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평소에 그림을 거의 감상하지 않는 사람들도, 대부분 자신이 그림을 볼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시각적인 훈련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본다는 일이 그토록 쉽게 생각될 만큼, 우리 삶에서 너무도 기본적인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나 세익스피어를 감상하는 데, 모종의 훈련이 없이는 그 맛을 음미하지도 감동을 느낄 수도 없다는 데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클래식이나 재즈를 듣거나 고전을 읽으려면, 처음에는 재미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꾸준히 감상해서 감각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녹차처럼 은은한 맛밖에 없거나, 그조차도 없이 무미건조한 공부와도 같은 훈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꾸준히 반복해서 감상하다보면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된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취미이고 문화적인 향유일진대, 어째서 그러한 고생을 해야 하는가? 바로 그 세계- 아름답고 위대한 그 세계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이른바 고급 예술은 절대로 단번에 그 문을 열어주지 않으며, 까다롭게도 자기훈련을 통해 가다듬은 영혼만을 들여보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싫다면 고상한 예술을 만나기를 포기하고 대중예술에만 귀를 기울이면 된다. 사실 상업예술이라 해서 나쁜 것은 아니며, 훌륭한 상업예술은 고급예술의 탈을 쓴 가짜보다는 훨씬 고상하다. 순수예술이니 상업예술이니 하는 귀족주의적인 구분은 잘못된 것이며, 예술이 처음부터 그러한 구분을 갖고 탄생된다는 생각에도 문제가 있다. 예술이란 어디까지나 표현이며, 그렇다면 모든 종류의 표현에 대해 열린 눈으로, 편견없이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하여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대중예술은 쉽고 즐거우며, 대체로 처음 대면한 즉시 감동을 주고, 재미도 있으며 마음을 사로잡는다. 모든 종류의 헐리우드 영화, 대중 가요, 만화나 애니메이션, 팝송, 등등은 별다른 훈련이나 공부 없이 쉽사리 즐길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 그 가운데는 정말이지 감동적이고 심금을 울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고, 희망으로 가득 채우고, 편안한 휴식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대중예술은 아무리 좋게 본다 하더라도 예술작품으로서는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잘 알려진 바대로 그것은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하며, 배후에 깔린 상업주의는 진실을 왜곡시키고, 지나치게 말초적이며 그 미감은 질이 낮은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점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대중예술이란 것이 어디까지나 1회용 예술이라는 점에 있다. 비디오 가게에 먼지를 뒤집어쓴채 가득히 쌓여있는 영화들은 1,2년도 못되 빠른 속도로 퇴물이 되어가며, 음반시장에 쏟아져나오는 가요와 팝송들도 마찬가지 신세를 겪게 된다. TV드라마는 한두번 방영으로 즉시 잊혀지기 마련이고 베스트셀러 소설들은 몇 년도 못되 낡아빠진 폐지 신세가 된다. 사실 10년전에 유행했던 가요모음집이나 영화목록을 보면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임을 알수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대중 예술은 여러 번이 아니라 단 한번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 만들어지며, 주로 상업적인 동기에서- 즉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달콤하고 재미있고 환상적이며 위로가 되며 유행에 맞아야 한다. 즉 인기를 끌어야 한다. 그것이 대중예술의 지상명제인 것이다.
항구적인 매력이나 진실성이나 완성도, 내지는 형식의 참신함 등등은 대중예술에서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즉 한번 팔아서 관객에게 한번 사용되는, 일종의 1회용 청량음료 같은 것이 대중예술이다. 이 장르가 늘 같은 주제와 내용을 반복하고, 똑 같은 것들을 옷만 갈아입혀서 자꾸자꾸 내놓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금씩 가사와 멜로디가 바뀌기만 한 노래, 사람이름과 역할만 바꾼 똑 같은 드라마나 영화가 얼마든지 나와도 좋은 것은, 그때 당시에만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으면 이 장르는 목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독창성이나 개성도 대중예술에서는 별로 중요한 사안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진실된 세계관이나 철학 보다는 상업적 의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작품으로서는 치명적인 한계이다. 이것은 아주 잘 알려진 훌륭한 대중예술들, <타이타닉>이나 <인어공주>같은 잘 만든 작품들조차 피할 수 없는 약점인 것이다.
그런데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는 사실상 그렇게 또렷한 것은 결코 아니다. 양쪽 편으로 진짜와 가짜는 섞여 있기 마련이다. 먼저 비틀즈의 예를 들면, 그는 분명히 대중예술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음악을 듣고 감동을 받아본 사람들은, 비틀즈가 예술이라거나 아니라거나 하는 따위의 논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독자적인 가치관과 개성을 지니고, 스스로 창조한 형식에 따라 진솔한 음악을 펼친다면 그것은 이미 대중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더구나 대중예술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어쩌면 대중예술 가운데서도 진실되고 고상한 하나의 새로운 장르명을 부여해야 할지도 모른다. 훌륭하고 가치있는 기능을 하고 있다면, 그것에 어떤 이름이 붙여져 있느냐는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 한가지 예를 들고 싶은 것은 워홀 같은 경우이다. 그는 순수미술에 속해 있기를 고집했다. 그는 순수미술의 전시장에 순수미술이라는 레벨을 붙여 대중미술을 끌어들이는 행동을 했다. 즉 실크로 찍은 마릴린몬로라든가 코카콜라 마크 등등을 전시함으로써, 순수미술계의 아방가르드적인 새로움에의 욕구를 자리바꿈질로 충족시켰다. 현재도 실크로 대충 밀어놓은 그의 마릴린몬로가 비싼 가격으로 고급미술의 전시장에서 소통되고 있다. 이른바 팝아트인데, 이것은 미술의 대중화인가 혹은 대중미술의 순수미술화인가, 혹은 어느쪽도 아닌 일종의 지적 사기인가? 일반 대중은 그 논의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비틀즈와는 달리 이 경우에는 그 명칭 문제가 아주 중요하다. 그의 실크판화에 ‘감동받는’ 매니아층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작품을 감상하는 문제는 소수 미술전공자들의 지적 행위에 국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그림이야기/우창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