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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VIII (1491-1547)
핸리8세는 굳이 영국역사를 공부한 적이 없더라도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볼 했을법한 왕이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그가 좋이 왕이고 나쁜 왕이고를 떠나서 그에게 6명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런 문구를 외우기도 한다.
"Divorced, Beheaded, Died:
Divorced, Beheaded, Survived"
"이혼, 사형, 죽음:
이혼, 사형, 살음"
우리가 흔히 접하는 핸리8세의 초상화에서 그는 뚱뚱하고 그다지 잘 생기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말년시절의 모습이고, 실제로 젊은 시절의 그는 꽤나 잘생겼었고,
운동을 즐기는, 유럽에서 가장 "결혼할만한 왕자"로 꼽혔다고 한다.
뭐 더 젊은 모습으로 추정되는 초상화지만, 현대적인 시각에서 딱히 매력있다고 보기엔..
물론 윗 이미지보단 낫지만..
사실 그는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다.
왕세자였던 그의 형 Arthur가 죽으면서 왕위가 그에게로 돌아왔다.
핸리8세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이 포스트에서는 그의 결혼 관계만 살펴보겠다.
첫 번째 여인 : Catherine of Aragon
만약 캐서린이 아들을 낳았더라면 과연 이혼당하는 수모를 격었을지.
핸리8세는 아들에 대한 욕심이 유난히 컸던 왕이었다.
이유는, 영국을 이끌기 위한 굳건한 왕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상당히 아이러니컬 한 것이 그의 죽음 이후 영국을 이끌었던 두 강력한 통치자는
그의 두 딸 메리와 엘리자베스였다는 것이다.
캐서린은 원래 핸리8세와 결혼하기 전 아더와 결혼했었다.
그러나 아더는 16세의 캐서린은 홀로 남겨놓고 죽었던 것이다.
7년 후에 캐서린이 핸리와 재혼했을 때, 캐서린은 23살이었고 핸리는 18살이었다.
당시의 핸리는 연상의 여인인 캐서린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하는 아들은 태어나지 않고 살아남은 자식은 딸인 메리 한 명 뿐이었다.
이미 40대가 되어버린 캐서린이 다른 자식을 가질 확률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기구한 운명은 시작된다.
핸리가 캐서린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형의 아내였음에도 불구하고
처녀였기 때문에 교황의 동의를 얻어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연인이었던 앤 볼린이 아이를 가지자 다급해진 핸리는 그 당시 캐서린이
처녀가 아니었다는 것을 문제삼아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했었다.
물론 캐서린은 아니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여기서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결혼이 무효가 된다면, 그녀의 딸 메리의 정통성 또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뒤늦게 와서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핸리의 말은 굉장히 황당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에게 '정통성을 가진 아들'은 중요했었다.
캐서린의 조카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가 개입되면서 교황은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무엇을 결정하더라도 양 측 중 한 쪽은 못마땅해 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앤의 배는 불러오고 핸리는 점점 다급해졌다.
결국 그는 카톨릭과의 이별을 선언하고, 그때서야 캐서린과 이별할 수 있었다.
캐서린은 그 후 죽는 날까지 외롭고 조용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두 번째 여인 : Anne Boleyn
원래 캐서린 여왕의 시녀였던 그녀는 여왕이 된다.
그 난리를 치고 여왕이 된 그녀였지만 안타깝게도 태어난 아이는 여자였다.
핸리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준 이 아이는 후에 엘리자베스 1세가 된다.
얼마전 개봉했던 천일의 스캔들이라는 영화에서 그녀는 상당히 매력적면서도 당찬 여인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언니었던 메리는 실제로 핸리의 연인이었다고 한다.
핸리는 앤에게 눈길이 갔지만 그녀가 결혼을 요구하며계속 튕기는 바람에 상당히 애먹었다고도 전해진다.
결론은 영화에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는 것?
앤 볼린의 다른 초상화다.
오른쪽 그림 지금 시각으로도 상당히 매력있다.
아무튼 어떤 방법을 썼던 결국 여왕이 된 그녀가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듯.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후 앤은 두 번 남자아이를 가졌지만 두 아이 모두 유산되었다.
핸리는 결혼이 저주 받았다고 하기 시작했고, 앤의 건방진 태도 또한 그가 정을 떼는데 한 몫을 했다.
원하던 아들도 태어나지 않고 앤이 싫어진 핸리는 앤을 없애기 위한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앤은 그녀의 남동생과 다른 남자들과의 간통 혐의로 구속되었다.
또한 그녀는 '마녀' 혐의를 받았는데 이것은 그녀를 없애려던 핸리로 인해 상당히 부풀려진 면도 있다.
핸리는 그녀가 마법을 써서 그를 사로잡았다고 주장했으며,
그녀가 그를 독으로 해칠까봐 불안하다고 하였다.
평균보다 큰 그녀의 키와 여섯번째 손가락이 그녀가 마녀라는 주장을 강화시켰다.
또한 1536년에 그녀가 유산했을 때, 아이의 기형적인 모습 또한 이 주장을 강화시키는데 이용되었다.
[* 여섯번째 손가락에 대한 주장은 그녀를 마녀로 매장하기 위해 나온 유언비어라고도 한다.
만약 결함이 있었다면 그냥 손톱이 하나 더 있었을 정도로 작은 것이었을 확률이 높다.]
결국 그녀는 런던탑에서 참수되었다.
핸리는 일주일 뒤에 그의 애인이었던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였다.
세 번째 여인 : Jane Seymore
핸리의 세 번째 아내 제인은 그에게 유일하게 아들을 안겨준 여자다.
그녀는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는데 수도원 해산에 반대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아들을 낳자 핸리는 모든 것을 용서해줬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아들을 낳은 후 금방 죽는다.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상당히 호강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된다.
여담이지만 그녀의 아들 애드워드는 병약했고 왕이 된 후 얼마되지 않아 사망했다.
결국 영국 왕위는 핸리가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 아닌 두 딸에게 돌아간다.
네 번째 여인 : Anne of Cleves
핸리의 네 번째 아내, 두 번째 앤은, 독일의 공주였다.
이 결혼은 정치적 성향이 강했다.
두 성공회 국가가 동맹으로 엮이기 위한 결혼이었다.
핸리는 앤의 초상화만 보고 결혼을 결정했으나,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싫어하게 되었다.
그는 앤을 흔히 'Flanders Mare'라고 비꼬았는데,
그녀가 '말 처럼' 생겨서 생긴 별명이다.
양 쪽의 동의 하에 이혼이 순조롭게(??) 실행되었다.
결혼 후 6달만의 이혼이었고 앤은 많은 돈과 집까지 얻을 수 있었다.
결혼 후에도 그녀는 계속 영국에 거주했으며, 왕실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한편 이 결혼을 중간에서 주선한 크롬웰은 핸리의 용서를 받지 못했고
결국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다섯 번째 여인 : Catherine Howard
말에 떨어지는 사고로 인해 한 쪽 다리가 불구가 되어 핸리는 더 이상 예전처럼 스포츠를 즐길 수 없었다.
운동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삶은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에 그는 계속 살이 쪘다.
점점 우리가 기억하는 핸리로 변해간 것이다. 죽을 때 쯤 그의 허리는 4.5피트 정도 됐다고 한다.
아무튼, 핸리는 두 번째 후계자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 (끝 없는 욕심) 다음 아내를 찾게 된다.
그보다는 훨씬 어린, 이쁘고 몸집이 작은 캐서린 하워드가 눈에 들어왔다.
핸리는 그녀에게 푹 빠졌으며, 그녀에 대한 무성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흥미로운 것은, 캐서린이 앤 볼린의 사촌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앤과 똑같은 운명을 맞게 된다.
핸리는 캐서린에게 완전 빠졌고, 그녀를 'Rose without a Thor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시 없는 장미'라는 뜻인데, 과연..
실제로 캐서린이 그녀의 뚱뚱하고 늙은 남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결혼 후에도 그녀가 전 애인인 Thomas Culpepper와의 관계를 유지한데 있다.
결혼한지 17개월만에 그녀는 구속된다.
그녀 또한 그녀의 사촌 앤 볼린 처럼 처형되고 핸리는 대놓고 울었다고 전해진다.
-_-
그녀를 처형하고 나서도 왕은 한동안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여섯 번째 여인 : Catherine Parr
왕의 마지막 아내이자, 세 번째 캐서린은 남편을 두 번이나 잃은 미망인이었다.
그녀가 왕의 눈에 들었을 때, 그녀는 제인 시모어(왕의 세 번째 아내)의 오빠인 Thomas Seymore와 재혼하려고 하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31세였고, 상당히 똑똑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어도 유창했고, 이탈리아어도 배웠으며, 라틴어를 쓰고 읽을 줄 알았고, 그리스어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아무튼 왕은 그녀와 재혼했다.
정확히 말하면 뺐어왔다고 해야하나?? -_-
캐서린은 똑똑한만큼 종교적 토론을 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그녀도 ?겨날 뻔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핸리와 토론을 하다가 여왕이 핸리를 너무나도 화나게 했기 때문에,
왕은 그녀를 이단이라고 하며 구속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굴려서 그녀의 시녀들에게 종교적으로 금지된 책을 모두 처분하라고 일렀고,
왕에게 가서, 그의 아픈다리로부터 조금이라도 신경을 돌릴 수 있도록 일부로 그랬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핸리의 세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가족"생활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준다.
예전의 사고로 인해 굉장히 약해진 핸리 또한 잘 살펴줬다고 한다.
또한 방문하는 외교인사와 학자들과들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핸리가 그녀를 어느 정도로 믿었냐면, 그가 1544년에 프랑스 원정을 갔을 때 캐서린에게 섭정을 맡겼다고 한다.
이것은 예전에 그의 첫 번째 아내인 Catherine of Aragon에게만 주어졌던 권리였다.
사실 이 여자에 대해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왕비인 캐서린과 앤에만 관심)
알고 보면 대단한 여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왕이 토머스 시모어로부터 그녀를 왜 뺐어왔는지도 조금은 알 법하다.
왕은 55세에 마지막 부인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럼 캐서린 파는 어떻게 됐을까??
그녀는 원래 결혼하기로 했었던 토머스 시모어와 재혼했다고 한다.
결국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
핸리는 죽은 후 그의 세 번째 아내인 제인 시모어 곁어 묻혔다.
이것을 증거삼아 역시 아들을 낳아준 제인을 가장 사랑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라는 상당히 낭만적인 상상을 해보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Horrible Histories"라는 아이들을 위한 역사책에는 상당히 흥미롭게 이것을 해석했다.
우선, 첫 번째 왕비 캐서린은 죽은지 굉장히 오래됐고 '이혼'했기 때문에 곁에 묻히지 않았고,
앤 볼린은 목이 잘렸고,
클레브의 앤 또한 별로 살지도 않다가 이혼했고 (그 당시 죽긴 했었나??),
캐서린 하워드 역시 앤처럼 목이 잘린 상태였고,
캐서린 파는 왕이 죽었을 당시 살아있었을테니
결국 묻힐 곳은 제인 시모어 곁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뭐, 역사란 해석하기 나름이니깐 각자 마음에 드는 해석을 하시길.
핸리8세라고 하면 처음 떠오르는 단어가 '여자'이긴 하지만,
사실 그는 그렇게 무능력한 왕도 아니었다.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기 좋아하며
지적이기도 하고, 난폭하기도 하고, 화려했으며, 사치도 심했다.
운동을 좋아했고, 음악도 좋아했고, 시인이기도 했다.
가차없고, 거만하면서도 상당히 열정적인 사람이었다고도 전해진다.
상당히 복합적이며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복잡한 결혼 관계로 인해 그 외에 다른 면들은 잘 보여지지 않는듯 하다.
그의 삶은 비교적 최근의 나온 영화 천일의 스캔들과 드라마 튜더스로 인해 재조명을 받고 있다.
시간나면 한 번쯤 보는것도 즐거울 듯??
보너스~
튜더스의 핸리, 아라곤의 캐서린, 앤 볼린의 모습.
상당히 매력적인 핸리다.
첫댓글 비오는날...흥미진진하게 읽어봤습니다.
어느나라역사에서나 되돌아보면 왕와 여인들 사이에서는
많은 스캔들이 떠날적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여기도 비가 종일왔습니다
잠시나마 흥미를 가지셨다니
게시물 올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스캔들이 어찌 왕들 뿐이겠습니까만 ㅎㅎ^^*
ㅋㅋ 넘 길다......뿌리와 그의 연들...잘있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이네요
감사합니다
young님 첨 뵙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