(이상), 6月(월) 25日(일) 이로써 議政府(의정부)가 急迫(급박)한 商況(상황)이 되었다.
遞信部(체신부) 保險局長(보험국장) 김의창(金義昌)은 抱川(포천) · 議政府(의정부)의 戰況(전황)을 國務會議(국무회의)에 報告(보고)한 바 있다.
春川(춘천) 및 洪川(홍천) 戰鬪(전투)~江陵(강릉) 戰鬪(전투).
陸軍本部(육군본부)의 對應(대응).
當時(당시) 陸軍(육군)의 總指揮者(총지휘자)는 채병덕(蔡秉德) 總參謀長(총참모장)이었다.
開戰(개전) 當日(당일) 6月(월) 25日(일)), 午後(오후) 2時(시)에 열린 國務會議(국무회의)에서 채병덕(蔡秉德)은 “敵(적)의 全面(전면) 攻擊(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李舟河), 金三龍(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參考(참고):김삼룡이주하사건(金三龍李舟河事件) 政治事件(정치사건)은 1948年(년) 8月(월) 15日(일)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樹立(정부수립)을 前後(전후)해 單獨政府(단독정부) 樹立(수립)을 反對(반대)하여 南勞黨(남로당)의 核心幹部(핵심간부) 金三龍(김삼룡)과 이주하(李舟河)가 벌인 일련의 事件(사건) 및 逮捕(체포)過程(과정).]
채병덕(蔡秉德) 參謀總長(참모총장)은 陸士敎導隊(육사교도대) 生徒(생도) 1期(기)(262名(명) 및 2期(기) 227名(명)를 抱川(포천) 戰鬪(전투)에 投入(투입)하라고 命令(명령)하였다.
6月(월) 25日(일) 午後(오후) 채병덕(蔡秉德)은 다음날(6月(월) 26日(일)) 午後(오후)의 國務會議(국무회의)에서는 서울(Seoul) 死守(사수)를 空言(공언)하였고 命令(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平壤(평양)을 占領(점령)할 수 있다고 豪言壯談(호언장담)하기도 했다.
한편, 陸軍本部(육군본부) 狀況室(상황실)의 當直下士官(당직하사관)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워 奔走(분주)하게 商況(상황)을 接受(접수)하고 있었다.
아침 7時(시) 以前(이전)에는 陸軍本部(육군본부)로 이어지는 軍(군)의 主要通信網(주요통신망)이 在京遊擊隊(재경유격대)들에 依(의)해 切斷(절단)되었고 北韓軍(북한군)은 韓國軍(한국군)의 通信網(통신망)을 流言蜚語(유언비어)를 퍼뜨리는 等(등)에 逆利用(역이용)하고 있었다.
서울(Seoul) 의 商況(상황)
以前(이전)부터 38線(선) 附近(부근)에서의 小規模(소규모) 衝突(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大韓民國(대한민국) 國民(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軍用車(군용차)가 거리를 疾走(질주)하고 "3軍(군) 將兵(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復歸(복귀)하라"는 마이크(MIC) 소리가 搖亂(요란)해지면서 조금씩 動搖(동요)하기 始作(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午前(오전) 7時(시)가 넘어서야 放送(방송)은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侵攻(침공)해 왔다는 消息(소식)만 간단히 傳(전)하고 "將兵(장병)들은 누구를 莫論(막론)하고 빨리 原隊復歸(원대복귀)하라"는 公知放送(공지방송)만 反復(반복)하고 있었다.
UP通信社(통신사)의 서울(Seoul)駐在(주재) 特派員(특파원) 잭 제임스(Jack James)가 發送(발송)한 전문(電文) 記事(기사) 內容(내용)에 대하여 UP通信社(통신사)의 도널드 곤잘레스(Donald Gonzales)는 美國(미국) 國務府(국무부) 東(동)아시아(Asia)太平洋擔當國(태평양담당국) 涉外官(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W. Bradley Connors)에게 確認(확인)을 要請(요청)하였다.(午前(오전) 11時(시) 4分(분) 駐韓(주한) 美國(미국)大使(대사) 존 무초(John Mucho)도 11時(시)에 워싱턴(Washington)D.C.에 電話(전화)를 걸어 “北韓軍(북한군)이 韓國(한국)에 대한 全面(전면) 攻擊(공격)을 開始(개시)했다”고 보고했고, 北韓(북한)의 攻擊(공격) 商況(상황)을 國務府(국무부)에 傳達(전달)했다.
워싱턴(Washington) 當國(당국)은 이 公式報告(공식보고)를 6月(월) 24日(일) 21時(시)26分(분)에 接受(접수)하였다. 戰爭(전쟁)이 勃發(발발)하고 7時間(시간)26分(분) 後(후)였다. 國務府(국무부) 東(동)아시아(Asia)太平洋擔當國(태평양담당국) 次官補(차관보) 딘 러스크(Dean Rusk)는 동국(同局) 涉外官(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Bradley Connors)로 부터 戰爭(전쟁) 勃發(발발) 事實(사실)을 報告(보고)받고, 駐韓(주한) 美國(미국) 大使(대사) 존 무초(John Mucho)에게 잭 제임스(Jack james)가 打電(타전)한 記事(기사)(戰爭(전쟁) 勃發(발발)의 事實(사실) 與否(여부)를 確認(확인)하라는 指示(지시)를 내렸다.
한편, 戰爭(전쟁) 勃發(발발)에 關(관)한 駐日聯合軍(주일연합군) 最高司令部(최고사령부) 司令官(사령관) 맥아더(MacArthur)의 最初(최초)의 報告(보고)는 워싱턴(Washington) 時間(시간)으로 1950年(년) 6月(월) 25日(일) 5時(시), 侵攻(침공)이 開始(개시)된지 14時間(시간) 뒤에 陸軍省本部(육군성본부)에 到着(도착)했다.
그러나 맥아더(MacArthur)는 駐韓(주한) 美軍(미군) 軍事顧問團(군사고문단)의 要請(요청)에 따라 開戰(개전)當日(당일)부터 合參(합참)의 指示(지시)도 받지 않고 韓國軍(한국군) 支援(지원)措置(조치)를 取(취)하기 始作(시작)했다.
1950年(년) 6月(월) 26日(일) 밤 10時(시) 半(반)경 이승만(李承晩)은 도쿄(東京)에 있는 美國(미국) 極東軍司令官(극동군사령관) 맥아더(MacArthur)에게 電話(전화)를 걸어 도움을 要請(요청)하였다.
이승만(李承晩)은 라디오(radio) 演說(연설)로 서울(Seoul)市民(시민)은 政府(정부)를 믿고 動搖(동요)하지 말라는 放送(방송)을 通(통)해, 서울(Seoul) 市民(시민)들이 서울(Seoul)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督勵(독려)한 半面(반면) 그 自身(자신)은 放送(방송) 進行(진행) 中(중)에 閣僚(각료)들과 함께 特別列車(특별열차)로 大田(대전)으로 避身(피신)하였다.
6月(월) 27日(일) 새벽 2時(시)에 이승만(李承晩)은 大田行(대전행) 特別(특별) 列車(열차)를 타고 大田(대전)으로 내려갔다. 6月(월) 27日(일) 새벽 4時(시)에 열린 非常(비상) 國務會議(국무회의)에서 政府(정부)의 水原(수원) 遷都(천도)가 正式(정식)으로 議決(의결)되었다. 이승만(李承晩)은 大田(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月(월) 1日(일) 새벽에 列車(열차)편으로 大田(대전)을 떠나 裡里(이리)에 到着(도착)하였다.
7月(월) 2日(일)에는 다시 木浦(목포)에 到着(도착)하였고, 배편으로 釜山(부산)으로 옮긴 뒤 7月(월) 9日(일) 大邱(대구)로 옮겨갔다. 6月(월) 27日(일) 아침 6時(시)에 서울(Seoul)中央放送(중앙방송)은 水原(수원) 遷都(천도) 消息(소식)을 傳(전)했으나, 이를 取消(취소)하라는 壓力(압력)으로 取消(취소) 放送(방송)이 있었다.
서울(Seoul) 市民(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商況(상황)에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미아리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Seoul) 市民(시민)들은 待避(대피)하기 시작했다.
處刑(처형)된 美軍(미군)
保導聯盟(보도연맹) 事件(사건)
보도연맹[保導聯盟은 1948年(년) 12月(월)에 國家保安法(국가보안법)이 施行(시행)됨에 따라, 左翼(좌익)轉向者(전향자)를 保護(보호)하고 指導(지도)한다는 名分(명분)으로 結成(결성)한 團體(단체)] 事件(사건)
6月(월) 27日(일) 저녁에 서울(Seoul) 近郊(근교)까지 밀어닥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들과 肉薄戰(육박전)을 敢行(감행)했으나, 워낙 戰勢(전세)가 不利(불리)하여 大韓民國(대한민국)은 政府(정부)를 大田(대전)으로 옮겼다.
6月(월) 27日(일) 保導聯盟員(보도연맹원)에 대한 處刑(처형)이 執行(집행)됐다.
虐殺(학살)은 主(주)로 國軍(국군)(陸(육),海(해),空軍(공군)과 西北靑年會團(서북청년회단)等(등)의 極右(극우) 暴力團體(폭력단체)의 依(의)해 恣行(자행)되었으며, 美國(미국) 文書(문서)에서 美軍政(미군정) 美軍將校(미군장교)의 參觀(참관)과 許可(허가) 最終指示(최종지시)로 밝혀져있다.
韓國戰爭(한국전쟁) 初期(초기),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步兵(국군보병)의 基本火器(기본화기)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는 北韓軍(북한군)이 漢江(한강)을 넘어서 進擊(진격)할 것을 憂慮(우려)해 6月(월) 28日(일) 새벽 2時(시) 30分(분)경 아무런 豫告(예고)도 없이 漢江(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漢江鐵橋(한강철교)를 爆破(폭파)하였다.
이 爆破(폭파)로 50대 以上(이상)의 車輛(차량)이 물에 빠지고 最小限(최소한) 500名(명)이 爆死(폭사)하였다. 漢江(한강) 鐵橋(철교)의 爆破(폭파)로 國民(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只今(지금)까지도 政府(정부)의 이 같은 失策(실책)은 批判(비판)을 받고 있다.
當時(당시)의 戰況(전황)으로 볼 때 6~8時間(시간)의 餘裕(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早期(조기) 爆破(폭파)로 人命(인명) 殺傷(살상)은 물론 兵力(병력)과 物資(물자) 輸送(수송)에 막대한 打擊(타격)을 입혔다는 批判(비판)이 擡頭(대두)되자, 이승만(李承晩) 政權(정권)은 나중에(8月(월) 28日(일) 當時(당시) 爆破(폭파) 責任(책임)을 맡았던 工兵監(공병감)인 大領(대령) 최창식[崔昌植, 1921年(년) ~ 1950年(년) 9月(월) 21日(일)는 日本(일본) 帝國(제국)陸軍(육군) 및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육군)의 軍人(군인)이다. 創氏改名時(창씨개명시)의 日本名(일본명)은 高山隆(다카야마 다카시)이다.]을 ' 敵前飛行罪(적전비행죄)'로 逮捕(체포)해 9月(월) 21日(일) 死刑(사형)을 執行(집행)했다.
최창식(崔昌植)은 12年(년) 만에 再審(재심)을 거쳐 1962年(년) 無罪(무죄) 判定(판정)을 받아 死後(사후) 復權(복권)되었다.
漢江(한강) 鐵橋(철교)의 爆破(폭파)는 신성모(申性模)國防長官(국방장관)이 指示(지시)했지만, 總理(총리) 李範奭(이범석)이 建議(건의)하였다는 主張(주장)도 있다.
漢江(한강) 鐵橋(철교)의 爆破(폭파)로 國民(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고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은 서울(Seoul)을 넘어 釜山(부산), 浦項(포항)과 慶尙道(경상도) 東海岸(동해안), 大邱(대구), 蔚山(울산), 慶州(경주), 永川(영천)과 그 以南(이남)을 除外(제외)한 모든 地域(지역)을 占領(점령)하게 되었다.
서울(Seoul)市民(시민) 144萬(만)6천여 名(명) 가운데 서울(Seoul)이 人民軍(인민군)에게 占領(점령)당하기 前(전)에 서울(Seoul)을 빠져나간 사람은 40萬名(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越南同胞(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萬名(만명)이 政府高官(정부고관), 右翼政客(우익정객), 軍人(군인)과 警察(경찰)의 家族(가족), 自由主義者(자유주의자)들로 推定(추정)된다.
한때 이승만(李承晩)은 日本(일본) 야마구치현(山口県)에 亡命政府(망명정부)를 設置(설치)하는 方案(방안)도 세우고 있었다. 政權官吏(정권관리)들은 韓半島(한반도)와 地理的(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山口県)에 亡命政府(망명정부) 樹立意思(수립의사)를 日本(일본)에 傳達(전달)했으며, 日本(일본) 政府(정부)는 야마구치현(山口県) 支社(지사) 다나카(田中)에게 6萬(만)여명을 收容(수용)할 施設(시설) 및 食量(식량)을 準備(준비)하라고 指示(지시)했다고 했다.
當時(당시) 다나카(田中) 支社(지사)는 縣(현)의 小學校(소학교)를 亡命政府(망명정부) 施設(시설)로 確保(확보)하는 方案(방안)과 日本(일본) 政府(정부)에 대해 特別(특별) 食量配給要請(식량배급요청) 與否(여부)를 檢討(검토)하기도 했다.
1950年(년) 6月(월) 27日(일) 이승만(李承晩)은 大統領(대통령)과 內閣(내각)으로 構成(구성)된 亡命政府(망명정부)를 日本(일본)에 樹立(수립)하는 方案(방안)을 駐韓(주한) 美國(미국) 大使(대사) 존 무초(John Mucho)에게 問議(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美國(미국) 國務省(국무성)에 報告(보고)되었다.
北韓軍(북한군)이 서울(Seoul)을 占領(점령)하고 全羅道(전라도)까지 威脅(위협)하자, 이승만(李承晩) 大統領(대통령)은 大田(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月(월) 1日(일) 새벽에 列車便(열차편)으로 大田(대전)을 떠나 裡里(이리)에 到着(도착)하였다. 7月(월) 2日(일)에는 다시 木浦(목포)에 到着(도착)하였고, 배편으로 釜山(부산)으로 옮긴 뒤 7月(월) 9日(일) 大邱(대구)로 옮겨갔다.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서울(Seoul) 占領(점령)
6月(월) 28日(일) 새벽 人民軍(인민군)의 탱크가 서울(Seoul) 中心部(중심부)에서 目擊(목격)되었다. 그러나, 바로 漢江(한강)을 渡河(도하)하지 않고 7月(월) 3日(일)까지 서울(Seoul)에 머물렀는데, 그 理由(이유)에 대해 여러 見解(견해)가 나뉘어 있다. 첫째 春川戰鬪(춘천전투)의 敗戰(패전)으로 因(인)한 包圍計劃(포위계획) 失敗(실패), 둘째 渡河裝備(도하장비) 不足(부족), 셋째 南勞黨(남로당) 責任者(책임자)인 박헌영(朴憲永)이 戰爭(전쟁) 勃發時(발발시) 20萬(만)名(명)의 南勞黨員(남로당원)의 一齊蜂起(일제봉기)로 大韓民國(대한민국) 自體(자체)가 早起崩壞(조기붕괴)시키겠다고 豪言壯談(호언장담)하며 이를 기다리자고 主張(주장) 하였다는 3가지 說(설)이 있는데 여러 가지 見解(견해) 中(중) 많은 學者(학자)들이 春川戰鬪(춘천전투)에서의 國軍(국군)의 防禦(방어)가 人民軍(인민군)을 沮止(저지)한 것이 서울(Seoul)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라는 理由(이유)로 보고있다.
이 2師團(사단)은 議政府(의정부)에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에 敗退(패퇴)하고 남은 兵力(병력)이 只今(지금)의 銅雀大橋(동작대교)에서 廣(광)나루까지 防禦陣(방어진)을 構築(구축)하고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渡河(도하)를 沮止(저지)하는 任務(임무)를 맡았다.
洛東江(낙동강) 防禦戰(방어전).
1950年(년) 8月(월) 17日(일)의 洛東江(낙동강) 戰線(전선)에서 美合衆國(미합중국) 陸軍(육군) 24師團(사단) 所屬(소속) M24 채피(Chaffee) 戰車(전차)와 戰車兵(전차병)들의 모습.
金海(김해)와 馬山(마산) 사이에서 빠져나와 避亂(피란)을 가는 一家族(일가족)의 모습.
大田(대전)을 占領(점령)한 北韓軍(북한군)은 다시 進路(진로)를 3分(분)하여 一部(일부)는 西(서)쪽으로 호남(湖南) 一帶(일대)를 휩쓸고 馬山(마산)으로 닿고, 一部(일부)는 京釜線(경부선)을 따라 大邱(대구)로 向(향)했으며, 또 一部(일부)는 東(동)으로 浦項(포항)에 肉薄(육박)했다.
유엔(UN)軍(군)은 總司令部下(총사령부하)에 韓國軍(한국군)까지 包含(포함)시켜 作戰(작전) 系統(계통)을 統一(통일)하고 部隊(부대)를 大幅(대폭) 增强(증강)하여 洛東江(낙동강) 戰線(전선)을 마지막 防禦線(방어선)으로 삼아 反擊(반격)을 開始(개시)할 態勢(태세)를 完了(완료)한 때였다.
8月(월) 7日(일) 유엔(UN)軍(군)은 馬山地區(마산지구)에 美軍(미군) 第(제) 25師團(사단) · 34師團(사단) 其他(기타) 第(제)5戰鬪團(전투단) · 第(제)3海兵旅團(해병여단) 等(등)을 投入(투입)하여 釜山(부산)을 目標(목표)로 肉薄(육박)하는 北韓軍(북한군)에게 强力(강력)한 反擊(반격)을 加(가)하여 3日(일) 동안에 60里(리)를 進擊(진격), 韓國軍(한국군)의 채병덕(蔡秉德) 少將(소장)이 戰死(전사)한 河東地區(하동지구)를 奪還(탈환)했다. 이것은 6月(월) 25日(일) 以後(이후) 유엔(UN)軍(군)이 加(가)한 最初(최초)의 本格的(본격적) 反擊(반격)이었다.
8月(월) 13日(일)에는 東部戰線(동부전선) 浦項(포항)에 突入(돌입)한 北韓軍(북한군)을 韓國軍(한국군) 首都師團(수도사단)과 第(제)3師團(사단)이 對抗(대항)하여 北韓軍(북한군)의 主攻擊(주공격) 地點(지점)으로서 洛東江(낙동강) 渡河作戰(도하작전)을 위해 10여 일을 두고 4個(개) 師團(사단)의 兵力(병력)을 投入(투입),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몰려들었다.
이에 유엔(UN)軍(군)은 8月(월) 16日(일) 하루 사이에 B29 99대를 出動(출동)시켜 北韓軍(북한군)의 集結地(집결지)인 왜관(倭館)에다 都合(도합) 850瓲(톤)에 달하는 數千個(수천개)의 爆彈(폭탄)을 投下(투하)했으니 이것은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後(후) 最大(최대)의 爆擊記錄(폭격기록)이다.
그러나 北韓軍(북한군)은 굽히지 않고 18日(일)에는 大邱(대구) 北坊(북방) 13마일 地點(지점)까지 肉薄(육박)했다.
이 날 政府(정부)는 大邱(대구)에서 釜山(부산)으로 後退(후퇴)하고 大邱(대구) 市民(시민)에게는 소개령(疏開令)을 내렸다. 最後(최후)의 決戰(결전)을 覺悟(각오)한 韓國軍(한국군) 第(제)1師團(사단)은 英國軍(영국군) 步兵(보병) 第(제)27旅團(여단)의 支援(지원)을 받아가며 北坊(북방)으로 4Km를 反擊(반격), 뒤이어 이 날 美軍(미군) 第(제) 24師團(사단)과 海兵師團(해병사단)의 應援(응원) 出動(출동)이 있어 23日(일)까지는 大邱(대구) 北坊(북방)의 戰勢(전세)를 完全(완전)히 逆戰(역전)시켜 洛東江(낙동강) 以南(이남) 地域(지역)을 確保(확보)했다.
이 後(후) 北韓軍(북한군)은 大邱(대구)를 避(피)하여 東(동)·西(서)로 部隊(부대)를 移動(이동)하더니, 最後(최후)의 決戰(결전)인 第(제)2次(차) 협공(挾攻)作戰(작전)을 企圖(기도)했다.
西南地域(서남지역) 진주(晋州) 方面(방면)에 北韓軍(북한군)의 4個(개) 步兵師團(보병사단)(4·6·7·9)과 1個(개) 戰車聯隊(전차연대)(105師團(사단) 16聯隊(연대)가 集結(집결)하고, 東部戰線(동부전선) 浦項(포항) 北坊(북방)에 亦是(역시) 4個(개) 步兵師團(보병사단)(5·8·12·15)과 1個(개) 戰車聯隊(전차연대)(105)가 集結(집결)하여 9月(월) 3日(일) 12時(시)를 期(기)하여 同時(동시)에 유엔(UN)軍(군)을 攻擊(공격)해 왔다.
그러나 北韓軍(북한군)은 이미 士氣(사기)가 極度(극도)로 低下(저하)되고 戰鬪力(전투력)이 氣盡(기진)하였으며, 訓鍊(훈련)도 되지 않은 新兵(신병)들을 補充兵力(보충병력)으로 編成(편성)한 狀態(상태)였다.
西南地域(서남지역)에서는 馬山(마산)의 美軍(미군) 第(제)2師團(사단)·25師團(사단)이 北韓軍(북한군)의 繼續(계속)되는 夜襲攻擊(야습공격)을 막아서 擊退(격퇴)시켰으며, 東部戰線(동부전선)에는 韓國軍(한국군) 第(제)2軍團(군단)이 9月(월) 10日(일) 最强(최강)을 자랑하던 北韓軍(북한군) 第(제)15師團(사단)과 1個(개) 砲兵聯隊(포병연대)를 영천(永川)地區(지구)에 몰아 包圍(포위)하고 4,800여 명의 北韓軍(북한군)을 射殺(사살), 數(수) 많은 車輛(차량)과 戰車(전차)武器(무기) 等(등)을 빼앗아 完全(완전) 殲滅(섬멸)한 後(후) 單番(단번)에 15km를 北進(북진)하여 敵(적)의 氣勢(기세)를 最終的(최종적)으로 꺾어놓고 말았다.
當時(당시) 美(미)8軍(군) 司令官(사령관)이던 워커(Walker) 中將(중장)은 12日(일) 談話(담화)를 發表(발표)하여 ‘韓國(한국) 戰線(전선) 最大(최대)의 危機(위기)는 지나갔다’고 말하였다.
이로써 北韓軍(북한군)의 南侵(남침) 攻勢(공세)는 決定的(결정적)으로 꺾이고 유엔(UN)軍(군)의 北進(북진)이 있을 뿐이었다.
大邱(대구) 後退(후퇴)와 多富洞戰鬪(다부동전투).
多富洞(다부동) 戰鬪(전투)의 主要(주요) 指揮官(지휘관)이었던 陸軍(육군)少將(소장) 白善燁(백선엽)이 前套(전투)로 洛東江(낙동강)의 臨時(임시) 防禦線(방어선)을 構築(구축)하고 UN(유앤)軍(군) 等(등)의 增援(증원) 派兵(파병)때까지 餘裕(여유) 時間(시간)을 獲得(획득)했다.
8月(월)까지 北韓軍(북한군)은 大邱(대구)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洛東江(낙동강) 戰線(전선)에서 國軍(국군)과 美軍(미군)의 强烈(강렬)한 抵抗(저항)으로 膠着狀態(교착상태)에 빠졌고 熾烈(치열)한 交戰(교전)이 繼續(계속)되었다.
이때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 第(제)1師團長(사단장) 白善燁(백선엽)은 多富洞(다부동)에서 人民軍(인민군)의 侵攻(침공)을 擊退(격퇴)하고 8月(월) 3日(일) 유엔(UN)軍(군)은 馬山(마산)-倭館(왜관)- 盈德(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UN(유앤)에서의 說得作業(설득작업)
소비에트(Soviet) 聯邦(연방)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側(측)은 6.25 戰爭(전쟁)이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先制(선제) 攻擊(공격)으로 勃發(발발)했다고 主張(주장)했다. 8月(월) 1日(일), 安保(안보) 理事會(이사회)의 8月(월) 議長國(의장국)이었던 蘇聯(소련) 측 代表(대표) 말리크(Малик:Malik)는 理事會(이사회)에 出席(출석)했다.
議長席(의장석)에 앉은 蘇聯(소련) 側(측) 대표 말리크(Малик:Malik)는 그 동안의 韓國事態(한국사태)에 대한 안보리[安保理: 國際(국제) 平和(평화)와 安佺(안전)의 維持(유지)를 目的(목적)으로 하는, 國際聯合(국제연합)의 主要機構(주요기구)]의 모든 決意(결의)가 無效(무효)임을 宣言(선언)하였다.
그는 “安保理事會(안보이사회)의 常任理事局(상임이사국)인 蘇聯(소련)과, 또 常任理事局(상임이사국)으로서 當然(당연)히 參席(참석)해야 할 中共代表(중공대표)가 없는 동안에 通過(통과)된 決議案(결의안)은 하나도 認定(인정)할 수 없다”고 主張(주장)하였다.
大韓民國(대한민국) 側(측) 代表團長(대표단장) 장면(張勉)은 8月(월) 유엔(UN)安保理(안보리) 會議(회의)에서도 옵서버(Observer:觀察者(관찰자)資格(자격)으로 자리 잡고 앉으려고 待期(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리크(Малик:Malik)는 끝내 장면(張勉)의 着席(착석)을 拒否(거부)했다. 또한 말리크(Малик:Malik)는 “6‧25 動亂(동란)은 人民軍(인민군)의 南侵(남침)에서 始作(시작)된 것이 아니고, 反對(반대)로 韓國軍(한국군)의 北枕(북침)”이라며 “美國(미국)이 韓國軍(한국군)을 背後(배후)에서 操縱(조종)했다”고 主張(주장)하였다.
蘇聯(소련) 側(측) 代表(대표)의 이런 逆宣傳(역선전)을 미리 豫想(예상)한 場面(장면)은 美國(미국) 側(측) 代表(대표) 오스턴(Austin)과 짜고 韓國(한국) 戰線(전선)에서 鹵獲(노획)한 蘇聯製(소련제) 小銃(소총) 한 정을 證據物(증거물)로 提示(제시)하고 反駁(반박)하였다.
말리크(Малик:Malik)는 “이번 싸움은 韓國(한국) 사람끼리의 싸움이지 蘇聯(소련)은 전혀 關聯(관련)이 없다”며 “蘇聯軍(소련군)은 이미 1947年(년)에 完全(완전)히 北韓(북한)에서 撤收(철수)했고, 이번 動亂(동란)에 蘇聯(소련)에서는 銃(총) 한 자루 보내 준 일이 없다”고 斷言(단언)했다.
美國(미국) 側(측) 代表(대표) 오스틴(Austin)은 장면(張勉)이 韓國(한국) 戰線(전선)에서 가져온 ‘1950年(년) 蘇聯製(소련제)’라는 鐵人(철인)이 찍힌 小銃(소총)을 證據物(증거물)로 提示(제시)하였고, 蘇聯(소련) 側(측)이 提示(제시)한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北枕(북침) 主張(주장)과 蘇聯(소련)의 不介入(불개입) 主張(주장)은 論破(논파)당하였다.
장면(張勉) 代表(대표)는 9月(월)에 열린 UN(UN) 安保理(안보리) 理事會(이사회)에도 參席(참석)하는데, 9月(월) 安保理(안보리) 議長國(의장국)은 英國(영국)이었다.
9月(월) 1日(일), 글랜드윈 접(Gland ween) 英國(영국) 側(측) 代表(대표)가 安保(안보) 理事會(이사회)의 司會(사회)를 맡자 장면(張勉)은 着席(착석)과 發言權(발언권)을 달라고 미리 要求(요구)했다.
議長(의장)은 “當事國(당사국)인 大韓民國(대한민국)을 代表(대표)하는 장면(張勉) 大使(대사)에게 着席(착석)을 許(허)한다”고 宣言(선언)하여 장면(張勉) 代表(대표)는 무난히 着席(착석)하였다.
議長(의장)으로부터 發言權(발언권)을 얻은 장면(張勉) 代表(대표)는 “그 동안 갖은 侮辱(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 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蘇聯(소련)을 攻駁(공박)하였다.
蘇聯(소련) 代表(대표) 말리크(Малик:Malik)는 “規則(규칙) 發言(발언)!”이라며 그의 發言(발언)을 制止(제지)하려 들었다. 이어 말리크(Малик:Malik)는 그에게 “도대체 저 者(자)가 누군데 무슨 資格(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發言(발언)을 하는 것이냐?”며 “저 者(자)는 이승만(李承晩) 徒黨(도당)의 傀儡(괴뢰)”라고 마구 辱說(욕설)을 퍼부었다.
장면(張勉)은 말리크(Малик:Malik)의 辱說(욕설)에 대해 取消(취소)하라고 抗卞(항변)하였다.
大韓民國(대한민국)에는 이승만(李承晩) 徒黨(도당)이라는 것은 없고 나는 憲法(헌법)에 依(의)해 合法的(합법적)으로 當選(당선)된 大統領(대통령)의 任命(임명)을 받아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를 代表(대표)해 이 자리에 議長(의장)의 招請(초청)으로 着席(착석)했노라.
그는 約(약) 40여 분간 共産圈(공산권)의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北枕(북침)” 主張(주장)과 “韓國民(한국민)들끼리의 內亂(내란)”이라는 主張(주장)을 反駁(반박)하는 演說(연설)을 했고, 이는 國際社會(국제사회)에 生放送(생방송)으로 中繼(중계)되었다.
UN(유엔)軍(군)의 總反擊(총반격)
유엔(UN)軍(군)이 육전(陸戰)에서 전과(戰果)를 올리기까지는 空軍(공군)의 지원폭격(支援爆擊)이 크게 奏效(주효)하였으니 유엔(UN) 空軍(공군)은 이미 개전(開戰) 20日(일) 만에 제공권(制空權)을 掌握(장악), B29, B26 等(등) 중폭격기는 敵(적) 後方(후방)의 交通(교통)로를 破壞(파괴)하는 한편 平壤(평양)·鎭南浦(진남포)·咸興(함흥)·城津(성진)·淸津(청진)·羅南(나남) 等地(등지)의 軍需品(군수품) 工場(공장)을 完全(완전)히 破壞(파괴)했다.
세이버(Saber) 제트(jet)機(기)·F51 戰鬪機(전투기)·英國機(영국기)·호주기(濠洲機) 等(등)이 戰線(전선)을 主(주) 攻擊目標(공격목표)로 삼고 各(각) 方面(방면)으로 攻襲作戰(공습작전)을 展開(전개)하였다.
한편 海軍(해군)도 開戰(개전) 直後(직후)부터 制海權(제해권)을 掌握(장악)하였으나 地上(지상)作戰(작전)이 後退(후퇴)를 거듭하므로 큰 活躍(활약)을 못 하고 있던 中(중), 洛東江(낙동강) 戰線(전선)에서 陸軍(육군)의 反擊(반격)이 開始(개시)되자 電擊的(전격적) 北上(북상)을 企圖(기도)하는 맥아더(MacArthur) 유엔(UN)軍(군) 總司令官(총사령관)의 命令(명령)에 依(의)해 9月(월) 13日(일) 仁川(인천) 上陸作戰(상륙작전)이 開始(개시)되었다.
이 作戰(작전)의 海軍(해군) 司令官(사령관)은 美(미) 海軍(해군) 少將(소장) 도일(Doyle)로서, 動員(동원)된 軍艦(군함)은 韓國(한국) 15척, 美國(미국) 226척, 英國(영국) 12척, 캐나다(Canada) 3척,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2척, 뉴질랜드(New Zealand) 2척, 프랑스(France) 1척, 都合(도합) 261척이었다.
13日(일)부터 2日(일) 間(간)에 걸쳐 맹렬한 艦砲(함포) 射擊(사격)을 가한 後(후) 15日(일) 새벽 마침내 유엔(UN)軍(군)과 國軍(국군) 海兵隊(해병대)가 맥아더(MacArthur) 將軍(장군) 指揮(지휘)로 仁川(인천)에 上陸(상륙), 서울(Seoul)을 向(향)해 進擊(진격)했다. 김일성(金日成)은 유엔(UN)軍(군)의 仁川上陸(인천상륙)이 있자 소위 민족보위상(民族保衛相)인 최용건(崔鏞健)을 서울(Seoul) 防衛司令官(방위사령관)으로 任命(임명)하고 약 2萬(만)의 兵力(병력)으로 最後(최후) 抵抗(저항)을 試圖(시도)했으나 20日(일)에 유엔(UN)軍(군) 搜索隊(수색대)는 이미 漢江(한강)을 건너 서울(Seoul)에 浸透(침투)했고, 23日(일)에는 韓國軍(한국군)海兵隊(해병대)와 美(미) 第(제)1海兵師團(해병사단)이 서울 (Seoul) 西北方(서북방)의 안산(鞍山)을 占領(점령)하고 다음 날 麻浦(마포)로 도하(渡河)하여 市內(시내)로 突入(돌입)했으며, 25日(일)에는 冠岳山(관악산) 方面(방면)으로 부터 韓國軍(한국군) 第(제)17聯隊(연대)와 美(미) 第(제)7師團(사단)이 漢江(한강)을 渡河(도하)하여 南方(남방)으로부터 市內(시내)로 突入(돌입), 挾攻(협공)으로 猛擊(맹격)을 가했다.
北韓軍(북한군)은 決死的(결사적) 抗拒(항거)로 市街戰(시가전)을 企圖(기도)하였으나 兵力(병력)의 大部分(대부분)이 殲滅(섬멸)되어 서울(Seoul)에서 退却(퇴각)하니, 9月(월) 28日(일) 歷史的(역사적)인 서울(Seoul) 奪還(탈환)이 이루어져 中央廳(중앙청) 尖塔(첨탑)에 다시 太極旗(태극기)가 올랐다.
이 서울(Seoul) 奪還作戰(탈환작전)은 南韓地域(남한지역) 戰鬪(전투)의 最終的(최종적) 決判(결판)이 되었으니, 서울(Seoul)을 完全(완전) 奪還(탈환)한 유엔(UN)軍(군)은 다시 水原(수원) 方面(방면)으로 南下(남하)하여 敵(적)의 背後(배후)를 찔렀으며, 中部(중부)와 東部戰線(동부전선)에서도 無制限(무제한) 北進攻勢(북진공세)를 取(취)하니 30日(일)에 벌써 國軍(국군) 第(제)30師團(사단)은 東海岸(동해안)을 電擊的(전격적)으로 北上(북상)하여 38線(선) 接境(접경) 인악리(仁岳里)에 이르렀다.
이에 38線(선) 以南(이남)의 共産軍(공산군)은 事實上(사실상) 퇴로(退路) 마저 끊긴 채 완전히 痲痹狀態(마비상태)에 빠졌다.
9月(월) 30日(일) 유엔(UN)軍(군) 總司令官(총사령관) 맥아더(MacArthur) 將軍(장군)은 北韓(북한) 共産軍(공산군) 總司令官(총사령관) 김일성(金日成)에게 降伏(항복) 勸告文(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金日成)은 이를 拒否(거부)하고 다만 南韓地域(남한지역)에 있는 共産軍(공산군)의 全面(전면) 退却(퇴각)만을 命令(명령)했다.
따라서 같은 날 유엔(UN)軍(군) 司令部(사령부)는 麾下(휘하) 全將兵(전장병)에게 38線(선)을 突破(돌파)하여 北進(북진)할 것을 命令(명령)했고, 北韓軍(북한군) 部隊(부대)들은 태백산맥(太白山脈)을 有一(유일)의 退路(퇴로)로 利用(이용)하여 後退(후퇴)했으며 나머지 一部(일부)는 智異山(지리산) · 大德山(대덕산)·回文山(회문산) 一帶(일대)에 包圍(포위)된 채 遊擊戰(유격전)을 企圖(기도)하게 되었다.
第(제)1機甲師團(기갑사단) 所屬(소속) 兵士(병사)가 開城(개성) 附近(부근)에서 불에 탄 屍體(시체)를 바라보고 있다.
10月(월) 1日(일) 午前(오전) 11時(시) 45分(분) 國軍(국군) 第(제)3師團(사단)은 이종찬(李鍾贊) 大領(대령) 指揮下(지휘하)에 最初(최초)로 38線(선)을 넘어 北進(북진)을 開始(개시)했으며 뒤이어 首都師團(수도사단)이 인제(麟蹄)를 거쳐 北上(북상)하여 10月(월) 10日(일) 3師團(사단)과 함께 원산(元山)市內(시내)와 명사십리(明沙十里) 飛行場(비행장)을 完全(완전) 占領(점령)했다.
中部前線(중부전선)에서는 國軍(국군) 第(제)7師團(사단)과 8師團(사단)이 화천(華川)·김화(金化)를 거쳐 北上(북상), 18日(일)에는 西部戰線(서부전선)으로 北上(북상)한 美(미) 第(제)1軍團(군단)과 만나 平壤(평양) 南方(남방) 近郊(근교)에 肉薄(육박)하고 19日(일) 韓國軍(한국군) 第(제)1師團(사단)을 先頭(선두)로 하여 平壤(평양)을 完全(완전) 占領(점령)했다.
當時(당시) 平壤(평양)을 지키고 있던 敵軍(적군)의 최인(崔仁) 中將(중장)은 新兵(신병)으로 補充(보충)된 約(약) 2萬(만)의 兵力(병력)으로 防禦態勢(방어태세)를 取(취)했으나 大敗(대패)하여 청천강(淸川江) 以北(이북)으로 逃走(도주)했다.
한편 西部戰線(서부전선)에서는 10月(월) 20日(일)에 淸川江(청천강) 以南(이남) 숙천(肅川) 一帶(일대)에 美(미) 第(제)11공정사단(空挺師團)의 約(약) 4千名(천명)이 落下傘(낙하산)을 타고 내려 敵(적)의 後方(후방)을 攻擊(공격)하였으며, 國軍(국군) 第(제)6師團(사단)이 美(미) 第(제)24師團(사단)과 英國(영국) 旅團(여단)의 西海岸(서해안) 進擊(진격)과 補助(보조)를 같이하여 덕천(德川)·희천(熙川) 等地(등지)를 거쳐 西北(서북) 國境(국경)의 中央地點(중앙지점)인 초산(楚山)으로 進擊(진격), 26日(일) 午後(오후) 5時(시) 50分(분) 6師團(사단) 第(제)7聯隊(연대) 搜索隊(수색대)가 鴨綠江(압록강)에 이르렀다. 11月(월) 21日(일)에는 中部(중부)로 進擊(진격)한 國軍(국군) 第(제)7師團(사단)의 一部(일부)가 中部國境(중부국경) 혜산진(惠山鎭)에 到達(도달)했고, 東部戰線(동부전선)의 首都師團(수도사단)과 3師團(사단)은 元山(원산)에서 다시 北進(북진)하여 10月(월) 17日(일)에 咸興(함흥), 22日(일)에 북청(北靑), 28日(일)에 성진(城津)을 占領(점령)했으며, 여기서 第(제)3師團(사단)은 길주(吉州)를 거쳐 백두산(白頭山)을 向(향)해 합수(合水)로 進擊(진격)하고 11月(월) 25日(일) 首都師團(수도사단)은 咸鏡北道(함경북도) 道廳(도청) 所在地(소재지) 청진(淸津)에 突入(돌입)했다.
이로써 國土(국토)의 全域(전역)이 거의 收復(수복)되고 統一(통일)이 目前(목전)에 다달았다.
仁川(인천) 上陸(상륙) 作戰(작전)
仁川(인천)에 上陸(상륙)하는 유엔(UN)軍(군)의 모습.
유엔(UN) 將軍(장군)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仁川(인천)에서 上陸作戰(상륙작전)을 觀察(관찰)하고 있다.
作戰(작전)의 第(제)1段階(단계)는 月尾島(월미도)의 占領(점령)으로 始作(시작)되었다. 1950年(년) 9月(월) 15日(일) 새벽 5時(시) 始作(시작)된 攻擊(공격) 準備(준비) 射擊(사격)에 이어 美(미) 第5海兵聯隊(제5해병연대) 3大隊(대대)가 戰車(전차) 9대를 앞세우고 月尾島(월미도) 前面(전면)에 上陸(상륙)하였다. 月尾島(월미도)는 2時間(시간) 만에 完全(완전)히 美軍(미군)에 依(의)해 掌握(장악)되었다. 美軍(미군)은 負傷(부상) 7名(명)의 輕微(경미)한 被害(피해)를 입었으며, 人民軍(인민군)은 108名(명)이 戰死(전사)하고 106名(명)이 捕虜(포로)로 잡혔다.
이어 第(제)2段階(단계)로 國軍(국군) 第(제)17聯隊(연대), 美軍(미군) 第(제)7師團(사단), 美國(미국) 1 海兵師團(해병사단)이 主導(주도)한 仁川半島(인천반도) 攻擊(공격)이 이어졌다. 人民軍(인민군) 第(제)18師團(사단)과 仁川(인천) 警備兵力(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美軍(미군) 第(제)1海兵師團(해병사단)과 國軍(국군) 海兵(해병) 第(제)1聯隊(연대)는 人民軍(인민군)의 主力(주력)이 糾合(규합)할 時間(시간)을 成功的(성공적)으로 빼앗아버리며 仁川(인천) 掌握(장악)에 成功(성공)하였다.
서울(Seoul) 收復(수복).
그 後(후) 서울(Seoul)을 빼앗긴 지 3個月(개월) 만인 9月(월) 28일에 서울(Seoul)을 되찾았다.
韓國軍(한국군)은 이어서, 달아나는 人民軍(인민군)을 뒤쫓아 38線(선)을 突破(돌파)하여 10月(월) 10日(일)에는 元山(원산)을, 10月(월) 19日(일)에는 平壤(평양)을 占領(점령)했다.
이어, 10月(월) 26日(일)에는 西部(서부)는 淸川江(청천강) 北部(북부)와 鴨綠江(압록강)의 楚山(초산)에 이르렀고, 中部(중부)는 長津湖(장진호)까지 進擊(진격)했으며, 東部(동부)는 鴨綠江(압록강)의 惠山鎭(혜산진)까지 進擊(진격)했다.
또한 11月(월)에는 豆滿江(두만강) 一帶(일대)까지 進擊(진격)하였다. 한편, 김일성(金日成)은 政府(정부)와 人民軍(인민군)을 미리 10月(월) 9日(일)에 北(북)쪽으로 거의 모두 撤收(철수)시킨 다음에 10月(월) 12日(일)부터 平壤(평양)에서 철수했다.
中共軍(중공군) 介入(개입)과 長津湖戰鬪(장진호전투).
서울(Seoul) 收復(수복)後(후) 38線(선)을 넘어 繼續(계속)北進(북진)하던 韓國軍(한국군)과 美軍(미군)은 平壤(평양)을 占領(점령)後(후) 繼續(계속) 北進(북진)해 나아갔다.그러던중 鴨綠江(압록강) 까지 進擊(진격)했다.
그런데 統一(통일)直前(직전)까지 갔던 聯合軍(연합군)은 中共軍(중공군)이 갑작스런 介入(개입)에 唐惶(당황)하고 平壤(평양)까지 占領(점령)당하는 受侮(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聯合軍(연합군)은 中共軍(중공군)의 人海戰術(인해전술)에 밀려 繼續(계속`) 後退(후퇴)를 하게 된다.
한편 美(미)10軍團(군단)은 咸鏡南道(함경남도) 長津郡(장진군)에서 中共軍(중공군)에게 包圍(포위)당하고 치열하게 戰鬪(전투)를 하게되는데 그 戰鬪(전투)가 바로 長津湖戰鬪(장진호전투)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反擊準備(반격준비)
한편,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9月(월) 30日(일)경, 스티코프(Stikoff)를 面談(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金日成)은 戰況(전황)이 不利(불리)하기 때문에 蘇聯(소련)의 援助(원조)를 要請(요청)하는 다음과 같은 內容(내용)의 便紙(편지)를 보낼 意向(의향)임을 밝혔다.
“敵軍(적군)이 38線(선)을 넘어 以北(이북)을 侵攻(침공)할 때에는 蘇聯軍(소련군)의 出動(출동)이 절대 必要(필요)하다. 만일 그것이 不可能(불가능)할 때에는 中國(중국)과 其他(기타) 共産主義國家(공산주의국가)들이 國際義勇軍(국제의용군)을 組織(조직)해 出動(출동)하도록 援助(원조)해 주기 바란다.”
10月(월) 1日(일), 스탈린(Stalin)은 베이징(北京)駐在(주재) 蘇聯大使(소련대사) 로신(Канифоль:Rosin)에게 傳文(전문)을 보내 다음 內容(내용)을 마오쩌둥(毛泽东)이나 저우언라이(周恩来)에게 至急(지급) 傳達(전달)하도록 指示(지시)하였다.
“中國(중국)義勇軍(의용군)을 보낼 수 있다면 빨리 5~6個(개) 師團(사단)이라도 38線(선)에 進出(진출)시켜야 할 것임.” 10 月(월) 3日(일), 마오(毛泽东)는 이렇게 回答(회답)했다.
“처음에 우리는 敵軍(적군)이 38線(선)을 넘을 始點(시점)에 中國(중국) 義勇軍(의용군) 數個師團(수개사단)을 投入(투입)할 생각이었으나 只今(지금)은 當分間(당분간)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된다.
北韓(북한)은 遊擊戰爭(유격전쟁)으로 이행하면 될 것이다. 必要(필요)하다면 貴下(귀하)의 休養地(휴양지)에 저우언라이(周恩来)와 린뱌오(林彪)를 보내도록 하겠다.”
이에 대한 駐中(주중) 蘇聯大使(소련대사) 로신(Канифоль)의 見解(견해)는 이러했다: “마오(毛泽东)의 이 回答(회답)은 朝鮮問題(조선문제)에 關(관)한 中國(중국)의 態度(태도)가 바뀌었음을 보여주고 있음.
態度(태도) 變更(변경)의 原因(원인)은 아직 不明(불명)하다.” 김일성(金日成)은 駐北韓(주북한) 蘇聯大使(소련대사) 스티코프(Стикофф)를 通(통)해, 스탈린(Stalin)에게 北韓(북한)이 어려움에 逢着(봉착)하였음을 理由(이유)로 援助(원조)와 도움을 要請(요청)하였다.
김일성(金日成)은 美軍(미군)이 韓半島(한반도) 全體(전체)를 占領(점령)하여 極東(극동)에서의 戰略基地(전략기지)를 만들 意向(의향)인 것 같다고 밝혔다.
11月(월) 20日(일), 스탈린(Stalin)은 스티코프(Стикофф)에게 飛行士(비행사) 養成(양성)에 관한 김일성(金日成)의 要請(요청)을 받아들일 것임을 通報(통보)토록 指示(지시)하였다.
그리고, 11月(월) 28日(일), 蘇聯(소련) 閣僚會議(각료회의)는 蘇聯(소련) 民間大學(민간대학)에 留學中(유학중)인 北韓(북한) 學生(학생) 2百名(백명)을 12月(월) 5日(일)까지 滿洲(만주)로 보내기로 決定(결정)하였다.
制限戰線(제한전선)의 激動(격동)
共産側(공산측)은 結局(결국) 戰勢(전세)가 有利(유리)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6月(월) 23日(일) 蘇聯(소련)의 유엔(UN) 大使(대사) 마리크(Marik)로 하여금 韓國戰爭(한국전쟁)의 停戰(정전)을 提議(제의)해 오고 美國(미국)은 이에 呼應(호응)함으로써 7月(월) 8日(일) 開城(개성)에서 停戰會談(정전회담) 豫備會談(예비회담)이 開催(개최)되고 10月(월) 25日(일) 會談場所(회담장소)를 판문점(板門店)으로 옮겨 會談(회담)을 進行(진행)했다.
11月(월) 28日(일)에는 當時(당시) 戰線(전선)을 臨時休戰線(임시휴전선)으로 採擇(채택)하게 되어 한때 戰鬪(전투)가 小康狀態(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치열한 宣戰戰(선전전)을 隨伴(수반)하면서 如前(여전)히 戰鬪(전투)는 繼續(계속)되었다.
한편 國軍(국군)은 後方(후방)에서 9·28收復(수복) 때 智異山(지리산) 一帶(일대)의 山岳(산악)으로 集結(집결)한 패잔(敗殘) 공비(共匪) 掃蕩作戰(소탕작전)을 開始(개시)했다.
國軍(국군) 首都官(수도관)과 第(제)7師團(사단) 및 戰鬪警察隊(전투경찰대) 5個(개) 聯隊(연대)는 이해 12月(월) 2日(일)부터 이듬해 3月(월) 13日(일)까지 4次(차)에 걸친 攻擊(공격)을 가해 射殺(사살) 7,147名(명), 捕虜(포로) 6,883名(명), 歸順(귀순) 172名(명)의 戰果(전과)를 올려 一旦(일단) 全面的(전면적) 掃蕩(소탕)을 끝냈다.
以外(이외)에도 1952年(년) 여름에는 거제도(巨濟島) 捕虜收容所(포로수용소)에서 數次(수차)에 걸쳐 暴動(폭동)이 일어난 5月(월) 7日(일)에는 捕虜代表(포로대표)와 談判(담판)을 하려던 收容所(수용소) 少將(소장) 돗드(Dodd) 준장(准將)이 捕虜(포로)들에게 拉致(납치)되는 等(등) 騷亂(소란)이 일어났으나 6月(월) 末境(말경)에는 完全(완전)히 秩序(질서)를 回復(회복)했다.
1951年(년) 7月(월) 休戰會談(휴전회담)이 開始(개시)된 後(후)부터 韓國戰爭(한국전쟁)은 世界(세계) 戰史上(전사상) 처음보는 소위 제한공격(制限攻擊)이라는 戰法(전법)을 採擇(채택)하게 되었으니, 當事國(당사국)인 韓國(한국)의 反對(반대)에도 불구하고, 共産軍(공산군)과 유엔(UN)軍(군)은 함께 休戰(휴전)의 成立(성립)을 希望(희망)하여 서로 觀望(관망)하는 態度(태도)를 取(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戰鬪(전투)는 다만 進擊(진격)을 敢行(감행)하지 않을 뿐이지 거의 固定(고정)된 戰線(전선)에서의 近距離(근거리) 高地(고지) 爭奪戰(쟁탈전)은 치열하였으니, 한 능선(稜線)·한 高地(고지)에서 退却(퇴각)과 奪還(탈환)을 20여 回(회) 이상 거듭하는 게 普通(보통)이었다.
1952年(년) 8月(월)부터 共産軍(공산군)은 後方(후방)의 兵力(병력)과 裝備(장비)를 補强(보강)하여 8月(월) 5日(일) 國軍(국군) 首都師團(수도사단)이 지키는 金化(김화) 等(등) 北坊(북방)의 首都高地(수도고지)에 攻擊(공격)하여 왔다.
전례없이 砲擊(포격)을 强化(강화)한 敵(적)은 1日(일) 平均(평균) 2萬(만) 발을 發射(발사)하여 人海戰術(인해전술)로 肉薄(육박)해 8月(월) 10日(일)까지 6日(일) 만에 7번이나 高地(고지)의 主人(주인)이 갈리었다.
이러한 싸움을 9月(월) 28日(일)까지 繼續(계속)하여 我軍(아군)은 高地(고지)를 確保(확보)하니 29日(일)에는 開戰(개전) 이래 最大(최대)의 砲擊(포격)으로 4萬(만) 8千(천) 발을 首都師團(수도사단) 地區(지구)에 퍼붓고 다시 方向(방향)을 돌려 백마고지(白馬高地)에 攻擊(공격)해 왔다.
白馬高地(백마고지)는 北漢江(북한강) 東(동)쪽에 位置(위치)한 獨立高地(독립고지)로서 철의 삼각지대[鐵의 三角地帶)는 江原道(강원도)의 평강군, 鐵原郡(철원군), 金化郡(김화군)을 잇는 地理上(지리상)의 三角地帶(삼각지대)이다.
中部前線(중부전선) 掌握(장악)을 위한 戰略的(전략적) 要衝地(요충지)로서, 最適(최적)의 防禦(방어) 地形(지형)을 지니고 있어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大韓民國(대한민국) 攻擊(공격)의 本據地(본거지) 役割(역할)을 하였다.
韓國戰爭(한국전쟁) 當時(당시) 南北間(남북간) 치열한 爭奪戰(쟁탈전)이 벌어진 곳으로, 戰爭(전쟁) 後(후) 結局(결국) 南北(남북)이 이 地域(지역)을 兩分(양분)하였다.] 안의 交通路(교통로)를 制壓(제압)하는 戰略床(전략상)의 主要(주요) 高地(고지)다.
이 地帶(지대)는 國軍(국군) 第(제)3師團(사단)·9師團(사단) 및 美(미) 第(제)2師團(사단) 等(등)이 防禦(방어)하고 있었는데, 10月(월) 29日(일)까지 1個月(개월) 사이에 25回(회) 以上(이상) 高地(고지)의 主人(주인)이 바뀐 끝에 我軍(아군)은 한걸음 進擊(진격)하여 철마(鐵馬)高地(고지)까지 占領(점령)했으며, 이 동안의 接戰(접전)은 主(주)로 白兵戰(백병전)이었다.
한편 首都高地(수도고지)와 白馬高地(백마고지) 사이에 있는 저격능선(狙擊稜線)에서도 10月(월) 初(초)부터 猛烈(맹렬)한 敵(적)의 攻擊(공격)을 받았는데, 이 稜線(능선)은 鐵(철)의 三角地帶(삼각지대) 東側(동측) 要衝(요충)으로 敵(적)의 主要(주요) 陣地(진지)인 오성산(伍聖山)에 對峙(대치)하는 地點(지점)이다.
이 地帶(지대)는 國軍(국군) 第(제)2師團(사단)이 당하고 있었는데 4日間(일간) 戰鬪(전투)에 17回(회)나 稜線(능선)의 主人(주인)이 바뀌었으나 12月(월) 21日(일) 狙擊稜線(저격능선)의 암석봉(岩石峰)에 攻擊(공격)해 오는 敵(적)을 네 번이나 擊退(격퇴)시키자 平溫狀態(평온상태)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1953年(년) 1月(월)로 들어가 敵(적)은 散發的(산발적)으로 消極的(소극적)인 攻擊(공격)을 해 왔다. 그러나 이 해 3月(월) 5日(일) 스탈린(Сталин)이 死亡(사망)한 後(후) 4月(월) 6日(일), 5個月(개월) 만에 休戰會談(휴전회담)이 再開(재개)되고 11日(일)에는 傷痍捕虜(상이포로) 交換協定(교환협정)이 調印(조인)되니 벌써 休戰(휴전)境界線(경계선)의 決定(결정)을 討議(토의)하게 되었다.
休戰協定(휴전협정)이 決定的(결정적)으로 成立(성립)될 段階(단계)에 이르자 敵軍(적군)은 5月(월) 初旬(초순)부터 전전선(全戰線)에 걸쳐 攻勢(공세)를 取(취)해 왔다.
그리하여 5月(월) 12日(일) 中東部(중동부) 戰線(전선)에 約(약) 4萬(만) 5千(천)의 兵力(병력)을 投入(투입)하고 12時間(시간) 동안에 11萬(만) 8千(천) 발의 砲擊(포격)을 가해 約(약) 3km 後退(후퇴)했으며, 東部戰線(동부전선) 단장(斷腸)稜線(능선), 西部戰線(서부전선) 연천(蓮川)地方(지방)도 심한 攻擊(공격)을 받았다.
7月(월) 16日(일)부터 我軍(아군)은 總攻擊(총공격)을 開始(개시), 休戰(휴전)을 앞두고 戰略床(전략상)의 要地(요지)들을 確保(확보)하려던 敵(적)의 攻擊(공격)을 擊退(격퇴)시키고, 20日(일)까지는 앞서 잃었던 地域(지역)의 大部分(대부분)을 奪還(탈환)했다.
드디어 1953年(년) 7月(월) 27日(일) 午前(오전) 10時(시), 停戰協定(정전협정)이 正式(정식)調印(조인)됨으로써, 3年(년) 1個月(개월)에 걸쳐 慘憺(참담)했던 韓國戰爭(한국전쟁)은 終戰(종전)이 아닌 休戰協定(휴전협정)만이 調印(조인)되었고, 韓半島(한반도)에는 '第(제)2의 38線(선)'인 休戰線(휴전선)이 設定(설정)되어 民族分斷(민족분단)의 悲運(비운)을 또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大量(대량)殺傷(살상)武器(무기).
1952年(년) 2月(월) 中國(중국)의 마오쩌뚱(毛泽东)은 蘇聯(소련)의 스탈린(Сталин:Stalin)에게 傳文(전문)을 보내 美國(미국)이 航空機(항공기)와 野砲(야포)를 利用(이용), 8次例(차례)에 걸쳐 細菌武器(세균무기)를 使用(사용)했다고 主張(주장)했다.
1952年(년) 2月(월) 22日(일), 北韓(북한) 外務省(외무성)은 美國(미국)이 韓國(한국)에서 細菌戰(세균전)을 펼치고 있다는 聲明(성명)을 發表(발표)했다. 1952年(년) 1月(월) 28日(일)부터 美軍(미군) 飛行機(비행기)가 細菌(세균)에 感染(감염)된 昆蟲(곤충)을 大量(대량)으로 韓半島(한반도) 上空(상공)에 撒布(살포)하고 있다면서 유엔(UN) 側(측)에 强力(강력)하게 抗議(항의)했다.
1952年(년) 3月(월), 中國(중국)의 주은래(周恩来) 總理(총리)는 美軍(미군) 飛行機(비행기)가 中國(중국)의 禾北地域(화북지역) 및 滿洲(만주)에서 細菌戰(세균전)을 遂行(수행)하고 있다고 發表(발표)하며 美國(미국)을 批判(비판)했다.
當時(당시) 中國軍(중국군)은 北韓軍側(북한군측)에서 發病(발병)한 傳染病(전염병)과 關聯(관련)해, 美軍(미군) 操縱士(조종사) 戰爭捕虜(전쟁포로)들에게서 細菌武器(세균무기)를 使用(사용)했다는 陳述(진술)을 받아냈지만, 이들은 釋放(석방)되어 美國(미국)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陳述(진술)을 飜覆(번복)했다.
英國(영국)의 生化學者(생화학자)인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을 團長(단장)으로 하는 國際科學者協會(국제과학자협회) 公式調査團(공식조사단)이 이와 關聯(관련)한 照査(조사)를 하여, 1952年(년) 니덤(Joseph Needham) 報告書(보고서)를 作成(작성)했다. 美軍(미군) 飛行機(비행기)가 投下(투하)한 生物武器(생물무기) 爆彈(폭탄) 寫眞(사진) 等(등) 200여가지 證據資料(증거자료)가 添附(첨부)된 670 페이지(Page) 報告書(보고서)로, 2015年(년) 6月(월) 最初(최초)로 原文(원문))이 公開(공개)되었다.
2010年(년) 3月(월) 17日(일) 알자지라(Al Jazeera) 放送(방송)은 美國(미국) 國立文書保管所(국립서보관소)에서 入手(입수)한 美國(미국) 合同參謀本部(합동참모본부) 命令書(명령서)를 公開(공개)했다.
1951年(년) 9月(월) 21日(일)에 作成(작성)된 이 文書(문서)에는 "作戰狀況(작전상황)에서 特定(특정) 病原體(병원체)의 效果(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大規模(대규모) 現場(현장) 實驗(실험)을 始作(시작)할 것"을 指示(지시)했다.
맥아더(MacArthur) 將軍(장군)은 中國(중국) 滿洲地域(만주지역)에 核攻擊(핵공격)을 가함으로써 中國(중국) 支援(지원)을 遮斷(차단)하고 戰勢(전세)를 逆戰(역전)시키려고 했다. 核武器(핵무기) 26發(발)을 1次(차)로 北韓(북한)과 滿洲(만주)에 投下(투하)하자고 主張(주장)했다.
當時(당시) 트루먼(Truman) 大統領(대통령)도 韓國戰爭(한국전쟁)에서의 核武器(핵무기) 使用(사용)을 主張(주장)했다.
休戰協定(휴전협정)
이승만(李承晩)은 1951年(년) 6月(월) 9日(일) 休戰(휴전)의 決死反對(결사반대)를 宣言(선언)하였고 6月(월) 27日(일) 蘇聯(소련)의 休戰案(휴전안)을 拒否(거부)하였다.
1951年(년) 7月(월)에 休戰會談(휴전회담)이 開始(개시)된 後(후) 世界戰爭(세계전쟁) 事相(사상) 처음 보는 制限戰爭休戰(제한전쟁휴전)이 되면 各其(각기) 占領地域(점령지역)에서 國境(국경)이 定(정)해지는 條件(조건)으로 싸우는 戰爭(전쟁)이 벌어졌다.
1951年(년) 9月(월) 20日(일) 이승만(李承晩)은 休戰受諾(휴전수락)의 前提條件(전제조건)으로 中國(중국) 人民支援軍(인민지원군) 撤收(철수),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武裝解除(무장해제), 유엔(UN)監視下(감시하) 總選擧(총선거)를 要請(요청)하였다.
軍事分界線(군사분계선) 問題(문제)는 이미 1952年(년) 1月(월) 27日(일)에 妥結(타결)되었으며, 1952年(년) 5月(월)에 이르러선 捕虜(포로) 交換問題(교환문제)를 除外(제외)하곤 거의 大部分(대부분) 議題(의제)에 合議(합의)하였다.
韓國戰爭(한국전쟁) 中(중) 2年(년) 동안 이렇다 한 成果(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介入(개입)으로 戰線(전선)이 固着化(고착화)하자,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을 부담스러워한 美國(미국)은 現狀維持(현상유지) 次元(차원)에서 休戰協定(휴전협정)을 推進(추진)하였다.
蘇聯(소련)이 部分的(부분적)으로 參戰(참전)하자, 世界(세계) 여러나라들은 韓國戰爭(한국전쟁)이 머지않아 冷戰體制(냉전체제)와 韓國(한국)의 統一(통일)을 위한 第(제)3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可能性(가능성)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엔(UN)軍(군)과 中國(중국) 人民解放軍(인민해방군)은 얼른 이 韓國戰爭(한국전쟁)을 中斷(중단)하고, 休戰(휴전)을 하기로 했었다.
美國(미국)은 소비에트(Soviet) 聯邦(연방) 및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側(측)과 休戰(휴전)을 論議(논의)한다.
1952年(년) 3月(월) 이승만(李承晩)은 分斷狀態(분단상태)에서의 休戰(휴전)은 韓國(한국)에 대한 “死刑宣告(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主張(주장)하며, “民族國家(민족국가)로 生存(생존)하기 위해 單獨(단독)으로라도 繼續(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强調(강조)했다.
徹底(철저)한 反共主義(반공주의)를 志向(지향)하였던 이승만(李承晩)은 北進(북진)을 固執(고집)하며 休戰(휴전)에 協助(협조)하지 않았다.
유엔(UN)軍(군)과 韓國軍(한국군)이 反擊(반격)하였고 人民軍(인민군)을 鴨綠江(압록강)까지 北(북)쪽으로 물리쳤을 때, 이승만(李承晩)은 韓國(한국)을 分斷(분단)시킬 여러 번의 休戰提案(휴전제안)에 同意(동의)하기를 拒絶(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聯合國(연합국)들로부터 人氣(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승만(李承晩)은 유엔(UN)의 도움으로 統一(통일)된 韓國(한국)의 指導者(지도자)가 되기를 希望(희망)하였기에,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政府(정부)를 完全(완전)히 除去(제거)하는 데 妨害(방해)가 되는 어떤 協定(협정)에도 反對(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에 對應(대응)하여 좀 더 强力(강력)한 方法(방법)이 使用(사용)되어야 한다고 主張(주장)하였고 美國(미국)이 爆擊(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그리고 또한, 1953年(년) 3月(월) 5日(일) 스탈린(Stalin:Сталин)의 死亡(사망)으로 休戰會談(휴전회담)은 새로운 局面(국면)을 맞게 되어, 1953年(년) 3月(월) 19日(일) 蘇聯(소련) 內閣(내각)은 '韓國戰爭(한국전쟁)을 政治的(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決定(결정)을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과 北韓(북한)에 通報(통보)하면서 負傷捕虜(부상포로)의 于先(우선) 交換(교환)에 同意(동의)하도록 指示(지시)(또는 要請(요청)했다.
1953年(년) 5月(월) 30日(일) 이승만(李承晩)은 아이젠하워(Eisenhower)에게 보낸 親書(친서)에서 다시 韓美相互防衛條約(한미상호방위조약)을 要求(요구)하였다.
이승만(李承晩)은 休戰協定(휴전협정)을 妨害(방해)할 目的(목적)으로 收監(수감)된 捕虜(포로) 中(중) 反共捕虜(반공포로)를 大規模(대규모)로 釋放(석방)했다.(1953年(년) 6月(월) 18日(일) 電擊的(전격적)인 反共捕虜(반공포로) 釋放(석방)에 激憤(격분)한 美國(미국)은 이승만(李承晩)을 除去(제거)할 作戰(작전)을 計劃(계획)한다.
主(주)로 開城(개성)과 金剛山(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戰鬪(전투)가 繼續(계속)되다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蘇聯(소련)을 通(통)해 休戰(휴전)을 提議(제의)하였고, 유엔(UN)軍(군) 側(측)의 承認(승인)으로 休戰(휴전)이 成立(성립)되었다.
1953年(년) 7月(월) 27日(일)22時(시)에 板門店(판문점)에서 休戰協定(휴전협정)이 調印(조인)됨으로써 3年(년) 1個月(개월) 만에 韓國戰爭(한국전쟁)은 休戰(휴전)으로 매듭이 지어졌으며, 現在(현재)까지 繼續(계속)해서 效力(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休戰協定(휴전협정) 以後(이후) 이승만(李承晩) 大統領(대통령)은 다시 서울(Seoul)에 올라와서, 休戰協定(휴전협정) 4條(조) 60項(항)은 協定締結(협정체결) 後(후) 3個月(개월) 안에 韓半島(한반도) 問題(문제)의 平和的(평화적) 解決(해결)을 위한 高位級(고위급) 關係國(관계국) 政治會議(정치회의)를 開催(개최)할 것을 雙方(쌍방) 政府(정부)에 建議(건의)했다.
直後(직후)인 1953年(년) 8月(월) 28日(일) 第(제)7次(차) 유엔(UN) 總會(총회)는 유엔(UN) 總會(총회) 決議(결의) 第(제)711號(호)를 通(통)해 休戰協定(휴전협정)을 認准(인준)하고, 協定(협정) 4條(조)60項(항)이 建議(건의)한 대로 韓半島(한반도) 統一(통일)을 위한 政治會議(정치회의)가 開催(개최)되는 것을 歡迎(환영)한다고 선언했다.
餘波(여파)
大韓民國(대한민국)을 비롯한 世界(세계) 大部分(대부분)이 北韓(북한)이 韓半島(한반도) 全體(전체)를 共産化(공산화)하기 위한 次元(차원)에서 38度線(도선) 全域(전역)에 걸쳐서 大韓民國(대한민국)에 대한 武力侵攻(무력침공)을 敢行(감행)하였다는 南侵(남침)[南(남)으로 侵掠(침략)함]說(설)을 正說(정설)로 보는 가운데, 3年(년) 1個月(개월)에 걸친 韓國戰爭(한국전쟁)은 韓半島(한반도) 全體(전체)를 廢墟化(폐허화)했고, 參戰(참전)한 外國(외국)의 兵力(병력)에까지 極甚(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使用(사용)된 爆彈(폭탄)의 數(수)는 不分明(불분명)하지만 1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韓國戰爭(한국전쟁)은 그밖에도 約(약) 20萬(만) 名(명)의 戰爭未亡人(전쟁미망인)과 10餘萬(여만) 名(명)이 넘는 戰爭孤兒(전쟁고아)를 만들었으며 1千(천)餘萬(여만) 名(명)이 넘는 離散家族(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工業(공업) 施設(시설)이 破壞(파괴)되어 經濟的(경제적), 社會的(사회적) 暗黑期(암흑기)를 초래했다.
이번 韓國戰爭(한국전쟁)은 美國(미국)과 蘇聯(소련)을 비롯해 유엔(UN)과 醫療陣(의료진) 그리고 中共軍(중공군)까지 參戰(참전)하면서 第(제)3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에 가까운 戰爭(전쟁)이었다.
蘇聯(소련)의 統計(통계)에 따르면, 北韓(북한)의 11.1%에 該當(해당)되는 113萬(만) 名(명)의 人口(인구)가 戰爭(전쟁)을 通(통)하여 死亡(사망)하였고, 兩側(양측)을 合(합)하여 250萬(만) 名(명)이 死亡(사망)하였다.
80%의 産業施設(산업시설)과 公共施設(공공시설)과 交通施設(교통시설)이 破壞(파괴)되었고, 政府(정부) 建物(건물)의 4분의 3이 破壞(파괴)되거나 損傷(손상)되었으며, 家屋(가옥)의 折半(절반)이 破壞(파괴)되거나 損傷(손상)되었다.
韓國戰爭(한국전쟁)은 核武器(핵무기)를 除外(제외)한 當代(당대) 最新(최신)의 殺傷武器(살상무기)가 總動員(총동원)된 새로운 戰爭(전쟁)이었다.
戰爭(전쟁) 中(중) 美極東軍(미극동군)은 爆彈(폭탄) 46萬(만) 噸(톤), 네이팜탄(Napalm Tan)3萬(만) 2,357瓲(톤), 로켓탄(Rocket bomb) 31萬(만) 3,600發(발), 煙幕(연막) 로켓탄(Rocket bomb) 5萬(만) 5,797發(발), 機關銃(기관총) 1億(억) 6,685萬(만) 3,100發(발)을 쏟아 부었다.
韓半島(한반도) 全域(전역)이 갈기갈기 찢겼고, 그 안에 사는 生命體(생명체)들이 무수히 殺傷(살상)되었다.
3年(년) 동안 繼續(계속)된 이 戰爭(전쟁)으로 數(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大部分(대부분)의 産業施設(산업시설)들이 破壞(파괴)되는 等(등) 兩國(양국) 모두가 큰 被害(피해)를 입었으며, 大韓民國(대한민국)과 北韓(북한)間(간)의 敵對的(적대적) 感情(감정)이 澎湃(팽배)하게 되어 韓半島(한반도) 分斷(분단)이 더욱 完固(완고)해지면서, 現在(현재)까지도 休戰線(휴전선)에 依(의)한 分斷對峙(분단대치) 狀態(상태)를 維持(유지)하고 있다.
休戰協定(휴전협정) 以後(이후)의 衝突(충돌)
休戰協定(휴전협정) 以後(이후) 크고 작은 局地挑發(국지도발) 및 武力衝突(무력충돌)이 여러 번 있었다. 1968年(년)에는 北韓(북한)에서 김신조[金新朝:김재현(金在現, 1942年(년) 6月(월) 2日(일) ~ )은 南派(남파) 武裝工作員(무장공작원) 出身(출신)의 思想轉向者(사상전향자)이자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 改新敎(개신교) 牧師(목사) 이름인 김신조(金新朝)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를 앞세워 靑瓦臺(청와대) 浸透(침투)를 試圖(시도)한 事件(사건)이 있었으며, 이 過程(과정)에서 많은 警察(경찰)과 民間人(민간인)을 包含(포함)해 人命被害(인명피해)가 있었다.
1976年(년),板門店(판문점) 도끼 殺人事件(살인사건)이 일어나 駐韓美軍(주한미군) 將校(장교) 2名(명)이 死亡(사망)하였다.
2013年(년) 10月(월) 24日(일) 平和問題硏究所(평화문제연구소) 創立(창립) 30週年(주년) 記念(기념) 國際學術會議(국제학술회의)에서 청샤오허(成曉河) 中國人民大學(중국인민대학) 敎授(교수)에 依(의)해 김일성(金日成)은 1965年(년) 第(제)2次(차) 韓國戰爭(한국전쟁)을 計劃(계획)했지만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이 拒否(거부)했다는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外交部(외교부)의 機密解題(기밀해제) 文書(문서)(No.106-01480-07)가 公開(공개)되었다.
1990年(년) 以後(이후)에는 西海(서해) 北坊限界線(북방한계선) 附近(부근)에서 數次例(수차례)의 海上(해상) 武力衝突(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99年(년)에는 延平島(연평도) 附近(부근)에서 第(제)1延平海戰(연평해전)이 있었으며, 2002年(년) 韓日(한일)월드컵(World Cup)期間(기간) 사이에 비슷한 地點(지점)에서 第(제)2延平海戰(연평해전)이 勃發(발발)하였다.
2007年(년) 南北頂上會談(남북정상회담)은 '終戰(종전)'을 宣言(선언)하는 問題(문제)를 推進(추진)하기 위해 서로 協力(협력)해 나가기로 하였으나, 李明博(이명박) 行政府(행정부) 以後(이후) 狀況(상황)이 急變(급변)하여 北韓(북한)의 核實驗(핵실험) 等(등)으로 因(인)한 持續的(지속적)인 葛藤(갈등)으로 南北關係(남북관계)가 梗塞(경색)되었다.
2008年(년)에는 金剛山(금강산)에서 大韓民國(대한민국)의 觀光客(관광객) 1名(명)이 被殺(피살)되는 事件(사건)이 일어나 金剛山(금강산) 觀光(관광)이 中斷(중단)되었으며, 2009年(년)에는 大靑海戰(대청해전)이 勃發(발발)하였다.
2010年(년)에는 천안함 被擊(피격) 事件(사건)과 延平島(연평도) 砲擊(포격)이 發生(발생)하였다.
2013年(년) 3月(월) 5日(일) 北韓(북한)의 3次(차) 核實驗(핵실험)에 따른 유엔(UN)의 對北(대북) 制裁推進(제재추진)과 韓美(한미) 合同(합동) 軍事訓練(군사훈련) 키 리졸브(Key resolve)에 反撥(반발)해 北韓(북한)은 人民軍(인민군) 最高司令部(최고사령부) 代辯人(대변인) 聲明(성명)을 通(통)해 키 리졸브(Key resolve) 訓鍊(훈련)이 開始(개시)되면 休戰協定(휴전협정)을 白紙化(백지화)할 것이라고 宣言(선언)했으며 11日(일) 訓鍊(훈련)이 開始(개시)되자 停戰協定(정전협정)의 白紙化(백지화)를 宣言(선언)했다.
그리고 2006年(년), 2009年(년), 2013年(년), 2016年(년)에 잇따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4次例(차례)의 核實驗(핵실험)을 强行(강행)하였고, 2015年(년)에는 西部(서부) 戰線(전선) 砲擊事件(포격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2016年(년)에는 4次(차) 核實驗(핵실험)인 最初(최초)의 水素彈(수소탄) 核(핵) 實驗(실험)까지 强行(강행)하면서 南北關係(남북관계)가 더욱 梗塞(경색)되었다.
1年(년) 뒤인 2017年(년), 6次(차) 核實驗(핵실험)을 進行(진행)하고, 미사일(missile)을 發射(발사)하여 狀況(상황)을 더욱 惡化(악화)시켰다.
2020年(년),西海(서해)에서 延平島(연평도) 公務員(공무원) 被擊(피격) 死亡(사망) 事件(사건)이 일어났다.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金正恩(김정은Kim Jong-un)은 謝過(사과) 2日(일)뒤 威脅(위협)하였다.
戰後(전후) 國家別(국가별) 實態(실태)~大韓民國(대한민국)
美國(미국)의 統計(통계)에 따르면, 60萬(만) 名(명)이 戰爭(전쟁) 中(중)에 死亡(사망)하였고, 全體(전체) 參戰國(참전국)의 死亡者(사망자)를 모두 合(합)하면 200萬(만) 名(명)에 달한다고 한다. 韓國(한국)의 死亡者(사망자)는 百餘萬名(백여만명)이 넘으며 그中(중) 85%는 民間人(민간인)이다.
韓國戰爭(한국전쟁)으로 因(인)해 韓半島(한반도) 全體(전체)가 廢墟(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日本(일본)이 만들어 놓은 北韓(북한) 地域(지역)의 大規模(대규모) 工業地域(공업지역)은 絨緞爆擊(융단폭격)을 당해 完全(완전)히 燒失(소실)되었다.
漢江(한강)의 다리는 모조리 끊어졌으며 數(수)많은 戰爭孤兒(전쟁고아)가 量産(양산)되었다.
高麗(고려) 宮闕(궁궐) 滿月臺(만월대)는 美軍(미군)의 野戰病院(야전병원)을 만들기 위해서 불도저(bulldozer)로 파헤쳐 지기도 하였다.
韓國戰爭(한국전쟁)으로 因(인)하여 1000萬名(만명) 以上(이상)의 離散家族(이산가족)이 發生(발생)하였다.
戰爭(전쟁)을 通(통)해, 大韓民國(대한민국)은 美軍(미군)의 駐屯(주둔)과 美國(미국)의 經濟支援(경제지원)으로 軍事的(군사적)으로는 戰後(전후) 共産勢力(공산세력)에 依(의)한 南侵(남침)을 막고 經濟的(경제적)으로는 成長基盤(성장기반)을 마련했다고 보나, 戰爭(전쟁) 以前(이전)부터 있었던 反共主義(반공주의)가 國家(국가)의 理念(이념)으로 굳어지게 되어, 이승만(李承晩)의 獨裁政權(독재정권) 維持(유지)에 活用(활용)하였다는 視覺(시각)도 있다.
南北(남북)을 分斷(분단)시키는 境界線(경계선)이 戰後(전후) 새로 바뀌게 되었는데 開城市(개성시) 等(등)에 平野地域(평야역)은 北韓(북한)으로 되고 太白山脈(태백산맥)을 中心(중심)으로 한 조금 더 늘어난 山岳地域(산악지역)은 南韓(남한)으로 定(정)해졌다.
軍事的(군사적)으로는 山岳地域(산악지역)이 平野地域(평야지역)보다 占領(점령)하기가 힘들어서 더 價値(가치)가 있다는 理由(이유)로, 軍事分野(군사분야)에서는 戰後(전후)의 占領 地域(점령지역)에 戰爭(전쟁) 以前(이전)의 占領地域(점령지역)보다 더 意味(의미)를 附與(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에서는 서울(Seoul)特別市(특별시) 龍山區(용산구)의 戰爭記念館(전쟁기념관)을 비롯해 全國(전국) 16곳에 參戰記念碑(참전기념비), 參戰記念館(참전기념관), 公園(공원)을 造成(조성)하여 各國(각국) 軍(군)의 參戰(참전)과 殉國(순국)을 기리고 있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戰爭過程(전쟁과정)과 戰爭(전쟁) 以後(이후)에 김일성(金日成)은 韓國戰爭(한국전쟁)의 責任(책임)을 박헌영(朴憲永), 김무정(金武亭) 等(등) 自身(자신)의 政敵(정적)들에게 全部(전부) 뒤집어씌우고 肅淸(숙청)하여 自身(자신)의 政敵(정적)을 效果的(효과적)으로 除去(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金日成) 共産王朝體制(공산왕조체제)'의 基盤(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戰爭期間(전쟁기간) 동안 占領地(점령지) 住民(주민)에 대해 大規模(대규모) 虐殺(학살)을 恣行(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美軍(미군) 戰爭犯罪照査局(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文書(문서)들에서 드러났다.
共産主義的(공산주의적)인 産業化(산업화) 卽(즉), 計劃經濟(계획경제)에 따른 産業化(산업화)를 더욱 急速(급속)하게 推進(추진)할 수 있는 契機(계기)를 얻었으나 急進的(급진적)인 短期政策(단기정책)들의 效果(효과)는 未備(미비)하여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經濟的(경제적)인 狀況(상황)이 1960年代(년대) 以後(이후)로 大韓民國(대한민국)과의 比較(비교)에서 매우 惡化(악화)되었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當時(당시) 日本(일본)이 만들어 놓은 大規模(대규모) 工業團地(공업단지)가 爆擊(폭격)으로 因(인)해 完全(완전)히 燒失(소실)되었으며 韓國戰爭(한국전쟁) 直前(직전)까지 大韓民國(대한민국)보다 工業(공업)이 發展(발전)한 先進國(선진국)이였던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러한 被害(피해), 以後(이후) 族閥獨裁(족벌독재), 軍事力(군사력) 增强(증강)에만 集中(집중)하게 되어 1970年代(년대)에는 經濟(경제)가 逆轉(역전)되어 大韓民國(대한민국)보다 後進國(후진국)이 되었다.
北韓(북한)은 戰後(전후) 復舊(복구)를 위해 소비에트(Soviet) 聯邦(연방)으로부터 10億(억) 루블(рубль)을 支援(지원)받았으며,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8億(억) 慰安(위안)을 支援(지원)받았다.
開城(개성)과 黃海南道(황해남도) 一部(일부) 地域(지역)을 戰後(전후) 新解放地區(신해방지구)라고 하며 거기 살던 住民(주민)들을 咸鏡道(함경도)로 가서 살도록 보내고, 咸鏡道(함경도)에 住民(주민)들을 新解放地區(신해방지구)로 보냈다. 그리고 開城(개성) 쪽으로 탈북이 힘들도록 開城(개성)에는 承認番號(승인번호)가 있어야 出入(출입)이 可能(가능)하도록 바뀌었다.
美國(미국).
美國(미국)은 韓國戰爭(한국전쟁)에 가장 많은 軍事(군사)를 支援(지원)하였고,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將軍(장군)을 비롯한 相當數(상당수)의 美軍(미군)들이 戰爭捕虜(전쟁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 過程(과정)에서 銃殺(총살)된 美軍(미군)의 숫자도 많았다고 한다. 約(약) 54,000名(명)의 死亡者(사망자)가 發生(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Vietnam) 戰爭(전쟁) 때보다는 若干(약간) 적은 數(수)이지만 훨씬 짧은 時期(시기)에 發生(발생)하였다.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은 共産主義(공산주의) 陣營(진영)을 지키고 美國(미국)이 主導(주도)한 國際聯合軍(국제연합군)에 敗(패)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新生國家(신생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國際的(국제적)으로 位相(위상)을 提高(제고)시켰다.
그리고 國際法上(국제법상), 大韓民國(대한민국)을 侵掠(침략)한 北韓(북한)을 支援(지원)함으로써, 國際的(국제적)으로 外面(외면)과 指彈(지탄)을 받았고, 이는 한동안 같은 思想(사상)을 共有(공유)하는 蘇聯(소련)과 關係(관계)가 密接(밀접)해지는 傾向(경향)을 낳았다.
또한 이 戰爭(전쟁) 以後(이후) 中國(중국)의 經濟(경제)는 疲弊(피폐)해져서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은 大躍進(대약진) 運動(운동)을 始作(시작)하게 되었다.
유엔(UN)軍(군)
유엔(UN)軍(군)에는 美國(미국) 以外(이외)에 英國(영국), 캐나다(Canada), 터키(Turkey), 그리스(Greece) 等(등)이 所屬(소속)되어 1萬名(만명) 以上(이상)을 派兵(파병)하였다.
터키(Turkey)軍(군)은 1萬(만) 4936名(명)을 派兵(파병)하였고, 724名(명)이 戰死(전사)하였다.
戰後(전후) 提起(제기)된 問題(문제)~戰爭犯罪(전쟁범죄)
居昌(거창) 良民虐殺(양민학살) 事件(사건)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소위 人民裁判(인민재판) 等(등)의 組織的(조직적)인 戰時民間人(전시민간인) 虐殺(학살), 서울大學校(대학교) 附屬病院(부속병원) 虐殺(학살)事件(사건), 咸興(함흥) 虐殺(학살) 事件(사건), 靈光郡(영광군) 虐殺(학살) 事件(사건), 303高地(고지) 虐殺(학살),
大田(대전)矯導所(교도소) 虐殺(학살) 事件(사건)(相互間(상호간)
韓國軍(한국군): 漢江(한강) 人道敎(인도교) 爆破(폭파), 居昌(거창) 民間人(민간인) 虐殺(학살)事件(사건), 보도연맹[保導聯盟:1948年(년) 12月(월)에 國家(국가) 保安法(보안법)이 施行(시행)됨에 따라, 左翼(좌익) 轉向者(전향자)를 保護(보호)하고 指導(지도)한다는 名分(명분)으로 結成(결성)한 團體(단체).] 虐殺(학살), 山淸(산청)·咸陽(함양) 良民虐殺(양민학살) 事件(사건), 國民防衛軍(국민방위군) 事件(사건), 大田(대전)矯導所(교도소) 虐殺(학살) 事件(사건)(相互間(상호간)
戰爭中(전쟁중)의 拉北者(납북자), 捕虜送還問題(포로송환문제)
重複人員(중복인원)을 除外(제외)하고 拉北(납북)事實(사실)이 確認(확인)된 拉北者(납북자) 數(수)는 96,013名(명)으로 現在(현재)에도 生存(생존)하고 있는 拉北者(납북자)가 一部(일부) 있을 것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는 推定(추정)하고 있으나,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否認(부인)하고 있다.
또한 休戰(휴전) 後(후)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유엔(UN)軍(군) 捕虜(포로)들을 送還(송환)했다고 主張(주장)하나 아직도 未送還(미송환) 國軍(국군) 捕虜(포로)가 存在(존재)하고 있으며 美軍(미군)을 비롯한 유엔(UN)軍(군)捕虜(포로)들도 全部(전부)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推定(추정)된다.
美國(미국)의 韓國援助(한국원조).
美國(미국)은 1945年(년) 8月(월) 15日(일) 韓國(한국)이 日本(일본)으로 부터 解放(해방)한 直後(직후)부터 1970年(년) 5月(월)까지 20年(년) 동안 物資(물자)와 外貨不足(외화부족) 問題(문제)를 無償(무상)으로 支援(지원)해 주었으며, 특히 1950年(년)대말 까지는 유일한 外資導入(외자도입) 窓口(창구)로 韓國(한국) 經濟復興(경제부흥)에 美國(미국)의 韓國(한국) 援助政策(원조정책)이 가장 큰 寄與(기여)를 해주었다.
美國(미국)의 韓國(한국) 無償援助(무상원조)는 約(약) 44億(억) 달러(dollar), 有償援助(유상원조)는 約(약) 4億(억) 달러(dollar)에 달하여 韓國(한국) 經濟(경제)의 投資財源(투자재원) 마련, 國際收支(국제수지) 赤字保全(적자보전) 및 經濟成長(경제성장)에서 매우 重要(중요)한 役割(역할)을 했고 美國(미국)의 援助(원조)는 그 當時(당시) 家難(가난)했던 韓國(한국) 政府(정부) 豫算(예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갤러리(Gallery)
Korean War Historical Images Morning Calm Weekly Newspaper Installation Management Command, U.S. Army Signal Corps Photographs of American Military Activity Part 2 (2차 세계대전 전후) 國史編纂委員會(국사편찬위원회) 電子(전자)史料館(사료관)
中共軍(중공군) 介入(개입)으로 平壤(평양)에서 撤收(철수)하는 유엔(UN)軍(군)을 따라 南下(남하)하기 위해 大同江(대동강) 鐵橋(철교)에 매달린 避難民(피난민)들: 1950年(년) 12月(월) 3日(일) D. Helms 中士(중사) 撮影(촬영).
南下(남하)하기 위해 끊어진 大同江(대동강) 鐵橋(철교)를 오르는 避難民(피난민)들. 1950年(년) 12月(월) 3日(일) D. Helms 中士(중사) 撮影(촬영).
6.25 戰爭(전쟁) 當時(당시) 大同江(대동강)을 건너 南下(남하)하는 避難民(피난민)들. 1950年(년) 12月(월) 3日(일)의 寫眞(사진). 강물은 얼어붙기 直前(직전)이고, 얼음조각이 떠다녔다.
中共軍(중공군)의 南下(남하)를 피해 얼음같이 찬 大同江(대동강)을 맨발로 건너는 避難民(피난민)들. 이들은 故鄕(고향)인 平壤(평양)을 떠나 自由(자유)를 찾아 南(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1950年(년) 12月(월) 3日(일) D. Helms 中士(중사) 撮影(촬영).
中共軍(중공군)의 南下(남하)를 피해 大同江(대동강)을 건너 避難(피난)하는 避難民(피난민) 行列(행렬) 가운데 家族(가족)을 찾고 있는 韓國人(한국인) 兒童(아동): 1950年(년) 12月(월) 3日(일) D. Helms 中士(중사) 撮影(촬영).
中共軍(중공군)의 介入(개입)으로 신발을 벗어들고 얼음 조각이 떠 다니는 大同江(대동강)을 건너 南下(남하)하는 避難民(피난민)들: 1950年(년) 12月(월) 13日(일)
1950年(년) 12月(월) 19日(일) 興南(흥남) 撤收(철수) 當時(당시) 上陸(상륙)함에 오르기 위해 늘어선 避難民(피난민)들. 一部(일부)는 소달구지로 끌고온 하찮은 物品(물품)들을 漁船(어선)에 싣고 있다.
1950年(년) 12月(월) 19日(일) 興南(흥남) 撤收(철수)를 위해 물에 뜨는 것은 무엇이 타려는 北韓住民(북한주민). 南韓(남한) 上陸艦(상륙함)의 甲板(갑판)과 여러 漁船(어선)에 가득찬 避難民(피난민) 들.
1951年(년) 1月(월) 8日(일) 江陵(강릉) 外郭(외곽)에서 暴雪(폭설)을 뚫고 南(남)쪽을 向(향)해 끝없이 이어지는 避難行列(피난행렬)
서울(Seoul)에서 生捕(생포)된 12살의 人民軍(인민군) 송종태 二等兵(이등병)과 美軍(미군) Desert B Knight 一兵(일병). 宋(송) 二兵(이병)은 "Bugs Bunny"를 닮았다고 해서 "Bugs"라는 別名(별명)이 붙었다: 1951年(년) 1月(월) 14日(일) Angus J Walker 少領(소령) 撮影(촬영)
其他(기타)
’特殊(특수) 慰安隊(위안대) 實績(실적) 統計表(통계표)’ 檀紀(단기) 4285年度(년도) (1952年度(년도)) 陸軍本部(육군본부) 後方(후방)戰死(전사)
韓國戰爭(한국전쟁) 때 特殊(특수)慰安隊(위안대)가 設置(설치)되었다.
蔡命新(채명신) 將軍(장군)의 證言(증언)에 依(의)하면 韓國軍(한국군)은 士氣振作(사기진작)을 위해 60여 명을 1個(개) 中隊(중대)로하는 慰安部隊(위안부대)를 서너 個(개) 運用(운용)했다.
관우[關羽: 中國(중국) 三國時代(삼국시대), 蜀漢(촉한)의 將帥(장수)]의 67代(대) 後孫(후손)이자 관평[關平, 178年(년)? ~ 219年(년) 10月(월)은 中國(중국) 後漢末(후한말)의 武將(무장)이다. 蜀漢(촉한)의 猛將(맹장) 관우(關羽)의 장남(長男)이다.]의 66代(대) 後孫(후손)인 관충금(關忠金)은 이 戰爭(전쟁)에 中共軍(중공군)의 資格(자격)으로 參戰(참전)하여 國軍(국군)과 유엔(UN)軍(군) 聯合軍(연합군)과 戰鬪(전투)를 벌였다. 職責(직책)은 一般(일반) 兵卒(병졸)이였다.]
韓國戰爭(한국전쟁)을 素材(소재)로 한 作品(작품)
大韓民國(대한민국)~映畫(영화)
1961년 《5인의 해병》
1965년 《인천상륙작전》
2003년 《태극기 휘날리며》
2005년 《웰컴 투 동막골》
2010년 《포화 속으로》
2011년 《고지전》
2014년 《국제시장》
2015년 《서부전선》
2016년 《인천상륙작전》
2019년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드라마(Drama)
1975년 《전우》
1983년 《전우》
1991년 《여명의 눈동자》
1999년 《왕초》
2003년 《야인시대》
2006년 《서울 1945》
2010년 《전우》
2010년 《로드 넘버원》
게임(game)
2015년 《6월 25일》
海外映畫(해외영화)
1957년 《전송가》
1970년 《매시》
1981년 《오, 인천》
2017년 《아일라》
드라마(drama)
1972년 《매시》
關聯書籍(관련서적)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1993년. ISBN 978-89-3647-596-3
한성훈. 《가면권력》. 후마니타스. 2014년. ISBN 978-89-6437-212-8
같이보기(See together)
韓國戰爭(한국전쟁)의 武器目錄(무기목록)~韓國戰爭(한국전쟁) 戰鬪目錄(전투목록)
停戰(정전) 以後(이후)의 戰鬪(전투) 및 局地挑發(국지도발) 1·21 事態(사태)
- 金新朝(김신조:김재현(金在現, 1942年(년) 6月(월) 2日(일) ~ )은 南派(남파) 武裝工作員(무장공작원) 出身(출신)의 思想轉向者(사상전향자)이자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 改新敎(개신교) 牧師(목사) 이름인 김신조(金新朝)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咸鏡北道(함경북도) 淸津(청진)에서 出生(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平安南道(평안남도) 順川(순천)에서 잠시 幼兒期(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만 5歲(세) 時節(시절) 平安南道(평안남도) 平壤(평양)에 移住(이주)하여 成長(성장)한 그는 1968년 1월...) 武裝共匪(무장공비) 浸透事件(침투사건)
第(제)1延平海戰(연평해전)
第(제)2延平海戰(연평해전) - 最初(최초)에는 西海交戰(서해교전)으로 命名(명명)되었다가 以後(이후) 第(제)2延平海戰(연평해전)으로 改名(개명)
大靑海戰(대청해전)
천안함 被擊事件(피격사건)
延平島(연평도) 砲擊(포격)
56艦(함) 被擊沈沒事件(피격침몰사건)
海軍放送船(해군방송선) 被拉事件(피랍사건)
海警警備艇(해경경비정) 第(제)863號(호) 被擊事件(피격사건)
2020年(년) 南北共同連絡事務所(남북(공동연락사무소) 爆破事件(폭파사건)
在日學徒義勇軍(재일학도의용군)
第(제)1共和國(공화국)
이승만[李承晩, 1875年(년) 3月(월) 26日(일) ~ 1965年(년) 7月(월) 19日(일)은 朝鮮(조선)·大韓帝國(대한제국)·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開化派(개화파)·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言論人(언론인)·政治人(정치인)·敎育者(교육자),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의 初代(초대) 大統領(대통령)이자 마지막 主席(주석), 大韓民國(대한민국)의 第(제)1·2·3代(대) 大統領(대통령)이다.
1949年(년) 建國勳章(건국훈장) 大韓民國章(대한민국장)에 敍勳(서훈)되었다. 本貫(본관)은 全州(전주)이고, 初名(초명)은 승룡(承龍), 號(호)는 우남(雩南)이다.
黃海道(황해도) 平山郡(평산군)에서 讓寧大君(양녕대군)의 傍系(방계) 16代孫(대손)으로 태어났다.
大韓帝國(대한제국) 時節(시절) 《獨立新聞(독립신문)》과 《報協成會會報(협성회회보)》 主筆(주필), 獨立協會(독립협회) 活動(활동) 等(등) 啓蒙運動(계몽운동)을 하였고, 王政(왕정) 廢止(폐지)와 共和國(공화국) 樹立(수립)을 圖謨(도모)하였다는 反逆(반역)의 罪目(죄목)으로 漢城監獄(한성감옥)에 投獄(투옥)되었다.
收監(수감) 時節(시절) 基督敎(기독교)로 改宗(개종)하고, 獄中(옥중) 啓蒙活動(계몽활동)을 하고, 《獨立精神(독립정신)》을 著述(저술)하였다.
大韓帝國(대한제국) 末期(말기) 特別赦免(특별사면)된 後(후) 密使(밀사)로 渡美(도미)하였다가 큰 成果(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美國(미국)에서 學業(학업)을 繼續(계속)하여 5年(년)에 걸쳐 조지워싱턴(George Washington) 大學校(대학교)에서 學士(학사), 하버드(Harvard)大學校(대학교)에서 碩士(석사), 프린스턴(Princeton) 大學校(대학교)에서 博士學位(박사학위)를 받았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朝鮮(조선)에 歸國(귀국)하여 啓蒙(계몽)敎育(교육)을 하다가 日帝(일제)의 逮捕(체포)威脅(위협)을 피해 1912年(년) 美國(미국)으로 亡命(망명), 하와이(Hawaii)에서 韓人學院(한인학원)과 韓人學校(한인학교) 等(등)을 運營(운영)하며 實力養成運動(실력양성운동)을 하였다.
1919年(년) 3.1 運動(운동) 以後(이후)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獨立運動(독립운동) 方法(방법)을 놓고 意見(의견)이 갈라졌을 때 그는 國內(국내)의 事情(사정)을 外國(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求(구)하는 外交獨立論(외교독립론)을 主張(주장)하였다.
大韓國民議會(대한국민의회), 上海(상해) 臨時政府(임시정부), 漢城政府(한성정부) 等(등) 各地(각지)에서 樹立(수립)된 臨時政府(임시정부)의 首班(수반)을 거쳐 1919年(년)부터 1925年(년)까지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 大統領(대통령)을 歷任(역임)하였다.
1919年(년)부터 光復(광복) 때까지 歐美委員部(구미위원부) 委員長(위원장), 駐美外務行書(주미외무행서) 外務委員長(외무위원장), 駐美(주미)外交委員部(외교위원부) 委員長(위원장) 等(등)을 歷任(역임)하며 主(주)로 美國(미국)에서 外交(외교) 中心(중심)의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펼쳤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中後半(중후반)에는日本內幕記 《日本內幕記(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著述(저술)하는 等(등) 日本(일본)의 美國(미국) 侵掠(침략)을 警告(경고)하였고, 1941年(년) 太平洋(태평양) 戰爭(전쟁)이 勃發(발발)하자 日本(일본) 帝國(제국)의 敗戰(패전)을 確信(확신)하고 日帝(일제)가 亡(망)하는 卽時(즉시) 韓國(한국)이 빼앗긴 主權(주권)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國際社會(국제사회)가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를 正式(정식)承認(승인)해야 된다는 外交活動(외교활동)을 하였고, 美國(미국)의 소리 超短波(초단파) 放送(방송)을 通(통)해 故國同胞(고국동포)들의 鬪爭(투쟁)을 激勵(격려)하였으며, 臨時政府(임시정부)와 美軍(미군) OSS 間(간)의 韓美(한미)軍事協力(군사협력)을 周旋(주선)하였다.
1945年(년) 光復(광복) 後(후) 김구(金九)와 함께 信託統治(신탁통치) 反對運動(반대운동)을 主導(주도)하였다. 또한 共産陣營(공산진영)과의 妥協(타협)이 不可能(불가능)하다고 判斷(판단), 38線(선) 以南(이남)에 民族陣營민족진영)을 中心(중심)으로 國際社會(국제사회)가 認定(인정)하는 合法政府(합법정부)를 單獨樹立(단독수립)한 뒤 38線(선) 以北(이북)의 非合法政府(비합법정부)와 共産陣營(공산진영) 一體(일체)를 쫓아내고 韓半島(한반도) 統一(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1948年(년) 制憲(제헌) 國會議長(국회의장)을 지냈으며, 그 해 大韓民國(대한민국) 初代(초대) 大統領(대통령)에 當選(당선)되었다.
冷戰時代(냉전시대)에 발맞추어 反共主義(반공주의), 自由民主主義(자유민주주의), 市場
經濟體制(시장경제체제)의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土臺(토대)를 마련하였고, 1949年(년) 農地改革法(농지개혁법) 制定(제정), 1953年(년) 韓美相互防衛條約(한미상호방위조약) 締結(체결) 等(등) 안팎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 發展(발전)의 基礎(기초)를 마련하였다. 1952年(년) 平和線(평화선)을 宣布(선포)하여 獨島(독도)를 死守(사수)하였다.
1952年(년) 大統領(대통령) 直選制(직선제)를 骨子(골자)로 한 拔萃改憲(발췌개헌)과 1954年(년) 大統領(대통령) 連任制限(연임제한) 廢止(폐지)와 國家主義(국가주의)經濟條項(경제조항)을 市場經濟條項(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四捨五入(사사오입) 改憲(개헌)을 하여 大統領(대통령)을 3回(회) 歷任(역임)하였다.
1960年(년) 제4代(대) 大統領(대통령)에 選出(선출)되었으나 3.15 不正選擧(부정선거)로 促發(촉발)된 4·19 革命(혁명)에 대한 責任(책임)을 지고 自進(자진) 下野(하야)했고, 하와이(Hawaii)로 亡命(망명)한 後(후) 歸國(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逝去(서거)하였다. 葬禮(장례)는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 家族葬(가족장)으로 執行(집행)되었으며, 國立(국립)서울(Seoul)顯忠院(현충원)에 安葬(안장)되었다.
特殊(특수) 慰安隊(위안대)~北美平和協定(북미평화협정)
日本(일본)의 韓國(한국) 戰爭特殊(전쟁특수)(ja:朝鮮特需)
仁川(인천) 上陸作戰(상륙작전)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年(년) 1月(월) 26日(일) ~ 1964年(년) 4月(월) 5日(일)는 美國(미국)의 軍人(군인)이자 政治家(정치가)이며 社會運動(사회운동)가이다. 美國(미국) 陸軍(육군)士官學校(사관학교)와 美國(미국) 陸軍參謀大學校(육군참모대학교)를 거쳐 美國(미국) 陸軍指揮參謀大學校(육군지휘참모대학교)를 卒業(졸업)하였다. 第(제) 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當時(당시) 指揮官(지휘관)이였다.
第(제)1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과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韓國戰爭(한국전쟁)에 美國軍(미국군)과 聯合軍(연합군)의 指揮官(지휘관)으로 活動(활동)하였다. 필리핀(Philippines) 植民地(식민지)의 統治者(통치자)였으며, 1945年(년) 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終戰以後(종전이후)에는 極東軍(극동군)의 指揮官(지휘관)을 지냈다. 또한 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亦是(역시) 그의 管理對象(관리대상)이었다.
1937年(년) 退役(퇴역)하고 필리핀(Philippines) 名譽陸軍大將(명예육군대장)으로 推戴(추대)되었다가, 1941年(년) 美國陸軍大將(미국육군대장)으로 復歸(복귀)한 後(후) 1944年(년) 美國陸軍元帥(미국육군원수) 階級(계급)을 받아 進級(진급)하였다.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의 終決(종결)과 日本(일본)의 降伏(항복)이 있은 後(후) 日本(일본)에 駐屯(주둔)하다가 韓國戰爭(한국전쟁)을 指揮(지휘)하였다. 韓國戰爭(한국전쟁) 當時(당시) 美國軍(미국군) 司令官(사령관)으로 參戰(참전)하였으며,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人民軍(인민군)이 大邱(대구)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을 成功(성공)시켜 人民軍(인민군)들을 南北(남북)으로 兩分(양분)시켰다.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 參考(참고) 1945年(년)부터 1951年(년)까지 外國人(외국인) 身分(신분)으로 日本軍(일본군) 占領司令部(점령사령부) 元帥(원수)를 지냈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姓(성)은 原來(원래) 正確(정확)한 英語(영어) 發音(발음) 表記(표기)는 /məkˈɑːrθər/이다.
外來語(외래어) 表記法(표기법)에 依(의)한 英語(영어)의 한글 表記(표기) 原則(원칙)대로 그의 姓(성)을 韓國語(한국어)로 表記(표기)하면 매카서(McCarthy)가 맞으나 國立國語原(국립국어원)에서는 標準國語大事典(표준국어대사전)에 收錄(수록)된 慣習的(관습적) 通用(통용) 表記(표기)를 尊重(존중)하여 맥아더(MacArthur)로 表記(표기) 用例(용례)를 定(정)하였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1880年(년) 아칸소주 리틀록(Little Rock, Arkansas)의 兵營(병영)에서 스코틀랜드(The Granite City)로 移民(이민)한 移民者(이민자) 出身(출신) 軍人(家門(군인가문)의 아들로 出生(출생)하였으며 지난날 美國(미국) 뉴욕 주 올버니(Albany, New York)에서 잠시 幼兒期(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훗날 美國(미국) 뉴욕주 뉴욕 시티(New York City, New York)에서 成長(성장)하였다.
위로 4年(년) 年上(연상)의 아서 맥아더(Arthur MacArthur) 3世(세)(1876年(년)~1923年(년)와 2年(년) 年上(연상)의 맬컴 맥아더(Malcolm MacArthur)가 있었다. 그러나 맬컴(Malcolm)은 5歲(세) 때인 1883年(년)에 死亡(사망)했다.
아버지(father)
더글러스(Douglas)의 아버지(father) 아서 맥아더 2세(Arthur MacArthur Jr.)(中將(중장) 豫編(예편)는 독실한 改新敎(개신교) 信者(신자)로, 幼年期(유년기)부터 그에게 影響(영향)을 미쳤다. 아버지(father) 아서 2世(세)(Arthur II)는 美軍(미군) 將校(장교)로 美國(미국)-스페인(Spain) 戰爭(전쟁)과 美國(미국)-필리핀(Philippines) 戰爭(전쟁)에 參戰(참전)하였고, 1900年(년) 美國(미국)이 필리핀(Philippines) 戰爭(전쟁)에서 勝利(승리)를 거둔 뒤 占領(점령)하고 있던 필리핀(Philippines)의 軍政(군정) 總督(총독)으로 在職(재직)한 바가 있었다. 한때 豫編(예편)하고 돌아와서 法律(법률)工夫(공부)를 했다가 다시 軍人(군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아버지(father) 아서(Arthur)는 行軍(행군) 때마다 自身(자신)도 士兵(사병)들과 똑같이 걸음으로써, 어린 맥아더(MacArthur)에게 指揮官(지휘관)이 먼저 規則(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軍人精神(군인정신)을 가진 아버지(father)의 影響(영향)을 받은 그는 軍人(군인)이 되기로 決心(결심)하고 웨스트포인트(West Point)에 進學(진학)했다.
어머니(Mother)
어머니(Mother) 메리 하디 맥아더(Mary Pinkney Hardy MacArthur)는 自身(자신)의 私生活(사생활)을 抛棄(포기)하면서까지 아들의 敎育(교육)에 매달렸는데, 아들이 웨스트포인트(West Point)에 進學(진학)했을 때에는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近處(근처)에 房(방)을 얻어 宿食(숙식)하면서 아들을 뒷바라지하였다.
士官學校(사관학교) 生活(생활)
웨스트포인트(West Point)를 首席(수석)으로 卒業(졸업)했는데,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在學(재학) 當時(당시) 蔓延(만연)한 學校(학교) 內(내) 暴力問題(폭력문제)로 彷徨(방황)하기도 하였다.
當時(당시)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士官學校(사관학교)에서는 拳鬪(권투)나 體罰(체벌)을 憑藉(빙자)한 先輩(선배)들의 苛酷(가혹) 行爲(행위) 때문에 一部(일부) 士官候補生(사관후보생)들이 自殺(자살)하거나 學校(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있었을 程度(정도)로 暴力(폭력)이 深刻(심각)했다.
이 事實(사실)이 알려지면서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大統領(대통령) 指示(지시)로 議會(의회)에서 聽聞會(청문회)가 벌어졌는데, 이는 靑年(청년) 맥아더(MacArthur)에게 心的(심적)인 彷徨(방황)의 原因(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當時(당시) 맥아더(MacArthur)는 學校(학교) 暴力(폭력) 被害者(피해자)의 便(편)에서 加害者(가해자)들을 告發(고발)할 것인가, 아니면 軍人(군인)으로서 입을 무겁게 해야 할 것인가로 苦悶(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맥아더(MacArthur)는 곧 良心(양심)에 따라 加害者(가해자)들을 告發(고발)하는 것으로 決定(결정)한다.
한편 웨스트포인트(West Point)에 在學(재학) 中(중)일 때에도 그는 多少(다소) 同僚(동료) 關係(관계)가 圓滿(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出身(출신)들의 結婚式(결혼식)은 大槪(대개) 新郞(신랑)과 校友(교우)들의 끈끈한 紐帶關係(유대관계) 를 보여주는 重要(중요)한 社交(사교) 行事(행사)였다. 그런데도 그의 첫 번째 結婚式(결혼식)은 親舊(친구)와 同僚(동료) 賀客(하객)이 너무 적어서 注目(주목)을 끌 程度(정도)였다. 한편 그는 假飾的(가식적)인 性格(성격)을 至毒(지독)하게 嫌惡(혐오)하여, 마음에 없는 말과 行動(행동)을 하는 이가 눈에 띄면 대놓고 指摘(지적)하고 비꼬기도 했다. 이런 態度(태도) 때문에 親舊(친구)보다는 敵(적)을 相當(상당)히 많이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웨스트포인트(West Point)를 卒業(졸업)할 때까지 그는 4年(년) 동안 歷代(역대)最高(최고) 點數(점수)인 98點(점)대의 優秀(우수)한 成績(성적)을 維持(유지)했다. 맥아더(MacArthur)는 아이젠하워(Eisenhower) 尾局(미국) 大統領(대통령)의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大先輩(대선배)였는데 卒業(졸업) 때 成績(성적)은 더글러스(Douglas)가 首席(수석)인 半面(반면) 아이젠하워(Eisenhower)는(Class 1915年(년) 132등이었다. 더글러스(Douglas)는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陸士(육사)를 나온 以後(이후) 砲兵學校(포병학교)와 陸軍大(육군대)를 거쳐 指揮參謀隊(지휘참모대)를 나왔고 한편 運動(운동)을 좋아하여 陸士(육사) 時節(시절) 校內(교내) 野球(야구) 選手(선수)로 活動(활동)하기도 하였다.
1912年(년) 9月(월) 5日(일) 그의 아버지(father) 아서 주니어(Arthur Jr.)가 死亡(사망)한다.
第(제)1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美軍(미군)參戰(참전) 當時(당시) 第(제)42師團(사단) 參謀長(참모장)이자 大領(대령)으로 프랑스(France)에서 服務(복무)하였으며. 第(제)1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때 42師團(사단) 勤務時(근무시) 1918年(년) 陸軍(육군)准將(준장)으로 陞進(승진)하여, 프랑스(France) 駐屯軍(주둔군) 84步兵(보병) 旅團長(여단장), 42師團(사단) 臨示(임시) 師團長(사단장)이 되었는데 프랑스(France)에서 美軍(미군) 最年少(최연소) 師團長(사단장)이기도 했다.
以後(이후) 1919年(년)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校長(교장)이 되고, 母校(모교)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의 校長(교장), 1次大戰(차대전) 終戰(종전) 以後(이후) 1925年(년)에 最年少(최연소) 陸軍(육군)少將(소장)이 되었고, 1930年(년) 후버(Hoover) 大統領(대통령) 때 美國(미국) 13代(대) 陸軍參謀總長(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후버(Hoover) 大統領(대통령) 때인 1932年(년) 中葉(중엽) 正規軍(정규군) 部隊(부대)를 워싱턴(Washington)으로 보내 '老兵(노병) 보너스 군대'(Bonus Army of veterans)를 武力(무력)으로 解散(해산)하자 四坊(사방)에서 非難(비난)이 쏟아졌다.
1935年(년) 10月(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大統領(대통령) 初期(초기)에 陸軍參謀總長(육군참모총장) 任期(임기)를 마쳤으며 1935年(년)에서 1937年(년)까지 필리핀(Philippines) 政府(정부) 最高軍事 顧問(최고군사고문)을 지냈다. 1937年(년) 退役(퇴역)하였다.
그 해에 필리핀(Philippines) 陸軍元帥(육군원수:General of the Army)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father)는 필리핀(Philippines) 總督(총독)을 지냈으며, 2代(대)에 걸쳐 맥아더(MacArthur)家門(가문)은 필리핀(Philippines)에서 莫大(막대)한 利權(이권)과 影響力(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35年(년)~1941年(년)에는 資金(자금)의 不足(부족)을 무릅쓰고 對日(대일) 필리핀(Philippines) 防衛軍(방위군)을 組織(조직)하는 데 專力(전력)했다.
現役復歸(현역복귀)와 2次(차) 大戰參戰(대전참전)
第(제)2次(차) 世界大戰中(세계대전중)인 1941年(년) 7月(월)에 豫備役(예비역)에서 召集(소집)되어 다시 現役(현역)으로 復歸(복귀)함과 同時(동시)에 필리핀(Philippines) 駐在(주재) 美國(미국) 極東軍(극동군) 最高司令官(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42年(년) 3月(월) 西南(서남) 太平洋(태평양) 方面(방면) 聯合軍(연합군) 總司令官(총사령관)이 되고, 1944年(년) 元帥(원수)가 되었다. 1945年(년) 日本軍(일본군)을 擊破(격파)하고 필리핀(Philippines) 에 上陸(상륙)하였으며, 以後(이후) 대일(對日) 占領(점령)聯合軍(연합군) 最高司令官(최고사령관)으로서 8月(월) 30日(일) 日本(일본) 땅에 첫 발을 디뎠다.
8月(월) 初(초) 美國(미국) 大統領(대통령)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은 日本(일본)에 原子爆彈(원자폭탄) 投下(투하)를 指示(지시)했다. 8月(월) 6日(일)과 8月(월) 9日(일), 새벽 히로시마(広島:Hiroshima)와 나가사키(長崎:Nagasaki)에 原子爆彈(원자폭탄)이 投下(투하)되었다. 結局(결국) 多數(다수)의 人命(인명) 死傷者(사상자)를 내고 日本(일본)은 히로히토(Hirohito:ヒロヒト) 日王(일왕)이 直接(직접) 降伏(항복)聲明(성명)을 發表(발표)함으로써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은 終決(종결)된다. 當初(당초) 美國(미국) 空軍(공군)이 原子爆彈(원자폭탄)을 投下(투하)할 場所(장소)로 豫定(예정)한 곳 中(중) 하나는 오사카시(大阪市:Osaka City)였으나, 이곳은 日本人(일본인)의 精神(정신)적인 遺産(유산)이 많이 所在(소재)한 곳이라 打擊(타격)을 가했다가 日本人(일본인)들의 抗戰(항전) 意志(의지)를 刺戟(자극)할 수 있다고 하여 맥아더(MacArthur)가 直接(직접) 오사카(大阪市:Osaka City) 爆擊(폭격)은 排除(배제)했다는 說(설)도 있다.
事實(사실) 맥아더(MacArthur)는 原子爆彈(원자폭탄) 攻擊(공격)보다는 日本(일본) 本土進入(본토진입)을 念頭(염두)에 두고 니미츠(Nimitz) 元帥(원수)와 指揮權(지휘권)을 調律中(조율중)이었다.
日本(일본)에서의 軍政活動(군정활동)1945年(년)부터 이듬해 1946年(년)까지 1年間(년간) 日本(일본) 히로히토(ヒロヒト:Hirohito) 天皇(천황) 代身(대신) 日本(일본)의 權力(권력)을 잡았기에 日本(일본) 歷史(역사) 最初(최초)의 外國人(외국인) 執政官(집정관)이기도 한 맥아더(MacArthur)는 日本(일본)에 대한 情緖(정서)를 어느 정도 理解(이해)하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맥아더(MacArthur)는 日本人(일본인)을 쉽게 다스리기 위해 天皇(천황)의 “天皇(천황)은 人間(인간)” 發言(발언)을 이끌어 낸 것으로도 有名(유명)하며, 聖書(성서)를 大量(대량)으로 流逋(유포)하는 等(등) 宗敎(종교)로써 日本(일본)을 順應(순응)시키려고 하였다.
이 過程(과정)에서 맥아더(MacArthur)는 쇼와 천황(昭和天皇)의 격을 깎기 위해 둘이 나란히 서서 紀念寫眞(기념사진)을 찍었다. 키 183cm의 맥아더(MacArthur)와 키 165cm의 쇼와 천황(昭和天皇)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에서 쇼와 천황(昭和天皇)은 엄청 초라하게 찍혔다. 물론 當代(당대) 아시아(Asia)人(인) 成人(성인) 男性(남성)의 平均身長(평균신장)이 162cm 程度(정도)에 不過(불과)해서 當代(당대) 아시아(Asia)人(인)들의 基準(기준)으로 보자면 쇼와 천황(昭和天皇)이 平凡(평범)한 것이고 되려 맥아더(MacArthur)가 巨人(거인)이었지만 너무 큰 키 差異(차이)로 因(인)해 寫眞(사진)속에서는 쇼와 천황(昭和天皇)이 초라해 보이는 게 事實(사실)이다.
寫眞上(사진상)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動作(동작)도 對照(대조)되는데 쇼와 천황(昭和天皇)이 차렷 자세로 바짝 緊張(긴장)하고 서 있는 것과는 對照(대조)되게 맥아더(MacArthur)는 짝다리를 짚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로 서 있다.
問題(문제)는 이게 맥아더(MacArthur)의 意圖(의도)와는 전혀 다른 兩相(양상)으로 商況(상황)이 돌아갔다는 點(점)이다. 맥아더(MacArthur)는 本人(본인)이 어떻게 되든 말든 전혀 神經(신경)을 안 쓰고 그저 天皇(천황)의 격을 最大(최대)한 깎아서 다시는 天皇(천황)을 中心(중심)으로 戰爭(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막으려고 한 行動(행동)이었을 뿐이었지만 웃기게도 日本人(일본인)들은 天皇(천황)의 격을 깎기는 커녕 되려 맥아더를 神(신)으로 崇拜(숭배)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當時(당시) 日本人(일본인)들이 맥아더(MacArthur)의 名義(명의)로 聯合軍(연합군) 最高司令部(최고사령부)에 보낸 팬레터(Fan letter)가 엄청났는데 1946年(년) 9月(월)부터 1951年(년) 5月(월)까지 聯合國(연합국) 飜譯通譯班(번역통역반:ATIS)에서 44萬(만) 1,161通(통)의 便紙(편지) 葉書(엽서)를 읽고 處理(처리)했다는 公式記錄(공식기록)이 存在(존재)하며 맥아더(MacArthur)는 본의 아니게 日本人(일본인)들에게 엄청난 膳物(선물)을 받아야만 했다. 平素(평소) 天皇(천황)을 最高(최고)의 存在(존재)로 여겼던 日本人(일본인)들은, 맥아더가 만든 이 狀況(상황)을 目擊(목격)하자 最高(최고) 위에 더 最高(최고)가 있구나라고 생각해버릴 뿐이었으므로 맥아더(MacArthur)는 그야말로 日本人(일본인)들에게 神(신)으로 崇拜(숭배)되는 地鏡(지경)까지 갔다.
오죽하면 日本人(일본인)들 사이에서는 GHQ(總司令部(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막부[幕府:1192年(년)~1868年(년)에 實質的(실질적)으로 日本(일본)을 統治(통치)한 世襲的(세습적) 軍事(군사) 獨裁者(독재자)인 쇼군(将軍)의 政府(정부) 또는 예전에, 邊方(변방)에 將軍(장군)들이 머물면서 軍事(군사)를 指揮(지휘)하던 곳.]의 더글러스 맥아더 쇼군[Douglas MacArthur Shogun]이라는 別名(별명)까지 지어서 불렀다. 이는 日本(일본) 신토(神道:Shinto)에까지 影響(영향)을 끼쳐서 신토 토속신(神道土俗新:Shinto local god)들 中(중)에 맥아더(MacArthur)가 包含(포함)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卽(즉), 日本(일본) 軍國主義(군국주의)의 思想的(사상적) 根據(근거)가 된다고 判斷(판단)한 신토(神道:Shinto)를 無力化(무력화)시키고, 神化敎育(신화교육) 等(등)을 徹底(철저)히 禁止(금지)시켜 戰爭(전쟁) 挑發(도발)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勿論(물론) 여기서 若干(약간)의 역효과가 나타나는데 신토(神道:Shinto) 中(중)에서 맥아더(MacArthur)를 崇拜(숭배)하는 신토(神道:Shinto)가 이 때 생겨난 것이었다. 그外(외) 日本(일본)에서의 맥아더(MacArthur)의 奪軍國主義化(탈군국주의화) 政策(정책)으로는 社會主義(사회주의)와 勞動運動(노동운동) 默認(묵인)을 通(통)한 資本(자본)가 牽制(견제)(資本家(자본가)들이 軍隊(군대)와 協助(협조)하지 못하게 하려는 政策(정책), 敎科書(교과서) 內(내) 天皇(천황) 神格化(신격화) 禁止(금지) 措置(조치), 軍國主義(군국주의) 體制(체제)의 버팀목이었던 財閥解體(재벌해체), 戰爭(전쟁) 責任(책임)이 있던 公職者(공직자) 2萬名(만명) 公職追放(공직추방) 等(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試圖(시도)들은 施行(시행)되는 途中(도중) 韓國戰爭(한국전쟁)과 트루먼(Truman)과의 左右(좌우) 對立(대립)葛藤(갈등)이 勃發(발발)하고 以後(이후) 日本(일본)社會(사회)가 다시 保受化(보수화)되면서 意味(의미)가 없게 되었다.
公職(공직) 追放令(추방령)이 解除(해제)되면서 前前(전전)의 右翼(우익) 性向(성향) 政治人(정치인), 公職者(공직자)들이 모두 復歸(복귀)했으며, 解體(해체)되었던 財閥(재벌)은 다시 再結合(재결합)하였다. 이로 因(인)하여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支持者(지지자)들로부터 맥아더(MacArthur)는 GHQ[總司令部(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막부(幕府)의 將軍(장군)이라는 稱號(칭호)를 얻게 되었다.
1945年(년) 9月(월) 2日(일) 朝鮮(조선)에는 美軍(미군) 太平洋司令部(태평양사령부) 豫下(예하) 美陸軍(미육군) 第(제)24軍團(군단)을 派遣(파견), 中將(중장) 존 리드 하지(John Reed Not)를 代理人(대리인)으로 任命(임명)하고 '朝鮮民衆(조선민중)에 대한 布告文(포고문) 第(제)1號(호)'를 發表(발표)하게 했다.
韓半島(한반도)에서의 影響(영향) 및 活動(활동).
1948年(년) 初(초)가을, 이승만(李承晩) 大統領(대통령) 內外(내외)는 정한경(鄭翰景)(1949年(년) 1月(월) 駐日代表部(주일대표부) 大使(대사)로 任命(임명)된다.), 金良千(김양천) 祕書(비서), 金東成(김동성) 公報處長(공보처장), 李貞淳(이정순) 公報局長(공보국장) 4名(명)의 隨行員(수행원)과 함께 日本(일본)을 처음으로 訪問(방문)하였다.
이 訪問(방문)은 맥아더(MacArthur)의 招請(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1박2일은 非公式的(비공식적) 社交(사교) 訪問(방문)이었으나, 大韓民國(대한민국)이 主權(주권)을 回復(회복)하고 나서, 初代(초대) 大統領(대통령)이 日本(일본) 땅을 처음 밟는 것이었다. 駐日(주일) 美國大使館邸(미국대사관저)에서 맥아더(MacArthur)와 1次(차) 會談(회담)을 가진 이승만(李承晩)은 이날 밤 맥아더(MacArthur)의 邸宅(저택)으로 招待(초대)되어 함께 祝杯(축배)를 들었다. 이 訪問(방문)은 맥아더(MacArthur)의 訪韓(방한)에 대한 答訪(답방)의 形式(형식)이었으나, 맥아더(MacArthur)將軍(장군)으로부터 韓國(한국) 防衛(방위)에 대한 確實(확실)한 支援(지원)을 얻어내자는 것이 主目的(주목적)이었다.
以後(이후) 그는 이승만(李承晩)의 歸國(귀국) 便宜(편의)를 봐 주었고, 10月(월) 12日(일) 도쿄(東京)에 到着(도착)한 이승만(李承晩)에게 自身(자신)의 專用機(전용기)를 내주어 歸國(귀국)시켰다. 以後(이후) 이승만(李承晩)은 隨時(수시)로 그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國內(국내)에서의 美軍政(미군정)을 指揮(지휘)하던 존 하지(John not)와는 隨時(수시)로 摩擦(마찰)을 빚는다.
韓國(한국) 政府(정부)의 대한군원(對韓軍援)과 美軍(미군)의 繼續(계속) 駐屯(주둔) 要求(요구)에 대해 美國(미국) 國務省(국무성)이 消極的(소극적)인 態度(태도)를 보이자, 이승만(李承晩)은 그의 옛 親舊(친구)인 맥아더(MacArthur)를 다시 찾아갈 決心(결심)으로 1949年(년) 2月(월) 初(초), 駐(주)필리핀(Philippines) 特使(특사)로 赴任(부임)을 위해 도쿄(東京)에서 잠시 滯留中(체류중)이던 변영태(卞榮泰)를 맥아더(MacArthur) 司令部(사령부)에 보냈으나 맥아더(MacArthur)는 "내 任務(임무)는 明確(명확)히 規程(규정)되어 카르빈(Carbine) 한 자루도 넘겨줄 수 없다"면서 딘 애치슨(Dean Acheson) 國務長官(국무장관)만을 非難(비난)했다.
이승만(李承晩)은 婦人(부인)) 프란체스카(Francesca)를 시켜 다음과 같은 內容(내용)의 便紙(편지)를 맥아더(MacArthur)에게 보내기도 했다. "尊敬(존경)하는 將軍(장군)...부디 우리 國民(국민)을 도와주십시오... 只今(지금) 우리 內外(내외)는 將軍(장군)의 協力(협력)만을 企待(기대)하고 있습니다." 프란체스카(Francesca)의 便紙(편지)를 받은 맥아더(MacArthur)는 때마침 對日(대일) 請求權(청구권) 關係(관계)로 對日(대일) 强硬策(강경책)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던 이승만(李承晩)에게 韓(한)-日(일) 關係改善(관계개선)을 위한 雰圍氣(분위기)를 助成(조성)해 주기 위해 다시 이승만(李承晩)을 招請(초청)했다. 존 무초(John Mucho) 駐韓(주한) 美國(미국) 大使(대사)로부터 맥아더(MacArthur) 將軍(장군)의 招請(초청)을 通報(통보)받은 이승만(李承晩)은 1950年(년) 1月(월) 21日(일) 임병직(林炳稷) 外務部長官(외무부장관), 장기영(張基榮) 遞信部長官(체신부장관), 고재봉, 김광섭 두 祕書(비서), 武官(무관)으로 정일권(鄭一權) 大尉(대위)를 帶同(대동)하고 두 번째로 맥아더(MacArthur)의 애기(愛機) 바탄호(Bataan)를 타고 日本(일본)으로 건너갔다. 맥아더(MacArthur)는 그러나 이때도 이승만(李承晩)의 韓國(한국) 防衛(방위)에 대한 主張(주장)을 鼓舞(고무)해 주었으나 武器支援(무기지원)에 대한 具體的(구체적)인 言及(언급)은 回避(회피)했다
6·25 勃發(발발)에 關(관)한 맥아더(MacArthur)의 最初(최초)의 報告(보고)는 워싱턴(Washington)時間(시간)으로 1950年(년) 6月(월) 25日(일) 日曜日(일요일) 새벽 5時(시), 侵攻(침공)이 開始(개시)된 지 14時間(시간) 뒤에 陸軍省本部(육군성본부)에 到着(도착)했다. 그러나 맥아더(MacArthur)는 駐韓(주한) 美軍(미군) 軍事(군사) 顧問團(고문단)의 要請(요청)에 따라 開戰(개전) 當日(당일)부터 合參(합참)의 指示(지시)도 받지 않고 韓國軍(한국군) 支援(지원) 措置(조치)를 取(취)하기 始作(시작)했다.
6月(월) 26日(일) 밤 10時(시) 半徑(반경) 이승만(李承晩)은 맥아더(MacArthur)에게 電話(전화)를 걸어 도움을 要請(요청)하였다. 6月(월) 27日(일), 트루먼(Truman) 大統領(대통령)은 맥아더(MacArthur)에게 "大韓民國(대한민국)에 대한 海軍(해군) 및 空軍(공군)의 支援(지원)을 卽刻(즉각) 開始(개시)하라"고 命令(명령)했다. 맥아더(MacArthur)는 6月(월) 29日(일) 하네다(羽田:Haneda)에서 飛行機(비행기)를 타고 水原(수원)으로 와서 漢江防禦線地域(한강방어선지역)을 視察(시찰)하고 워싱턴(Washington)에 地上軍(지상군) 投入(투입)을 要請(요청)하였다.
맥아더(MacArthur)는 駐日(주일) 美(미) 第(제)8軍(군) 司令官(사령관) 월턴 워커(Walton Walker) 中將(중장)에게 “第(제)24師團(사단)을 韓國(한국)으로 異動(이동)시키라.”라는 命令(명령)을 下達(하달)(6月(월) 30日(일)하였다.
“ 軍隊(군대)에 民主主義(민주주의)는 없다. ”
— 洛東江(낙동강) 防禦線(방어선)을 死守(사수)하라는 워커(Walton Walker) 將軍(장군)의 命令(명령)을 擁護(옹호)하면서 1950年(년) 韓國戰爭(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UN forces) 總司令官(총사령관)에 就任(취임)하였다.
韓國戰爭(한국전쟁) 當時(당시) 맥아더(MacArthur)는 韓國軍(한국군)의 軍勢(군세)를 돌아보고 채병덕(蔡秉德) 陸軍參謀總長(육군참모총장)이 '虛勢(허세)가 높은 半面(반면) 실속이 없는 人物(인물)'이라는 것을 看破(간파)하여 채병덕(蔡秉德)의 面前(면전)에서는 채병덕(蔡秉德)을 極讚(극찬)한 半面(반면) 이승만(李承晩) 大統領(대통령)과 단 둘이 있을 때 채병덕(蔡秉德)의 補職(보직)을 解任(해임)시키라고 建議(건의)하였다.
이승만(李承晩)은 맥아더(MacArthur)의 이러한 建議(건의)를 積極的(적극적)으로 受容(수용)하여 채병덕(蔡秉德)을 陸軍參謀總長(육군참모총장)에서 解任(해임)시키고 그 後任(후임)으로 정일권(鄭一權)을 任命(임명)했으며 채병덕(蔡秉德)에게는 1個(개) 聯隊(연대)의 兵力(병력)만 附與(부여)하여 釜山(부산) 防禦(방어)의 任務(임무)를 맡겼으나 채병덕(蔡秉德)은 指揮(지휘)經驗(경험) 不足(부족)으로 因(인)하여 戰死(전사)하고 말았다.
그 해 11月(월) 外信(외신)과의 인터뷰(interview)에서 北韓(북한) 外(외)의 共産國家(공산국가)의 軍人(군인)이 韓國(한국) 戰爭(전쟁)에 參與(참여)하는 것 같다고 公式(공식) 發表(발표)했다가 유엔(UN) 共産圈(공산권) 國家(국가)들로부터 提訴(제소)당하였다.
仁川(인천) 上陸(상륙) 作戰(작전)
當時(당시) 國軍(국군)은 釜山(부산)까지 後退(후퇴)해 있었고 白善燁(백선엽) 等(등)이 多富洞(다부동) 戰鬪(전투)를 勝利(승리)로 이끌면서 釜山(부산) 地域(지역)에 겨우 防禦線(방어선)을 構築(구축)하고 있었다. 이때 맥아더(MacArthur)는 人民軍(인민군)이 占領(점령)한 地域(지역)의 中心部(중심부)를 打擊(타격)하여 補給路(보급로)를 끊는 計劃(계획)을 세웠다.
맥아더(MacArthur)는 1950年(년) 6月(월) 29日(일) 戰爭勃發(전쟁발발) 4日(일) 뒤 美國(미국) 政府(정부)에, 漢江(한강)防禦線(방어선)을 視察(시찰)하며 人民軍(인민군)의 後方(후방)에 上陸(상륙), 兵站線(병참선)을 遮斷(차단)하고 洛東江(낙동강)을 通(통)해 反擊(반격)에 들어간다는 基本(기본) 戰略(전략)을 세웠다고 報告(보고)했다. 그러나 美(미) 海軍(해군)은 仁川港(인천항)의 干滿(간만)의 차가 平均(평균) 7미터로, 港(항)에 上陸(상륙)하기 前(전)에 月尾島(월미도)를 먼저 占領(점령)해야 하는데다 船團(선단)의 接岸(접안)地域(지역)이 좁아 上陸(상륙) 後(후) 市街戰(시가전)이 不可避(불가피)한 點(점) 等(등)의 理由(이유)로 上陸作戰(상륙작전)의 最惡(최악)의 地形(지형)이라며 완강히 反對(반대)하였다.
海軍(해군) 一部(일부) 人士(인사)들이 作戰(작전)成功率(성공률)이 5천대 1이라며 激甚(격심)하게 反對(반대)하는 渦中(와중)에, 맥아더(MacArthur)는 이런 難點(난점)이 오히려 敵(적)의 虛點(허점)을 찌르는 奇襲(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仁川(인천)上陸(상륙)을 主張(주장), 結局(결국) 8月(월) 28日(일) 美合參本部(미합참본부)로부터 承認(승인)을 얻어냈다.
9月(월) 15日(일), 作戰開始日(작전개시일)에 艦艇(함정) 206척, 7만여名(명)을 動員(동원)하여 永宗島(영종도) 近處(근처)에 集結(집결), 作戰(작전)이 始作(시작)되었다.
作戰(작전)의 第(제) 1段階(단계)는 月尾島(월미도)의 占領(점령)으로 始作(시작)되었다. 새벽 5時(시)에 始作(시작)된 攻擊準備射擊(공격준비사격)에 이어 美(미) 第(제)5海兵聯隊(해병연대) 3大隊(대대)가 戰車(전차) 9대를 앞세우고 月尾島(월미도) 前面(전면)에 上陸(상륙)하였다. 月尾島(월미도)는 2時間(시간)만에 完全(완전)히 美軍(미군)에 依(의)해 掌握(장악)되었다. 美軍(미군)은 負傷(부상) 7名(명)의 경미한 被害(피해)를 입었으며, 人民軍(인민군)은 108名(명)이 戰死(전사)하고 106名(명)이 捕虜(포로)로 잡혔다.
第(제)2段階(단계)는 國軍(국군) 第(제)17聯隊(연대), 美軍(미군) 第(제)7師團(사단), 美軍(미군) 第(제)1海兵師團(해병사단)의 主導(주도)로 仁川半島(인천반도) 攻擊(공격)으로 이어졌다. 人民軍(인민군) 第(제)18師團(사단)과 仁川(인천)의 警備兵力(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美軍(미군) 第(제)1海兵師團(해병사단)과 國軍(국군) 海兵(해병) 第(제)1聯隊(연대)는 成功的(성공적)으로 人民軍(인민군)의 主力(주력)이 糾合(규합)할 時間的(시간적) 餘裕(여유)를 빼앗아버리며 仁川(인천) 掌握(장악)에 成功(성공)하였다.
上陸(상륙)하는 美軍(미군)
人民軍(인민군)이 38線(선)에서 洛東江(낙동강) 防禦線(방어선)까지 進擊(진격)하는데 81日(일)이 걸렸지만, 仁川(인천)上陸(상륙) 以後(이후) 我軍(아군)이 38線(선)까지 돌아오는데 15日(일)이 걸렸으니 敵(적)의 背後(배후)를 불의에 攻擊(공격)한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의 크나큰 成果(성과)다.
맥아더 (MacArthur)將軍(장군)의 引率下(인솔하)에 敢行(감행)된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은 워싱턴(Washington)等(등) 軍部(군부)의 反對(반대)에도 불구하고 戰鬪(전투)를 成功的(성공적)으로 指揮(지휘), 戰爭(전쟁)의 樣相(양상)을 뒤바꿔 놓았다. 最側近(최측근)들은 仁川(인천)은 潮水干滿(조수간만)의 差(차)가 커서 危險(위험)하다며 群山(군산)으로 上陸地點(상륙지점)을 變更(변경)할 것을 提案(제안)했지만 맥아더(MacArthur)의 信念(신념)은 確固(확고)했다. 西海(서해) 어느 港口(항구)에 美軍(미군)이 上陸(상륙)한다는 情報(정보)는 北韓軍(북한군)에게도 알려졌지만, 北韓軍(북한군)은 이미 補給線(보급선)이 너무 길게 늘어져서 洛東江(낙동강)防禦線(방어선)에서 돌릴 軍事力(군사력)이 不足(부족)했고 김일성(金日成)은 이 情報(정보) 自體(자체)를 크게 믿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作戰(작전) 突入(돌입) 段階(단계)에 이르러서 主要(주요) 幹部(간부)끼리 'Go/No go(作戰(작전) 實行(실행)/中止(중지) 會議(회의)'를 했다. 當時(당시) 駐韓(주한)美海軍(미해군) 司令官(사령관)이 反對(반대)했다. 美國(미국) 軍部(군부)는 群山(군산) 上陸(상륙) 作戰(작전)이 效率的(효율적)이라고 여겼다. 맥아더(MacArthur)는 "이건 내 고집대로 해야겠으니 따라와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게 맥아더(MacArthur)는 仁川(인천)을 選擇(선택)했다. 그러나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에 대해 中國(중국)의 마오쩌둥(毛泽东)은 豫測(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數次例(수차례) 김일성(金日成)에게 警告(경고)했지만, 김일성(金日成)은 듣지 않았다. 結局(결국) 美軍(미군)은 단 한 名(명)의 死傷者(사상자)도 없이 月尾島(월미도)를 차지하여 仁川港(인천항)을 占領(점령)할 수 있었고, 以後(이후) 이어진 첫날 戰鬪(전투)에서도 美軍(미군)의 死亡者(사망자)는 20名(명)에 불과했다.
막상 서울(Seoul)路(로)의 進入(진입)은 여의치 않았다. 北韓軍(북한군)은 美軍(미군)을 막을 만한 正規師團(정규사단)이 存在(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더라도 막을 兵力(병력)이 없었지만 共産主義(공산주의) 運動家(운동가), 人民警察(인민경찰), 海岸砲兵(해안포병) 等(등)이 中心(중심)이 되어 防禦作戰(방어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結局(결국) 作戰(작전)은 成功(성공)하였고 맥아더(MacArthur)의 作戰(작전)을 제대로 看破(간파)하지 못한 北韓軍(북한군)은 이 作戰(작전)에 依(의)해 仁川(인천)을 빼앗긴 以後(이후) 1.4後退(후퇴)가 도래할 때까지 連戰連敗(연전연패)했다. 實際(실제)로 김일성(金日成)은 韓國戰爭(한국전쟁)의 失敗(실패) 原因(원인)으로 '仁川上陸(인천상륙) 對備失敗(대비실패)', '서울(Seoul) 早期包圍失敗(조기포위실패)', '春川(춘천) 早期占領失敗(조기점령실패)' 3個(개)를 꼽은 바 있다. 이를 記念(기념)하여 後日(후일)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는 仁川(인천) 自由公園(자유공원)에 맥아더(MacArthur)의 銅像(동상)을 建立(건립)하기도 했다.
月尾島(월미도) 民間人(민간인) 爆擊被害(폭격피해)
1950年(년) 9月(월)10日(일) 美軍(미군) 航空母艦(항공모함)에서 出擊(출격)한 航空機(항공기)들이 95개의 네이팜탄(Napalm Tan)을 月尾島(월미도) 東(동)쪽 地域(지역)에 投下(투하)하고 機銃掃射(기총소사)를 하는 方式(방식)으로 9월 13日(일) 아침까지 繼續(계속)됐다.
身元(신원)이 確認(확인)된 犧牲者(희생자)가 10名(명)이고, 失踪者(실종자)와 身元(신원)을 確認(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包含(포함)하면 實際(실제) 犧牲者(희생자)가 100餘名(여명)에 이를 것으로 眞實和解委員會(진실화해위원회)는 推算(추산)했다.
眞實和解委員會(진실화해위원회)는 美軍(미군)이 民間人(민간인) 犧牲(희생)을 줄이기 위한 最小限(최소한)의 措置(조치)가 없이 月尾島(월미도) 全體(전체)를 無差別(무차별) 集中(집중) 爆擊(폭격)한 것은 國際法(국제법) 等(등)에 違反(위반)된 作戰(작전)이라며, 韓國(한국)과 美國(미국) 政府(정부)가 協議(협의)해 犧牲者(희생자)와 쫓겨난 被害(피해) 住民(주민)들에 合當(합당)한 被害(피해) 補償(보상)과 歸鄕(귀향) 對策(대책)을 取(취)하도록 勸告(권고)했다.
滿洲(만주) 爆擊(폭격) 主張(주장)
1951年(년) 3月(월) 10日(일) 그는 韓國(한국) 戰線(전선)의 第(제)12次(차) 視察(시찰)을 마치고 聲明(성명)을 發表(발표)했다. 그는 國際的(국제적) 決定(결정)이 없으면 韓國(한국)은 沈滯)狀態(침체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指摘(지적)하였다.
이날 聲明(성명)에서 그는 滿洲爆擊(만주폭격)을 해도 軍事基地(군사기지) 施設(시설)에 閑閑爆擊(한한폭격)이며 民間人(민간인) 被害(피해)는 없을 것이라고 言明(언명)하였다.
1951年(년) 4月(월) 19日(일) 午前(오전) 上下兩院(상하양원) 合同會議(합동회의)에서 '侵掠者(침략자) 中共(중공)을 膺懲(응징)'하자며 所信(소신)을 披瀝(피력)하였다.
上下兩院(상하양원) 合同會議(합동회의)에서 그는 韓國戰爭(한국전쟁)을 조속히 終決(종결)짓지 않으면 더 큰 戰爭(전쟁)을 면할 수 없을 것이며, 韓國戰爭(한국전쟁)을 조속히 終決(종결)시키려면 첫째로 鴨綠江(압록강) 彼岸(피안)의 敵補給基地(적보급기지)를 爆擊(폭격)하고, 둘째로 中共(중공)에 대한 經濟封鎖(경제봉쇄)를 實施(실시)하고, 셋째로 美海軍(미해군)으로 中國(중국) 封土(봉토)의 沿岸(연안)을 封鎖(봉쇄)하고, 넷째로는 空軍(공군)으로 中國(중국) 本土(본토)를 攻擊(공격)하고, 다섯째로 타이완(Taiwan)에 있는 國父軍(국부군)에 加(가)해진 制限(제한)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4月(월) 21日(일) 인터뷰(interview)에서 "이러한 나의 主張(주장)을 가리켜 戰爭挑發(전쟁도발)이라고 非難(비난)하는 一部(일부) 人士(인사)들도 있으나 觸發(촉발)된 戰爭(전쟁)을 조속히 終決(종결)시키는 것이 軍人(군인)의 使命(사명)일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附言(부언)하였다. 東亞日報(동아일보)는 그 날 特別(특별) 社說(사설)을 發表(발표)해 그를 偉大(위대)하다고 評(평)하였다.
트루먼(Truman)과의 不和(불화)와 解任(해임).
그러나 그는 戰爭(전쟁)에서 獨斷的(독단적)인 行動(행동)에 대한 當時(당시) 大統領(대통령)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의 不信(불신)으로 因(인)해, 韓國戰爭(한국전쟁) 後(후) 美國(미국)에서 매카시스트(McCarthyist) 卽(즉), 極端的(극단적) 反共主義(반공주의)인 매카시즘(Mechanic)追從者(추종자)로 烙印(낙인)찍힌다.
또한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正規軍(정규군)(中國人民解放軍(중국인민해방군)의 介入(개입)을 無視(무시)하다가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이 戰爭(전쟁)에 數十個(수십개) 師團級(사단급) 兵力(병력)을 보내어 介入(개입)하자 滿洲(만주)에 原子爆彈(원자폭탄) 投下(투하)와 장제스(蒋介石) 總統(총통) 指揮下(지휘하)의 中華民國(중화민국) 國軍(국군)의 支援(지원)을 主張(주장)하기도 하였다. 맥아더(MacArthur)는 "共産主義(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겠다"는게 目標(목표)였던 半面(반면), 트루먼(트루먼)은 政治家(정치가)인지라 "制限戰爭(제한전쟁)"으로써 戰爭(전쟁)은 始作(시작)된 곳에서 맺어야 하고, 얼른 戰爭(전쟁)을 終決(종결)지어야 政治的(정치적)으로 安全(안전)하다고 判斷(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意見(의견)차로 結局(결국) 맥아더(MacArthur)는 解任(해임)되기에 이르렀다. 當時(당시) 中共軍(중공군)의 參戰(참전) 以後(이후), 맥아더(MacArthur)는 補給(보급)/充員(충원)의 根據地(근거지)가 되는 滿洲(만주)에 航空爆擊(항공폭격)을 許可(허가)해 달라고 本國(본국)에 要請(요청)했다. 하지만 美國(미국) 政府(정부)는 蘇聯(소련)에 參戰(참전)빌미를 줘 확전되는 것을 憂慮(우려)하여 不許(불허)했다. 中共軍(중공군) 參戰(참전) 以前(이전)에 中華民國(중화민국)을 聯合軍(연합군)에 編入(편입)시키지 않은 것도 中共(중공)에 대한 刺戟(자극)을 피해보려는 理由(이유)에서였다.
美國(미국) 政府(정부)로서는, 蘇聯(소련)의 힘과 의지를 過大評價(과대평가)한 美國(미국)의 戰略的(전략적) 判斷(판단) 失手(실수)와, 2次(차)大戰(대전) 終戰(종전) 直後(직후) 大多數(대다수)의 部隊(부대)를 解體(해체)하여 動員可能兵力(동원가능병력)이 극히 줄어든 것이 확전을 피하려 한 가장 큰 理由(이유)였다.
이런 기미를 눈치챈 蘇聯(소련)은 非公式的(비공식적)으로 空軍(공군)操縱士(조종사)를 中國(중국)에 보내 韓(한)-滿洲國境(만주국경)에서 美軍(미군) 爆擊機(폭격기)를 攻擊(공격)해 相當(상당)한 戰果(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韓國戰爭(한국전쟁)은 美國(미국) 國內(국내)에서 人氣(인기) 없는 戰爭(전쟁)이었다. 期間(기간)이 길어지자 與論(여론)의 終戰(종전)壓力(압력)도 커졌다. 이로 因(인)해 休戰會談(휴전회담)이 始作(시작)되었다.
老兵(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 웨스트포인트(West Point)에서의 隱退演說文(은퇴연설문) 中(중) 一部(일부)
그의 解任(해임)에 대한 具體的(구체적)인 解任(해임) 理由(이유)에 대해 命令(명령) 不服(불복)이 原因(원인)이라는 見解(견해)도 있다.
첫째, 韓國軍(한국군) 白善燁(백선엽)이 中共軍(중공군) 捕虜(포로)를 잡아 審問(심문)했다. 또한 中共軍(중공군) 捕虜(포로)를 보여주며 맥아더(MacArthur)에게 中國人民解放軍(중국인민해방군)이 參戰(참전)했다는 報告(보고)를 했지만 맥아더(MacArthur)는 事實(사실)을 隱蔽(은폐)했다.
둘째, 美國(미국)은 戰爭(전쟁)이 長期化(장기화) 될 것을 豫想(예상)하고 韓國(한국)으로 겨울을 對備(대비)한 補給品(보급품)을 보냈다. 맥아더(MacArthur)는 戰爭(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 判斷(판단)하고 補給品(보급품)을 하와이(Hawaii)로 돌려 보냈다. 겨울에 美軍(미군)이 必要(필요)한 支援(지원)을 받지 못해 많이 얼어죽었다.
이로 因(인)해 맥아더(MacArthur)는 責任(책임)을 물어 解任(해임)했다.
이에 대해 얄타회담(Yalta talks)以後(이후) 일어난 韓國戰爭(한국전쟁)은 美國(미국)과 蘇聯(소련)의 兩極體制(양극체제)를 굳히기 위한 戰爭(전쟁)이다. 美軍(미군)은 이미 戰線(전선)의 크기를 定(정)해놓고 戰爭(전쟁)을 하였다. 그래서 맥아더(MacArthur)가 滿洲(만주)를 爆擊(폭격)하는 것을 막았다. 특히 맥아더(MacArthur)는 滿洲(만주)에 核爆擊(핵폭격)을 要求(요구)했다.
또 當時(당시) 中共軍(중공군)은 홍콩(Hong Kong)마카오(Macau)를 通(통)해 多數(다수)의 美國(미국) 武器(무기)를 輸入(수입)해서 使用(사용)했다. 이는 美國(미국)이 2次大戰(차대전)이 끝나고 自國(자국)의 軍需業者(군수업자)들을 위해 戰爭(전쟁)을 傍觀(방관)한 證據(증거) 中(중)의 하나이다. 스탈린(Stalin)은 中央(중앙)유럽(Europe)에서의 蘇聯(소련)의 影響力(영향력)을 擴大(확대)하는 機會(기회)로 삼으려고 박헌영(朴憲永)과 김일성(金日成)에게 戰爭(전쟁)을 承諾(승낙)했고, 美國(미국)은 影響力(영향력) 擴大(확대)와 軍需業者(군수업자)들의 利益(이익)을 위해 韓國戰爭(한국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傍觀(방관)했다.
當時(당시) 中華民國(중화민국)의 장제스(蒋介石)는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毛泽东)이 韓國戰爭(한국전쟁)에 介入(개입)하자 타이완(台湾) 海峽(해협)을 건너 中國(중국) 大陸(대륙)을 侵攻(침공)하려 했으나 美軍(미군)이 타이완(台湾) 海峽(해협)을 막았다. 韓國戰爭(한국전쟁)으로 마오쩌둥(毛泽东)의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은 내몽골(内蒙古)과 滿洲(만주)에 대한 支配權(지배권)을 確保(확보)했고 위구르(维吾尔族)와 티베트(西藏:Tibet) 直接(직접) 支配(지배)하는 발판을 만들었다는 等(등)의 反論(반론)이 있다.
企業人(기업인) 活動(활동)
1951年(년) 民主黨(민주당) 트루먼(Truman) 大統領(대통령)과의 對立(대립)으로 4月(월) 司令官(사령관)의 地位(지위)에서 解任(해임)된 以後(이후) 별다른 活動(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1948年(년)과 1952年(년) 美國(미국) 共和黨(공화당)의 剛勁(강경) 反共主義(반공주의) 保守勢力(보수세력)은 연이어 맥아더(MacArthur)의 大統領(대통령) 候補者(후보자) 指名(지명)을 얻어내기 위해 努力(노력)했지만 穩健派(온건파)들의 反對(반대)로 飜飜(번번)이 失敗(실패)하였다.
맥아더(MacArthur)는 1952년 레밍턴랜드(Remington Land) 會社(회사)의 理事會(이사회) 會長職(회장직) 提議(제의)를 受諾(수락)하였다.
1952년 레밍턴랜드(Remington Land) 會社(회사) 會長(회장)으로 職務(직무)를 보는 것과 公開席上(공개석상)에 가끔 나타나는 것 外(외)에는 뉴욕(New York) 市內(시내)의 邸宅(저택)에서 隱居生活(은거생활)을 하였다.
그 뒤 스페리랜드(Sperry Land) 會社(회사)의 取締役(취체역) 會長(회장)에 選任(선임)되었다.
1960年(년) 2月(월) 2日(일) 尿道疾患(요도질환)으로 레녹스 힐(Lenox Hill) 病院(병원)에 入院(입원)했다.
3月(월) 19日(일) 前立腺(전립선)을 除去(제거)하는 手術(수술)을 받고 病院(병원)에 入院(입원)해 있다가 4月(월) 5日(일) 63일만에 退院(퇴원)하였다.
1962年(년) 10月(월)부터 11月(월)까지 美國(미국)을 訪問(방문) 中(중)이던 金鍾泌(김종필)을 만났다. 美國(미국) 訪問(방문) 길에 그는 맥아더(MacArthur) 美國(미국) 陸軍元帥(육군원수)를 訪問(방문)하기도 했다.
金鍾泌(김종필)과의 面談(면담)에서 맥아더(MacArthur)는 金鍾泌(김종필)에게 "韓國(한국)이 하루빨리 統一(통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韓國(한국)이 統一(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습니다."는 意思(의사)를 披瀝(피력)한다. 또 맥아더(MacArthur)는 金鍾泌(김종필)에게 "韓國戰爭(한국전쟁)을 勝利(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滿洲爆擊(만주폭격)을 主張(주장)"했으며 "韓國戰爭(한국전쟁)의 休戰(휴전)에 있어서 美國(미국)은 잘못을 저질렀으며, 韓國(한국)에서의 北進統一(북진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印度(인도) 事態(사태)가 發展(발전)된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晩年(만년)에 그는 企業人(기업인)과 言論人(언론인)으로 活動(활동)하다가 1964年(년) 워싱턴 D. C.(Washington D. C.)에서 85勢(세)를 일기로 他界(타계)하였다. 버지니아주 노퍽(Norfolk, Virginia)에 埋葬(매장)되었다. 當時(당시) 韓國(한국)에서는 서울(Seoul)에 政府(정부)의 主導(주도)로 殯所(빈소)를 차리고 弔問行列(조문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家族關係(가족관계:Family Relations)
아버지(father) : 아서 맥아더(Arthure MacAthur, Jr., 1845年(년) 6月(월) 2日(일) ~ 1912年(년) 9月(월) 5日(일).
어머니(Mother) : 메리 하디 맥아더(Mary Pinkney Hardy MacArthur, 1852年(년) 3月(월) 22日(일) ~ 1935年(년) 12月(월) 3日(일) 兄(형) : 핀릴 맥아더(Finril MacArthur)(1876年(년) 6月(월) 1日(일) - 1923年(년) 12月(월) 2日(일)ㅣ
兄(형) : 맬컴 맥아더(Malcolm MacArthur)(1878年(년) 10月(월) 17日(일) - 1883年(년).
賞勳經歷(상훈경력:Scholarship)
議會名譽勳章(의회명예훈장:Parliamentary Honorary Medal)
陸軍受勳服務勳章(육군수훈복무훈장:Army Distinguished Service Medal)
海軍受勳服務勳章(해군수훈복무훈장:Naval Service Merit Medal)
殊勳飛行十字章(수훈비행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
은성훈장(銀星勳章,Silver Star)
동성훈장(Bronze Star Medal, 銅星勳章)
퍼플하트(Purple Heart) 勳章(훈장)
욱일장(Rising sun)
評價(평가:evaluation)
맥아더(MacArthur)는 自身(자신)의 편이라고 생각되는 人間(인간)에게는 한없이 親切(친절)하고 慈悲(자비)로운 人物(인물)이며 自身(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고 선물로 줄 만큼 好意(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自身(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는 지나치리만큼 冷情(냉정)하게 대하였다. 따라서 많은 사람에게 그는 多少(다소) 高壓的(고압적)이고 도도하며, 利己的(이기적)이고 잘난체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否定的(부정적)으로 評價(평가)되었다. 그러나 그의 軍隊(군대) 部下(부하), 司令部(사령부) 職員(직원)들이 보기에는 多情(다정)하며 勇氣(용기)있고 假飾(가식)이 없으며 謙遜(겸손)하기까지 한 사람이라는 相反(상반)된 評價(평가)도 있다.
論難(논란)과 疑惑(의혹)~韓國戰爭(한국전쟁) 生化學武器(생화학무기) 使用疑惑사용의혹)
1951年(년) 北韓(북한)에서 細菌戰(세균전) 現場(현장) 實驗(실험)을 命令(명령)했음을 보여 주는 文書(문서)가 發見(발견)됐다고 아랍권 위성채널 알(Arab satellite channel Al)-자지라(Jazeera)가 報道(보도)했다.
다만, 韓國戰爭(한국전쟁) 때 美國(미국)이 北韓(북한)과 中國(중국) 東北地方(동북지방)에서 細菌戰(세균전)을 벌였다는 北韓(북한), 中國(중국), 옛 蘇聯(소련)側(측)의 主張(주장)은 거짓이라는 當時(당시) 中國軍側(중국군측) 高位關係者(고위관계자)들의 生前(생전) 證言(증언)도 있다.
"美(미) 帝國主義者(제국주의자)들은 朝鮮(조선)에서 細菌戰(세균전)을 벌이지 않았다. 이제 두 나라(中國(중국)과 美國(미국) 關係(관계)가 나쁘지 않으니, 그 問題(문제)에 關(관)해 繼續(계속) 얘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 韓國戰(한국전) 當時(당시) 中國人民解放軍(중국인민해방군) 總參謀長(총참모장)을 지낸 황커청(黃克誠)이 워질리(Wojilly)와 對話(대화)에서
滿洲爆擊만주폭격) 計劃(계획)
韓國戰爭(한국전쟁) 中(중) 그는 滿洲(만주)의 爆擊(폭격)을 計劃(계획)하였다. 그러나 尾局(미국) 大統領(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과의 葛藤(갈등) 끝에 解任(해임)됨으로써 滿洲爆擊(만주폭격) 計劃(계획)은 水泡(수포)로 돌아간다.
銅像存置(동상존치) 論難(논란)
1998年(년) 以後(이후)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는 仁川廣域市(인천광역시)의 自由公園(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MacArthur)의 銅像(동상)을 비롯, 大韓民國(대한민국) 國內(국내)에 있는 맥아더(MacArthur) 銅像(동상)의 存置(존치) 與否(여부)를 놓고 贊反(찬반) 論難(논란)의 對象(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맥아더(MacArthur)를 韓國(한국)의 自由(자유)를 지켜낸 韓國戰爭(한국전쟁)의 英雄(영웅)으로 보는 觀點(관점)과, 崇拜(숭배)의 對象(대상)이 될 必要(필요)는 없다고 보는 觀點(관점)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崇拜(숭배)의 對象(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은, 맥아더(MacArthur)를 뛰어난 軍人(군인)으로서 評價(평가)할 수는 있지만, 民間人(민간인) 虐殺(학살), 日本(일본)의 戰後(전후) 賠償制 拒否(배상제거부) 等(등) 否定的(부정적)인 면도 分明(분명) 儼存(엄존)하기 때문에 崇拜(숭배)의 對象(대상)이 될 必要(필요)는 없다고 主張(주장)한다.
그냥 自由(자유)로운 評價(평가)의 對象(대상)으로 놔두자는 것. 반면 銅像(동상) 支持(지지) 立場(입장)의 사람들은 맥아더(MacArthur)德分(덕분)에 只今(지금)의 韓國(한국)이 있게 되었으며 맥아더(MacArthur)가 없었다면 南韓(남한)은 存在(존재)하지 않았고 北朝鮮(북조선)의 끔찍한 統治(통치)를 받게 되었을 것이라 主張(주장)한다.
2005年(년) 7月(월)에는 맥아더(MacArthur) 銅像(동상) 周邊(주변)에서 保守團體(보수단체)와 進步團體間(진보단체간)의 맥아더(MacArthur) 銅像(동상) 死守(사수), 撤去(철거) 集會(집회)를 나란히 開催(개최)하였다.
2005年(년) 9月(월) 11日(일)에는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1950年(년) 9月(월) 15日(일) 55週年(주년)을 나흘 앞둔 11日(일) 仁川(인천)自由公園(자유공원) 一帶(일대)에서 맥아더(MacArthur) 將軍(장군) 銅像(동상)의 撤去(철거)를 主張(주장)하는 團體(단체)와 銅像死守(동상사수)를 主張(주장)하는 團體(단체)의 大規模(대규모) 同時(동시) 集會(집회)가 同時(동시)에 開催(개최)되었는데, 이때 銅像(동상) 撤去(철거)를 主張(주장)하는 團體(단체) 會員(회원)들이 暴力示威(폭력시위)를 벌이며 警察(경찰)과 激烈(격렬)하게 衝突(충돌)했다. 이로 因(인)해 示威隊(시위대)와 警察(경찰) 모두 負傷者(부상자)가 續出(속출)하고 公園(공원) 一帶(일대)는 亂場(난장)판이 됐다.
保守團體(보수단체)와 全國民衆聯隊(전국민중연대)·統一聯隊連帶(통일연대)·韓總聯(한총련)等(등) 銅像(동상) 撤去(철거)를 主張(주장)하는 團體會員(단체회원) 4000餘名(여명)의 衝突(충돌)이 豫想(예상)되자 곧 警察(경찰)이 投入(투입)되었다. 全國民衆聯隊(전국민중연대)·統一聯隊(통일연대)·韓總聯(한총련)等(등) 銅像(동상) 撤去(철거)를 主張(주장)하는 團體會員(단체회원) 4000餘名(여명)은 이날 午後(오후) 5時(시)15分(분)쯤 自由公園(자유공원) 內(내) 맥아더(MacArthur) 銅像(동상)을 둘러싸는 ‘人間(인간)띠 잇기’ 行事(행사)를 가지려다 大韓民國(대한민국) 警察官(경찰관)들이 이를 沮止(저지)하자, 警察(경찰)에게 쇠파이프와 2~3m 길이의 대나무를 마구 휘두르고 달걀 수십 개를 던졌다. 示威隊(시위대)가 흙까지 뿌리자 興奮(흥분)한 警察(경찰)이 防牌(방패)와 棍棒(곤봉)을 휘두르고 消火器(소화기)를 뿌리며 이에 맞섰고, 兩側(양측) 間(간)에 投石戰(투석전)까지 벌어지면서 負傷者(부상자)가 속출했다. 示威隊側(시위대측)에서는 박범수(慶熙大(경희대)씨 等(등) 20餘名(여명)이 警察(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머리가 찢어지는 等(등) 크고 작은 傷處(상처)를 입었으며, 戰警(전경) 十數名(십수명)도 示威隊(시위대)가 휘두른 둔기에 얻어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右側(우측)에 선 梁芳秀(양방수) 맥아더(MacArthur) 將軍(장군) 銅像(동상)을 建立(건립)한 仁川(인천) 自由公園(자유공원)을 찾아가다.........
9月(월) 15日(일) 保守團體(보수단체)는 1萬(만) 5千名(천명)의 人波(인파)를 動員(동원)해 맥아더(MacArthur)銅像(동상) 死守(사수) 集會(집회)와 맥아더(MacArthur)銅像(동상)을 지켰다. 15日(일) 仁川(인천)自由公園(자유공원)에서 豫備役(예비역) 將兵(장병)과 市民(시민)團體(단체)가 參與(참여)하는 大規模(대규모) ‘맥아더(MacArthur)銅像(동상) 死守(사수)’ 集會(집회)가 열린다. 集會(집회)에는 最大(최대) 1萬(만)5000餘名(여명)이 參席(참석)할 展望(전망)이다. 海兵隊戰友會(해병대전우회)는 “맥아더(MacArthur)銅像(동상)앞 廣場(광장)에서 ‘國家安保(국가안보) 및 맥아더(MacArthur)將軍(장군) 守護決意(수호결의)’를 15日(일) 午後(오후) 1時(시)30分(분)부터 開催(개최)한다”고 14日(일) 밝혔다. 9月(월) 15日(일) 保守團體(보수단체) 會員(회원)과 市民(시민) 等(등) 1萬(만) 5千名(천명)은 맥아더(MacArthur)銅像(동상) 周邊(주변)에서 集會(집회)를 하였다.
맥아더(MacArthur) 布告令(포고령)의 美軍(미군)의 韓半島(한반도) 占領 論難(점령논란)
韓半島(한반도) 以南(이남)에 入城(입성)한 美軍(미군)은 布告令(포고령) 第(제)1號(호)를 發表(발표)하였는데, 極東(극동)아시아(Asia)의 司令官(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이름을 본따서 發表(발표)하게 된다. 이 맥아더(MacArthur) 布告令(포고령) 第(제)1條(조) 內容(내용)을 通(통)해서 美軍(미군)이 直接(직접) 韓半島(한반도) 統治(통치)를 하겠다는 意思(의사)를 밝혔다. 또 이 布告令(포고령)에서 '美軍(미군)은 '解放軍(해방군)'이 아닌 '占領軍(점령군)'임을 明白(명백)히 드러낸다'는 意見(의견)과 '布告令(포고령)의 占領(점령)은 occupy의 駐屯(주둔)이란 意味(의미)를 誤譯(오역)한 것이다.'라는 意見(의견)이 對立(대립)하고 있다.
其他(기타:Other)
그는 베트남(Vietnam)과 필리핀(Philippines)에 漢字(한자)와 原住民語式(원주민식) 表記文字 表記文子(표기문자) 代身(대신) 表音文字(표음문자)로 全部(전부) 바꾸라고 强要(강요)하였고, 이들은 漢字(한자)와 原住民(원주민) 言語(언어)를 抛棄(포기)하고 英語式(영어식) 表音文字(표음문자)를 使用(사용)하게 되었다.
1945年(년) 8月(월) 日本(일본)의 敗戰(패전) 以後(이후) 그는 日本(일본)에게도 漢字(한자)를 없애고 表音文字(표음문자)로 全部(전부) 바꾸라고 日本(일본) 政府(정부)에 壓力(압력)을 넣었으나 國語審議委(국어심의위)에서 오랜 硏究(연구) 끝에 當分間(당분간)은 1,850字(자)의 漢字(한자)를 使用(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당용한자(當用漢字)를 制定(제정) 施行(시행)하다가 不便(불편)하여 그 後(후) 95字(자)를 늘려 1,945字(자)에 지명(地名)과 인명(人名)에 쓸 벽자(僻字) 166字(자)를 追加(추가)하여 現在(현재) 2.111字(자)를 使用(사용)하고 있다.
美軍政(미군정) 중인 韓國(한국)에는 部下(부하) 司令官(사령관)인 존 하지(John not)를 通(통)해 傳達(전달)하였으나, 이승만(李承晩) 等(등)은 拒絶(거절), 韓國(한국)의 固有(고유) 言語(언어)라서 없앨 수 없다고 하여 常用(상용)漢字(한자)를 一部(일부), 한글과 竝行(병행)해서 쓰게 했다.
西洋人(서양인)으로는 드물게도 巫俗信仰(무속신앙)에서 神(신)으로 崇拜(숭배)하는 人物(인물)이다. 一名(일명) 제네랄(General) 神靈(신령)이라 불리는 無贖身(무속신)이 바로 巫俗信仰(무속신앙)에서의 맥아더(MacArthur)이다. 맥아더(MacArthur)를 神靈(신령)으로 모시는 祠堂(사당)은 仁川廣域市(인천광역시)에 있다.
文化(문화)속의 맥아더(MacArthur)
2016年(년) 7月(월) 7日(일)에 開封(개봉)한 映畫(영화)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에서 리암 니슨(Liam Neeson)이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演技(연기)를 맡았다.
같이보기(See together)~윌리엄 시볼드(William Seabold)
第(제)1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太平洋戰爭(태평양전쟁)~韓國戰爭(한국전쟁)
이승만(李承晩)~존 하지(John not)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강계시(江界市)는 慈江道(자강도)의 道(도) 所在地(소재지)慈江道(자강도) 人民委員會(인민위원회), 朝鮮(조선)勞動黨(로동당) 慈江道黨(자강도당)이다. 地形(지형) 때문에 가장 重要(중요)한 戰略的(전략적) 要衝地(요충지)이다. 人民(인민)委員長(위원장)은 박필증, 黨(당) 責任祕書(책임비서)는 리영남이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는 軍事的(군사적) 要衝地(요충지)였다. 또한, 原來(원래) 이 곳은 1950年(년) 韓國戰爭(한국전쟁)에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강계시를 臨時(임시) 首都(수도)로 決定(결정)했던 場所(장소)로서 當時(당시)엔 江界特別市(강계특별시)로 訂正(정정)되기도 하였으나,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介入(개입)으로 因(인)해 다시 강계시로 修整(수정)되었다.
平壤撤收(평양철수)
1·4 後退(후퇴)
人海戰術(인해전술)
大韓民國國軍(대한민국국군)
백인엽[李範奭, 1900年(년) 10月(월) 20日(일) ~ 1972年(년) 5月(월) 11日(일)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 兼(겸) 軍人(군인)이자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政治家(정치가) 兼(겸) 著述家(저술가)이다.
신성모[申性模, 1891年(년) 5月(월) 26日(일) ~ 1960年(년) 5月(월) 29日(일)는 大韓民國(대한민국)의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 兼(겸) 政治人(정치인)이다. 1910年(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Россия:Vladivostok, Russia)로 亡命(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 안희제(安熙濟) 等(등)과 함께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하였고 1945年(년) 光復(광복) 뒤 大韓靑年團長(대한청년단장), 內務部長官(내무부장관), 國防部長官(국방부장관) 等(등)을 歷任(역임)하고 1950年(년) 4月(월) 21日(일)부터 1950年(년) 11月(월) 22日(일)까지 國務總理(국무총리) 署理(서리)를 지냈다.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1911年(년) 신규식(申圭植) 等(등)이 中國(중국) 상하이(上海(상해)에서 組織(조직)한 團體(단체). 상하이에(上海(상해) 머물고 있던 有力(유력)한 中國(중국) 革命人士(혁명인사)를 찾아다니면서 獨立運動(독립운동)에 必要(필요)한 戰術(전술)과 戰略(전략)을 習得(습득)하고 軍需物資(군수물자) 따위의 支援(지원)을 要請(요청)하였다.)]와 新韓靑年黨(신한청년당)의 멤버(member)로 活動(활동)하였고 1919年(년) 상하이(上海(상해) 臨時政府(임시정부)가 樹立(수립)된 뒤에는 臨政軍事委員(임정군사위원)을 지냈다. 本貫(본관)은 高靈(고령), 號(호)는 소창(小滄).
신익희[申翼熙, 1892年(년) 6月(월) 9日(일) ~ 1956年(년) 5月(월) 5日(일)는 大韓民國(대한민국)의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이며, 敎育者(교육자), 政治人(정치인)이다.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 外務部(외무부) 次長(차장), 美軍政廳(미군정청) 南朝鮮(남조선)過渡立法議員(과도입법의원) 議長(의장) 兼(겸) 常任委員長(상임위원장), 大韓民國(대한민국) 民議院(민의원) 議長(의장) 等(등)을 지냈다.
字(자)는 여구(如耉), 號(호)는 해공(海公)·해후(海候), 別稱(별칭)은 왕방평(王邦平)·왕해공(王海公), 왕방우(王邦宇), 임방호(壬邦乎).
원용덕[元容德, 1908年(년) 2月(월) 29日(일) ~ 1968年(년) 2月(월) 4日(일)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와 大韓民國(대한민국)의 軍人(군인) 兼(겸) 內科醫師(내과의사) 및 政治家(정치가)로 第(제)1共和國(공화국) 政治(정치)에서 重要(중요)한 役割(역할)을 맡았다. 本貫(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이범석[李範奭, 1900年(년) 10月(월) 20일~1972年(년) 5月(월) 11日(일)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 兼(겸) 軍人(군인)이자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政治家(정치가) 兼(겸) 著述家(저술가)이다.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존 무초(John Mucho)
이시영[李始榮:Yi Si-yeong:大韓民國(대한민국)의 初代(초대) 副統領(부통령).總理大臣(총리대신)을 지낸 金弘集(김홍집)의 사위壻(서)이며 [鰲城(오성), 호(號)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鰲城(오성)과 漢陰(한음)인 이덕형(李德馨)漢陰(한음)으로 有名(유명)한 白沙(백사) 이항복(李恒福)의 直系(직계) 11代孫(대손)이다. 國會議員(국회의원) 이종찬(李鐘贊)과 이종걸의 작은할아버지이다
亡命政府(망명정부)
백선엽[白善燁, 1920年(년) 11月(월) 23日(일) 陰曆(음력) 10月(월) 13日(일) ~ 2020年(년) 7月(월) 10日(일)의 本貫(본관)은 수원(水原), 號(호)는 우촌(愚村)·운산(雲山)이다.
大韓民國(대한민국)의 陸軍參謀總長(육군참모총장)·合同參謀議長(합동참모의장) 等(등)을 지낸 軍人(군인)이자 交通部(교통부) 長官(장관) 等(등)을 지낸 官僚(관료)이다.
滿洲國(만주국) 陸軍軍官學校(육군군관학교) 第(제)9期(기)로 卒業(졸업)하여 間島(간도)特設隊(특설대)에서 將校(장교)로 服務(복무)하였다. 1945年(년) 滿洲軍(만주군) 中尉(중위)로 있을 때 光復(광복)을 맞아 平壤(평양)에 돌아왔고,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 조만식(曺晩植)의 祕書(비서)로 活動(활동)하다가 蘇聯(소련)이 以北(이북) 地域(지역)에 進駐(진주)하자 그해 12月(월) 越南(월남)했다.
1946年(년) 軍政期(군정기) 南朝鮮(남조선)國防警備隊(국방경비대) 第(제)5聯隊(연대) 中隊長(중대장)을 맡았고, 1949年(년) 第(제)5師團長(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年(년) 開城(개성) 第(제)1師團長(사단장)으로 昇進(승진)한 以後(이후) 韓國戰爭(한국전쟁)에 參戰(참전)하였다. 戰爭(전쟁) 初期(초기) 人民軍(인민군)에 敗退(패퇴)하여 首都(수도) 서울(Seoul)이 早期(조기) 陷落(함락)되는 原因(원인)을 提供(제공)하였으나 美軍(미군)과 함께 多富洞(다부동) 戰鬪(전투) 等(등)에서 全功(전공)을 세우며 32勢(세)에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 最初(최초)의 大將(대장)에 올랐고, 太極武功勳章(태극무공훈장)과 美國(미국) 殷盛(은성)武功勳章(무공훈장)을 받았다.
1952年(년) 休戰(휴전) 會談(회담) 때 韓國側(한국측) 代表團(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休戰(휴전) 文書(문서) 調印式(조인식)에 參席(참석)했다. 豫編(예편) 後(후)에는 交通部(교통부) 長官(장관)을 歷任(역임)하고, 中華民國(중화민국)·프랑스(France)·캐나다(Canada) 大使(대사) 等(등)을 지냈으며, 韓國綜合化學(한국종합화학)∙한국에타놀(Korean ethanol) 社長(사장)도 歷任(역임)하였다. 同生(동생) 白仁燁(백인엽)과 仁川大學校(인천대학교) 等(등) 先人財團(선인재단)을 設立(설립)했다. 2020年(년) 7月(월) 10日(일)에 99歲(세)의 나이로 別世(별세)하여 國立(국립)大田(대전) 顯忠院(현충원)에 安葬(안장)되었다.
백선엽[白善燁, 1920年(년) 11月(월) 23日(일) (陰曆(음력) 10月(월) 13日(일)) ~ 2020年(년) 7月(월) 10日(일)의 本貫(본관)은 수원(水原), 號(호)는 우촌(愚村)·운산(雲山)이다. 大韓民國(대한민국)의 陸軍參謀總長(육군참모총장)·合同參謀議長(합동참모의장) 等(등)을 지낸 軍人(군인)이자 交通部長官(교통부장관) 等(등)을 지낸 官僚(관료)이다.
滿洲國(만주국) 陸軍軍官學校(육군군관학교) 第(제)9期(기)로 卒業(졸업)하여 間島特設隊(간도특설대)에서 將校(장교)로 服務(복무)하였다. 1945年(년) 滿洲軍(만주군) 中尉(중위)로 있을 때 光復(광복)을 맞아 平壤(평양)에 돌아왔고,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 조만식(曺晩植)의 祕書(비서)로 活動(활동)하다가 蘇聯(소련)이 以北(이북) 地域(지역)에 進駐(진주)하자 그해 12月(월) 越南(월남)했다.
1946年(년) 軍政期(군정기) 南朝鮮(남조선)國防警備隊(국방경비대) 第(제)5聯隊(연대) 中隊長(중대장)을 맡았고, 1949年(년) 第(제)5師團長(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年(년) 開城(개성) 第(제)1師團長(사단장)으로 陞進(승진)한 以後(이후) 韓國戰爭(한국전쟁)에 參戰(참전)하였다. 戰爭(전쟁) 初期(초기) 人民軍(인민군)에 敗退(패퇴)하여 首都(수도) 서울(Seoul)이 早期(조기) 陷落(함락)되는 原因(원인)을 提供(제공)하였으나 美軍(미군)과 함께 多富洞(다부동) 戰鬪(전투) 等(등)에서 全功(전공)을 세우며 32歲(세)에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 最初(최초)의 大將(대장)에 올랐고, 太極武功勳章(태극무공훈장)과 美國(미국) 殷盛武功勳章(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1952年(년) 休戰(휴전) 會談(회담) 때 韓國側(한국측) 代表團(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休戰(휴전) 文書調印式(문서조인식)에 參席(참석)했다. 豫編(예편) 後(후)에는 交通部長官(교통부장관)을 歷任(역임)하고, 中華民國(중화민국)·프랑스(France)·캐나다(Canada) 大使(대사) 等(등)을 지냈으며, 韓國綜合化學(한국종합화학)∙한국에타놀(Korean ethanol)
社長(사장)도 歷任(역임)하였다.
同生(동생) 白仁燁(백인엽)과 仁川大學校(인천대학교) 等(등) 先人財團(선인재단)을 設立(설립)했다. 2020年(년) 7月(월) 10日(일)에 99歲(세)의 나이로 別世(별세)하여 國立大田顯忠院(국립대전현충원)에 安葬(안장)되었다.
김석원[金錫源, 日本式(일본식) 이름: 金山錫源(가네야마 샤쿠겐), 1893年(년) 9月(월) 29日(일) ~ 1978年(년) 8月(월) 6日(일)은 日本軍(일본군) 將校(장교)를 지낸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의 陸軍(육군) 軍人(군인)이다.
김홍일[金弘壹, 1898年(년) 9月(월) 23日(일) ~ 1980年(년) 8月(월) 8日(일)은 中華民國(중화민국) 陸軍(육군) 軍人(군인)이자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韓國(한국)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 出身(출신) 大韓民國(대한민국)의 軍人(군인) 兼(겸) 政治家(정치가)이다. 平安北道(평안북도) 出身(출신)으로, 本貫(본관)은 法興(법흥)이다.
初名(초명)은 홍일(弘日), 號(호)는 일서(逸曙), 산남(山南). 別名(별명)은 최세평(崔世平), 中國語(중국어) 이름은 王雄·王逸曙·王復高. 中國軍(중국군) 現役(현역) 軍人(군인) 身分(신분)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도와 윤봉길(尹奉吉), 이봉창(李奉昌)의 巨事(거사)를 支援(지원)하였고, 韓國(한국) 光復軍(광복군) 參謀長(참모장)을 거쳐 國軍(국군) 准將(준장)으로 任官(임관)하여 6.25 戰爭(전쟁)에 參戰(참전)하였다. 1961年(년) 5·16 軍事(군사) 政變(정변) 直後(직후)에는 外務部(외무부) 長官(장관)을 歷任(역임)하였다.
김일성[金日成, 1912年(년) 4月(월) 15日(일) ~ 1994年(년) 7月(월) 8日(일)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初代(초대) 最高(최고)指導者(지도자)였다. 1948年(년) 9月(월) 9日(일)부터 1972年(년) 12月(월)까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內閣(내각) 首相 首相(수상)을 지냈고 1972年(년) 12月(월) 28日(일)부터 1994年(년) 7月(월) 8日(일) 死亡(사망)前(전)까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最高(최고)指導者(지도자)를 지냈다.
김종필[金鍾泌, 1926年(년) 1月(월) 7일~2018年(년) 6月(월) 23日(일)은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政治人(정치인)이다.
그는 박정희(朴正熙)가 5.16 軍事(군사) 政變(정변)를 일으킬 當時(당시) 豫備役(예비역)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육군) 中領(중령)으로 쿠테타(Coup)에 參與(참여)했다. 1951年(년) 2月(월) 박상희(朴相熙)의 長女(장녀) 朴榮玉(박영옥)과 結婚(결혼)했으며 1963年(년) 陸軍(육군) 准將(준장)으로 進級(진급) 後(후) 豫編(예편)했다.
9選(선) 國會議員(국회의원)으로 最多選(최다선) 國會議員(국회의원) 出身(출신)이며, 1971年(년) 박정희(朴正熙) 呈券(정권)기 第(제)11代(대), 金大中(김대중)政府期(정부기) 31代(대) DJP 聯政(연정) 國務總理(국무총리)를 歷任(역임)하였다. 金泳三(김영삼), 金大中(김대중)과 함께 3金(김)이라 불리며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政治(정치)를 이끌었다.
民主(민주)共和黨(공화당) 總裁(총재)와 新民主共和黨總裁(신민주공화당총재)를 거쳐 自由民主聯合總裁(자유민주연합총재)를 지낸 그의 主要(주요) 居住地(거주지)는 大韓民國(대한민국) 서울(Seoul)特別市(특별시) 中區(중구) 新堂洞(신당동)이었다.
陸軍(육군)士官學校(사관학교)를 8期(기)로 卒業(졸업)하고 1961年(년) 5.16 軍事政變(군사정변)의 中心(중심) 人物(인물)로 初代(초대) 中央情報部(중앙정보부)(現(현) 國家情報員(국가정보원)를 創設(창설)해 部長(부장)에 就任(취임)해 活躍(활약)했지만, 共和黨(공화당)의 內紛(내분)으로 政界(정계)를 隱退(은퇴)했다. 1971年(년) 共和黨(공화당) 副總裁職(부총재직)을 맡고 第(제)8代(대) 國會議員(국회의원)에 當選(당선)됐으며, 같은 해 6月(월) 國務總理(국무총리)에 就任(취임)함으로써 政界(정계)에 復歸後(복귀후) 5年(년)6個月間(개월간) 최장수 總理(총리)를 지내며, 大德硏究團地(대덕연구단지), 民俗村(민속촌)等(등)을 企劃(기획)했다.
1979年(년) 共和黨(공화당) 總裁(총재)를 맡았으나,1981年(년) 新軍部(신군부)의 壓力(압력)으로 政界(정계) 隱退(은퇴) 後(후) 美國(미국)으로 건너갔다. 1987年(년) 新民主共和黨(신민주공화당)을 創黨(창당)하며 政界(정계)에 復歸(복귀)하였다. 1990年(년) 3黨合黨(당합당)에 參與(참여)하여 民主自由黨(민주자유당) 最高委員(최고위원)으로 活動(활동)하였다. 하지만 1995年(년) 脫黨(탈당)하고 自由民主聯合(자유민주연합)을 創黨(창당)하고 初代(초대) 總裁(총재)가 되었다. 2004年(년)에 第(제)17代(대) 總選(총선)에서 落馬(낙마)하고 政界(정계)를 隱退(은퇴)했다.
第(제)3共和國(공화국)과 第(제)4共和國(공화국) 當時(당시) 第(제)2人者(인자)였으며 金泳三(김영삼), 金大中(김대중), 李哲承(이철승)과 함께 박정희(朴正熙)의 後繼者(후계자) 또는 潛在的(잠재적) 代案者(대안자)로 擧論(거론)되기도 했다. 1971年(년) 6月(월) 4日(일)부터 1975年(년) 12月(월) 18日(일)까지 大韓民國(대한민국)의 第(제)11代(대) 國務總理(국무총리)를, 1998年(년) 3月(월) 3日(일)부터 2000年(년) 1月(월) 12日(일)까지 第(제)31代(대) DJP 聯政(연정) 國務總理(국무총리)를 歷任(역임)했다.
2018年(년) 6月(월) 23日(일)에 宿患(숙환)으로 因(인)해 享年(향년) 93歲(세)의 나이로 死亡(사망)하였다.
박헌영[朴憲永, 1900年(년) 5月(월) 28日(일)? 大韓帝國(대한제국) 忠淸南道(충청남도) 禮山(예산) 出生(출생) ~ 1956年(년) 12月(월) 5日(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平壤(평양)에서 死刑(사형) 執行(집행)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半島(반도)의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 言論人(언론인), 勞動運動(노동운동)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政治家(정치가)이다.
리승엽[李承燁, 1905年(년) 2月(월) 8日(일) 大韓帝國(대한제국) 京畿道(경기도) 富平(부평) 出生(출생) ~ 1954年(년) 7月(월) 30日(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平壤(평양)에서 死刑(사형) 執行(집행)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親日共産主義(친일공산주의) 運動家(운동가)이며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政治家(정치가)이다. 本貫(본관)은 인천(仁川).
김신[金信, 1922年(년) 9月(월) 21日(일) 國民政府(국민정부) 時代(시대) 中華民國(중화민국) 大陸(대륙) 本土(본토) 장쑤 성 상하이(江苏上海) 出生(출생) ~ 2016年(년) 5月(월) 19日(일) 大韓民國(대한민국) 서울(Seoul)에서 別世(별세)은 空軍參謀總長(공군참모총장)·交通部長官(교통부장관)·初選國會議員(초선국회의원) 等(등)을 지낸 大韓民國(대한민국)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이자 軍人(군인) 兼(겸) 外交官(외교관)이며 政治家(정치가)이다. 本貫(본관)은 安東(안동)이다.
장면[張勉, 1899年(년) 8月(월) 28日(일) ~ 1966年(년) 6月(월) 4日(일)은 지난날 美國(미국) 駐在(주재) 大韓民國(대한민국) 大使(대사)·大韓民國(대한민국) 國務總理(국무총리)·大韓民國(대한민국) 副統領(부통령) 等(등)을 지낸 大韓民國(대한민국)大學(대학) 敎授(교수) 出身(출신)의 政治家(정치가)이다.
최용덕[崔用德, 1898年(년) 9月(월) 19日(일) ∼ 1969年(년) 8月(월) 15日(일)은 大韓民國(대한민국)의 軍人(군인), 政治人(정치인), 外交官(외교관)이다. 本貫(본관)은 경주(慶州). 雅號(아호)는 창석(滄石).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時節(시절)에는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하였으며 第(제)2大(대) 空軍參謀總長(공군참모총장), 1960年(년) 6月(월) 2日(일)부터 1960年(년) 8月(월) 22日(일)까지 遞信部長官(체신부장관)을 歷任(역임)하였다.
한신[韓信, 1922年(년) 12月(월) 27日(일) ~ 1996年(년) 5月(월) 6日(일)은 豫備役(예비역)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大將(육군대장) 豫編(예편)한 大韓民國(대한민국)의 軍人(군인)· 政治家(정치가)· 企業家(기업가)이다. 內務部長官(내무부장관), 監査院院長(감사원원장), 合同參謀總長(합동참모총장), 아시아(Asia)自動車(자동차)名譽會長(명예회장) 等(등)을 지냈다.
최영희[崔榮喜, 1921年(년) 3月(월) 1日(일)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朝鮮(조선) 京城府(경성부) 出生(출생) ~ 2006年(년) 1月(월) 11日(일)大韓民國(대한민국) 서울에서 別世(별세)는 터키(Turkey) 駐在(주재) 大韓民國(대한민국) 大使(대사)·國防部長官(국방부장관)·3選(선) 國會議員(국회의원) 等(등)을 지낸 大韓民國(대한민국) 軍人(군인), 政治家(정치가), 外交官(외교관)이었다.
그는 韓國戰爭(한국전쟁)의 指揮官(지휘관)이었으며 陸軍中將(육군중장) 戰役(전역)以後(이후) 國防部長官(국방부장관) 國會議員(국회의원)을 지냈다.
1961年(년)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中將(육군중장) 豫編(예편)·
김종오[金鍾五, 1921年(년) 5月(월) 22日(일) ~ 1966年(년) 3月(월) 30日(일)는 大韓民國(대한민국)의 軍人(군인) 兼(겸) 政治家(정치가)이다. 1921年(년) 5月(월) 22日(일) 忠淸北道(충청북도) 淸原郡(청원군) 芙江面(부강면)에서 태어났다. 1944年(년) 日本(일본) 주오(中央)大學(대학) 재학 中(중) 日本軍官學校(일본군관학교)에 學徒兵(학도병)으로 入隊(입대)하여 任官敎育(임관교육) 中(중) 解放(해방)을 맞고 歸國(귀국)하였다. 歸國(귀국) 以後(이후) 左翼勢力(좌익세력)이 結成(결성)한 學兵同盟(학병동맹)에 對抗(대항)하여 만들어진 學兵團(학병단)에 들어가 活動(활동)하기도 하였다. 以後(이후) 1946年(년) 1月(월) 15日(일) 軍事英語學校(군사영어학교) 1期生(기생)으로 入校(입교)해 陸軍(육군) 參尉(참위:少尉(소위)로 任官(임관)하였다.
1947年(년) 陸軍(육군) 第(제)1聯隊長(연대장)이 되었고, 韓國戰爭(한국전쟁) 開戰(개전) 當時(당시) 陸軍大領(육군대령)으로 第(제)6師團(사단)의 師團長(사단장)이었다. 1950年(년) 7月(월) 准將(준장)으로 進級(진급)하였다.
第(제)6師團長(사단장) 歷任時(역임시) 낌새를 수상히 여긴 김종오(金鍾五)는 春川(춘천)에 駐屯(주둔)한 陸軍(육군) 第(제)6師團(사단) 第(제)7聯隊(연대)에 1950年(년) 6月(월) 22日(일)부터 警戒態勢(경계태세) 强化(강화)와 同時(동시)에 全將兵(전장병)의 外出(외출)을 禁止(금지)시키도록 命令(명령)했다.
그 때문에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2萬(만)4千(천) 名(명)은 6月(월) 25日(일) 새벽 春川(춘천)을 奇襲攻擊(기습공격)했지만 40% 以上(이상)의 戰力(전력)을 喪失(상실)한 채 春川地域(춘천지역) 占領(점령)을 失敗(실패)하고 말았다.
春川(춘천) 戰鬪(전투)에서 6師團(사단)은 3日間(일간)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과 對峙(대치)하며 春川(춘천)을 確保(확보)했으며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進軍(진군)을 成功的(성공적)으로 遮斷(차단)하였으나 陸軍本部(육군본부) 命令(명령)에 따라 忠州(충주)로 撤收(철수)하면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은 6月(월) 27日(일) 저녁 10時(시)에 春川(춘천)을 占領(점령)했다.
以後(이후) 김종오(金鍾五)가 이끄는 6師團(사단) 7聯隊(연대)는 同樂里(동락리) 戰鬪(전투)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에게 勝戰(승전)을 거두었다.
1950年(년) 10月(월) 熙川(희천) 戰鬪(전투) 때, 김종오(金鍾五)가 이끄는 陸軍(육군) 第(제)6師團(사단) 第(제)7聯隊(연대)는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18師團(사단)의 1個(개) 聯隊(연대)를 물리치고 熙川(희천)을 占領(점령)하였다.
以後(이후) 김종오(金鍾五)는 9師團(사단) 師團長(사단장)으로 赴任(부임)하여 白馬高地(백마고지) 戰鬪(전투)에서 中共軍(중공군)과 戰鬪(전투)를 벌여 勝戰(승전)하였다.
韓國戰爭(한국전쟁) 以後(이후)에는 合同參謀議長(합동참모의장)과 第(제)15代(대) 陸軍參謀總長(육군참모총장)을 맡기도 하였고 5.16 軍事政變(군사정변) 直後(직후)에는 國家再建最高會議(국가재건최고회의) 最高委員(최고위원)을 맡음으로 잠시 政治家(정치가)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1965年(년) 4月(월) 陸軍大將(육군대장)으로 豫編(예편) 後(후), 1966年(년) 3月(월) 30日(일) 午前(오전) 9時(시) 25分(분) 新堂洞(신당동) 自宅(자택)에서 肺癌(폐암)으로 死亡(사망)하였다.
學校設立(학교설립)
淸州市(청주시)(現(현) 世宗特別自治市(세종특별자치시)에 芙江中學校(부강중학교)와 芙江工業高(부강공업고)(現(현) 世宗(세종)하이텍(Hi-tech)高等學校(고등학교)를 設立(설립)하였다.
忠淸北道(충청북도) 淸原(청원) 出生(출생)이며 本貫(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65年(년)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大將(육군대장) 豫編(예편) 等(등)의 軍人(군인)들처럼 學徒兵(학도병) 出身(출신)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육군) 少尉(소위)로 任官(임관)하여 1975年(년)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大將(육군대장)으로 豫編(예편)하였다.
8·15 光復(광복) 後(후)에는 1945年(년) 9月(월) 20日(일)을 기하여 이름을 한원극(韓元極)에서 한신(韓信)으로 改名(개명)하였으며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육군)將校(장교) 活動(활동)하다가 韓國戰爭(한국전쟁)이 勃發(발발)하자 聯隊長(연대장) 身分(신분)으로 여러 戰鬪(전투)에 參戰(참전)하였다.
韓國戰爭(한국전쟁) 當時(당시) 그의 階級(계급)은 大領(대령)이었다. 이 때, 白善燁(백선엽)과 송요찬(宋堯讚)의 信賴(신뢰)를 얻게 되었고 특히나 그의 淸廉(청렴)함과 部下(부하)들에 대한 各別(각별)함이 그가 이종찬(李鐘贊)처럼 參軍人(참군인)으로 部下(부하) 將校(장교)와 將兵(장병)들에게 尊敬(존경) 받게 되었다.
박정희(朴正熙)가 5.16 軍事(군사) 政變(정변)을 일으키자 軍事革命(군사혁명)委員會(위원회)(國家再建最高會議(국가재건최고회의)에 依(의)하여 內務部長官(내무부장관)에 任命(임명)되었다. 當時(당시)의 韓信(한신)은 李鍾贊(이종찬)과 달리 軍人(군인)이 나라를 위해 힘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이를 忌憚(기탄)없이 受諾(수락)하였고 以後(이후) 國防大學院(국방대학원) 卒業(졸업), 大韓重石(대한중석)(現(현) 대구텍(TaeguTec Ltd) 社長(사장), 아시아(Asia)自動車(자동차)(現(현) 기아(KIA)自動車(자동차) 會長(회장) 等(등)을 歷任(역임)하였다. 1941年(년) 咸鏡南道(함경남도) 咸興高等普通學校(함흥고등보통학교) 卒業(졸업)
1945년 日本(일본) 주오(中央)大學校(대학교) 法學科(법학과) 學士(학사)
1946년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육군)士官學校(사관학교) 2期(기)
1949년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步兵學校(육군보병학교) 卒業(졸업)
1951년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육군)機甲學校(기갑학교) 卒業(졸업)
1952년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砲兵學校(육군포병학교) 卒業(졸업)
1953년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大學校(육군대학교) 卒業(졸업)
1956년 大韓民國(대한민국) 國防大學校(국방대학교) 行政學士(행정학사) 1期(기)
1959년 大韓民國(대한민국) 國防大學院(국방대학원) 行政學(행정학) 碩士(석사)
經歷(경력)
1946년: 陸士(육사) 2期(기) 任官(임관).
1954년: 陸軍(육군)准將(준장) 進級(진급).
1956년: 六軍(육군) 首都軍團(수도군단) 副軍團長(부군단장)(准將(준장).
1961년: 內務部長官(내무부장관).
1962년: 陸軍(육군)少將(소장) 進級(진급).
1963년: 陸軍(육군) 第(제)2軍司令部(군사령부) 副司令官(부사령관)(少將(소장).
1963년: 監査院長(감사원장).
1964년: 陸軍(육군) 第(제)6軍團(군단) 副軍團長(부군단장).
1968년: 陸軍(육군) 第(제)6軍團長(군단장).
1968년: 陸軍(육군) 參謀次長(참모차장)(中將(중장).
1968년: 陸軍(육군) 第(제)2軍司令官(군사령관).
1969년: 陸軍(육군) 第(제)1軍司令官(군사령관).
1970년: 陸軍(육군) 第(제)1軍司令官(군사령관) 職位(직위)在職時(재직시)에 陸軍大將(육군대장) 進級(진급).
1972년: 合同參謀總長(합동참모총장).
1975년: 아세아(Asia)自動車(자동차)株式會社(주식회사) 社長(사장)
1976년: 아세아(Asia)自動車(자동차)株式會社(주식회사) 會長(회장)(1984年(년) 아시아(Asia)自動車(자동차) 名譽會長(명예회장) 離任(이임).
1977년: 大韓重石(대한중석) 社長(사장) 兼職(겸직).
1981년: 韓國(한국)綜合化學工業(종합화학공업) 社長(사장)(兼職(겸직).
1984년: 아시아(Asia)自動車(자동차) 名譽會長(명예회장).
1985년: 大韓重石(대한중석) 社長(사장) 職位(직위) 退任(퇴임).
1986년: 韓國(한국)綜合化學工業(종합화학공업) 社長(사장) 職位(직위) 退任(퇴임).
1987년: 아시아(Asia)自動車(자동차) 名譽會長(명예회장) 職位(직위) 退任(퇴임).
駐韓美軍(주한미군)
9·28 收復(수복)
마오 쩌둥(毛泽东)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Joseph Stalin)
中華人民支援軍(중화인민지원군)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KBS 特別企劃(특별기획) 韓國戰爭(한국전쟁)
제네바(Geneva) 合議(합의)
제네바(Geneva) 協定(협정)
6·25戰爭日(전쟁일)
人民解放軍(인민해방군), 人民軍(인민군), 蘇聯軍(소련군)
• 國軍(국군), 美軍(미군), 英聯邦(영연방) 및 유엔군(UN)軍(군)
脚注(각주)1.↑ “Českoslovenští lékaři stáli v korejské válce na straně KLDR. Jejich mise stále vyvolává otazníky” (체코어). Czech Radio. 2013년 4월 11일. 2016년 7월 25일에 확인함.
2.↑ 이동: 가 나 Edwards, Paul M. (2006). 《Korean War Almanac》. Almanacs of American wars. New York: Infobase Publishing. 528쪽. ISBN 9780816074679.
3.↑ Kocsis, Piroska (2005). “Magyar orvosok Koreában (1950-1957)” [Hungarian physicians in Korea (1950-1957)]. 《ArchivNet: XX. századi történeti források》 (헝가리어). Budapest: Magyar Országos Levéltár. 2016년 11월 22일에 확인함.
4.↑ “Romania's "Fraternal Support" to Nor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Wilson Centre. 2013년 1월 24일에 확인함.
5.↑ [1]
6.↑ Stueck 1995, 196쪽.
7.↑ Millett, Allan Reed, 편집. (2001). 《The Korean War, Volume 3》. Korea Institute of Military History. U of Nebraska Press. 541쪽. ISBN 9780803277960. 2015년 9월 18일에 확인함. "India could not be considered neutral."
8.↑ Birtle, Andrew J. (2000). 《The Korean War: Years of Stalemate》.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34쪽. 2007년 12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2월 14일에 확인함. 한반도 분단 고착화
9.↑ Young, Sam Ma (2010). “Israel's Role in the UN during the Korean War” (PDF). 《Israel Journal of Foreign Affairs》 4: 81–9. 2015년 8월 24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0월 24일에 확인함.
10.↑ 김, 관용 (2017). “11개국 유엔 참전용사 재방한 행사, 독일 의료지원단도 초청”. 《이데일리뉴스》.
11.↑ Edles, Laura Desfor (1998). 《Symbol and Ritual in the New Spain: the transition to democracy after Franco》.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2쪽. ISBN 0521628857.
12.↑ [2]
13.↑ 주의: 출처에 따라 수치는 다를 수 있고 주둔 병력 기준.
14.↑ Millett, Allan Reed, 편집. (2001). 《The Korean War, Volume 3》. Korea Institute of Military History. U of Nebraska Press. 692쪽. ISBN 978-0803277960. 2013년 2월 16일에 확인함. "Total Strength 602,902 troops"
15.↑ Kane, Tim (2004년 10월 27일). “Global U.S. Troop Deployment, 1950–2003”. 《Reports》. The Heritage Foundation. 2013년 1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2월 15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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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建军八十周年特刊]抗美援朝:第一次较量_新闻中心_新浪网”. 《news.sina.com.cn》. 2020년 7월 16일에 확인함.
17.↑ 영문 위키 출처
18.↑ 1999년까지는 미군 전사자 수가 54,246명으로 기록되었으나 2000년에 미국 국방부에서 대외적으로 36,574명으로 정정, 이런 혼란이 빚어진 이유는 미국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 주관 단체에서 한국에 들어와서 전사한 미군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 등에서 한국전쟁 지원 업무 등을 하는 것과 같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종사한 전세계 모든 미군들 중에서 사망한 모든 미군들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전사자 수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19.↑ How Many Americans Died In Korea?
20.↑ “抗美援朝烈士最新确认为197653名”. 《news.sina.com.cn》. 2020년 9월 24일에 확인함.
21.↑ 대한민국에서는 1973년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 6·25 사변일(六二五事變日)을 공식 명칭으로 써왔으나, 2014년 3월 24일 개정으로 6·25 전쟁일이라고 규정한다. 또는 6·25 사변, 6·25 동란, 6·25 전쟁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으로도 부른다. 대한민국의 초, 중, 고등학교 역사(사회) 교과서에는 6·25 전쟁으로 표기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보다 6·25 전쟁을 사용한다.
22.↑ 중화인민공화국의 조선족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
23.↑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6·25전쟁〔槪說〕
24.↑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어 스탈린과 김일성의 긴밀한 협의 아래 6.25 전쟁이 일어났음이 확인되었다.
25.↑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26.↑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27.↑ “육이오 전쟁”.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2020년 9월 14일에 확인함.
28.↑ “'6·25전쟁'이냐 '한국전쟁'이냐”. 조선일보. 2010년 6월 21일.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연구소가 25일 개최하는 6·25 60돌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6·25전쟁의 명칭과 복합전적 인식'을 발표하는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한국전쟁은 미국식 용어로 어느 나라도 자기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을 이렇게 부르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29.↑ 정원교, 중국의 속내는… 행사 자제 속 ‘北·中-韓·美 대결구도’ 꺼려, 국민일보, 2013년 7월 26일
30.↑ 문예성, 中 당국, 북한 전승절 대표단 파견 전하면서 최초 항미원조→조선전쟁, 뉴시스, 2013년 7월 25일
31.↑ 오승렬, 한·미·중의 ‘6·25 전쟁 재평가’ 의미, 문화일보, 2013년 7월 30일
32.↑ 이승관, "잊혀진 승리" 미국 펜타곤에 한국전 전시관, 연합뉴스, 2013년 6월 19일
33.↑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34.↑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35.↑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36.↑ 〈美의 對極東防衛線은...〉 《京鄕新聞》 (1950년 1월 12일) 1쪽.
37.↑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나남출판. 303~304쪽.
38.↑ 이동: 가 나 다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
39.↑ Max Beloff, Soviet Foreign Policy In the Far East,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52, pp.177
40.↑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1일. 5면.
41.↑ 박태균 (2010년 7월 6일). “[2010연중기획]한국전쟁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 경향신문사: 주간경향.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42.↑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1일. 5면.
43.↑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1일. 5면.
44.↑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1일. 5면.
45.↑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138쪽.
46.↑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138쪽.
47.↑ 이동: 가 나 다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KBS 2010.06.24 (22:03)
48.↑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5면.
49.↑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5면.
50.↑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5면.
51.↑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5면.
52.↑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5면.
53.↑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54.↑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55.↑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56.↑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57.↑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58.↑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5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54쪽.
60.↑ 사실, 이승만은 조만식이 대한민국에 내려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조만식을 삼팔선 이남까지 데리고 내려오라.'는 조건을 붙여 사실상 교환을 거부했다.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514
61.↑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62.↑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63.↑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64.↑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65.↑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66.↑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67.↑ 6·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37) 평양서 발견한 전쟁 준비 문서 Archived 2010년 2월 20일 - 웨이백 머신, 《중앙일보》, 2010년 02월 17일
68.↑ NA, RG242, SA2009, Item. 8/95, 949군부대 야전병원철.: (박명림 (2002년).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서울: 나남. 79쪽쪽. ISBN 89-300-3939-1. )에서 재인용
69.↑ “(403) 광복과 분단, 그리고 북한의 전쟁준비”. 전쟁기념관. 2013년 11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11월 5일에 확인함.
70.↑ “秘錄 韓國外交<28>: 政府樹立 직후 ⑩”. 경향신문. 1975년 3월 17일.
71.↑ 소진철,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 한국학술정보, 2008년 [쪽 번호 필요]
7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25~26쪽.
73.↑ 박태균 (2010년 7월 6일). “[2010연중기획]한국전쟁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 경향신문사: 주간경향.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74.↑ “6.25전쟁 알아봅시다.”.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75.↑ “6.25스물세돌특집 1950년6월25일 새벽4시…당시 일선지휘관들의 증언”. 경향신문. 1973년 6월 22일.
76.↑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77.↑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78.↑ 이동: 가 나 CIA 한국전 잇단 오판, 수장까지 교체 Archived 2013년 11월 11일 - 웨이백 머신, KBS, 2010년 06월 16일
79.↑ “덜레스氏 38線視察”. 동아일보. 1950년 6월 19일.
8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47~48쪽.
81.↑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82.↑ 임영태, 《인류 이야기 현대편 2권》(아이필드 출판사 2004년) 124~128쪽
83.↑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46쪽.
84.↑ 이정훈 기자 (2000년 5월 1일).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동아일보사.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85.↑ 이정훈 기자 (2000년 5월 1일).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동아일보사.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86.↑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87.↑ 이정훈 기자 (2000년 5월 1일).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동아일보사.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88.↑ 미국은 2차 대전 때 57mm포로도 충분히 T-34를 사냥했었기 때문에 한국군이 57mm포를 보유하고도 제대로 활용을 못했다고 생각했었다. 후에 스미스 대대가 치른 오산 전투에서야 자신들이 오판했음을 깨닫게 된다.
89.↑ 백선엽의 회고록 참조. 한국군 사단 포병이 미군 수준으로 4개 대대로 구성된 포병연대급으로 증강된 것은 전쟁 후반기였다
90.↑ 김학준 (1995년). 《북한 50년사: 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 동아출판사. 146쪽. "북한군은 소련제~가지고 있었다."
91.↑ 로버트 T. 올리버 (1982년). 박일영 옮김, 편집. 《이승만 비록》. 한국문화출판사. 322쪽.
92.↑ 윌리엄 스톡 (2001년). 김형인 외 옮김, 편집. 《한국전쟁의 국제사》. 푸른역사. 65쪽.
93.↑ 채명신 (1994년).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 매일경제신문사. 98쪽.
94.↑ 아나톨리 토르쿠노프(Anatoli Torkunov); Mark Jarvis 편역. “Subject: Korean War: how it started”. Korean War Project. 2013년 5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7월 6일에 확인함.
95.↑ [http://www.f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437 소진철교수 - 6.25 전쟁사 다시 써야한다.) 파이낸스 투데이
96.↑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 발발 직전의 정황〉 “이러한 상황 하에서 북한의 김일성은 ‘대한민국이 공격해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면서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침략을 개시하였다.”
97.↑ “한강 철교 수중에서 6·25때 사용한 불발탄 인양”. 2015년 12월 11일.
98.↑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99.↑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100.↑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101.↑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컬렉션/토픽”. 2019년 11월 18일에 확인함.
102.↑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103.↑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104.↑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과 유엔군 출동〉
105.↑ 이정훈 기자 (2000년 5월 1일).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동아일보사.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106.↑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과 유엔군 출동〉
107.↑ 당시에는 장단군 백학면이었으며, 현재는 연천군 장남면에 속한 고랑포리이다.
108.↑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109.↑ 〈추억의 가지가지〉 《경향신문》(1956년 6월 25일) 4쪽.
11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48쪽.
111.↑ 〈軍 어제와 오늘<30> 「북극성會」(6) “正規출신은 온실의 화초같은 애송이 “短期출신, 후배명예욕 질타”〉 《동아일보》(1993년 7월 29일) 5쪽.
11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49쪽.
113.↑ “6.25스물세돌특집 1950년6월25일 새벽4시…당시 일선지휘관들의 증언”. 경향신문. 1973년 6월 22일. "…육본상황실로 들어갔다. 상황판에서는 당직하사관들이 평일과는 달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당직병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운듯 충혈된 눈으로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기를 붙잡기에 분주했고 통화가 끝나면 색연필을 가지고 상황판의 붉은 화살표시를 남쪽으로 내려었다…. …아침 7시쯤부터 걸려오는 괴전화였다…. 그때는 이미 육본으로 이어지는 군의 주요통신망이 재경유격대들에 의해 절단되었고 적은 아군의 통신망을 역이용하고 있었다."
114.↑ 노정팔 (1995년). 《한국방송과 50년》. 나남. 159~160쪽. "이전부터 38선~반복하고 있었다."
115.↑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7章 UN의 決意와 赴援軍의 出動 2. 美國과 UN의 動向〉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869쪽.
116.↑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7章 UN의 決意와 赴援軍의 出動 2. 美國과 UN의 動向〉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869쪽.
117.↑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7章 UN의 決意와 赴援軍의 出動 2. 美國과 UN의 動向〉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869쪽.
118.↑ 〈맥아더傳記3部「勝利와 不幸」(1945~64)(下)〉《경향신문》 1985년 5월 10일 5쪽.
11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50~51쪽.
12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51쪽.
121.↑ 전쟁기념사업회 (1992년). 《《한국전쟁》 제3권》. 행림출판. 39쪽. "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에~정식으로 의결되었다."
122.↑ 노정팔. 《앞의 책》. 161~162쪽. "6월 27일 아침 6시에~"
123.↑ 김동춘 (2000년). 《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돌베개. 91쪽.
124.↑ 이한우. 《앞의 책》. 84쪽. "당시의 전황으로~"
125.↑ 백사 이윤영 회고록 제I편 171~172쪽
126.↑ 김동춘 (2000년). “〈서울시민과 한국전쟁:'잔류'·'도강'·'피난'〉”. 《《역사비평》》 (제51호): 45. "서울시민~"
127.↑ 이동: 가 나 다 일 산케이신문, 일 산케이신문, "50년 일본 야마구치에 이승만, 망명정부 구상" 조선일보 1996년 4월 14일
128.↑ 고은 (2004). 《만인보 1》. 창비. 21~23쪽. "대전에서 사흘을~"
129.↑ 강준만, 앞의 책, 66쪽.
130.↑ 당시 사단장은 박춘하(朴春河)였다.
131.↑ 김동선 (1991년 6월 27일). “〈돌아온 老兵 “50년6월29일 수원서 맥아더 만났다”〉”. 《《시사저널》》 (제87호).
132.↑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과 유엔군 출동〉
133.↑ 이동: 가 나 다 라 마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113페이지
134.↑ 이동: 가 나 다 장면,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113페이지
135.↑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115쪽
136.↑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9·28수복에서 압록강까지〉
137.↑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4일. 5면.
138.↑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4일. 5면.
139.↑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4일. 5면.
140.↑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4일. 5면.
141.↑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5>”.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5일. 5면.
142.↑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5>”.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5일. 5면.
143.↑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1·4후퇴와 재북진〉
144.↑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최후의 혈전과 휴전 성립〉
145.↑ "한국전 생화학무기 사용주장은 허구" , 연합뉴스, 1999-03-12
146.↑ 최초로 폭로된 세균전, 한국전쟁, 통일뉴스, 2015.07.10
147.↑ “미군, 일본 ‘731부대’에서 세균무기 배워 한국전쟁에서 사용” 보고서 공개, 경향신문, 2015-01-27
148.↑ [단독]"美, 6·25서 세균전" '니덤보고서' 전문 나와, 연합뉴스, 2015-06-09
149.↑ 미군, 한국전쟁때 북한서 세균전 명령, 한겨레, 2010-03-19
150.↑ [책과 삶]원전 문제는 결국 민주주의 문제… 동북아 우경화로 문제 해결 요원해져, 경향신문, 2013.03.08
151.↑ [논술 따라잡기] '한국전쟁과 맥아더' 어떻게 볼것인가, 매일경제, 2006-02-20
152.↑ “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신동아》 (동아일보사). 2006년 8월 1일.
153.↑ 온창일. 《〈한국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군사분계선 문제는~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154.↑ 한국전쟁연구회, 편집. (2000년).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 백산서당. 389쪽.
155.↑ 홍용표. 〈〈전쟁 전개과정에서의 한·미간의 갈등: 이승만의 북진통일론과 미국의 대응을 중심으로〉〉. 《앞의 책》. 392~393쪽.
156.↑ “6·25 참전국 모두 모여 만든 ‘유일한 국제공인 통일원칙’”. 《신동아》 (동아일보사). 2008년 2월 1일.
157.↑ 한국의 역사 19, 234 ~ 246쪽.
158.↑ “"다시 보는 한국 전쟁"”. 2007.09.02 19:12. 2013년 11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1월 2일에 확인함.
159.↑ “김일성, 1965년 '제2차 한국전쟁' 준비했었다”. 뉴스1. 2013년 10월 24일.
160.↑ http://economy.donga.com/3/all/20130311/53619871/2
161.↑ “개성의 근대와 새로운 기회”. KBS오피스 북한백과. 2006년 3월 19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62.↑ 김동춘. 《앞의 책》. 292쪽. "한국 전쟁은 이승만이~수 있었다."
163.↑ 《같은 책》. 292쪽. "전쟁 과정에서~계기를 얻었다."
164.↑ 소진철,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 270쪽, 한국학술정보 2008년, ISBN 978-89-534-6814-6
165.↑ 이동: 가 나 이제 만나러 갑니다 434회 채널A 2020-04-12
166.↑ 정철근, 전쟁고아도 챙겼던 터키 노병 “한국 발전 감사”, 중앙일보
167.↑ 이미일. 《〈6·25전쟁 중 남한민간인 납북 문제에 대한 전후 처리 현황과 과제〉》. "전쟁납북자명부 5종을 통합하여 중복된 경우 하나만 남기고 정리한 96,013명의 인적자료를 분석한 결과~"
171.↑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 오마이뉴스 2002.02.22
172.↑ 이영훈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뉴데일리 2009.06.01
173.↑ 대한민국 정부가 포주였다 한겨레21 2011.11.28 제8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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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토 2021-02-13 오후 6:39 ~ 좋은 사진과 자료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