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들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헤아릴 수 없는 보고입니다. 바오로가 직접 복음의 씨를 뿌린 이 도시 공동체는 유난히 심각한 분열과 오만한 태도로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려는 바오로 사도의 노력 속에서 우리는 그의 십자가 신학의 정수와 신앙 체험의 깊고 절절한 차원을 만납니다.
코린토는 경제와 무역이 융성하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교차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이렇게 입지 조건이 좋은 삶의 자리 때문인지 이 지역의 신자들은 더욱 허영에 들뜨고 교만하며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유혹에 걸려 올바른 신앙에서 자주 벗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의 피눈물 나는 훈계는 세속화의 정점에 이른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으로 필요한 충고이기도 합니다.
성서학자 야곱 크레머 신부는 자신의 주석에서 바오로 사도의 주된 의도를 잘 요약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허영심과 경박함과 도취감에 들뜬 코린토 신자들에게 참된 사도직의 형태를 보여 줌으로써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겸손을 배우도록 합니다. 스스로를 많이 아는 자이자 부유하고 힘 있는 자로 여기며 자신이 종교적으로 큰 깨달음과 은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듯이 내세우는 교만은, 교회 안에 분파를 낳고 올바른 신앙을 해하는 큰 병이 되었습니다.
이 ‘병’이 너무나 깊기에 바오로 사도의 ‘치료법’ 또한 직접적이며 공격적이어야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 기법을 사용해 유난히 신랄한 논박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이 자만과 자족, 교만함으로 오도되고 왜곡된 신앙에서 깨어나 다시금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서도록 호소하는 모습을 오늘 제1독서에서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치유책의 핵심은 ‘모든 것이 선사받은 것’이라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에 관한 인식에 다다르는 데 있습니다. 여러모로 자화자찬과 자기 합리화의 문화에 젖어 있는 우리 또한 이러한 참된 겸손함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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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릴 때 이미 부모를 잃고, 일가친척도 모르는 채 외롭게 살아갔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험난한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갔습니다. 세상은 그 아이를 가엾게 여겼지만, 누구 하나 선뜻 손을 내밀고, 음식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나라에서조차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지, 언제 태어났는지,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누구나 해야 하는 ‘주민 등록’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그 아이는 여느 때처럼 껌을 팔거나 종이를 주워서 팔지 못하여 먹을 것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몸이 많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그 아이가 몸이 낫게 되자,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이는 주인이 없는 틈을 타 빵집에서 빵을 한 개 훔치다가 주인에게 덜미를 잡혔습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주인이 아이의 딱한 사정을 알아주었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하게도 아이는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어 주어야 합니까? 그 아이는 현행법을 어겼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이럴 때 법보다는 그 아이의 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라도 그 아이를 돌보아 주고 인간답게 대했다면, 그 아이는 그렇게 배고프지 않았을 것이고, 빵도 훔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식일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느냐 아니냐가 더 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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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배가 고파 그랬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나던 길에 간식 삼아 그랬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동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어겼다고 따집니다. 안식일에 추수를 하면 안 되는데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을 추수 행위로 간주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예리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바리사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떤 눈빛으로 대하셨을까요? 그분께서는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의 예화’를 들어 그들에게 답변하십니다. 말씀의 요지는 ‘율법의 유연성’을 잃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는 보면서 숲을 보지 못하면’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이 힘들고 딱딱한 것이 된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지 말라는 율법’을 ‘하라는 율법’으로 바꾸신 분이십니다. ‘밀 이삭 비벼 먹는 것’으로 상징되는 하찮은 일 때문에 신앙의 기쁨을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모는 모든 자녀를 사랑합니다. 별난 자식에게는 더 많은 애정을 기울입니다.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을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부모 앞에서 벌벌 떠는 자식을 좋아할는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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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유다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날입니다. 모든 일에서 해방되어 주님 안에서 쉬는 날입니다. 이날은 일하는 다른 날과 구별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인 주일로 안식일을 대체합니다. 주님의 날은 다른 날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떠한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지 주님 안에서 되새겨야 하는 날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주님을 위해 하루를 봉헌해야 하는 날입니다. 이런 구별은 우리가 결코 일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어떤 신분이나 처지에 있든 인간이면 누구나 쉴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민석이가 훔쳐온 체육복을 대신 팔아줬다. 당시 학교 5층에 체육복 판매업체가 들어와 바깥 문구점보다 싸게 옷을 팔고 있었다. 누군가 체육복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며 환불을 요청하자, 업체는 두말없이 돈을 내줬다. 소문이 학교에 순식간에 퍼졌다. 체육복 도난사고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민석이가 나에게 훔친 체육복을 내밀며 “나는 한 번 환불해 얼굴을 알 수도 있으니 나대신 팔아주면 3만1000원 가운데 1만5000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1만5000원을 벌었지만, 우리의 잘못은 곧 들통 났다. 나를 포함해 6명이 적발됐고, 학교에서는 우리에게 다음 주로 예정돼 있던 수학여행에 참가하지 말라고 통보했다. 3월 31일, 결국 나는 민석이와 함께 학교 선도위원회에서 퇴학처분을 받았다. 반성문을 쓰고 무릎 꿇고 빌었다. 어머니도 학교로 찾아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빌었다. 소용없었다. -한겨레신문, 2010.09.02일자-
신문의 기사 한 토막이었습니다. 1만5000원 때문에 퇴학을 당해야 했던 안타까운 사연이었지요. 물론 체육복을 훔친 것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문제만으로 퇴학이라는 엄청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꼭 퇴학을 통해서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이런 모습들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작은 것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회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개개인들도 이러한 모습을 쫓아서 용서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어떠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들과는 정반대로 계속해서 용서하시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많은 잘잘못 속에서도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용서를 이렇게 가득히 받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평등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사랑은 하지 못하며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고 하면서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라고 말합니다. 지금 같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큰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밀 이삭을 뜯은 것은 추수요, 손으로 비빈 것은 타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노동을 한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가장 근본적인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안식일이 주님의 날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동을 금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노동 자체에 중점을 두고서, 왜 일했냐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일인 사랑과 용서는 도저히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판단을 할 때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가장 근본적인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때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피로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나 죄악이 아니라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고 탄식하는 것에서 비롯된다(앙드레 지드).

신앙의 자유
-정희완 신부-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 이미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네 생이고,
또한 신앙의 의미를 잘 알기도 전에 이미 신앙은
내 안에 은총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가지고 이승의 삶을 산다는 것이
뭘까, 라는 질문이 제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이 세상에서, 종교적 신념과 신앙이 작용하는 모습을 보면,
저는 참 많은 회의를 느낍니다. 종교적 신념 때문에, 신앙 덕분에
기쁘고 열린 모습으로 교회와 신앙인들이 서 있기보다는
자꾸만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자기합리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 같고,
종교적 신념과 신앙이 타인을 포용하는 힘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심판하고 배척하는 힘으로 사용되는 것 같아 가슴이 참 아픕니다.
종교적 신념과 신앙이 오늘의 세상에서 자꾸만 규칙과 규범으로서 작용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율법이 아닙니다.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자기의 마음 안에 숱한 규칙의 가지들을
치렁치렁 달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를 구속하는 율법 같은
짐이 아니라 우리를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유와 해방의 힘입니다

사랑의 자유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먹은 제자의 행위를 들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시비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다윗이 사제들만 먹게 되어있는 제사 빵을 먹은 것을 예로 들며
주님께서는 안식일 법보다 사람이 더 우선임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자유는 진리에서 옵니다.
그런데 사랑도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말씀입니까? 사랑은 우리를 매이게 하고
부자유스럽게 합니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렇지요.
집착하는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이게 하고
그래서 부자유스럽게 합니다.
그 사람 곁을 한 순간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숨도 마음대로 쉬지 못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연인들의 사랑을 떠올리고
제가 그런 경험이 있어서 이런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시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느냐?
미워하는 사랑도 사실은 집착하는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집착하는 사랑은 부자유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우리를 진정 자유스럽게 합니다.
사랑은 진리 중의 진리, 최고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사람이 늘 그 중심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늘 그 중심에 있다고 해야 하지만 그게 그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셨기에
하느님이신 사람의 아들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 현재 우리 성당에서는 공사 중입니다. 성당 옆 학교를 인수해서 저희 성당의 교육관으로 쓰일 예정입니다. 하지만 그대로 쓰기란 문제가 많아 리모델링 작업을 시작했지요. 그리고 성당 입구를 변경하고,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야외에 세워져 있던 성모님을 교리실로 잠시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 뒤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모상이 그 자리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성모상이 놓여 있었던 자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인사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히 성모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인사를 하는 것이지요. 즉, 성모상은 보지도 않고 습관적으로 인사할 뿐입니다.
문득 이 모습이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또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습관적으로만 하는 신앙생활. 그래서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만을 끊임없이 습관적으로 입으로만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 어떠한 지를 바라보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어떤 사랑을 해야 할 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습관적으로만 말하는 사랑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 사람 몇 사람이 또 예수님께 따지지요.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즉,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인데요. 단순히 배고파서 길 가에 있는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이 자신들의 눈으로는 추수와 타작을 한 것으로 비춰진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과 판단만을 옳다고 내세우는 곳에서 과연 사랑이 있을까요? 율법의 최고 계명이 ‘사랑’에 있음을 알고 있어도, 그 사랑은 습관적으로 말만 할 뿐 실천이 없는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느 여학교에 남자 선생님께서 새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긴장되는 첫 번째 수업이었지요. 그런데 수업에 들어왔는데, 잠시 뒤 여학생들이 키득키득 웃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이 선생님의 남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학생 한 명이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앞문 열렸는데 데요.”
이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지 앞의 지퍼가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아주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반장 나와서 닫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또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엉뚱한 사랑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모상에 인사할 때 습관적으로 하지 말고 눈을 맞추고 인사합시다.

안식일
-서북원 신부-
유다교의 안식일 법은 정말 대단합니다. 노동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물론
6일 동안 일할 수 있는데 굳이 안식일까지 일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하루 쉬면서 미사 참례하는 것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협의의 안식일은 그럴지 모르지만 본래 안식일이란 주중에
바쁜 일상 때문에 하지 못했던, 이웃에게 봉사하며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을 잠시 접고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내 자신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합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대화를 통해 서로의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율법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정신을
제대로 살려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 악습에서 비롯된 것은
과감하게 새롭게 정립해나가야 합니다. 안식일에 관한 법뿐만 아니라 모든 법이
우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며
인간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근본적인 마음을 헤아리며 기쁘게 살아갑시다.

성시간의 준수
-이종진 신부-
유럽에서 10여 년 유학 생활을 할 때는 그런대로 안식일을 제대로 보냈던 것 같다. 아무리 세속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고는 하나 그곳의 문화는 여전히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각인되어 있기에, 일요일에는 대부분의 상가가 문을 닫고 거리는 한산하다. 자연히 쉬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well-being’시대를 맞이해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일요일에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것을 근면의 덕으로 여기거나, 그것을 강요당하는 환경이 엄연히 존재한다. 나 역시 과제수행에 대한 압박감으로 안식일의 평온을 잃을 때가 많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천명하셨을 때, 이는 안식일 규정 폐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예수님은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참된 의미를 일깨워 주며, 당신이 바로 그러한 규정의 ‘입법자’임을 선언하신다. 그에 비해 우리 신앙인은 그 규정을 ‘준수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창세기의 보도처럼 안식일의 성시간이 하느님에 의해서 일상의 시간과 구분되었다면, 그로부터 속(俗)의 시간 역시 ‘종교적’ 의미를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휴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이제 일상의 노동을 ‘고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성속(聖俗)의 시간 구분 없이, 곧 안식일의 휴식에 참여함이 없이, 그저 일만 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신봉하는 사람들한테는 미덕이 될지 몰라도 결코 ‘종교적’ 삶의 방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우리 사회가 좀더 인간적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안식일의 문화’를 확산시켜 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가령 ‘신체’와 ‘지성’만 혹사당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억압당한 ‘영적 감각’이 최소한 안식일에는 자유롭게 발아되도록 마음 써주는 것이 한 보기가 될 것이다. 물론 우리 자신도 누려야 하지만.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참 인간, 참 자유인>
-양승국신부-
인간이란 존재, 생각할수록 특별하고 재미있습니다. 인간이 여타 생명체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우월성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참으로 인간다워집니다.
육체는 비록 제한된 여건 안에 살아가지만, 그의 정신, 영성, 내면세계를 무한대로 확장시켜나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만이 지닌 우세함입니다.
굵은 밧줄로 육체를 꽁꽁 묶어둔다 할지라도, 좁디좁은 감방 안에 육체를 가둔다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내적으로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그 어떤 충격이나 상처에도 우리 인간은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서 있으면, 자기중심을 똑바로 잡고 서 있으면 그 누구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코린토1서의 바오로 사도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인간’ ‘참자유인’으로 살아가셨던 분들이 사도들이셨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사도들 삶의 적나라한 실상을. 그들의 삶은 연회와 호의호식이 계속되는 호화판 삶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나날은 연일 웃음꽃이 활짝 피는 화기애애한 날들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늘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떠돌아다니고, 사람들로부터 욕설을 얻어듣고 박해와 중상을 당하던 괴로웠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계속되는 목마름, 헐벗음, 고초와 욕설, 박해와 중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세는 너무나도 당당합니다. 의연합니다. 자랑스러워합니다.
결국 그들은 무수한 고통 가운데서도 낙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자랑했으며 긍지를 지녔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영적 참자아가 굳건히 서 있는 사람은 타인들이 아무리 적대시하고 헐뜯는다하더라고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의 내적 공간은 온통 그리스도로 꽉 차 있기에 밖에서 입히는 상처가 그의 내면 안으로 스며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하느님 체험이 우리를 참 자유에로 이끕니다. 하느님께서 정말로 우리 안에 계시면, 하느님만으로 충분하기에, 그 어떤 강력한 외부의 공격이라 할지라도 초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안셀름 그륀,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 성서와 함께, 참조)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무 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느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합니다. 하느님을 모신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이미 배가 불렀습니까?
-김찬선신부-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
성북동 수도원에 있을 때의 얘기입니다.
우리 형제 하나가 오더니
“어떤 분이 꼭 원장님과 토론을 하고 싶어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나 보니 여호와의 증인 자매님이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토론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구원을 받으셨습니까?”하고
아주 무례하게 대뜸 묻는 것입니다.
불쾌한 마음을 참고 “구원은 하느님께 달린 것이니
어떻게 제가 감히 구원받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례를 받았다 해도
우리가 아무리 구원의 지혜를 깨쳤다 해도
우리가 아무리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해도
우리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특은을 받았다 해도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지언정
확신이 지나쳐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만 구원받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오늘 코린토 교회 신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바오로와 아폴로를 통해 은혜를 받았음에도
사도들은 어리석은 사람, 약한 사람으로서
멸시받고,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자기 손으로 애써 일하며 사는데
코린토 신자들은 이미 구원을 다 이룬 사람처럼,
부자처럼, 임금처럼, 지혜로운 사람처럼 명예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코린토 신자들을
오늘 우리와 함께 꾸짖고 있습니다.

<독서> : 늘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겸손한 신앙인이 되자.
-경규봉 신부-
무엇인가를 가지면 가질수록 좋다. 재물, 지식, 지위, 명예, 완력 등, 어떤 것이라도 가지면 가질수록 편리하며 좋다. 그것들은 우리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일들을 하게하고, 남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한다.
하느님께서도 세상을 창조하신 후 사람에게 세상을 다스리도록 맡기셨다. 사람에게 세상을 주신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다스림으로써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도록 하신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 사람을 그만큼 믿으셨음을 뜻한다. 때문에 우리가 많이 가지는 것은 좋은 것이며,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진 것을 잘 활용하며 서로를 위하고, 세상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자칫 사람이 가진 것에 얽매이면 문제가 생긴다. 가진 것에 얽매이면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가진 것을 사용하려 하지 않고 자신만이 꼭 움켜쥐고 내놓지 않으려 한다.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 사람보다 나아가 하느님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심하면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하여 다른 이들을 해하기도 한다. 가진 것이 마치 자신인 것처럼 가진 것을 자랑하고 자만과 교만에 빠진다. 그래서 가진 것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러나 제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가진 것이 나는 아니다. 나는 다만 가진 것을 관리할 따름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람에게 맡기셨듯이, 하느님께서 내가 가진 것을 나에게 맡기셨을 따름이며, 나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내가 가진 것을 관리할 따름이다. 내가 관리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가진 것이 곧 나인 것처럼 착각하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죄에 빠지게 된다.
고린토 교회에는 교만에 빠진 교우들이 많았다. 이들의 교만으로 인하여 고린토 교회는 분열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구원의 길에서 이미 목표점에 이르렀다고 믿었으며 왕이 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바울로는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부당한지 지적한다. 그는 사도로서 벌써 목표점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으며,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도상에 있음을 강조한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당하는 고난을 달게 받으며 살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자신이 그처럼 살아감을 본받아 겸손하게 살기를 권고한다.
오늘, 나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나는 이 세상에 선물로 태어났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고, 내가 노력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상에 선물로 태어났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내가 이처럼 성장하고 성숙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도 사실 내 것이 아니었다. 미모, 재능, 완력뿐만 아니라 학식, 재물, 명예나 지위 등 그 모든 것이 선물로 주어졌다. 삶은 곧 선물이다.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선물로 주어졌음을 안다면 나는 결코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주신 선물을 받고 산다는 감사의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 겸손한 삶을 살자.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자..................◆

안식일의 규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
-이호봉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율법이 정한 단식규정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오늘은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전도여행 중에 배가 몹시도 고팠던지 밀밭에 들어가 밀이삭을 짤라 먹었는데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에 해서는 않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위반한 제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비난할 구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 준 셈이 되었습니다. 율법의 조항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비난 섞인 질문에 예수님은 사무엘 전서 21장에 소개되어 있는 다윗과 그 동료들의 일화를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엄청난 말씀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안식일 규정의 위법성 여부에서 시작된 사건의 발단이 예수님의 신적인 정체성에 관한 계시로 일단락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서나,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적대자들에게서나, 20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 현대인들에게나 나자렛 사람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은 실존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왕이나 예언자로 볼 수도 있고, 조직과 체제를 거부하는 반란자나 이단자로 볼 수도 있고, 지상에서 천국의 이상을 실현하려다 실패한 혁명가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즉 신으로 고백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고, 죄와 죽음에서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하느님으로 고백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인류와 함께 할 하느님으로 고백한다면 모든 세상의 것들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예수님의 발언에 아마도 기절초풍할 정도로 경악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은 안식일의 하느님이고, 안식일은 주 하느님의 날이라고 철저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자렛에서 온 젊은 청년 예수가 자기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며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다 갖다 놓으니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분명히 적잖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예수님과 반대자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결국 머지안아 훗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살해하는 파국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은 모든 인류, 모든 삼라만상의 주인이십니다.
주인이신 분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속박하던 죄와 죽음의 올가미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한 영원한 자유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어둠의 세력인 죽음조차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자유인인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여러분 모두 주님의 품 안에서 참된 자유를 마음껏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새벽을 열며
한 해병이 있었는데, 그는 수영을 전혀 하지를 못하는 맥주병이었습니다. 하루는 이것을 너무나도 이상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그 해병을 놀렸지요.
“야, 넌 해병인데도 수영을 못하냐? 그러고도 해병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러자 그 해병이 아주 천연스럽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 공군은 다 나냐?”
하긴 그렇지요? 해병이 다 수영을 잘해야 한다면 공군은 다 하늘을 날아야 할 텐데, 하늘을 나는 사람이 있을까요? 따라서 ‘해병은 꼭 수영을 해야 한다’는 사실 역시 하나의 잘못된 고정관념도 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지요.
어느 날 초등학교 선생님이 1학년 학생들에게 “집에서 무엇을 도와주었는가?”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차례로 대답했지요.
“저는 엄마를 도와서 그릇을 닦았습니다.”
“저는 개에게 밥을 주었습니다.”
“이부자리를 직접 깔았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모습을 본 선생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물었지요.
“철수야, 너는 집에서 무엇을 도왔니?”
그러자 그 아이는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네요.
“저는 엄마에게 방해되지 않기 위해서 밖에서 신나게 놀았어요.”
그래요.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의 고정관념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일하는 것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엄마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밖에서 노는 것도 어른들을 돕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우리들의 고정관념들. 이 고정관념들이 생각의 폭을 좁게 하고 사람들의 관계도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긴 예수님을 반대했던 바리사이들도 그러했지요. 그들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고 따지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을 향해서 나아가지 못하고 율법의 조그마한 세부 조항만을 가지고서 마치 큰 죄를 범한 듯이 예수님을 향해 질책을 던지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셨을까요?
하지만 우리들도 이런 모습을 간직할 때가 너무나 많더라는 것입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들은 고정관념이라는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래서 사랑을 해야 할 순간에, 사랑과 더욱 더 멀어졌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주님을 따르는 일에 소홀하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즉, 사랑을 실천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나를 살리고 우리 공동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가정 안에서 무엇인가를 돕도록 합시다.
빠다킹신부

안식일의 주인
- 최혜영 수녀-
주5일제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토와 놀토라는 말이 생겨, 이번 놀토엔 뭐하며 놀까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근로시간제를 지킬 수 없는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나 자영업자들에겐 여전히 언감생심이지만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삼천이백여 년 전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떠돌이 유랑민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안식일이 주어졌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대권력자를 향한 대자유 선언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덧 안식일의 은총체험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규정이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두가 안식일 규정에 묶여 정작 그 정신을 잃어버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근본정신을 일깨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은 잠시 걸음을 멈춰 지난 한 주간을 돌아보며 그동안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바쁘게 지내는 일상 속에서 하루 한 시간, 아니 하루 10분만이라도 마음을 주님께 들어올려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한결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한만옥 신부-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의 일이다. 마침 금요일이었는데 오후가 되자 온 거리가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의가 유다교 신자이고, 그래서 지금도 안식일을 지킨다. 해가 지면서 하루가 시작되고 다음날 해가 질 때 하루가 끝나는 그들의 전통 관습에 따라 금요일 저녁에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느님께 바쳐진 날이고, 허용된 것이 아니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것이 안식일법이다.
금요일 저녁 호텔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몇 명 탔는데 그들은 우리 일행에게 “6층 좀 눌러주세요” 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안식일법에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러도 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란다. 당연한 일이다. 안식일법이 만들어질 때는 엘리베이터가 없었으니까. 오늘날에도 그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안식일법을 지키고 있었다. 율법을 지키려는 그들의 자세가 감탄스러웠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은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하고 묻는다. 율법을 법조문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는 물론 경계해야 하지만 율법을 지키려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이나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세만큼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임성환 신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 중의 하나인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의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은 도둑질이기에 바리사이 몇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휴식의 날이기 때문에 일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밀이삭을 잘라먹는 것도 일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을 가지고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인데...”
“배 고파 죽을 판인데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아무리 배 고파 죽을 판이지만 니는 하느님이 무섭지도 않느냐?”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는 성경 말씀도 모르느냐? 하느님은 그 크신 당신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주실 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말일까요?
우리 신앙생활을 위해서 만들어진 규율을 그대로 지켜야 할까요?
아니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급한 상황을 해결해야 할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상황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종종 고민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나서 우리가 내린 결정을 다시 고민하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더 옳을까요?
이 사람의 말이 맞을 수도 있고 저 사람의 말도 맞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서 이 사실을 다시 물어보고 뽀족한 대답을 얻기까지 두 사람의 말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고 한 사람만 맞고 나머지 한 사람은 틀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참으로 난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좀 더 명확한 규율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결국 모든 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다 모여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맞느냐? 저게 맞느냐?를 따지기 전에 그렇게 따지는 나의 속마음에 내 욕심과 내 명예욕 때문에 따지느냐 아니면 진정으로 예수님 그분께로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해서 따지는지를 먼저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한 연구팀은 어린 시절에 찍은 사진을 보고 그 사진 속에 있는 인물들이 커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 지 조사했답니다. 즉, 어린 시절 사진 찍을 때마다 크게 웃는 사람과 찡그리고 있는 사람의 이혼율을 조사한 것이지요. 그 결과 놀랍게도 찡그렸던 사람이 크게 웃는 사람보다 이혼율이 자그마치 세 배나 높았습니다.
하긴 잘 웃는 사람은 대부분 화목한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이를 잘 해결하고, 자신처럼 명랑한 성격의 배우자를 만나서 싸울 일이 적다고 합니다. 반면에 찡그리고 있는 사람은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져서 부부 사이의 갈등을 잘 풀어나가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거리를 거닐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웃음이 없다는 것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 외에 웃을 수 있는 동물이 없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웃지 않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백번의 신음소리보다 한 번의 웃음소리가 훨씬 더 듣기 좋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앞선 연구에서도 나왔듯이 더 잘 웃는 것이 더 잘 사는 것이며, 더 큰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웃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지요. 그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뀔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부정적인 마음이 하느님을 알아 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지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어제 복음과 마찬가지로 시비를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는 이유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인데, 그들은 안식일 법을 확대 해석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려는 것이지요.
바로 이때의 바리사이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십시오. 과연 웃고 있을까요? 과연 좋은 얼굴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서 이야기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든 난처하게 해야겠다는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얼굴은 인상을 쓰고 있을 것이고, 무척이나 화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이 화난 표정을 만들고, 이 화난 표정은 다름 아닌 하느님께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때의 내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 얼굴을 하느님께서 보신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하실 지를 떠올려보십시오. 가뜩이나 인상이 좋지 않다면 더욱 더 웃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남의 허물을 꾸짖는데 너무 엄하게 하지 말라. 그 말을 감당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남에게 착한 일 가르치기를 너무 높은 것으로써 하지 말라. 그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것으로 해야 한다.(채근담)

법 없이도 살 사람
-최성기 신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나 착하게 살아서, 그의 삶에
굳이 법의 잣대를 대지 않아도 잘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법을 어길까봐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소극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법의 정신을 삶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 적극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 어쩌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의 삶을 보면, 그들 나름대로 율법에 충실하고, 안식일 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올바로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좀 더 나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율법 안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는지 분별하기를
바라십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5,17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완성은 법 안에
사랑을 담아내는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법은 있되 사랑이 담기지 않을 때,
그 법은 억울한 이를 만들어내는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은 법이 폭력이 될 수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사랑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살피라는 간절한 충고입니다.

하느님 자녀에게 주어진 자유
-김석인 신부-
오늘 복음을 들으면 어릴 때 보리나 밀이 영그는 봄날 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날 들판을 지나면서 가끔씩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까먹던 생각이 나 동심의 세계를 그리며 웃음을 머금게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을 두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했던 행동을 비난한다. 이런 바리사이의 모습에 맘이 답답해진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께서 사시던 그 시대에 유다 지방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긴다.
일상에서 보면 나도 모르게 많은 것에 얽매여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많은 판단도 하고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바리사이처럼 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름대로 많은 잣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잣대도 하나씩 하나씩 무너뜨려야 한다. 예수님을 알게 되고 한 형제가 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곁을 지나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임을 알기에 나도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씩 마음 안에 자리 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백성임을 알려주는 표징이었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한테는 이제 이웃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백성임을 알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 때 하느님 자녀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사랑과 원융 무애
-김찬선신부-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좋은 뜻인 것 같습니다.
예외 없는 원칙은 없다는 말도 좋은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융통성은 어디까지 부려야 하나?
예외는 얼마나 인정될 수 있나?
사랑만큼 융통성을 부려도 된다.
사랑만큼 파계를 해도 된다.
사랑과 원융무애圓融無碍.
사랑과 자유.
사랑이 있으면 원칙도 좋고
사랑이 있으면 예외도 좋다.
사랑이 있으면 규율 안에 있어도 매이지 않고
사랑이 있으면 규율 밖에 있어도 방자하지 않다.
다윗이 먹어서는 안 되는 빵을 먹은 것이나,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시며 안식법을 넘어서시는 것이나,
다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삶의 기로 앞에서>
-양승국신부-
가끔씩 가족공동체 안에서 또는 수도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끼리 의견이 대립될 때면 어떻게 풀어 가십니까? 때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간관계 구조 안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정말 힘들기도 하지요.
너무나 복잡한 문제 앞에서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 한 문장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열쇠를 제공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선택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짧은 지상생활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삶의 모습들, 사상, 가치관들, 삶의 양식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 복음 자체가 그리스도인들의 판단 기준입니다.
애매하고 난처한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복음서를 펼쳐드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셨다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만일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실까?" 한번 먼저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제 세상만사의 원리이자 기준이십니다.
유다교 회당으로 기도하러 가실 때마다 예수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한가지 광경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상인들과 유다 관료사회의 철저한 부패를 보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안에서조차 너무도 자연스럽게 상거래를 일삼는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런 판단을 하셨습니다. "저 사람들,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구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는 판단과 함께 유다 교계제도에 정면으로 대항하십니다. 참으로 위험하고도 무모한 결정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생각이 굳어지자 즉시 실천에 옮기십니다. 낄낄대며 성전 마당에서 돈을 세고 있는 상인들을 사정없이 몰아내시고, 좌판을 둘러엎습니다.
그런가 하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켜 잡혀온 한 여인,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한 여인 앞에서 예수님은 군중들과는 또 다른 판단을 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편에서 보면 다 거기서 거긴데, 한번 실수한 걸로 쳐죽여야 한다고 돌을 들고선 저 사람들, 참으로 불쌍하구나. 저 여인, 지금은 비록 갈 때까지 간 여인이지만 분명히 기회만 주어지면 다시 설 수 있을거야"하는 생각과 함께 여인을 살리자는 판단을 내리십니다.
예수님은 문제 앞에 섰을 때, 판단의 기로에 섰을 때, 언제나 적절하고 소신에 찬 대응을 하셨는데, 그 대응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대응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결정은 자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의 결정이 보다 복음적인 것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보다 자주 복음서를 펼칠 필요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의 복음을 우리 삶 가운데로 끌어와야 합니다. 복음의 생활화,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구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수단입니다

율법주의와 자기중심주의
-전삼용신부-
언젠가 한 신자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결혼 한지 얼마 안 되는 자매인데 아기를 낳고 몸이 허해져서인지 자꾸 가위에 눌린다는 것입니다. 여러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안 되어서 다시 성당에 다니기로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좀 냉담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 보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아기가 아빠에게 안겨있으면 자꾸 울기 때문에 떼어놓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고해성사를 했고 성체를 영했는데 그 다음 주엔 산소 벌초를 하러 가야했기 때문에 또 미사에 갈 수 없었습니다.
또 남편에게 우는 아이를 맡기고 고해성사를 받아야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너무 힘겨워서 다시 냉담할 것만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해성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러 빠진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족 일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가족을 위해 사랑을 실천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죄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짓는 것입니다. 무조건 주일에 미사를 못 했다고 해서 죄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이런 상황이오면 주일미사에 빠진 것만 가지고 그 사람에게 죄를 씌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안식일 날 남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훔쳐 먹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법대로 하면 무엇을 훔친 것보다는 안식일날 일을 한 것이 더 큰 죄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다윗의 예를 들며 꾸짖습니다. 안식일 법이 있기는 하지만 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십니다.
율법주의자들의 특성이 결과만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이 위선적으로 겉으로 보이게만 잘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도 겉으로 보이는 결과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또 열심하다고 하는 신앙인 중에서도 하느님은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니 굳이 죄의식을 지니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죄를 스스럼없이 짓고 고해도 보지 않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제자들이 율법을 어긴 것이지 예수님은 절대 율법을 어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의 해석하여 율법을 정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율법은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겉모습만 너무 치우치면 속이 빈 율법주의자가 되고, 그렇다고 율법을 무시하면 자기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가 율법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기중심주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극단을 극복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수레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 상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에게 계약의 궤를 빼앗긴 일이 있었습니다. 계약의 궤는 성모님을 상징하고 그 안에 들어있던 십계명판은 율법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처음 블레셋 군과 싸울 때 계약의 궤는 실로라고 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사실 계약의 궤는 엘리라고 하는 예언자와 그의 두 아들, 또 온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소외받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키는 사제들인 엘리의 두 아들과 엘리까지도 사실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또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나갈 때 아예 하느님의 힘을 청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싸우러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쟁에 패하자 그들은 그제야 계약의 궤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들은 그 계약의 궤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생각했지만 블레셋 군들에게 패하고 계약의 궤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계약의 궤가 그들의 전부가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유용한 물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율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더 먼저 앞세우는 자기중심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계약의 궤는 블레셋의 신인 다곤상을 쓰러뜨리는 것은 물론이요 그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종기와 같은 질병으로 고통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 궤를 옮기는 마을마다 온갖 재앙이 들끓었습니다. 이들이 법은 지니고 있되 참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율법만 지니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는 율법의 참 정신을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율법을 지니고 지키는 것만으로 거룩하다고 여기는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입니다. 즉, 율법주의자들은 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 법 때문에 스스로 자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던 그들은 꾀를 생각해내는데 아기 송아지가 딸린 두 어미 소를 엮어 마차를 끌게 하고 그 마차에 계약의 궤를 싣습니다. 만약 벳 셰메시, 즉 ‘태양의 집’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동네로 곧장 걸어가면 그 질병이 계약의 궤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게 되리라 여겼습니다.
두 어미 소는 새끼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멀리하고 벳 셰메시쪽만 바라보고 걷습니다. 벳 셰메시는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고, 성전이며 그래서 ‘하느님나라’를 상징합니다. 아기 송아지의 울음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둘이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뒤에 계약의 궤가 실려 있었고 하느님나라라는 공통의 지향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죽이고 그 분이 가르치신 법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을 버린다는 뜻이고 계약의 궤를 운반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율법의 의미를 항상 잊지 않고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두 극단으로 빠지지 않아 마차가 멈추지 않습니다.
지나침은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 나라만 바라보는 노력, 율법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묵상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식일에 해야 할 일
-강영구신부-
+그때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 먹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 몇몇이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하고 말하였다.
그대에게
안식일(安息日)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편안하게 숨을 쉬는 날’입니다.
엄마 품에 안겨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면 안식(安息)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편안하게 숨을 쉬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맡길 수 있는 따뜻한 품이 있어야 합니다.
대지 깊이 뿌리내린 느티나무처럼 하느님께 귀의(歸依)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안식(安息)을 누립니다.
쪽배의 고물을 베고 풍랑 치는 바다 위에서 잠을 자는 예수(마태8,24)는 용감하거나 만용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안식일(安息日) 계명이 안식(安息)을 주지 않습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따뜻한 품이 안식(安息)을 줍니다.
하느님의 품 안에 머물며 안식(安息)하는 사람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폭풍우 속에서도 평안히 잠을 잘 수도 있고(마르4,35), 바다 위를 유유히 걸을 수도 있고(마태14,26), 군대 마귀와 대결하여 말씀 한마디로 그들을 굴복시킬 수도 있고(마르코5,9),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죽어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마르15,34).
안식일(安息日)에 해야 할 일은 하느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이나 욕망에 안주(安住)하는 일입니다.
자기 힘으로 서려는 자는 불안에 떨며 안식일에도 안식(安息)하지 못하겠지만,
하느님 품에 귀의(歸依)하는 자는 스스로는 약해도 늘 안식(安息)하게 됩니다.
당신의 오늘도 안식일(安息日)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사람을 살리는 법, 죽이는 법
-이기양 신부-
'고슴도치도 제 새끼털은 부드럽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도 있지요. 모두가 자기 자식이나 자기 사람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전혀 모르는 사람과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지적하는 율법학자들 앞에서 제자들을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마르7,1-8)
오늘 복음에서도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을 보고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루가6,2)하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적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야단치시기보다는 오히려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야단치시지요. 그리고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 안식일 논쟁은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대결하게 되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를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식일, 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안식일이 어떻게 다르길래 이렇게 극단적인 대립과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주님의 날"인 주일은 안식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쉬는 날"과는 그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이 날은 오롯이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하느님의 날이었지요. 성서에도 안식일의 깊은 의미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6일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7일 째 되는 날 다른 날과 달리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창세 2,2-3)
안식일의 첫 번째 의미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이지요. 또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받을 때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 대한 명확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 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출애 20,10-11)”
이렇게 안식일은 창조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날이요, 노예살이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민족사적인 축제의 날이자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감사와 찬미, 또 시나이산의 계약을 기억하는 축제일로 지내오던 안식일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하여 서서히 법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지요. 물론 처음에는 안식일을 제대로 잘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규칙들이었지요. 그런데 이 법규가 점차 세분화되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만들어지면서 서서히 사람들을 제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규칙을 만들어낸 사람들, 즉 율법학자들의 의견이 절대적인 세상이 되었지요. 또 그 법을 실행했던 사람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세분화된 율법과 그 율법을 만들어내고 실행했던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 못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힘을 얻은 사람들은 율법 본연의 정신보다는 법규의 복종만을 요구했습니다. 마음대로 사람들을 제약하고 자신들의 뜻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안식일의 법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러한 부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안식일법을 강하게 질타하시고 꾸짖으시며 바로 잡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성서에는 안식일법에 얽힌 예수님과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립이 여러 군데 묘사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안식일에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 수가 있습니다. 갈릴래아의 한 마을 가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는데(루가 4,31-37) 마침 그 날이 안식일이었지요.
안식일에 관한 두 번째 장면은 바로 오늘 복음 말씀으로 마르코 복음 2장 28절, 마태오 복음 1장 8절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먹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항의를 합니다. 안식일법을 어기는 예수님의 행위가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고 이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항의를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립은 점차 극으로 달려가지요.
세 번째,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팔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주시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노려보기 시작합니다.(마태12,9-14) 소문대로 안식일법을 무시하고 있는 예수님을 목격한 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것을 모의합니다.
네 번째는 십 팔 년 동안이나 허리가 굽었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신 장면입니다.(루가13,10-17) 지켜본 회당장이 트집을 잡자 예수님께서 꾸짖으시지요.
다섯 번째 안식일 논쟁은 역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수종병자를 고쳐주신 것에 기인합니다.(루가14,1-6)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일이 법에 어긋나느냐? 어긋나지 않느냐?”(루가 14,3)고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물으셨으나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안식일법에 대한 다툼은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극한 대립으로 결말이 나고 말지요.
“그 무렵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가야파라는 대사제 관저에 모여 흉계를 꾸며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마태26,3-4)
자기들이 만든 규칙과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는 율법을 변용하기도 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남들한테는 혹독하게 법들을 적용하였고 그 결과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법으로 안식일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법을 무엇보다도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살리는 법으로 해석하셨습니다. 법이나 규칙을 정할 때 사람을 살리려는 법이 있고 사람을 죽이려는 법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교육시키며 지키라고 내세우는 법은 어떻습니까?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것저것을 규제하지요. 자녀를 죽이기 위해서 규칙들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수가 상대방에게 들이미는 법은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법입니다. 똑같은 법도 어떤 마음을 갖고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을 억누르고 따돌리는 모든 법은 하느님의 뜻에 위배되는 법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 이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법은 사람을 살리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적용되어야지 죽이는 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잘못의 지적도 법의 적용도 근본적으로 사랑을 담고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인정도 사정도 없는 사람의 법
-박상대 신부 -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5,17)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에 이미 반감(反感)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때부터 그랬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일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고, 병의 뿌리로 간주되는 “죄를 용서한다.”는 말에 대하여 그들은 트집을 잡았다.(5,20-21)
이는 그들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이었고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이 다분히 종교적이었으며, 동시에 유대교의 기존 정서를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와 그 일행을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정하고 따라다니면서 감시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원래 감시자의 눈에는 좋은 것은 안 보이고 하자(瑕疵)만 보이는 법이다.
어느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예수의 일행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던 일로 또 한바탕 논쟁이 벌어진다. 루가는 마르코의 같은 대목(2,23-28)을 그대로 베껴 쓰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7절)는 구절은 의도적으로 삭제해버렸다.
남의 밭에 자라고 있는 곡식에 낫을 대지 않고 그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법적으로 허용된 일이다.(신명 2,26) 그런데 문제는 이 행위가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야 함은 십계명의 제3계명이다.(출애 20,8) 이 계명의 세부규정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쉬어야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은 야훼를 섬기는 거룩한 날이니 철저하게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출애 31,15; 35,2; 레위 23,3)
여기서 ‘철저하게 쉬어야 하는 것’의 목적은 이 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좀 애매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철저하게 쉬는 것인지 말이다. 따라서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39개의 세부지침을 만들게 된다.(미슈나 샤바트; 예루살렘 탈무드 참조) 바로 이 39개의 금령(禁令)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 즉 추수(秋收)하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먹은 제자들의 행동은 추수로 간주되어 안식일 법을 위반한 셈이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분명히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
예수께서는 사울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다윗의 일행이 몹시 굶주린 나머지 제단에 바쳐진 빵을 먹었다(1사무 21,1-10)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법에도 예외규정을 있음을 환기(喚起)시키신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 한해서는 예외규정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한낱 예외규정으로 제자들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는 것이다. 이제부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바로 안식일의 주인인 하느님이신 것이다.(느헤 9,14; 이사 56,4; 에제 23,38) 루가가 마르코복음을 베끼면서 27절(“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을 삭제한 이유도 이점을 더 강조하기 위함이다. 루가는 예수께서 율사들에게 하신 답변의 인본주의적 법이념보다 그리스도론적 법이념에 역점을 두려했던 것이다.
오늘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계명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겠다. 통상 주일의 성화(聖化)는 주일미사 참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일미사 참례의무는 교회법이 명기하고 있듯이 모든 신자의 의무이다.(교회법 1246조) 그렇다고 주일미사 참례 하나만으로 주일성화의 계명을 완수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교의 주일의무가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에서 유래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교회의 주일의무는 안식일 다음 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인류의 죄를 씻고 세상에 구원을 선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주일은 분명 부활신비를 기념하고 경축하는 날이요 기쁨과 해방과 구원의 날인 셈이다. 따라서 주일성화의 의무는 교회가 만든 법을 수행하는 것에 있다기보다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신 신비를 묵상하는 데 있다.
사람의 법은 법 자체의 이유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의 존재이유는 법 자체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법은 그 정신이 비록 인본주의(人本主義)에 있다하더라도 결국 사람의 복종을 무차별적으로 요구하며, 때로는 인정사정(人情事情)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목적으로 한 것이기에 거기에는 인정(人情)도 있고 사정(事情)도 있고 눈물도 있다. 하느님이 그 법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
오늘복음에서 안식일에 관한 논쟁은 주님과 바리사이들 간에 신랄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범하는 일은 그 범대로 집행한다면 사형에 해당되는 일임으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을 책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오늘 안식일 논쟁이 일어나는 상황은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어느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셨습니다. 이 때 주님의 제자들이 매우 시장한지라 그 밀밭에 있는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단죄한 것입니다.
1. 최초의 안식일
성서에 나오는 최초의 안식일은 창세기 2,1-3에 나옵니다. "이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창조주로 하느님과 함께 창조에 참여하셨기 때문에 주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골로 1,15-17). 안식일은 이처럼 원래가 하느님이 안식하신 날로 축복하신 날입니다. 하느님은 이같은 축복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려고 안식일을 율법에 정하시고 이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안식하신 안식일의 참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설명이 히브리서 4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제 7일에 관한 성서의 설명은 하느님의 안식으로 '나의 안식처'라고 말씀해 주셨으며 순종하는 자들이 그 곳에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2. 구약의 안식일
구약에는 모세의 율법에 처음으로 안식일에 관한 규례가 나옵니다. 율법에서 제 4계명으로 안식일의 규례를 주심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안식일은 절대적인 요소가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에 따라 지킨 안식일은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안식 후 첫날인 주의 날이 아니라 토요일입니다. 원래 율법이란 이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이 사람을 주장하여 단죄하였고 심판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안식일을 어기는 일은 곧 저주를 자초하는 일이며 하느님의 두려운 심판의 대상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지키는 생활로 올바른 관계를 얻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하시려는데 주신 목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모든 율법은 우리에게 저주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대신 받으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3. 신약시대와 안식일
그러면 신약 시대에 와서 안식일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해답이 성서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골로 2,16-17절에서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문제나 명절 지키는 일이나 초생달 축제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아무에게도 비난을 사지 마십시오. 이런 것은 장차 올 것의 상징에 지나지 않고 그 본체는 그리스도입니다."고 했습니다. 축제나 절기처럼 안식일도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축제일과 절기가 율법적인 절기로 폐해졌다면 안식일 역시 율법적인 절기로 폐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것을 법대로 지키지 못할 때 율법이 규정한 온갖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 율법적인 절기도 함께 지켜야 하며 율법에 규정된 모든 법도 온전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는 안식일이 없습니다. 실체가 되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그림자인 안식일은 다른 율법과 함께 폐해진 것입니다.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예배하는 날로 지키는 날은 안식일이 아닙니다. 주의 날, 즉 주일입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날을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안식의 완성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부활한 몸으로 안식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가졌습니다. 이 생명이 영생입니다. 영생이야말로 안식의 완성인 것입니다. 안식은 쉼을 얻는 것인데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이 안식일의 대용품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영원히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법에 얽매어 저주나 받을 안식일이 하느님을 경배하는 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한몸이 된 우리는 그의 영원한 생명과도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안식일과는 상관없이 이미 안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주의 날'을 주셨습니다. 주의 날은 율법으로 지키는 날이 아닙니다. 즐거움과 감사와 사랑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단죄하는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성서적인 근거를 대시면서 다윗왕의 경우를 예로 들어 공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한가지 사례를 들었는데 사제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폐해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구약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안식일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규례대로 주일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진정으로 하느님을 경배하는 날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안식을 희망하면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이날을 지켜야 합니다.◆
[두올묵상팀]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