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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나를 누구라 하느냐? (27-30)
1. 27절,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쌔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십니다.
a.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 헬몬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헬몬산에서 녹아내린 눈이 발원하여 사시사철 물이 넘쳐나는 지역인데, 요단강의 주요 수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원래 가이사 아구스도가 헤롯 대왕에게 하사한 도시였는데, 후에 헤롯 대왕의 아들로 이 지역의 분봉왕이 된 빌립 2세가 이 도시를 새롭게 정비하고 황제를 기리기 위해 ‘가이사랴’라는 이름을 붙이고, 또 자신의 이름인 ‘빌립’을 붙여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부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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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랴 빌립보는 가나안 시대부터 여러 신을 섬기는 신전들이 있었는데, 헬라시대에는 이곳에서 바포멧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판(Pan) 신을 숭배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의 원래 이름이 ‘바니아스’였는데, 이는 원래 ‘판신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예수님 당시에 판신을 섬기던 제단과 제우스를 비롯한 헬라의 신들을 섬기는 제단들과 아구스도(아우쿠스투스 황제)를 섬기는 제단이 있었던 것인데, 예수님이 바로 이곳에 제자들을 데려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27),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가이사랴 빌립보를 찾아와 이곳에 있는 우상들을 ‘신’이라고 부르며 섬기고 있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는 겁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함으로 예수님만이 우리가 섬겨야 할 ‘신’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했다는 겁니다.
b.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 첫 번째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생각을 묻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생각을 물으신 것입니다. 올바른 지식이 올바른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올바로 알아야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바로 알지 못하고 믿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요 거짓된 믿음이라는 겁니다. 이슬람 사람들도 예수를 믿지만,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 중에 하나로 믿고 있습니다. 여호와 증인들도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하지만, 저들은 예수님을 미가엘 천사장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들도 예수를 믿지만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믿고 있기에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바른 대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2. 28절,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하십니다.
a. “사람들이 누구라 하느냐?”(27)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이 “세례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는 대답을 했는데, 이 말씀이 마태복음 16장 14절에는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 더 첨가된 것인데,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나 혹은 엘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로 본 것일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아이러니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보고, 전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저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어 만방을 다스리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이 보여주신 행보는 이런 저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지 못했다는 겁니다.
b.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사람들의 생각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세례요한인데, 이는 분봉왕 헤롯이 세례요한을 목베어 죽인 뒤에 퍼뜨린 소문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4장 1, 2절의 말씀을 보면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하십니다. 헤로디아와 살로메의 미혹에 빠져 세례요한을 목베어 죽인 뒤 괴로워하던 헤롯이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기적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자,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이런 권능을 행한다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는 겁니다.
c. 두 번째 사람은 엘리야인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로 생각한 것은 말라기 4장 5절과 6절에 나오는 엘리야에 관한 예언 때문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하십니다. 이스라엘 땅에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 선지자가 먼저 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킴으로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인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가 올 길을 예비하러 온 엘리야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d. 세 번째 사람은 예레미야인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받기 직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솔로몬 성전에 있던 법궤와 분향단을 느보산 근처에 숨겨 놓았다는 전승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예레미야 선지자가 다시 와서 자신이 느보산에 숨겨 놓은 법궤와 분향단을 새로 건립한 성전에다 가져다 놓으면 메시아가 오신다는 전승인데, 예수님이 그런 일을 위해 보냄받은 예레미야 선지자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여하튼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는 모두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맡은 인물들로 알려진 사람들인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3. 29절,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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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이신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내가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b.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했는데, ‘그리스도’란 ‘기름부은 자’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메시아’는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기 위해 오셨는지를 보여주는 직분에 관한 명칭, 다시 말해 직명(職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세우신 특별한 직분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출 30:22-30; 레 4:3, 5; 시 133:2)과 ‘선지자’(왕상 19:16)와 ‘왕’(삼상 24:10; 왕상 19:15)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은 ‘당신은 세상과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이라는 고백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다윗 시대 이후,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이 ‘메시아’라는 명칭이 다윗과 같이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오는 정치적인 메시아 다시 말해 천군천사와 함께 찾아오는 왕이라는 개념으로 축소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바로 이런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와서도 자신이 기대한 정치적인 메시아의 길을 가지 않자 결국 실망하여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넘긴 것입니다(마 26:14-16). 사실 구약에 기록된 메시아에 관한 기록들은 대부분 천군 천사를 대동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왕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예언들인 것이고, 초림의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같은 메시아의 직분을 가지고 오시긴 했지만, 초림의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와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는 ‘제사장’으로서 오셨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4. 30절,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하십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많은 유대인들이 왕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전에 고난을 받는 메시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비록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라는 올바른 고백을 했지만,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한 불완전한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소식이 전해지면 오병이어 사건 때처럼 억지로 예수님을 붙들어 임금 삼으려 할 것을 아시고(요 6:15),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셨다는 겁니다.
불완전한 지식이 잘못된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메시아에 관해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종말에 관해서도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성경을 짜깁기하여 속이는 이단들의 미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하십니다.
II.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31-33)
1.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하십니다.
베드로로부터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때부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셨다”하셨는데, 이는 초림의 주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는 메시아에 관한 대표적인 예언이 바로 이사야 53장인데, 잠시 살펴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장 3-6절)하십니다.
2. 32절,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하십니다.
a. 베드로로부터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받으신 예수님이 드러내놓고 메시아(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임을 알리자 베드로가 이런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였다”하십니다. 여기서 “붙들고”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프로슬라브메노스’인데, ‘예수님을 붙잡고 한적한 곳으로 데려갔다(took Him aside(NASB))’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라고 고백했을 땐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 하시니, 멘붕이 와서 예수님께 한 마디 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끌고간 것입니다.
b. “간하매”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피티마오’인데, ‘꾸짖다(rebuke)’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가 “그러면 안된다”라고 강하게 어필하며 꾸짖었다는 겁니다.
3. 33절,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하십니다.
a. 베드로가 예수님을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 십자가를 지면 안된다 라고 꾸짖어 책망하니, 예수님도 이런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시며 꾸짖으신 겁니다. 33절에 등장하는 ‘꾸짖어’라는 단어는 32절에 등장하는 ‘간하매’라는 단어와 똑같이 ‘에피티마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에피티마오’는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을 때도 사용하신 단어입니다(막 1:25). 사단이 지금 베드로를 통해 십자가의 길을 사리려는 예수님을 미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으로 꾸짖으셨다(에피티마오)는 겁니다.
b.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십니다. 베드로가 사단의 미혹에 빠져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길을 막으려 한 근본 원인이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사역을 완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베드로의 생각이 바로 ‘사람의 일’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탄핵사태 이후 일부 교회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강단에서 정치적인 선동을 일삼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어서도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사단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III. 자기를 부인하고(34-38)
1.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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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신(31)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3)라고 책망하신 후 34절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십니다. “아무든지”는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말씀인데,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을 쫓는 자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면서도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을 쫓고 사람을 쫓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b. 두 번째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나에 대해 no라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생각과 욕심과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 바로 자기 부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듯 자기를 부인해야 비로소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겁니다.
c. 세 번째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에 제자의 길도 당연히 십자가의 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리스도인들에겐 예수님이 각자에게 맡겨주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다는 것인데, 이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고 지고 가는 자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는 겁니다.
2. 35-37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되, 목숨을 내걸고, 다시 말해 죽기를 각오하고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목숨’을 의미하는 단어가 헬라어 ‘프쉬케’인데, 이는 육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에 반해 성경는 영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프뉴마’라는 단어가 있고,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생명이 바로 이 ‘조에’인데,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셨고, 요한복음 1장 4절에서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또 요한일서 5장 12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하셨습니다.
‘프뉴마’와 ‘조에’를 얻기 위해 ‘프쉬케’를 버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잠시 잠깐뿐인 ‘프쉬케’의 삶을 연장하겠다고 ‘프뉴마’와 ‘조에’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하십니다.
3. 38절,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하십니다.
십자가의 길, 제자의 길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지 말라”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십자가의 도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입니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십자가의 도인 복음만이 우리를 영원한 저주와 형벌에서 구원할 수 있기에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자랑하며 널리 전하라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하십니다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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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