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기리시이땅 시대의 대표적인 일본인 순교성인 바오로 미키는
1564년에서 1565년 사이에 일본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568년 부친인 판다유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인은 1580년 예수회 교육기관인 세마나리오에 입학하여, 1589년 22세 때 예수회에서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신앙이 독실하고 재능이 뛰어난 그는 사제 수업 동안에도 예수회의 오르간티노 신부를 수행하여 게이한 지방에서 포교에 힘썼습니다.
1597년 1월 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그리스도교 금압령에 의해 체포된 성인은 1598년 2월 5일 나가사끼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이때 같이 순교한 일본 26성인중 일본인 20명 가운데서 중심인물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최후의 설교를 한 후, 신앙을 위해 의연하게 순교하였습니다.
1862년 다른 25명과 함께 시성되었는데 나가사끼 교구에서는 성인의 축일을 특별히 기념합니다.
그와 함께 순교한 평신도들은 다음과 같다.
목수이던 프란치스코는 박해 광경을 지켜보다가 십자가형을 받았고,
19세의 가브리엘은 프란치스칸의 문지기였고,
레오 기우야는 미야코 출신의 목수였으며,
요아 킴 사가키바라는 오사카의 프란치스코회 주방일을 하던 분이고,
디에고 키사이는 예수회의 보조자였으며,
베드로 수케고스마 다케야, 벤투라 등이다.
이들은 모두 1862년, 일본 순교자들로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바오로 스즈끼
일본 오와리 출신인 성 바오로는 1584년에 예수회원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프란치스칸 3회원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교리교사로 사제들을 도왔다.
바오로는 25명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나가사끼 교외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 밥티스타
스페인의 아빌라 교외에서 태어난 그는 1567년에 프란치스칸이 되어 멕시코 선교사로 떠났다가, 1583년에는 필리핀으로 갔다.
또 그는 일본에서도 활동하다가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크리스챤 박해 때에25명의 다른 크리스챤들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레오 가라수마루
한국 태생인 그는 원래 이방 종교의 사제가 되었으나,1589년에 일본에서 예수회원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첫번째 재속 프란치스꼬 회원이 되었고, 또 전교 회장이 되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일본 내의 크리스챤 박해 동안, 그와 25명의 다른 교우들은 1597년 2월 5일에 나가사끼 교외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와 함께 그의 동생 바오로 이바라끼 및 그들의 20세 되는 조카 루도비꼬 이바라끼가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1862년의 일본 순교자로 간주되어 시성되었다.
성 필립보
스페인 부모를 두고 멕시코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필립 라스 카사스이다.
그는 처음에 푸에블라에서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으나, 1589년에 수도회를 떠나 장사꾼이 되어 필리핀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또 다시 생각을 바꾸어, 1593년에 재차 마닐라의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다.
1596년, 그가 사제서품을 받기 위하여 멕시코로 돌아가던 중에 그의 배가 항로를 잃고 일본에 기항하였다.
그는 1596년에 체포되었으며, 다음 해에 나가사끼에서 25명의 신자들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1597년의 일본 순교자로서 1862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동방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서구 열강의 정복 민족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정복하는 데에 골몰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부분의 정복자들과는 달리, 로욜라의 이냐시오를 따라 한 분뿐이신 임금께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506년 스페인 나바라(Navarra)의 하비에르(Javier)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수학하던 1534년에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를 창립하였다.
1541년에 성 이냐시오의 권고를 따라 포르투갈령 인도로 가서 선교하였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참회하는 모범을 보였으며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뛰어난 설교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켰다.
그는 인도(1541-43,48,51-52년)와 스리랑카(1544-45년), 몰로카스 제도(1545-47년) 그리고 일본(1549-51년)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이러한 활동적인 모습은 그리스도교 모든 젊은이에게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정열을 쏟으라는 격려가 된다.
그는 1552년 중국으로 들어가던 도중 상찬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순교자의 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창조의 가장 큰 신비 중의 하나다.
’혼돈 이론’에 따르면 지구 한쪽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면 지구 반대편에서는 그것이 엄청난 기후 변화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주는지는 ‘혼돈 이론’까지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잘 알고 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마음에 깊은 상처와 균열을 만들기도 하고, 한 조각의 선행이 영원한 거룩함의 물결을 일으키기도 한다.
추운 2월의 어느 날 아침, 예수회 수사였던 바오로 미키는 다른 25명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나가사키가 건너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다.
그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 자신의 피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하는 비가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아무런 응답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60년대, 일본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재 정착한 후 조사해 보니 나가사키 주변에만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의 피는 소망대로 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적셔서 200년 후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어 오게 했던 것이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후손에게 신앙의 유산을 전할 것인가?
나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해 준 분들에게 감사한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