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 성장로의 복생캠프 강의, 이장우 목사님 내외분과의 교제 시간 그리고 월요복생모임에 이르기까지 온종일 은혜의 시간을 보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의 만남과 일정 위에도 함께 하여 주옵소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한 것들이 자기의가 될까봐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오니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정직한 영으로 주님께 고백합니다.
저는 먼지요 티끌이니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생명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본문 주해)
1~3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계시는 모습과 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고, 4장 이후 20장 6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다 이루셨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재림은 20장 7절부터 22장 21절이다.
이렇게 보면 재림 직전의 대환란이라는 것은 없다.
대환란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대환란인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보다 더 큰 환난은 없다.
주님은 그 십자가로 사탄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의 소식은 지금 핍박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의 소식이 된다.
1절 : 요한은 그리스도의 현현(1장)과 일곱교회에 대한 계시(2~3장)에 이어 하늘의 열린 문을 본다.
하늘의 열린 문을 본 자로 구약의 야곱과 에스겔, 신약의 스데반과 요한을 꼽을 수 있다.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는 형을 피하여 도망가는 중에 들판에서 하늘에 열린 문을 보았다.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중에 하늘이 열렸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하늘이 열렸다.
그리고 지금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러므로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은 세상의 문들이라는 것이 다 막혔을 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하늘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또 요한은 처음 밧모섬에 있을 때 들었던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듣는다. 이는 계시자 그리스도의 음성이며,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올라오라고 하시며, ‘이 후에 될 일’을 보이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후에 될 일’이라고 하는 이유는, 요한이 십자가 이 후에 계시를 받았지만, 그는 십자가 이전으로 거슬러 갔기에 ‘이 후에 될 일’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로 다 이루어진 일이기에 4:1~20:6절도 지금 있는 일에 해당하는 것이다.
2~4절 : 요한이 하늘 보좌의 환상을 본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하나님)는 벽옥과 홍보석 같다. 또 옥보석 같은 무지개와 이십사 보좌가 둘러싸고 있다. 이십사 보좌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쓴 이십사 장로가 앉아 있다.
하나님은 아무도 볼 수 없는 분이시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무지개로 가려져 있으며, 요한이 본 것은 찬란하고 빛나는 보석으로 비치는 하나님의 이미지이다.
장로들이 앉은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와 구별된다.
이십사 장로는 구약의 열두 지파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열두 사도로 대표되는 새 언약 백성을 가리킨다.
신약의 성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으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고 하늘에 앉히운 자이다.(엡2:5~6) 그들이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는 것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함께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나의 묵상)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이 내게 그저 휘황하기만 한 말씀이 되지 않고 확실하고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리되길 기도하면서 나의 묵상을 적어본다.
보석의 빛과 무지개 빛으로 둘러싼 하나님 보좌 주변에 이십사 장로들이 앉아 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 이십사 장로는 구약의 열두 지파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열두 사도로 대표되는, 새 언약 백성을 가리킨다.
나는 예수님의 피로 씻어 정결케 된 자요, 그 마음에 영원하신 주님의 말씀이 새겨진 자, 즉 새 언약 백성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
장차 하늘에 앉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앉히셨다’는 것으로 ‘완료형’이다.
이 역사 속에서 나는 여전히 육체를 입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묵시적으로는 이미 하늘에 앉히운 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십 사 장로의 보좌가 바로 나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그 자리는 세상의 관점처럼 출세의 자리, 높은 자리’가 아니라, 새 언약 백성의 자리요, 흰 옷 입은 주님의 신부의 자리이다.
‘이십 사’라는 숫자는 모든 새 언약 백성을 총칭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과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고,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간 자가 되었다!
그러니 진짜 문부원은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왜 그 문부원이 진짜인가?
이 땅의 세월이 길어도 100년이라면, 하늘 보좌의 세월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이상 세상의 영광을 구할 것도 없고, 이곳에서 세상 것을 기준으로 도토리 키재기 한다고 뒤꿈치를 들 필요도, 자존심을 세우기 위하여 안간힘을 쓸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을 사는 동안 오직 주님께 연합되기만을 바라고, 이 마음을 기뻐하시는 성령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다.
성령께서 주시는 평강의 바람이 나를 감싸는 순간이다.
명확한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 한번 복음 위에 나를 굳게 세우시는 성령의 역사를 누린다.
(묵상 기도)
주님,
사도 요한의 환상과 명확한 주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계시이기에 하나입니다.
우둔한 자에게 계시의 영을 주시어
환상의 장면을 보든지 읽든지
생명의 말씀만이 더욱 뚜렷이 보여지게 하옵소서.
이 말씀을 제가 먹고 마시고, 다른 영혼에게도 전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