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吳之湖)
한국의 서양화가. 한국 근현대 화단에서 인상주의 화풍의 대표작가로 우리나라 자연이 지닌 밝고 명랑한 풍광을 인상주의에 결합시켰다. 활달하고 생기 넘치는 특유의 붓 터치와 미묘하게 변화하는 색감으로 한국적 풍토에 맞는 인상주의 미학을 수립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출생-사망 : 1905.12.24 ~ 1982.12.25
본관 : 동복(同福)
본명 : 점수(占壽)
출생지 : 전남 화순
주요수상
국민훈장 모란장(1973), 대한민국 예술원상(1977), 금관문화훈장(2002)
주요저서
『현대회화의 근본문제』(1968)
주요작품
《아내의 상》(1936), 《사과밭》(1937), 《도원풍경》(1937), 《남향집》(1939), 《가을풍경》(1953), 《열대어》(1964), 《항구》(1967), 《무등산》(1969), 《함부르크 풍경》(1974)
주요업적 : 한국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
오지호는 1905년 전남 화순에서 구한말 보성군수를 지낸 오재영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직후 나라 잃은 통한에 비분강개하여 자결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강경한 성품과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이름은 점수(占壽)였고, 동복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전주고보에 진학했다가 서울의 휘문고보로 편입하면서 신문화와 신미술에 눈을 떴다. 휘문고보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화를 배우고 돌아온 고희동이 미술교사로 있었다. 또한 2년 선배인 정지용을 비롯해 1년 후배인 이마동, 이태준 등 후일 문화예술계를 빛낼 많은 인재들을 만나게 되었다.
오지호가 평생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혜석의 《농가》를 본 이후였다. 그는 1923년 고려미술원에 다니며 김주경과 김용준 등을 만났다. 1925년 화가수업을 위해 일본에 건너간 오지호는 기초과정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1926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당시 도쿄미술학교는 일본적인 아카데미즘을 표방하던 교육기관으로 오지호는 후지시마 다케시의 가르침을 받았다.
오지호는 1931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주경 등과 젊은 미술가들의 모임인 ‘녹향회’의 동인이 되어 사실적 자연주의 기법의 유화를 발표하고, 1935년 무렵부터는 국내 화단을 지배하던 향토주의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의 자연이 지닌 밝고 명랑한 풍광을 밝은 색채로 담아냈다. 1938년에는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컬러화집을 제작하면서 어두운 화폭에 갇혔던 민족의 빛과 영혼을 밝은 빛으로 채색하기 시작했다.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은 단순히 인상주의를 토착화시켰다는 의미를 넘어 근대 화단에 민족의 혼을 불어 넣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도쿄미술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 당시 일본화단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외광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 활동은 단순한 수용에 그치지 않았다. 오지호는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적인 풍토에 맞는 인상주의 미학을 수립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아울러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에 실린 <순수회화론>에서 ‘회화는 빛의 예술이며, 태양에서 태어났다’는 회화론을 주창했다.
오지호는 오랜 친구인 김주경의 도움으로 1935년부터 개성 송도고보의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송악산 아래 김주경이 남겨 준 초가는 그가 1944년까지 살았던 집으로 그의 대표작인 《남향집》의 바로 그 집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화창한 봄날의 따뜻한 기운을 쏟아지는 빛과 보라색 그림자로 표현했다. ‘그늘에도 빛이 있다’고 생각한 오지호는 ‘그늘은 빛에 가려진 것이 아니라 빛이 변화된 것’이라고 보았다.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문을 나서는 어린 소녀와 담장 아래에서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졸고 있는 삽살개가 정겨운 감흥을 일으킨다.
오지호는 8.15광복 직후 1948년부터 광주에 정착하여 조선대학교 미술과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고 호남지역 미술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6.25 전쟁 중에는 작품이 불에 타 없어지는 고통을 겪었으며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원색의 작품을 선보였다. 196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는 짙은 암청색의 거친 붓질이 드러나면서 자율적인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 시키고 주관적인 감성이 강조되었다. 말년에는 유럽여행의 감흥을 분출시킨 자유분방한 필치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오지호는 작품 활동 이외에 자신의 예술이념과 사상을 이론적으로 발언한 <구상회화선언>(1959) 등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1968년에 미술평론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를 출판했다. 1970년 정부가 모든 교과서에서 한자를 제거하자 작품 활동을 뒤로 하고 한자 폐지에 대한 폐해를 역설한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라는 글을 써 한자 교육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1975년 다시 한자 교육을 부활시킨다는 방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밖에 문화재 보호 운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양심수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쳤고,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건의문을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던 앞선 지식인이었다.
오지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및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1973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 1977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그는 1982년 12월 25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85년 미망인 지양진 여사가 국립현대미술관에 유작 34점을 기증했으며, 2002년에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주요 작품에는 《나부(裸婦)》(1928), 《아내의 상》(1936), 《사과밭》(1937), 《도원풍경》(1937), 《남향집》(1939), 《가을풍경》(1953), 《열대어》(1964), 《항구》(1967), 《무등산》(1969), 《만추》(1969), 《과수원 풍경》(1972), 《함부르크 풍경》(1974), 《선운사 설경》(1979), 《가을풍경》(1981) 등이 있다. 저서로는 원색판 『오지호 작품집』(1978)과 미술평론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1968), 시론 『알파벳 문명의 종언』(1979) , 미학원론으로 『미와 회화의 과학』(1992) 등을 남겼다.
오지호, 항구, 1969, 캔버스에 유화 물감
오지호
내장산 설경, 1972(좌),
항구 풍경, 1980(우)
[캔버스에 유화 물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