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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7일 상트 페트르 부르크시내 투어를 시작 하다
표트르가 만든 표트르의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 사실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스러운’ 도시는 아니다. 이는 모스크바도 마찬가지다. 두 도시 모두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 개념의 도시다. 러시아인들이 생각하는 전통적 러시아 도시는 ‘잘라또예 깔쪼(황금의 고리라는 의미로써 1천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여섯 도시 – 자고르스크, 블라디미르, 페레슬라블-잘레스키, 로스토프-벨리키, 수즈달, 야로슬라블)’라 불리우는 도시들에서 찾을 수 있다. 표트르 대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 페테르부르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더군다나 현재 페테르부르크가 위치한 네바강변은 러시아의 영토도 아니었다. 표트르 대제는 유럽열강과의 본격적인 경쟁을 하기 유럽으로 향하는 새로운 수도가 필요했고 그가 주목한 곳은 모스크바에서 640km 떨어진 네바강 인근이었다. 당시 네바강변은 유럽강국 스웨덴이 버티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는 몇 번의 패배를 감수한 끝에 스웨덴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1700년에 드디어 네바강 연안의 영토를 획득한뒤 1703년에 페테르부르그라는 계획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해 1712년에 드디어 모스크바를 뒤로한채 이곳으로 천도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이 도시는 전통적 러시아 건축양식을 벗어난, 도시이다. 당대 최고의 유럽식 건축양식으로 건설되어 전혀 러시아스럽지 않은 도시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외양은 표트르 대제가 원하는 새로운 수도에 적합했다. 표트르 대제가 이 도시의 원형으로 생각한 도시는 암스테르담과 베네치아였다. 페테르부르그는 우리나라의 논밭처럼 좌우 대칭이 비교적 명확한 도시다. 모스크바처럼 필요에 의해 자연적으로 넓어진 방추형 도시와는 전혀 상반된 느낌을 주는 계획도시인 것이다. 하지만 이 도시는 러시아 일반대중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도시이기도 했다. 늪지대 위에 세워질 이 도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동원된 수 십만의 러시아 민중은 자신의 옷가지에 진흙을 담아 옮기는 열악한 작업환경에 놓여있었으며 부족한 보급과 겨울철 추위로 인해 상당수의 민중이 사망하게 된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있지 않지만 건설초기부터 1708년까지 2만 5천에 이르는 동원인력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표트르 대제는 영리하고 근면성실한 인물이었으며 여러모로 솔선수범하는 계몽군주이기도 했지만, 전대 러시아 지도자들처럼 대중의 희생을 강요한 측면이 있었다. 다만 이와같은 경향은 하급민들 뿐만아니라 귀족들에게도 적용된 것이었다. 나라는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나 러시아인들은 전대 황제의 공포정치와는 또다른 압박을 받고 있었다. 각설하고. 이렇게 러시아 민중의 희생 하에 탄생하게 된 이 새로운 수도는 표트르 대제의 이름을 따서 ‘성스런 표트르의 도시’로 명명되게 된다. 더불어 이후 러시아 영토 내 세워지는 규격화된 유럽형 중소도시들을 원형이 되며,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200년간 로마노프 왕조의 수도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올해로 도시건립 31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뾰뜨르 대제 1세의 궁전 (집) 바로 앞에 있는 네바 강변에 있는 선상카페.식당
빼뜨로 빠블롭스끼 싸보르(피터폴사원) 성당 종루 높이 122.5M
네바강 멀리 보이는 곳 이삭 성당
피터 폴사원
빼뜨르빠블롭스까야(피터 폴)성체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레르부르크르를 탄생시키고 러시아가 대 유럽속의 세계 강국으로 변모하는데 큰 역활을 한 뾰뜨르 1세 황제의 동상 (1991년 M,쉐마낀이 동상제작함)
손가락이특이하게 길다 만지면 장수 하고 부자가 된다고 전해 진다
빼드로빠블롭스까야끄레빠스찌(피터폴 성채)
에르미 타쥐 박물관
성 이삭성당
성 이삭 성당 [St. Lsaac's Cathedral]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으로 지어질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고 1만4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 원래 명칭은 '이사악키이예프스키 사보르'이다. 웅장한 금빛의 둥근 지붕이 특징인 이사크 성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정시대의 교회의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듯 높이도 고층빌딩만해서 먼 곳에서도 잘 보인다. 내부에는 중앙에 있는 카를 브리쵸프의 작품을 비롯하여 성서의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예술가들의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다. 그밖에도 수백점의 동상과 부조가 있다.
성 이삭 성당 앞 광장 에서는 결혼 기념 촬영을 이곳에서 하는 것이 전통 행사이다
청동기마상 예카쩨리나 여제가 자신의 표트르 대제의 적통임을 알리기 위함이다
푸슈킨의 '청동기마'에도 나오는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이다. 뒷다리로는 악의 상징인 큰 뱀을 밟고 있고 앞다리는 높이 들고 있는 황제는 대북방전 쟁의 승리를 나타내고 있다. 이 상은 에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대제 지배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1,600톤이나 되는 유백색의 화강암에는 '표트르 대제에게 바친다. 에카테리나 2세 1782년'이라고 세겨져 있다. 대 제에게 존의를 표하는 동시에 지도자 지위를 확인하려는 의도에서 만든 것이다
네바 강을 유람선으로 관광 하고있다
강 건너편에 삼성의 로고가 반갑게 눈에 들어 온다.
그리스도 부활 성당 (피의 성당) 이라고도 한다
그리스도 부활 성당은 피의 사원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까닭은 이 사원이 있는 곳이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흘리면서 죽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 이곳에서 나로드니키의 한 파인 인민의 의지파에 속하는 그리네비츠키에 의해 살해당앴는데, 훗날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3세가 알렉산드르 2세를 기리기 위하여 이 성당을 지었으며, 모스크바에 있는 성 바실리 대성당을 모델로 하여 세웠다고 한다.
피의 사원
넵스키 거리에는 판탄까 운하 ,그리도예 도프 운하, 모이까 운하, 3개의 운하가 있는데 그중 피의 사원 옆에는 그리도예도프 운하가 인접 해 있다. 운하를 처음 만든 이유는 습지여서 물을 빼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지금은 여름은 배를 타고 겨울은 스키를 타고 매우 쓰임이 다양 하다.
카잔 대성당
넵스키 대로변에 있는 카잔 대성당은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을 본뜬 네오클래식 양식의 건물이다. 스트로하노프 백작의 농노 출신 건축가 바로니킨에 의해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넵스키 대로쪽으로 넓혀진 반원형의 회랑에는 94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늘어져 있으며, 건물 내부에는 19세기 초의 거장들이 그린 이콘이 있고, 특히 "카잔의 마리아 상"이 유명하다. 이 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
카잔 대 성당 1932년 이후 종교사와 무신론 박물관이었으나 1991년 종교사박물관이 되었 다. 로마의 성 베드로 사원을 모방하여 건축되었다는 러시아 고전주의 양식 의 사원이다. 1811년 건조된 건물은 코린트식의 144개의 기둥이 있는 반원 형의 회랑을 갖고 있다.
나폴레옹군과 싸워 이긴 꾸뚜조프 장군 동상
. 넵스키대로 사거리
중세 의상의모델에게 촬영비가 소요됨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기념 촬영
쌍트베쩨르부르크와 근교한국어판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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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안합니다 여러번 반복되게 올려서 잘 못 확인 해서 그냥 두어서 보시는데 불편을 드렸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