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
‘평양의 영어 선생님’ 수키 김 “답답하고 무서웠다”
대체 뭐가 들어 있나, 궁금했다. 쿡쿡 찔러봤는데 성에 안 찼다.
직접 들어가보지 않으면 모를 것 같았다. 북한의 실상. 몇 차례 방문만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아예 북한에 취직했다.
평양의 한 대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이 됐다. 그렇게 반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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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가깝다. 하지만 가장 멀기도 하다. 어쩌면 평생 밟아보기도 힘든 땅이다. 그래서 항상 궁금하다. 수키 김은 재미교포 작가다. 최근 <평양의 영어 선생님>을 펴냈다. 6개월간 평양과학기술대학교(이하 평양과기대) 영어 선생님으로 몸담으며 겪은 체험담을 엮은 책이다. 간 김에 쓴 책이 아니다. 책을 쓰기 위해 북한에 ‘잠입’했다. 김 씨를 만나 제일 먼저 물었다. 살아보니 어떻더냐고. 그는 “답답하고, 무서웠다”고 했다.
겉은 영어 선생님이었지만, 의도는 따로 있었다. 때문에 하루하루 맘 졸이며 살았다. 철저히 일정대로 움직이던 시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방으로 와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워드에 써 내려갔다. 다 적진 않았다. 심상을 알 수 있는 단어의 나열이었다. 그것마저 곧장 외장하드로 옮겼다. 인터넷 사용은 최대한 삼갔다. 행여 감시를 당할까 봐. 실제로 감시원은 늘 따라붙었다. 김 씨가 몇 시에 기상했는지까지 알 정도였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으니까 피곤하고 답답하고, 무서웠죠. 말을 뱉기 전에 생각을 해야 하고, 뱉고 나서도 내가 한 말을 점검해야 했으니까요.” 불안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지난 2011년 6월부터 12월까지, 한 가지만 되뇌었다. 실상을 알리겠다는 다짐이었다.
네 번의 방북, 한 번의 생활
그가 북한에 발을 디딘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02년부터 총 네 차례 방문했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환갑잔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방북 공연 등과 같은 행사를 취재할 목적이었다. 이후 방북 내용을 뉴욕의 한 매체에 칼럼으로 실었다. 그런데 충분하지 않다 느꼈다.
“갈 때마다 더 복잡한 스토리가 숨어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죠. 당국이 허락하는 선에서만 취재가 가능했고, 그 범위 안에는 평온함밖에 없었거든요. 대부분은 연출이었어요. 그 안에서의 실상은 뭘까. 그게 궁금했어요.”
분명 북한에 두 발로 서 있었지만, 그 참모습을 맛볼 길은 없었다. 방문객 신분으로는 알기 힘들었던 실상. 직접 가서 살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다.
“작가로서 그걸 과제로 삼았습니다. 탐사저널리스트가 돼야겠다, 어떡하면 북한에서 지낼 수 있을까, 고민했죠.”
마침 평양과학기술대학에서 외국인 영어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망설임은 없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지원서를 냈다.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결국 북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겉핥기가 아니라, 살아보기 위해서. 아득바득, 기어이 껍질을 깐 셈이다. 그 속엔 뭐가 있었을까.
“공포가 있더라고요. 겉으로 보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었는데요, 들여다보니 억눌려 있더라고요. 공포에.”
교사의 낙원
첫 수업은 2011년 7월 4일이었다. 공교롭게도 미국의 독립기념일이기도 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26명의 학생이 일제히 일어나서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김 씨는 “안녕하세요, 젠틀맨”이라고 화답했다. 이곳에선 영국식 영어를 가르쳤다. 수업시간엔 영어만 허용됐다.
“20살 언저리의 남학생들이었어요. 평양과기대는 특권층 자녀들로만 구성돼 있어요. 고위층 아들이었죠. 부모님들은 대부분 정부 관계자, 그러니까 당원이거나 과학자 아니면 의사였죠.”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생활을 했다. 일과는 빡빡했다. 우선 5시 반에 기상해야 했다. 이후 조국통일을 부르면서 구보를 했다. 김 씨는 “대학생이었지만, 마치 군인 같았다”고 했다. 실제로 반장은 소대장이라 불렸다. 아침은 6시 30분에 먹었다. 밥을 먹고 난 뒤 오전 8시까지는 자율학습을 했다. 8시부터 11시 30분까지가 1교시 수업이었고, 이후에는 체조시간과 점심시간이 이어졌다. 2시부터는 보충학습이 있고, 주체학습, 생활총화 시간도 뒤따랐다. 주체학습은 2시간씩 수령님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고, 생활총화는 서로를 비판하는 시간이다. 사이사이엔 정원을 가꾸고 숟가락을 세는 일정도 들어 있다. 저녁엔 단체로 뉴스를 봤다. 드라마도 보지만 모두 애국심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런 생활이 4년 동안 지속된다. 졸업 후 진로는 나라에서 결정한다.
철저한 일과 아래 학생들은 완벽해 보였다. 열심이었고, 예의발랐다. 일부 외국인 교사들은 “이곳이 교사의 낙원”이라고 할 정도였다.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 단체로 일어났고, 교사가 입을 뗄 때까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말 한마디에 ‘귀신같이’ 집중했고, 대답은 함께 외치며 했다. 숙제를 내주면 더 많이 내달라고 요청했다. 절대적인 존경이었다. 김 씨는 “그러나 이 모습들이 서서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습관화된 거짓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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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항상 한목소리를 냈다. 주어는 항상 ‘우리’였다. ‘나’는 없었다. “아이들은 항상 강조해요. ‘우리는 정말 행복하고, 우리는 자유롭고,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요. 모든 대답은 반사적이었어요. 그리고 무조건적이죠. 이를테면,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이 뭐냐고 물으면 ‘주체사상탑’이래요. 에펠탑을 본 적도 없지만, 그 아이들에겐 주체사상탑이 가장 높은 거죠. 늘 최고이며, 최대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이 경험한 적이 없는 바깥세계와 비교했습니다.”
그는 “최고, 최대라는 단어가 너무 자주 쓰여 그 의미를 잃을 정도”라고 했다. “한날은 촌극을 써오는 과제를 준 적이 있어요. 한 학생이 외국 선생님들과 ‘묘향산’에 간 에피소드를 써 왔더라고요. 묘향산에 봉이 몇 개이고, 봉마다 높이가 얼만지 아주 세세히 설명을 해요. 그리고 세상에서 최고 멋진 산이라는 말을 하죠. 가봤느냐고 하면 말을 못 합니다. 막상 반 전체에 묘향산을 가본 학생은 없었어요.”
그런 말들 중에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도 섞여 있다. “우린 5학년 때 토끼 복제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A형을 B형으로 바꾸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와 같은 말이다.
“하루는 한 학생이 결석을 했어요. 어디 갔는지 아느냐고 하니까, 두 명이 동시에 답을 했습니다. 한 명은 그 친구가 배탈이 났다고 했고, 다른 아이는 머리를 깎으러 갔다고 했어요. 둘 중에 뭐가 맞느냐고 하니까 둘이서 동시에 ‘머리를 깎으러 가다 배탈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우애는 감동적이었지만, 거짓말의 속도와 매끈함이 불안하기 시작했다. “사실을 알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을 그렇게 숨기더라고요. 주체학습을 하는 교실이 따로 있어요. 교회 같은 거죠. 그 앞에서 학생들은 돌아가며 보초를 서요. 겨울에 영하 몇십 도로 떨어져도, 여섯 명씩 밤새 바깥에서 교실을 지키죠. 밤새 보초를 서면 얼마나 졸려요. 아침에 수업에 늦은 거예요. 왜 늦었냐고 하면, 끝까지 얘길 안 합니다. 제가 그 학생이 보초를 서는 걸 봤는데도, 끝까지 다른 얘기로 둘러댑니다.”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건 아닌가 할 정도로 습관화된 거짓말들.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내 본질을 봤다. 공포와 억눌림, 그에 대한 발로였다.
마음대로 말할 수 없는 아이들
김 씨는 “외국인인 저에게 북한 사회의 민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한 처신”이라고 해석했다. 물론 특수한 경우이긴 하다. 4년 내내 기숙사생활을 하는 학교이기 때문에 통제가 비교적 더 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적 요인이 작용하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에 김 씨는 일면 수긍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덧붙였다.
“제가 외국인이고, 학교의 특수성도 작용했겠지만, 중요한 건 억눌림 여부입니다. 공통적으로 그랬습니다. (타 학교 학생들의 경우)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죠.” 아이들은 스스로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외쳤지만 의도치 않게 ‘그렇지 않음’을 드러내곤 했다. 에세이 과제를 내줬던 어느 날이었다. 주제는 성공적으로 여학생을 만나는 법. 점심시간에 아이들이 몰려와서 물었다.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다. 우리는 여자 친구가 있었던 적이 없는데, 어떻게 쓰느냐.” 방법에 대해서 쓰는 것이므로 교제 경험은 중요하지 않다고 타일렀다. 이후 아이들의 과제를 확인해봤더니, 대답은 한결같았다. 우선 하나같이 자신이 여학생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로 시작했다. 만약 만나게 되더라도 인민학습당에서 함께 공부하겠다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결국 강성대국을 건설하는 데 힘을 합치겠다는 결론으로 끝났다.
“주체학습당 앞에서 보초를 선다는 사실이나, 여자 친구를 못 사귀어본 사실 자체가 억압이 아니에요. 그걸 드러내지 못하는 것, 숨겨야 된다고 여기는 의식 자체가 억압인 거죠.” 반년의 시간이 모두 잿빛은 아니었다. 한바탕 웃은 날도 있다. 한창 짓궂을 나이인 아이들은 가끔씩 농담을 하기도 했다. 자기가 너무 잘생겨서 인민학생당에 있는 여학생들이 다 반했다는 식이다.
“아이들 자체는 굉장히 순수했어요. 닳고 닳은 것의 정반대라고 할까요. 사회가 아무리 억눌러도 순간순간 삐죽 나오는 젊고 어린 감성들이 있어요. 숨길 수 없는 호기심도 있고요.”
영화 <해리포터>를 보여준 날 특히 그랬다. 아이들은 <해리포터>라는 게 뭔지는 알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추상적 개념’일 뿐이었다. 수업시간에 영화를 보게 된다는 소문이 돌았던 날, 한 명씩 찾아와 물었다.
“우리가 정말로 <해리포터>를 보게 됩니까?” “우리가 정말 해리와 헤르미온느와 론, 모두를 볼 것입니까?” 영화를 틀어줬더니, 완전한 몰입 상태가 됐다. 여느 아이들과 같은 모습. 그럴 땐 이곳이 평양인 걸 잊기도 했다. 아이들 옷에 달려 있는 김일성 배지가 자각을 도왔다. “영화를 아주 흡수해버리더라고요. 이렇게 세상을 알고 싶어 하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누르면서 살겠지…. 안타까웠습니다. 가슴이 무거워졌고요.”
또렷한 목적의식이 깔려 있었지만, 사실 정도 많이 들었다. 한 학기 수업을 모두 마치던 날, 아이들은 김 씨에게 조선말로 뭔가 말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모국어를 사용하는 게 금지돼 있던 상황이라 놀랐지만, 더 가까운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그는 고개 숙여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눈물이 났다. 그는 “이 아이들이 마음대로 말할 수 있다면 어떤 말들을 했을까, 지금은 어떤 말을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까 더욱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이산가족 태생… 분단국가 관심 계기
그렇게 반년의 생활은 끝이 났다. 여자 혼자, 북한에서 철저한 감시 아래 반년간 생활한다는 것. 동기는 사실 ‘작가로서의 사명감’뿐만은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왔어요.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았죠. 또, 제가 이산가족 태생이기도 해요. 어린 시절, 외할머니께선 북한군에게 잡혀 간 외삼촌 얘길 종종하셨고요. 친가 역시 북에 가족이 몇 있었어요. ‘분단’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에요. 내가 알던 세상을 잃는 것. 그거잖아요. 북한이 남의 나라 같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죠.”
<평양의 영어 선생님>은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먼저 출간됐다. 반응은 뜨거웠다. 순식간에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가 됐다.
“마음을 움직였다는 얘길 들었어요. 미국 사람에겐 사실 북한이 먼 나라예요. 같은 민족이 아니니까 평소 북한의 상황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아요.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내 아이처럼 느껴졌다고 하더라고요. 울었다는 독자들도 있고요. 그때 느꼈죠. 아, (작가로서) 내 몫을 다했구나.”
한편 한국에서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한국판은 올 1월에 나왔다. 북한 실상을 파헤쳤다는 이유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저는 인권운동가가 아니라, 순수하게 작가로서 글을 쓴 건데…. (한국에서는) 북한 얘기에는 정치가 아주 깊숙이 개입돼 있더라고요. 이 책은 평양의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설명해준 책입니다.”
의도치 않은 비교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방북 경험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내놓은 신은미 씨가 그 상대였다. 그는 신은미 씨가 누군지 모른다면서 아마도 각자 시각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북한에 잠깐 방문한 입장이라면, 그(신은미)와 같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양과기대도 마찬가지예요. 며칠만 가보면 아이들이 참 행복해 보입니다. BBC에서도 대학 탐방으로 방영한 적이 있는데 아주 평온한 모습으로 비쳐졌죠. 애들은 밝은 표정이고, 실제로 엘리트학교니까요.”
<평양의 영어 선생님>은 3월 말, 영국판 출간을 앞두고 있다. 김 씨는 한동안 캐나다, 영국 등지에서 책과 관련한 인터뷰를 할 예정이다. 이후엔 본업인 소설가로 돌아갈 계획이라 했다.
북한에 또 가라고 하면 가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지도 남겼다.
그가 북한을 떠나던 2011년 12월 그날은 김정일의 사망 발표일 다음 날이었다. 아이들과의 마지막 수업에서 작별 인사를 나눈 이튿날,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때문에 떠나오던 날 아이들은 애도에 여념이 없었다. “만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가고 싶습니다. 김정일 체제가 무너지고, 아이들에게 다른 세상이 열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달라지길 바랐는데….”
수키 김의 책은 이렇게 끝난다. 마지막 장면은 떠나오기 전날이자, 김정일의 사망일에 맞춰져 있다. 아이들의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다. (김정일의 죽음이) 슬퍼서다. ‘평양의 영어 선생님’은 아이들을 기억하고자, 얼굴을 보고, 또 봤지만 그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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