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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 항일(抗日)의병장 신돌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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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11월 어느 날.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고 낙목에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울분을 삭이지 못한 신돌석 장군.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울진 평해 월송정에 올라 자작시를 낭송하고 의병을 일으킨다.”
2008년. 영덕 출신 항일(抗日) 의병장 신돌석(申乭石.1878.11.3~1908.음11.18) 장군의 순국100주년을 맞이한 해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돌석 장군은 지난1908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의병(義兵) 항쟁을 펼치다 영덕 눌곡(訥谷)에서 암살된 평민최초의 의병장이다. 그의 죽음에 대해 역사에서 전하는 사실은 참으로 비통하다. 그가 영덕지방에서 적이 아닌 우리 동족 주민에 의해 암살됐다고 전하고 있어, 현시대 후손들이 느끼고 받아들이는 역사적 비애(悲哀)는 너무도 크다.
그를 살해한 자들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가장널리 알려진 사실은 살해범이 김씨성을 가진 삼형제가 모의해 암살(暗殺)됐다는 설이다.
신돌석 장군은 1908년11월18일 영덕 지품 눌곡리에 은거했는데, 거액의 현상금에 눈이 먼 김씨성을 가진 자들이 준 독주(毒酒)를 마시고 일반인들이 나무를 찍거나 패는데 사용하는 연장인 '도끼'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 장군의 나이는 불과 31세였다. 일제의 계략과 재물에 눈이 멀어 동족의 손에 경북동해안지방의 민족적 평민 영웅이 암살된 이 얼마나 비통한 사건인가. 아직도 이 땅에 남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민족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신돌석 장군은 경북 영덕의 평범한 농가에서 출생, 본명은 신태호(申泰浩), 신태을(申泰乙)이라고 한다. 그는 1906년 당시 농민군등 300명을 모아 영릉(寧陵)의병을 결성해 동해안과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신 장군은 최초의 평민의병장으로 울진군에서 일본선박을 여러척 격침시키고 경북 내륙, 강원도 동해안, 원주등 강원 내륙까지 세력을 확대하는 등 태백산호랑이로 불리며, 신출귀몰하고 축지법등의 설화를 남긴 영덕이 낳은 신화적=역사적 인물이다. 구한말 의병운동은 주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신돌석 장군은 평민 최초의 의병장인 것이다.
그는 19세의 나이에 영덕에서 처음 의병을 일으켜 경북동해안 지방을 차례로 점령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리고, 이어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체결 되자 동생 신우경과 함께 재차 의병을 일으킨다.
또한 이인영의 연합의병13도 창의군 결성때는 영남지방을 담당하는 교남창의대장에 선임되는등 양반출신 의병대장들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한다. 이후 1908년 유시연의 부대와 연계하면서 주로 유격전 위주로 의병 항쟁을 펼치다가 영덕의 눌곡(訥谷)에서 암살된다.
신 장군은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고, 1995년 생가인 초가집이 복원됐다. 영덕군에서는 신장군의 항일정신을 후대에 남기고 본받고자 축산면 도곡리에 생가를 복원시키고(1996년) 성역화공원(1999년)을 조성했다. 생가는 장군의 부친 신석주가 1850년경에 지은 집이다. 영덕군에서는 신돌석 의병장의 기념관, 유적지. 생가등이 조성돼 장군의 항일 정신을 길이 후대에 남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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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기념물 제87호 지정 신돌석장군 생가. 영덕군문화관광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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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기념물 제87호 지정 신돌석장군 생가.
시설개요: 면적:18,531m2(유적지 17,084m2, 생가 1,447m2) 사업비 : 4,398백만원 건물내역: 전체 13동(387m2)- 육관 1동, 관리사 1동, 화장실 2동, 사당 1동, 내.외삼문 2동 동.서재 2동, 안내소 1동, 초가 2동, 충의공원 1동 준공일자 : 1999년 11월 18일 찾아오는길 : 7번국도 이용 포항에서 1시간 10분 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