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1903년 1월 25일 -
1926년 7월 23일)
일본의 아나키스트.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박열의 아내이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이틀 만에 치안 경찰법에 근거한 예비 검속으로 남편(당시에는 동거남) 박열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다이쇼 덴노와 히로히토 황태자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덴노의 명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의문사 하였다.
2. 생애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에키 후미이치(佐伯文一)는 히로시마 현 아키 군 출신으로, 텅스텐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야마나시 현 마키오카(牧丘)의 소마구치(杣口)에 머물다가 농민의 딸이었던 후미코의 어머니 키쿠(きく)와 결혼한 후 도주하였다. 아버지는 가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어머니 외에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는 등 불우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랐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태어난 후미코는 양친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아 소학교에 입학할 수조차 없었다. 아버지는 후미코의 이모와 눈이 맞아 가출하였고, 어머니도 다른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후미코는 8살 때 어머니를 따라 새 아버지가 살던 야마나시 현 기타쓰루(北都留)로 갔지만 곧 삼촌과 함께 어머니의 친정 가네코(金子) 가문이 있는 야마나시 현 히가 시 야마나시 군 스와무라 오오아기 소마구치(같은 군 마키오카, 현 야마나시 시)에 가서 자랐다.
후미코가 9살 때 생부의 여동생, 곧 고모가 결혼한 조선 충청북도 청주군 부강면에 있던 이와시타(岩下)의 집에 맡겨진다. 사위의 집에 살고 있던 후미코의 친할머니는 후미코를 친손녀로 인정하지 않았고, 후미코를 외조부의 5녀로 입적시켰고 후미코를 학대했다. 조선에 와서도 친척들에게 학대를 받자, 후미코는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1919년, 후미코는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목격하고, "권력에 대한 반역 정신이 일기 시작하여,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감격이 가슴에 솟아 올랐다."고 한다. 이렇게 후미코는 조선인의 입장에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여,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후미코는 16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때까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못해, 재혼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후미코는 당시의 상황을 "집없이 나는 며칠씩 인근의 친척 집을 방황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도 했으나 아버지는 후미코를 재산 많은 스님인 이종사촌에게 강제로 시집보냈다. 후미코는 학문에 대한 관심이 강해지고 야마나시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껴 남편과 헤어지고 1920년 4월, 17세 되던 해에 도쿄로 상경한다. 도쿄로 상경한 후 어머니 쪽 친척 집에 머물면서 우에노(上野)에서 신문팔이를 했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교류를 시작했고, 일을 하면서 마사노리(政則) 영어학교와 연수학관을 다녔다.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사귄 친구의 소개로 사회주의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책을 접했고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
후미코는 1920년 7월부터 1921년 10월까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계속 사회주의 책과 잡지를 탐독했으며, 1921년 여름 무렵, 유학과 기타 이유로 도쿄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교류를 시작하였다. 1921년 11월, 후미코는 사회주의자들이 모이던 이와사키(岩崎) 오뎅집의 종업원으로 들어갔다.
1922년 3월, 후미코는 박열과 만났고, 5월부터 동거를 시작했다. 후미코는 동거남 박열을 따라 박열이 조직한 사회주의자 모임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했다. 그러나 흑도회는 9월, 사회주의자와 아니키스트들로 분열되었고, 이후 박열과 홍진유(洪鎮裕), 박흥곤(朴興坤), 신염파(申焔波), 서상일(徐相一), 장상중(張祥重)이 함께 조직한 흑우회(黑友會)에 김중한(金重漢), 니이야마 쇼다이(新山初代), 쿠리하라 카즈오(栗原一男)와 함께 가입했다. 같은 해 11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대담한 조선인(太い鮮人)>이라는 운동지를 발간했다.
이듬해인 1923년 4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했고, 3월부터 살던 도쿄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정했다. 5월 27일에 불령사 첫 모임을 가졌다. 후미코는 재판에서 불령사의 성격을 "권력에 반역하는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라고 진술하였다. <대담한 조선인>을 <현사회(現社會)>라는 제목으로 바꿨고, 후미코는 이 잡지에 계속 글을 실었다. 6월에는 당시의 저명한 아나키스트였던 모치츠키 가쓰라와 가토 가즈오의 강연회를 열고, 나카시니 이노스케(일본의 노동운동가)의 출옥 환영회도 개최했다.
그러나 박열이 이전부터 은밀히 추진했던 폭탄 입수를 둘러싸고 김중한과 박열의 사이가 나빠지자 불령사는 점점 갈등이 커지게 되고, 같은 시기 흑우회가 해산되자, 니이야마와 김중한은 불령사를 나와 자신들만의 잡지를 발행하게 되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후미코는 박열과 예비 검속을 핑계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수사 도중 폭탄 입수 계획이 밝혀지자, 일본 당국은 이를 형법 73조(대역죄) 위반으로 두 사람을 기소하였다. 당시 후미코는 "다이쇼 덴노는 병자이기 때문에 히로히토 황태자를 엿보려 했다"라고 했지만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밝혀지지 않았다. 수사를 받으며 권력에 대한 후미코의 반감은 더욱 강해졌으며, 다른 불령사 동지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계속 수사를 받았다.
1926년 3월 25일,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4월 5일 천황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후미코와 박열은 옥중에서 혼인하였고, 후미코는 박열의 호적에 들어갔다. 후미코는 우쓰노미야 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 중, 7월 23일 의문사하였다. 일본은 후미코의 사인이 자살이라고 하였으나, 일본의 발표에 의구심을 품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동료들은 후미코의 어머니와 함께 시신을 확인해 보았으나, 끝내 사인을 밝힐 수 없었다. 일본은 후미코 추모 열풍이 불 것을 염려하여, 후미코의 어머니와 동료들을 검속하기도 했다.
법적으로 후미코는 박열의 아내였기에, 조선에서 박열의 동생이 와서 후미코의 유해를 모셔가려 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유골을 직접 주지 않고 조선의 경찰서로 보냈다. 경찰서에서 유골을 인수 받은 박열의 형은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에 후미코를 매장하였다. 후미코가 남긴 원고는 쿠리하라 카즈오가 정리하여 시집과 자서전으로 출간되었다. 후미코의 묘는 본래 주흘산에 있는 박열 집안의 선산 지역(문경읍 팔령리)에 있었는데 2003년 박열의 생가가 있던 곳에 기념관을 세우면서 후미코의 묘를 이 곳으로 이장했다.
1976년 3월, 야마나시 현 마키오카 소마구치에 있는 후미코의 생가 터에 가네코 후미코를 기리는 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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