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힙한 여행지 4곳
지난달 21일 부산 기장군 아홉산숲을 찾은 윤수현(22)씨가 밝게 웃고 있다.
요즘 부산 여행의 최신 트렌드는 해운대와 광안리 바닷가를 ‘건너뛰는 것’이다. 여행이 일상이 된 지금 사람들은 끊임없이 ‘색다른 장소와 콘텐츠’를 찾아 나선다. 이런 여행 흐름에 비춰보면 부산의 대표 여행지인 해운대와 광안리는 지루한 영화처럼 식상하다. 여행 트렌드세터들(감각이 뛰어나 유행을 이끄는 사람들)이 찾는 부산 여행지는 따로 있다.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에 부산 여행을 계획한 이들을 위해 ‘부산의 가장 힙한 4가지 여행지’를 지난달 20일부터 3일간 둘러봤다.
‘아홉산숲’의 대나무 노랫소리
지난달 21일 오후 1시. 부산 기장군 철마면에 있는 ‘아홉산숲’에는 습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늘 향해 쭉쭉 뻗은 나무들은 바람에 조응이라도 하듯 사각사각 울었다. 아홉산은 9개의 봉우리를 품고 있어 붙여진 순수한 우리 이름이다. 가장 높은 봉우리의 해발고도는 고작 361m. 평탄하고 아기자기한 산이다. 이곳에 조성된 숲은 52만8952㎡ 규모다.
지난달 21일 부산 기장군 아홉산숲을 찾은 지역 주민들.
매표소를 지나 숲에 들어서자 금강송 군락지가 제일 먼저 반겼다. 기장군에서 지정한 보호수로, 수령이 400년 넘은 소나무들이다. 한반도에 흔한 게 소나무 숲이라 큰 감흥은 없었다. 이 숲의 진짜 얼굴은 2~3분을 걷자 나타났다. ‘굿터 맹종숲’이란 글자가 적힌 팻말이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공터 주변에 대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이곳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유독 이 터에 대나무가 자라지 않자 아홉산 산신령의 기운이 서렸다고 여겼다. 불행이 닥칠 때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굿판을 벌였다. 터 주변 대나무들은 인간의 불안과 염원을 지켜봤다. 10~20m 크기로 쭉쭉 뻗은 대나무들은 지름도 20㎝ 정도로 굵직했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대나무 품종 중 가장 굵다는 맹종죽이다.
대나무들 사이에 커다란 돌기둥 2개가 서 있었다. 낯익다. 드라마 히트 제조기 김은숙 작가의 ‘뜻밖의 망작’으로 꼽히는 ‘더 킹: 영원의 군주’ 촬영을 이곳에서 했다. 기둥은 촬영을 위해 세운 것이다. 비단 이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2014), ‘대호’(2015) 등도 이곳이 촬영지다.
드라마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기둥은 포토존으로 ‘흥행 중’이다.가족과 함께 온 윤수현(22)씨도 동생 찬웅(16)군과 사진 찍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대나무가 울창해서 멋있고, 자연이 그대로 느껴져요.” 찬웅군의 감상이다. 휴대전화 사진 속 수현씨는 밝은 노란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대나무와 절묘하게 어울려 아이돌 스타처럼 보였다. 이들 가족은 “힐링하러 왔다”고 했다. 해운대나 광안리를 갈 이유가 없다고 했다.
지난달 21일 부산 기장군 아홉산 숲에 있는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 촬영지. 부산/박미향 기자 mh@hani.co.kr
숲 탐방로의 길이는 3.2㎞. 다 도는 데 약 1시간30분 걸린다. 숲에 조성된 편백나무, 삼나무, 굴피나무 등도 아름답지만, 압권은 두번째 만나는 맹종죽숲이다. 면적이 1만평에 달해 만평대숲이라고도 부른다. 빽빽한 대나무 숲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서로를 탐하며 춤춘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는 이들은 눈을 감는다.
대나무가 불러들인 바람이 귓가에 맴돈다. 고요한 평화가 찾아온다.전국 최대 규모인 이 두 맹종죽숲은 주인이 있을까. 이 숲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고난의 역사에도 300여년간 지키고 가꿔온 남평 문씨 집안의 노력의 산물이다. 현재 9대 장손인 문백섭(66)씨가 가문의 사명을 이어가고 있다. 치과의사인 그는 조부 문의순(1983년 작고)과 부친 문동길(2000년 작고)에 이어 조림과 육림에 힘쓰고 있다.
본래 이 숲은 훼손이 우려돼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지만 영화 촬영지로 소문이 나면서 개방을 요구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2017년께 문을 열었다. 입장료는 성인 1인당 5000원. 탐방로에 적힌 주인의 당부가 눈에 밟힌다. “낙서된 대나무는 모두 베어내고 있습니다. 낙서의 속도가 너무 빨라 감당키 힘든 지경입니다. 낙서가 많아질수록 대숲은 점점 줄어듭니다.”
‘커피 보물섬’ 변신한 영도
“육백삼번 손님, 육백삼번 손님….” 김초엽 작가의 에스에프 소설에 등장할 법한, 기계음과 유사한 차가운 음성이 매장에 울려 퍼졌다. 흰색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실내와 비교되게 창밖으로는 부두에 정박한 녹슨 배가 보였다. 산등성이에 빽빽하게 들어선 해진 아파트와 멀리 감만부두에서 보이는 무역선 등이 대조되면서 멀끔하게 자리잡은 거대한 카페는 더욱 세련돼 보였다.
부산 영도구의 카페형 복합문화공간 ‘피아크’의 전경. 선박수리회사가 지은 건축물답게 피아크는 거대한 크루즈 모양이다. 피아크 제공
피아크의 실내. 박미향 기자
지난달 22일 찾은, 부산 영도구 대표 ‘핫플’ 카페 피아크의 첫인상이다. 직원들은 “동양 최대 카페”라고 자평한다. 피아크는 지하 1층, 지상 6층 건물에 총면적이 1만693㎡에 이르는 대형 카페형 복합문화공간이다. 4층에 펼쳐진 베이커리 카페의 좌석은 1000석이 넘고 면적만 1983㎡다. 2021년 문을 연 이후로 연간 70만명이 찾는 명소가 된 데는 피아크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경치와 ‘고구만주’ 등 100가지가 넘는 베이커리 등이 한몫했다.
피아크는 선박수리회사 제일에스알그룹 류제학(41) 대표가 지었다. 창업주 류인석 회장의 아들이다. 피아크가 멀리서 보면 커다란 크루즈 모양인 이유다. 류 대표는 영도 토박이다. 대학도 영도에 있는 한국해양대를 졸업했다. 그는 “지역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어서, 영도를 부산 관광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어서” 피아크를 건축했다고 한다.
영도 일대가 보이는 피아크의 야외 데크. 박미향 기자
‘피아크’의 당근주스와 커피. 박미향 기자
‘피아크’의 사과 모양 케이크. 박미향 기자
영도구는 2021년 행정안전부가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한 89개 지역 중 부산 동구, 서구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인적이 드물었던 거리는 이제 매년 늘어나는 여행객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 중심에 피아크를 포함해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는 ‘카페’가 있다. 손민수 부산 로컬여행 전문가는 “2012년 6월 기준 카페가 10개밖에 없던 영도에 지난해 6월 기준으로는 200개가 넘는다”며 “입지 선정에 까다로운 스타벅스도 2개나 들어섰다”고 말했다.
봉래장 물양장 터로 여행을 온 이. 박미향 기자
‘모모스커피’의 카페라테. 2019년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전주연 바리스타가 함께하는 이 카페는 마니아들이 많이 찾는다. 개업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명성에 걸맞는 맛을 유지하고 있다. 박미향 기자
부두의 풍경이 인테리어인 카페 ‘원지’. 박미향 기자
봉래동 물양장(소형 선박이 접안하는 부두) 터에 자리 잡은 ‘모모스커피’, ‘무명일기’ 등도 일찌감치 영도 커피 문화의 초석을 닦은 카페다. 문 연 지 석달 된 ‘원지’는 피아크의 ‘경치 콘텐츠’를 잇는다. 물양장 창고를 개조해 만들었는데, 실내 한쪽 벽이 통창이다. 분주한 부두 풍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런 흐름의 영향으로, 지난해 7월께 부산시는 봉래동 물양장 인근 ‘봉래나루로’ 600m 구간을 커피특화거리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그해 11월엔 영도 커피 페스티벌도 열렸다. 흰여울문화마을, 깡깡이예술마을, 봉산마을 일대,
일대, 봉래산 중턱 등에 있는 카페들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영도는 ‘커피 보물섬’이다.
‘기장군 카페 문화’ 인기를 끌어낸 ‘웨이브온 커피’의 야외 풍경. 박미향 기자
기장군 해변 따라 줄줄이 연 카페들도 부산 여행의 진풍경이다. 2016년 개장해 그해부터 대박 행진하며 ‘기장 카페촌 문화’를 연 ‘웨이브온 커피’는 대표적인 ‘바다 뷰 카페’다. 월내리 절벽에 세워져 독특한 풍광을 자랑한다. 이 카페의 명당은 파란 쿠션 수십개로 꾸며진 야외 마당이다. 이곳에서 파는 건 커피만이 아니다. 바다를 친구 삼아 ‘잠시 멈춤’ 할 수 있는 여유 시간이다.
‘웨이브온 커피’가 바다를 소재로 만든 케이크. 박미향 기자
웨이브온 커피의 성공이 기폭제가 되어 남쪽 일광해수욕장까지 카페 수십곳이 들어섰다. 베이글 베이커리숍을 겸한 ‘메이크씨’도 바다가 코앞에서 보인다. ‘디원 베이커리 카페’는 그리스 산토리니를 모방한 조형물로 촬영 스폿을 제공해 화제다.
그리스 산토리니를 떠올리게 하는 ‘디원 베이커리 카페’. 박미향 기자
‘소금빵 베이글’ 등을 파는 카페 ‘메이크씨’. 바다를 보며 먹는 재미가 있다. 박미향 기자
요트 타고 해운대·광안대교로
부산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요트 투어. 박미향 기자
여행지의 낮과 밤은 같은 장소여도 다른 얼굴로 여행자를 맞는다. 지난달 21일 저녁 7시. 수영만요트경기장 계류장에 정박된 요컴퍼니 요트를 탔다. 여행사 부산여행특공대 누리집을 통해 전날 신청한 야경 투어를 하기 위해서였다. 투어는 ‘퍼블릭’과 ‘프라이빗’(요트 전체 임대)으로 나뉘는데, ‘퍼블릭’을 골랐다. 이용료는 1시간 남짓에 2만5000원. 현재 부산에서 영업하는 요트투어 업체는 대략 40군데다. 업체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가격은 대략 성인 1인당 2만5000원~3만원대다.
부산 야경 요트 투어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 박미향 기자
요트 투어의 백미인 폭죽 이벤트. 같은 시간대에 하기 때문에 다른 배에서 터지는 폭죽쇼를 볼 수 있다. 박미향 기자
해 지기 직전 바다는 고요했다. 요트에는 음유시인의 노래가 흘렀다. 경력 10년의 이주영 선장은 “요트 투어는 제주, 여수 등에도 있지만, 도시의 야경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데는 부산뿐”이라고 했다. 그가 운전대를 잡자 요트는 천천히 바다로 향했다. 어두워지는 속도에 맞춰, 요트는 누리마루아펙하우스, 해운대 일대 고층빌딩, 달맞이언덕, 오륙도, 이기대를 거쳐 광안대교 쪽으로 움직였다. 직장인 홍승완(40)씨는 두번째 부산 요트 투어라고 했다.
아들 주원(9)군이 말했다. “요트 타는 건 처음인데요, 바다를 가까이에서 봐서 좋아요. 스릴 있어요.” 가족, 중년 연인, 20대 커플, 나 홀로 셀카족 등 다양한 이들이 승선해 있었다. 붉은 천을 뒤집어쓴 것처럼 도시가 노을로 물들기 시작하자 광안대교가 보였다. 대교 위 차들의 불빛이 별빛 같았다. 조용필의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의 한 소절이 들리는 듯했다.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요트 투어의 마지막 백미는 배에서 터트리는 폭죽이다. 위험하지는 않을까. 홍상기 요컴퍼니 대표는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터트리기에 안전하다”고 말했다.
부산에서만 가능한 쇼핑 여행
부산 수영구 부두의 일상이 창밖 풍경으로 다가오는 ‘밀락더마켓’. 박미향 기자
‘밀락더마켓’의 극장식 좌석. 박미향 기자
지난달 22일 찾은 ‘밀락더마켓’은 수영구 일대의 ‘핫플’이다. 오전 10시 오픈 시간 전에 이미 긴 줄이 늘어섰을 정도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로마 원형경기장처럼 만든 계단식 좌석. 맞은편 통창에서 들어오는 풍광은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이다. 수리를 앞둔 낡은 선박이 보이는데, 영화 ‘밀수’의 권 상사(조인성)와 장도리(박정민)가 한판 붙고도 남을 장소로 보였다.
이곳은 더베이101과 올드트리마켓을 운영하는 기업 키친보리에가 지은 쇼핑 겸 문화공간이다. 뉴욕의 오래된 창고를 떠올리게 디자인됐다. 대지면적 7722㎡, 건축면적 4447㎡ 규모다. 베트남 음식점 ‘랑’, 하이볼 바 ‘디도’ 등 식당, 옷 가게, 사진관 등 가게 25곳과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다.
마을형 리조트 겸 복합문화공간인 ‘빌라쥬 드 아난티’ 쇼핑존 ‘엘.피. 크리스탈’. 박미향 기자
지난달 18일 문 연 리조트 겸 복합문화공간 ‘빌라쥬 드 아난티’도 독특한 쇼핑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고급 숙박시설과 별도로, 연면적 1만9834㎡ 규모에 조성된 복합문화공간 ‘엘.피. 크리스탈’ 때문이다. 지난달 20일 찾은 ‘엘.피. 크리스탈’은 유럽이나 미국의 소도시처럼 고불고불 길을 내 여행하는 기분이 들게 공간 구성이 되어 있었다.
‘마린룩의 대명사’, ‘130년 역사’ 등 화려한 타이틀이 따라다니는 의류 브랜드 ‘세인트 제임스’는 카페를 겸한 매장을 열었다. 서점 ‘헤이즐’엔 예술 서적들을 비롯해 독특한 책들이 즐비하다. 86개 브랜드가 입점한 편집숍들과 15개의 독립 매장들은 각각 색감과 실내 인테리어를 달리해 보는 맛을 준다. ‘르블랑’ ‘베이커리’ ‘카포티’ 등 식음료 매장들도 들어서 있다. 미식가가 주목할 만한 데는 지하 식품매장 ‘모비딕 마켓’이다. 신기한 모양새의 먹거리가 배치돼 있다.
마을형 리조트 겸 복합문화공간인 ‘빌라쥬 드 아난티’ 쇼핑존 ‘엘.피. 크리스탈’. 박미향 기자
‘빌라쥬 드 아난티’는 바로 옆에 있는 ‘아난티 코브’보다 2배 넓은 16만㎡ 규모로 조성된 마을형 리조트다. 단독 빌라, 펜트하우스, 아난티 앳 부산호텔 등 총 392개 객실과 복합문화공간, 5개의 수영장, 11개의 야외 광장으로 구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