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국가를 대상으로 지원금 감축을 계획하고 있다. 난민 수용 반기, 민주주의 훼손 등으로 갈등을 빚는 폴란드, 헝가리 등 ‘EU 내 문제국가’를 겨냥한 것이어서 서유럽과 동유럽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마르쿠스 베커 Markus Becker
페터 뮐러 Peter Müller
얀 풀 Jan Puhl
크리스토프 슐트 Christoph Schult <슈피겔> 기자
▲ 2018년 3월8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왼쪽)가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의 환영을 받고 있다. REUTERS
독일 국적의 귄터 외팅거 유럽연합(EU) 예산담당 집행위원이 폴란드 하원의회에 들어온다. 카메라 수십 대가 그를 쫓는다. “보조금 지급 법안을 개정하실 건가요?” 한 기자가 독일어로 그에게 소리쳐 묻는다. 껄끄러운 질문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답을 내놓든 간에, 이 질문은 폴란드에서 뜨거운 뉴스가 될 것이다. 핵심은 향후 수십억유로의 EU 보조금이 폴란드가 ‘법치국가’ 이념을 준수할 때만 지급되느냐에 있다.
외팅거는 폴란드에 있는 내내 이 질문을 받았다. 그의 직책이 아주 특별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폴란드에서 국빈 대접을 받는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와 야체크 차푸토비치 외무장관이 벨기에 브뤼셀에서 온 외팅거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낸다. EU의 차기 예산안이 어떻게 편성되고, 공동 예산 가운데 각국이 받을 보조금이 얼마인가.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련의 분위기로 비춰보면 보조금 규모는 현저히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원인은 폴란드 정부가 제공했다. 보수 성향의 여당 법과정의당(PiS)이 대법원 판사와 하급법원 법원장 등의 임명권을 정부에 주는 사법 개혁을 추진 중인데, 사법권 침해 논란이 불거졌다. 폴란드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훼손한다고 판단한 EU 집행위원회는 리스본 조약 제7조를 발동해, 폴란드의 법치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최악의 경우 폴란드는 EU에서 의결권을 제한받고 심지어 표결권까지 박탈당할 수 있다.
▲ 영국 런던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브렉시트 반대 시위를 하는 여성을 운전자가 바라보고 있다. 영국은 EU와 탈퇴 협상을 하고 있다. REUTERS
EU 가치 훼손한 국가 지원 축소 움직임
지금까지는 법과정의당 대표 야로스와프 카친스키가 자신의 정치력을 활용해 EU 정치가들을 간단히 무마해왔다. 이번에 결국 EU가 효력이 확실한 조처를 한 것이다. 외팅거가 제시한 2021~2027년 7년간 집행할 예산안이다(EU는 예산 규모로 1조1350억유로를 제안했다 -편집자).
EU에서 가장 격렬한 협상이 벌어지는 분야는 ‘돈’, 즉 예산 부분이다. 1조유로(약 1300조원)의 자금 분배 문제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한 예로, 최근 보조금 지급국과 수령국 사이의 밀당 협상에만 무려 29개월이 걸렸다. EU는 예산안에서 유럽 국경 지역 보호와 이민자 통합 등에 더 많은 돈을 내기로 함에 따라, 예산을 둘러싼 갈등도 첨예화하고 있다. 그런데다 EU 재정 기여도 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영국의 ‘브렉시트’(Brexit)로 예산안 규모도 줄어든 상태다.
외팅거가 폴란드 방문 때 “EU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가입국을 위해 예산을 써야 하나?”라고 했던 문제 제기 역시 예산 분배 공방 흐름에 가세한 형국이다. 이것에 EU 집행위원회가 구체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은 아직 없다. 하지만 외팅거의 말로 유추해볼 때, 답은 분명하다(민주주의, 인권, 근본적 자유, 법질서 등 EU의 근본 가치를 준수하지 않는 회원국의 예산을 삭감하는 것이다 -편집자). 이 안은 폭발 위험이 높은 혼합물과 같지만 이미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EU 정치가들은 매년 10억유로(약 1조3천억원)씩 동유럽에 보조금을 지원하면서도 이들 나라로부터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질렸다.
비셰그라드그룹(헝가리·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4개국으로 구성된 중부유럽지역 협력체) 국가들이 2007년부터 지금까지 EU에서 받은 보조금은 1500억유로(약 64조원) 정도에 이른다. 그럼에도 난민 수용, EU 재판소 판결 승복 등의 문제들은 모른 척하기 일쑤다. 바로 이 점이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 같은 극우 정당의 선거 슬로건으로 쓰인다는 지적이 EU 안에서 있었다.
▲ 영국 런던의 한 제과점에서 브렉시트에 항의하는 뜻으로 파이에 EU 깃발을 꽂았다. REUTERS
“EU는 단지 내수시장이 아니라 가치 공동체다. EU 예산 편성에서도 이 점이 반영돼야 한다.” 미하엘 로트 독일 외교부 EU 담당 차관이 강조했다. 모든 EU 가입국은 법치주의 국가의 원칙을 존중할 의무가 있는데, 이를 어기는 나라는 EU 보조금 지급을 중단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동유럽과 서유럽의 균열이 더욱 심화할 위험에 처했다. 영국 샐리스버리에서 일어난 전직 이중간첩 ‘세르게이 스크리팔’ 뇌신경 독극물 사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EU를 향한 무역전쟁 선포 등 EU 회원국들이 대외적으로 일치된 모습을 증명하는 게 어느 때보다 절박한 상황에서 말이다. “난민할당제, 농업보조금 축소와 공동방위군 창설로 방위·안보 예산 증액 등을 둘러싼 투쟁이 EU를 갈라놓을 수 있다.” 외팅거는 폴란드 의회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아일랜드 출신 EU 집행위원 필 호건 농업담당 집행위원도 “동구와 서구의 이해관계 경쟁이 EU의 논쟁에 스며들고 있다”고 탄식했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도 2018년 3월 취임 전 방문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이런 상황을 직접 겪었다. 야체크 차푸토비치 폴란드 외무장관과의 회담 중에 법치국가 요건과 보조금 지원에 대한 질문을 받은 것이다. 마스 외무장관은 “삭감된 보조금이 투입되는 상황을 맞지 않기 바란다”고 했지만, 막후 대화에서는 “독일 정부는 돈과 가치를 결부하는 EU 위원회의 계획을 지지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독일이 EU 예산을 더 많이 분담하는 상황에서, 그 돈의 쓰임새에 대한 결정권을 독일 정부가 갖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다.
외팅거는 폴란드 기업가들 앞에서 “사법부 독립이 훼손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을 때 지원금을 투입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이 말이 폴란드 정부에 강력한 위협이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안다. 동유럽 국가에선 정부 예산에 EU 보조금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EU의 보조금 규모는 헝가리의 경우 2014~2020년 국민총생산의 2.6%를 차지한다. 폴란드는 2.4%, 체코는 1.8%, 슬로바키아는 2.3%다.
EU 보조금은 동구와 서구의 생활 격차를 줄이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오용 사례가 적지 않다. 인게보르그 그러슬레르 EU 예산심의위원회 위원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EU가 쓰임새를 다 감독할 수 없다. 지원금이 목적에 맞게 지급되는지 수혜국 스스로 광범위하게 감시해야 한다. 하지만 자국의 부정 사례를 밝혀내야 하는 상황이라 남다른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 실질금액(세금을 뺀 액수)으로 본 EU 지원금 최대 지급국과 수령국. *2016년 기준
폴란드·헝가리, EU 보조금 오용 사례도
그러슬레르 위원장이 2017년 9월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가 그런 경우다. 당시 일정에 헝가리 정부 관계자 면담 외에 ‘협궤 열차 여행’이 포함됐다. 승객이 거의 없는 이 열차의 운행 노선이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의 고향 마을을 따라 짜여 있었다. 예산심의위원들이 의심할 만한 정황이다. 그러슬레르 위원장을 비롯해 심의위원들은 EU 회의 보고서에 “조사 초기부터 헝가리 정부의 협조를 받지 못해 임무 수행이 어려웠다. 또 헝가리 정부의 공공지출 항목에 투명성이 결여돼 부패 위험이 크다”고 썼다.
현재 오르반 총리는 수십억유로의 부패 스캔들 의혹을 받아 더 큰 압력 앞에 놓여 있다. 헝가리 일간지 <머저르 넴제트>는 거대한 돈세탁 시스템을 폭로한 헝가리 국민 한 명이 현재 미국 연방경찰국(FBI) 보호 아래 있다고 보도했다. EU 보조금 중 최대 40억유로가 헝가리 정부 밖에서 사용된 것이 확실하다고 전해진다. 기사는 “이 돈의 행방을 추적한 결과, 오르반이 속한 청년민주동맹(Fidesz) 최고위급까지 연결된다”고 밝혔다.
슬로바키아 상황은 헝가리보다 더 극적이다. 2018년 2월26일 슬로바키아의 언론사 기자인 얀 쿠치아크와 그의 약혼녀가 자택에서 피살됐다. 쿠치아크는 EU 보조금이 로베르트 피초 총리가 속한 집권당과 기업인, 마피아 자금으로 사라진 내막을 취재하고 있었다. 3월 EU 예산심의위원들이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 슬로바키아 정부가 이 사건을 해명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착각이었다. 그러슬레르 위원장은 “슬로바키아 정부 관계자들은 이와 관련한 대화에 우리가 참여하는 걸 방해하려 했다”고 보고서에 썼다. 또 “향후 보조금 지원 과정에선 좀더 엄정한 검증 도구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법치주의 가치를 보조금 수혜국 선발과 결부하는 안은 적절한 조치라고 사료된다”고 썼다.
외팅거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슬레르 위원장이 지적한) 이 작업을 추진해왔다. 그는 최근 비공식 회의에서 EU 집행위원들에게 이에 대한 세부사항을 소개했다. 이견이 없는 건 아니다. 국민이 그 고통을 떠맡게 된다면 역효과가 일어날 우려가 있어서다. 그래서 외팅거는 폴란드 정부가 법치주의 국가 원칙을 어긴 것에 대한 징계 때문에 고속도로 건설 무산 등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할 생각이다. 그가 염두에 둔 대안은 지원금 부여 절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보조금을 받는 EU 회원국이 해당 프로젝트에 자국 돈을 투입하면, 나중에 EU가 그 금액을 해당국 국고로 환급해주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수혜국이 법치국가 요건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다면 EU는 보조금 환급을 생략할 수 있다.
현재 폴란드와의 협상에서 보듯, 이 위협 방식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다. 초기 몇 달간은 EU 집행위원회조차 단단한 바위와 마주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최근 폴란드 정부는 EU가 차별적인 조항으로 지적했던 사법 개혁안의 수정 가능성을 시사했다. ‘남녀 법관의 정년 연령을 동일하게 하겠다’ 등이다. EU는 수정안이 EU 쪽 요구를 충족하기에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 제안을 개선의 첫 신호탄으로 평가한다. 다른 수정 제안이 계속 나오리라고 전망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폴란드 정부에 한해 보조금 환급 시기가 다른 나라보다 길기 때문이다. 외팅거는 더 나아가 “폴란드가 EU 요구대로 방향을 바꾼다면 ‘법치주의 국가’ 요건 조항을 보조금 예산 편성 과정 조건으로 달지 않거나, 있더라도 향후 없앨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모든 관계자에게 유리해 보이는 거래다. EU가 폴란드 제재 조치를 하려 할 때 만장일치를 위한 표가 부족해 (헝가리는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이미 공표한 바 있다) 부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폴란드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해 ‘문제국가’ 딱지를 뗄 수도 있다. 독일 외무장관 역시 EU와 폴란드 사이에서 협상을 중재하는 임무에서 해방된다.
독일 정부는 폴란드와 겨뤄볼 의향이 있어 보인다. “폴란드가 지금까지는 사법 개혁에 미봉책 수준에 불과한 수정안을 제시하지만, 차기 EU 예산 편성 협상 과정에서 달라진 EU 방침의 첫 결과를 보게 될 것”을 공언한다. 미하엘 로트 독일 외교부 EU 담당 차관도 “우리 협상은 효과를 내고 있다”고 장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