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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묵상글 ( 연중 제7주간 토요일, -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언제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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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연중 제7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언제나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오늘 야고보서는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지 않고 무엇을 할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 고통을 겪을 때 의외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신론자들이지요.
이들은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니 고통은 물론
어떤 경우든 무엇을 하든 하느님과 관련 없이 생각하고 행위를 합니다.
하느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 가운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를 부정하지 않을 뿐 실제의 삶은 하느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실제 삶에 깊이 들어와 있지 않은 것입니다.
강론을 들을 때나 누가 하느님 얘기를 하면 그때 잠깐 그의 귀에
하느님께서 머물다가는 이내 자취를 감추시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 무엇을 합니까?
껌을 계속해서 씹듯 고통을 씹고 또 씹습니다.
고통에 대해 분노하고 고통과 싸웁니다.
고통 때문에 이웃과 싸웁니다.
그래서 고통 때문에 불행해지고 맙니다.
그런가 하면 고통을 남에게 토로합니다.
고통을 가지고 상담을 합니다.
이것은 혼자 고통과 씨름하고 불행해지는 것보다는 낫고
점쟁이한테 가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사제에게 가지 않고
하느님께 달려가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면에서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야고보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신자라면 고통이 있을 때
고통을 곱씹지 말고 기도하라고,
고통과 싸우지 말고 기도하라고,
고통으로 남과 싸우지 말고 기도하라고,
고통 때문에 불행해지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원망하지 말고 하느님을 원망하라고
어제 말씀드린 바 있는데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병 주고 약 주냐고 화를 내기도 하는데
하느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병을 주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불교는 모든 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렸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설혹 내 잘못과 내 죄로 병이 나고 고통이 왔을지라도
그것들이 하느님과 전혀 무관치 않다고 믿는 자들이고
그것들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무엇보다 치유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많이 먹어 간이 나빠졌을 경우,
내 잘못으로 간이 나빠진 것이 분명하지만
벌로 주셨건 사랑의 매로 주셨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 벌로 하느님을 만나건 사랑으로 하느님을 만나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 기도이고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언제나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고 신앙이어야 한다고 오늘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즐거울 때는 하느님 찬양 기도가 나오는 것이 다를 뿐이겠지요.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즐거울 때 혼자 싱글벙글하거나 히죽거리지 말고
찬양 노래합시다. 오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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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저희 본당에는 다른 성당과 달리 아이들이 많습니다. 어린이 미사 때 120~130명의 아이가 나와서 열심히 미사에 참석합니다. 노래도 정말 크게 부르고, 율동도 얼마나 예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이 미사 시간이 성인 미사 시간보다 더 깁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열심히 그리고 너무 재미있다면서 미사에 임합니다. 저의 역량인 것처럼 생각하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면, 저와 아이들의 나이 차가 자그마치 40년이 넘습니다. 또 제가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결국 저의 능력이 아닌, 아이들 스스로 집중해서 그런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하면 태도가 180도 바뀝니다. 성가는 전혀 부르지 않고, 기도 손 하는 친구는 이제 찾기 힘듭니다. 청소년들은 말합니다. 미사가 너무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말입니다. 분명히 이 아이들도 어린이 미사 때는 열심히 했고 또 재미있어했는데 말이지요. 똑같은 미사인데 과거에는 재미있고, 현재는 재미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재미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재미에 너무 중독된 것입니다. 모든 중독성 물질이 그러하듯 재미에 대해서도 내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미있었던 일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재미와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이를 느끼는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미사에 흥미를 잃었으면 더 집중해야 가능했습니다. 더 집중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 너머를 볼 수 있는 것이 ‘감각’인데, 이 감각이 바로 믿음이 아닐까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집중할 때 예수님이 보이고 예수님께 주시는 사랑을 통해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이들의 이 감각을 말씀하십니다. 순수한 마음, 작은 것에서도 감탄하는 마음, 무조건 의지하는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풍요와 편안함만을 추구하면 절대로 믿음의 감각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천천히 걸으면 편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계속 뛰어다닙니다. 뛰어다니는 것이 더 재미있고 신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편하고 쉬운 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향해 순수한 마음으로 신나게 뛰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감각이 사라졌다 싶을 때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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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탁월함은 습관에서 나온다고 했다(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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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9장)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이라 함은 ‘하느님 나라’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들어가는 이’에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획득하는 나라’가 아니라 은총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어른 이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어린이는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른들은 ‘아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일 것입니다. 어린이는 어떤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모르기에 놀라워하고 경이롭게 여기고 경외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채로 받아들입니다. 곧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까닭입니다. 아인쉬타인은 말합니다.
“경외심을 느끼고 감탄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떤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그것이 이해가 되면 받아들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곧 지성적 동의를 통해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러니 아는 것을 통해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른 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선사된 것, 베풀어진 것, 선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요, 주어진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의탁과 신뢰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결국, 사랑을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습니다. 베풀어진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나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선사되고 주어져 이미 ‘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와’ 있는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오히려 막고 있는 이들을 깨우치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주님!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놀라워하고 경배하게 하소서.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속해 있고, 당신 생명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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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린이와 같은 사람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상을 차지하는 사람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 순수함을 지니고,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탁하는 마음을 회복하여 거듭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유다 사회에서는 12세 이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취사선택 없이 받아들입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뿌리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아직 잔머리를 굴리고 손익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잠시, 딴짓하다가도 부모가 안 보이면 놀라고 겁을 내어 다시 부모의 품을 찾게 됩니다. 또한 정직합니다. 잘못을 꾸짖으면 금방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순진무구, 천진난만! 전적인 의존성”
어느 날 가정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글을 알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기도하자 했더니 ‘식사 전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후딱 외워 내려갔습니다. 내용의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늘 부모와 함께 기도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어린이들이 성 시간에 참석하였는데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하던지요! 놀라웠습니다. 어떤 아이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꼭 안아주셨다고 하더라고요.
반 모임에 갔는데 18개월이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기도를 하는 중에는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기도를 마치며 참석한 교우들에게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해 드렸는데 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자기 할머니에게 가서 두 손을 펴서 머리에 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그래서 제가 그를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칭찬하고 왔습니다.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이가 되어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눈이 맑아지고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계산하면 하느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분명히 얻게 됩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어린이들의 축복을 가로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은 자유”라는 이론을 내세워 ‘유아세례’, ‘첫영성체’에 무관심한 분이 계십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무지한 부모입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종교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의 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의 교육 문제를 놓고 “나중에 커서 스스로 공부하게 될 때까지 신나게 놀아라.” 하십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보여주고 가르치며 신앙의 근본을 전수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커서 신앙의 가치와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는” 신앙인이 되고, 또 전해야 하겠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협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공부할 때, 학교 갈 때, 입시나 먼 길을 떠날 때, 군대 갈 때, 결혼할 때....늘 하느님의 축복을 청해주는 부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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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어르신 부부가 고백성사와 봉성체를 원하였습니다. 봉사자와 함께 찾아갔습니다. 형제님은 집에 있었는데, 자매님은 약속이 있다고 나갔다고 합니다. 전화를 드리니,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면서 형제님이 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재매님이 돌아왔고, 봉성체 날짜를 착각했다고 합니다. 봉사자는 하루 전날 확인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때로 착각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고백성사와 봉성체를 마치고 돌아오려는데 어르신 부부는 점심을 먹고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침 점심시간도 되어서 근처 식당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예전에 어른들은 ‘한(恨)’이 맺힌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던 부부에게도 ‘한(恨)’이 있었습니다. 3년 전에 사랑하는 아들이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신앙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감을 믿으면서도 어머니의 가슴에는 ‘한’이 응어리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픔을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어머니의 가슴에도 ‘한(恨)’이 있었습니다. 작은 형이 2004년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늘 밝고 화사했던 어머니도 가슴 한 쪽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깊게 남아 있었습니다.
저의 삶에도 한(恨)은 아니지만 몇 번의 아쉬움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의 임종을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2011년 5월 5일 목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교우들과 함께 기차로 떠나는 성지순례 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으로 갔습니다. 주교님께서도 오셔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창 신부님들이 미사를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2020년 9월 10일 목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당시 뉴욕에 있었고,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아쉽게도 한국으로 갈 수 없었고, 뉴욕에서 다른 분을 위한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추기경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미사를 잘 마쳤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평화방송 사장 신부인 동창 신부님이 어머니 마지막 가는 길을 영상으로 제작해서 보내 주었습니다. 1995년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제게 미국의 교포사목을 권하셨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느덧 3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열정은 넘쳤지만, 절제와 겸손의 덕이 부족했습니다. 부덕한 저의 탓으로 미국으로의 인사이동은 취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놀랍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좀 더 여물게 하신 다음 미국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진찰 한 후에 증상에 맞는 ‘처방전’을 만들어 줍니다.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으로 가면 약사는 처방전에 따른 약을 줍니다. 신앙생활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처방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기도’입니다. 즐거운 사람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찬양 노래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교회의 원로들입니다. 원로들은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발라줍니다.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처방전은 기도와 찬양 그리고 교회와의 연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 분노, 미움, 원한’의 쓰레기를 담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 희생, 나눔, 배려, 인내, 사랑’의 보석을 담으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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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린이와 같이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늘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씀은 또 어떤 의미일까요?
슈퍼맨 아시지요? 어린아이들에게 슈퍼맨은 하느님이 아니라 엄마와 아빠입니다.
어린아이들의 하느님은, 믿음의 대상은 엄마와 아빠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우리가 신앙하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어린이들의 믿음은 온통 엄마와 아빠에게 향해있습니다. 아플 때나 어려울 때, 슬플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 엄마와 아빠는 어린아이에게 슈퍼맨이 되어줍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못 하는 것 없는, 꼭 슈퍼맨 같은 존재가 바로 엄마와 아빠입니다. 엄마 아빠가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이러한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어른들처럼 조건에 따라 믿고 믿지 않음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저 믿습니다. 그저 의지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언제든 그 믿음을 하느님께 향하는 사람. 힘들 때도 하느님께, 슬플 때도 하느님께, 기쁠 때도 하느님의 품을 찾는 사람 말입니다.
모든 신앙인이 이런 모습이면 좋겠지만 사실 저도 그렇지 못하기에 반성에 반성을 더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믿습니다. 말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우리가 가진 경험을 믿고, 우리가 가진 지식을 믿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언제든 변할 수도 또는 사라질 수도 있기에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을 그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 하느님을 그 삶의 중심에 둔 사람. 그 사람은 오늘도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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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핸드폰을 듭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핸드폰을 듭니다.
우리 사는 모습이 다 이렇습니다.
어제는 어둠이 깔린 길을 걸으며
달에게 물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달에게 묻고 별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이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어서 달과 별에게 물었습니다.
답이 없는 문제여서 달과 별에게 물었습니다.
삶을 살다 보면 답이 정해져 있는 않은 질문을 우리는 받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핸드폰을 들어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고전적 방법을 써보세요.
달과 별에게 물어보세요.
어쩌면 답 없는 그 답을 찾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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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린이와 같이 되라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
오늘 복음의 소제목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구보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이라 생각합니다. 어린이는 순수한 인간 원형을 상징합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나이에 관계 없이 어린이가 살고 있습니다. 어제 저는 두분에게서 이런 어린이를 발견하고 기뻤습니다. 주고 받은 댓글의 일부,소개합니다.
“이 거룩한 요셉수도원에 와서
집을 짓는 일
미사드리는 은총
어린이같이 순수하신 수사님들 뵈면
매일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저에겐 싯귀처럼 예쁜 마음이 반짝였고, 저는 장미꽃 사진과 함께 다음 댓글을 보냈습니다.
“자매님 글이 시같이 아름답습니다. 축하드리며 장미꽃 사진 선물합니다.”
순수한 마음은 나이에 관계없이 소녀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살아있는 자연의 반응이 신비롭고 고맙습니다. 수도원 뜨락에 벌써 앵두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고 몇 개 따먹던중 이 장면을 포착한 수사님이 사진에 담았고 <앵두와 노수도승> 이란 시도 적어 보내줬고 어린이같은 순수한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노수도승이란 말을 읽으며 노수도승답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도 새로이 했습니다.
“오늘은 한 개
내일은 두 개
모레는 세 개 먹어야지
앵두와 함께 익어가는 수도승의 삶”
빙그레 미소짓게 하는 어린이같은 마음이 반짝이는 시입니다. 하느님 눈에는 누구나 사랑스런 어린이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13세였던 아이들이 지금은 60세인데 이번에도 수도원을 찾아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줄 때의 모습은 그대로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이었습니다. 올해 5월은 피정집 공사라 피정손님들을 받지 못했지만 예전 5월 소규모 인원의 피정때는 꼭 어린이날 노래, 동요를 불렀습니다. 노년에 속한 피정자들이 흥겹게 부를때는 그대로 어린이들같았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동심의 회복을 위해 동요부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날라라 새들아 푸른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벌판을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수도형제 모두가 흥겹게 부르는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저녁성무일도 세 번째 후렴과 시편 131장 후반부 내용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 그렇지 않고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
오늘 복음은 한폭의 살아있는 그림같습니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특징도 잘 드러납니다.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청하는 사람들 역시 순수한 아이같은 어른들입니다. 쓰다듬어 주는 사랑의 텃치, 스킨쉽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어렸을 때 어머니의 사랑의 스킨쉽이 결핍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공허한 마음에 영혼의 몸살을 앓습니다. 저는 동생이 생기기전 6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으며 컸습니다.
애정이 넘치고 치유하는 스킨쉽의 텃치는 아이들, 병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안아주라 있는 가슴이요 악수도 하고 등을 두드려 격려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라고 있는 또 만세를 부르라 있는 두 손입니다. 두발에 두손의 직립인간에 주어진 축복의 두 손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반응이 완고하기가 아주 권위적입니다.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은 바로 우리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일수 있습니다. 섬기는 일이 아닌 통제와 조종에 그 권위를 사용합니다. 순간 예수님의 개입이 기민합니다. 오늘 우리의 경각심을, 우리의 동심을 일깨우는 평생 교훈으로 삼아야 할 복음입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 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멋진 어른인지요. 매주 수요일 삼종기도후 강론전 베드로 광장에 어린이들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행렬하는 도중 아이들을 받아 쓰다듬으며 축복하시는 교황님의 모습도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큰아이 교황님처럼 보였습니다.
어린이다운 특징은 무엇입니까? 개방적인 열린 마음, 순수한 의탁, 편견없는 정신, 단순성이요 예수님은 물론 성인들이나 우리 주위에서도 우리는 이런 천진무구한 어른들을 간혹 만나기도 합니다. 칼릴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하여” 라는 잠언도 우리의 무지를 깨우칩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이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는 말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는 말라
큰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오늘 우리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7-8세기에 걸쳐 살았던 영국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도승인 성 베다 학자의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인은 7세때 수도원에 보내져서 원장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지도를 받으며 19세에 부제품, 30세에 사제품을 받았고 평생 어린이다운 순수성을 잃지 않고 베네딕도회 본연의 수도승생활에 충실했던 분입니다.
성 베다는 당대 가장 박학한 사람으로 존경받았고, 몇 차례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일생동안 늘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노동하며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한 수도승이었으며, 학문적 업적으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지혜와 학문을 높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존자(Venerable)”란 칭호를 받은 성인은 뛰어난 학자이면서 지극히 겸손했으며, “영국 역사의 아버지”라고도 불립니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회학자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시우는 성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베다 존자”라 불렀으며, 시성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국인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마지막 임종시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나는 오래 살았고 자비로우신 심판관께서는 내 일생을 당신 섭리로써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니 내 육신이 모두 사라져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 내 영혼은 내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갈망합니다. 손으로 내 머리를 받쳐주시오. 내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도록, 내가 즐겨 기도했던 성당을 향해 기대어 앉고 싶습니다.”
성인은 방바닥에 누워 영광송을 외우기 시작했고, “성령께”하고 말하는 순간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야고보 사도 역시 동심의 성인이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마지막으로 사도가 강조하는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역시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에 길이 없습니다. 기도가 어린이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니게 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어린이와같은 삶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동심을 회복해 아름답고 순수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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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린이와 같은 사람>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주는 대로 받고
받은 대로 주는
주는 만큼 받고
받은 만큼 주는
마음에
마음으로
웃음에
웃음으로
따뜻함에
따뜻함으로
부드러움에
부드러움으로
다가감에
다가감으로
착함에
착함으로
사랑에
사랑으로
주는 대로 받고
받은 대로 주는
주는 만큼 받고
받은 만큼 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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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연중 제7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마르 10,13)
회개에서 면제된 이는 누구인가?
자유롭게 의지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나이의 사람이 신자들의 성사를 받고자 할 때, 옛 삶을 회개하지 않으면 새 삶을 시작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아세례 받는 아기들은 이 의무에서 면제됩니다. 그들은 아직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에 데려오는 이들의 신앙은 유아의 성화와 원죄의 용서에 유익합니다. 다른 사람을 통하여 죄에 얼룩진 채 태어나지만, 또한 다른 사람의 물음과 응답을 통하여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어떤 그리스 학자는 말합니다. “하느님은 울타리처럼 자신의 모든 피조물을 에워싸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움직이게 하신다."
그 이유는 자연의 모든 것이 최고의 것을 끊임없이 열망하기 때문입나다. 창조계는 아들을 나타내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되도록이면 아버지도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모든 피조물이 시간을 벗어나 한없이 움직이기만 한다면, 창조계는 흠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 학자는 말합니다. “피조물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다른 것은, 창조계가 시간과 공간 속에 잠겨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을 짓는 사람은 먼저 마음속으로 집을 지어야 한다. 건축 재료가 집 짓는 자의 계획에 맞고, 건축자의 의도에 딱 들어맞는다면, 그 집은 건축자가 마음속에 생각한 대로 금세 지어질 것이다. 내적인 계획과 외적인 계획이 다르면, 낳음과 태어남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안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하느님인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흘려보냄과 흘러 나옴이 다를 뿐, 아버지와 아들은 다르지 않습니다.(176)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에 니파나는 유일신 신앙
이슬람교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일정한 형태와 조직을 이루고 있는 역사적 종단으로서의 종교들은, 그들 종교가 시작될 때의 단순하고도 순수한 영적 공동체로서의 일체성을 유지해 가기가 어렵게 된다. 종단 분열의 역사적 과정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몇 기지 이해될 만한 이유들을 열거해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종단이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 포교됨에 따라 각 지역의 수용과정에서 토착 종교들과 습합이 일어나고, 그 습합 과정에서 새로운 분파 운동이 발생한다.
둘째, 초기 종단 설립자들의 헌신적이고 금욕주의적인 경건한 영적 지도력은 후세 지도자들에 이르러 쇠퇴하면서 권력과 부와 명예욕에 침윤되고, 그 결과 그들 사이에 권력 투쟁과 정통성 논쟁이 일어난다. 이것이 종교사에서 흔히 발생하는 종파 분열의 큰 원인이 된다.
셋째, 종단이 발전하면서 경전 해석에서 신학적 견해 차이가 나타나며, 더 나아가 형식화되는 종교 의식과 경직화된 교리주의에 반발하여 신비주의가 발달하게 된다. 신비주의 운동이 반드시 종파의 분열을 촉진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신비주의는 초기 단계에서 종단의 교권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다.
다른 세계 종교들에 비하여 통일성과 단순성을 일사불란하게 지녀온 이슬람교 안에도 분파 운동이 발생하였다. 이슬람교의 분파들을 자세히 논하기도 어렵거니와 우리의 목적 또한 거기에 있지 않으므로, 대표적 종파인 수니파, 시아파 그리고 신비주의 운동체 수피즘만을 잠시 언급하면서 그 운동 속에서 이슬람교 유일신 신앙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수니파, 시아파, 수피즘 안에서 갈려져 나간 여러 분파 운동은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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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10,15)
우리 모두 다 어린이였습니다. 그런데 혹시 ‘어린이’의 의미를 아십니까? 사전에 보면 어린이는 나이가 적은 아이, 라고 규정되어 있더군요. 다른 관점, 곧 ‘늙은이’, ‘젊은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나이가 적은 어린아이도 ‘어린이’라고 부르면서 다른 세대와 대등하게 격상시킨 인격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1923년 「어린이」 잡지 창간호 처음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죄 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한울나라! 그것은 우리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까지든지 이 한울나라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모다 이 깨끗한 나라에서 살게 되도록 우리의 나라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이 창간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매우 비슷합니다. 「어린이」 잡지를 창간한 취지가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0,14) 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착안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린이를 귀하게 여긴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파 방정환 선생은 우리 민족의 희망인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성장하는 세상과 사회를 조성하자는 의도로 제언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 땅을 살아갈 모든 이가,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린이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깨닫고 실천하면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자고 당부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 앞서, 마르코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악령 들린 어린아이를 치유하신 것뿐만 아니라 제자들끼리 길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다툰 제자들에게 보고 깨달으란 의도에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껴안으시며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3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이런 일련의 일과 가르침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가실 곳이 어디든지 그 소문이 먼저 가 닿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되는 유다와 요르단강 건너편에도 이미 알려졌나 봅니다. 아마도 이런 경이로운 소문이 알려져, 마침내 자기 동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여보게 소문 들었나? 예수님이 우리 동네에 오셨다네 그려.’ 그래서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10,1) 라고 전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어린이의 특성 중 하나가 바로 호기심 아닙니까? 아마도 그곳엔 단지 어른들만 모여들지 않았겠지요. 분명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신다는 소문 즉,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세요. 예수님은 어린이를 껴안아 주시고 축복해 주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축복을 받게 해주려고 기를 썼을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부모가 서로 먼저 자기 자식들이 축복받게 하려고 하다 보니 서로 뒤엉겨 난장판이 되었나 봅니다. 그러자 결국에는 “제자들이 사람들을(=부모들을) 꾸짖었다.” (10,13) 라고, 분명하게 그 상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반응을 저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지나치게 격한 반응을 보면서, 예수님은 마음이 몹시 언짢으셨습니다. 왜냐고요. 제자들은 언제나 당신이 하신 일과 가르침의 의도를 알아차려 처신하기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듯’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 예수님은 화가 나셔서, “뭣들 하는 짓이냐? 내가 가버나움에서 가르친 것을 다 잊었느냐?”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화난 목소리에 부모들도 그렇고 아이들까지도 모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예수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0,14)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순간만큼, 제자들은 분명 어린이들과 같은 마음이나 처신은 아니었습니다.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태도이며 행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다시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10,15) 라고 제자들을 향해 직설적으로 언급하시고, 명확하게 알아듣고 깨닫도록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의 모든 어른은 마음에 새겨 간직하고,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때론 자녀를 둔 부모들이 불평하고 하소연하잖아요. 다른 아이들이나 어른들 앞에서 야단치고 호통치는 신부님을 보면서, 애들 주일미사에 보내고 싶지 않다고. 물론 아이의 부주의와 잘못이긴 하지만 때론 사제의 지나치게 격한 반응이, 복음의 제자들과 뭐가 다릅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10, 16) 얼마나 아름답고 경건한 광경이며 축복 넘치는 자리입니까? 바로 이 순간, 이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이며 교회의 참모습입니다. 어린이들은 단지 사랑한다는 말 이전에 자신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도록 표현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아이가 되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복음환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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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연중 제7주간 토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절마다 “어린이”라는 낱말이 되풀이됩니다.
이에 해당되는 그리스 말 ‘파이돈’은 세 살에서 다섯 살 정도의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이 나이의 아이들이 가지는 특징은 어른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따르며 믿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삶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고, 이렇게 하느님께 의존하는 삶의 자세가 역설적으로 인생을 무엇보다도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비결임을 강조합니다.
야고보서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독서의 내용이 이러한 역설을 확인하여 줍니다.
독서에서는 고통을 겪으면 하느님께 기도하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찬양 노래를 부르며, 아픈 사람이 있으면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주어지는 상황을 수용하도록 강조하는 것입니다.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온전한 신뢰와 의존으로 단순하게 하느님께 다가가는 어린이들과, 어린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를 막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무엇보다도 힘들어하는 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사건을 ‘막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비록 그것이 고뇌와 갈등을 일으키더라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면’ 예수님께서는 결국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하여 주십니다. 그것이 구원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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