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52]바빴던 어느 가을날의 일기
잠에 들기 전에 하루일을 되짚어본다. 무척 바빴던 듯하다. 새벽 4시 서재에 내려와 <찬샘별곡>을 1시간여 동안 쓰다. 우리의 고향, 작은 소읍이 의견의 고장으로 알려졌지만 세계적인 반려동물의 성지로 만드는 일은 아무리 좋은 스토리텔링을 가졌다해도 쉽지 않은 일일 터. 그를 위한 제안이나 방향의 우선순위를 나름 적어본 것이다. 거칠게 썼지만, 조금 다듬어 일간지 독자페이지에 투고할 생각이다. 아침밥을 먹고 최애 프로그램 <인간극장> 5부를 시청하다. 영국남자가 한국인 아내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강원도 산골에 정착, 염소를 키우고 카페를 운영하는 휴먼스토리는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별곡 Ⅲ-51]'1천년만의 오수개 부활'과 뉴스밸류 - Daum 카페
8시 30분, 몇 달만에 뒷산 저수지에 새우망을 놓으러 갔다. 6개를 놓았는데, 오후 5시쯤 올라와볼 생각이다. 얼마나 잡힐까, 궁금하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햇밤이 익어 떨어져 바닥에 즐비하다. 영글어 튀어나온 밤들만 주워도 금세 50여개. 밤알도 굵고 보기에도 좋은데, 하나를 까 먹어보니 너무 맛있다. 당장이라도 택배로 아들과 손자에게 보내주고 싶은데, 벌레 때문에 망설여진다. 10시 반, 임실군청 상수도과를 방문, 여느 달보다 요금이 10배도 더 나와 계량기 검침수치를 확인하러 갔지만, 어디에서 누수가 되고 있는지 한 달 지켜보자는 답변만 듣다. 내과에 들러 분변통을 받은 후(건강공단 안내), 군립도서관에서 <독일교육, 왜 강한가?>라는 책을 빌리다. 김누리 교수나 최동석 선생 그리고 유시민씨 책을 읽으면 독일교육은 근본적으로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함에 흥미를 느꼈었다. 도서관에서 잡지 과월호 3권은 그냥 가져가도 된다고 쌓아놓아 <문학동네>와 시전문계간지 <유심> 그리고 <동화읽는 어른>을 택해 가져오다.
임실의료원이 도서관 인근에 있는데, 얼마 전 원장이 고등학교 5년선배라 들은 바 있어 졸저도 한 권 드릴 겸 인사차 들렀다. 우리 고교는 유난히 1회 졸업생이면 깜박 ‘죽는’ 전통이 있다. 1회 선배들은 대부분 ‘전설적’인 인물들로, 절반은 완전 조폭들이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서울대, 고려대 등을 입학한 모범생도 있다. 임실의료원장 김대곤 선배는 전북대 의대 학장을 지낸 후 부임, 임기 3년을 마쳤는데 2년이 더 연장되었다 한다. 졸저를 드리니 답례로 당신이 펴낸 시집 두 권을 주었다. 알고보니 시인이자 화가였다. 95년에 지방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이미 9권의 시집을 냈으며, 사진집도 두 권, 그림 전시회도 5회나 연 문학인이자 예술가였다. 수수한 외모에 겸손하기까지 했다. 인사하러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1시 반, 친구가 전주에서 고향으로 내려오는데, 남원의 서예가부부와 점심을 같이 하자며 예약을 부탁했다. 불감청고소원. 닭볶음탕을 예약한 후, 집으로 달려와 햇밤을 15개씩 작은 봉지에 담고, 최근에 펴낸 소책자도 선물로 챙겼다. 12시 반, 두 친구부부와 함께 한 오찬은 1시간내내 즐거웠다. 명절을 앞두고 전주친구가 쏘겠다는 우정이 고마울 뿐이다. 친구집에서 커피를 하며 한담을 나눈 후, 귀가하여 의료원원장이 준 시집을 읽는데, 시집 제목 <포모와 조모사이>가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4부로 나뉜 60편의 시 가운데 이런 제목의 시가 없고, 각 챕터 제목의 시도 없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다. 시집 제목의 의미는 문학평론가가 쓴 해설을 읽으면 알게 됐다.
<포모FOMO>는 ‘Fear of Missing Out’의 이니셜을 딴 용어로, 사회적으로 소외되지 않기 위해 타인의 행동을 살피는 뜻이란다. 그러니까, 걱정, 후회 등 ‘소외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고, <조모JOMO>는 ‘Joy of Missing Out’을 줄인 말로 ‘나만의 즐거움’과 ‘나를 위한 시간’을 중요시하는 ‘자발적인 소외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포모와 조모 사이>, 시인이 천착하여 이런저런 시를 쓸만한 테제라 할 것이다. 시인은 포모와 조모사이에서 고립되고 소외된 같은 자아의 실상을 관조하듯 그려내기도 하고, 그에 상응한 ‘자발적 소외’를 즐기기도 하는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어찌 시인 개인에 국한된 문제일까. 우리 현대인에게 함게 적용되는 보편적 존재의식이라 하겠다. 아무튼, 흥미로운 시 몇 편을 발견한 것은 가외의 수확이었다.
시집을 읽다 반주에 취해 한숨 자고난 오후 5시, 뒷산 저수지를 가는데, 차로 가지않고 운동삼아 산을 탔다. 제법 통통한 가을새우라는데, 망에 얼마나 들어있을까? 끌어올리고 보니 제법 들었다. 내려오면 또 햇밤을 주웠다. 새우를 씻어 건조기에 말리고, 작두콩을 작두로 썰다. 내일은 동네 할마씨들 삶아드시라고 드려야겠다. 샤워를 하고 잡곡밥을 하고, 참게장에 밥을 비벼 김으로 싸 저녁밥을 맛있게 먹었다. 어김없이 아버지의 전화가 7시에 오다. 받을 때마다 민망하다. 어찌 백수가 내일인 아버지는 70도 안된 아들에게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안부(문안)인사를 한단 말인가. 귀가 잘 들리지 않기에 “밥 먹어야제” 당신 말만 하고 끊는다. 답답하고 송구할 일이다. 오후 9시 뉴스를 보는데, 또 미치고 환장할 뉴스를 말하고 있다. 검찰이 제안한 ‘수심위’에서도 ‘불기소’의견을 냈다고 한다. 에이고, 모르겠다. 책이나 읽자해도 집중이 안된다. 오 마이 갓! 진정 이 나라는 어디로 갈 것인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