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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Niccolò Paganini
본명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ò Paganini)
출생
1782년 10월 27일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사망
1840년 5월 27일
프랑스 공화국 니스
직업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서명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Paganini Caprice No.24) 영화 파가니니 :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中 |
Niccolò Paganini : Caprice No. 24 In A Minor
공연 중 그의 발치에는
사슬이 감겨 있었고
'악마'가 나타나 그의 연주를 도왔다.
하인리히 하이네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한들,
무감각한 철자와 죽은 단어의 나열,
그저 해독 불능의 상형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빈 공연 직후,
바이올린 협주곡 3번 E장조
연주에 관해 논평한 신문 기사 中
1. 소개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린
파가니니는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군림했던
바이올린, 비올라, 클래식 기타 연주자이자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그는 역사상 최고의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19세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의 상징이며,
낭만주의를 예고했으며
비르투오소의 시대를 연
최초의 비르투오소이다.
2. 생애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몇개월이면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유명해졌고
재능을 눈치챈 아버지에 의해
모차르트처럼 하루에 10시간씩
혹독한 연습을 하게 되었다.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어린 나이에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 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밀라노,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천재적 재능을 뽐내며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명성은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 모자, 장갑, 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에
정착하였다
말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 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좋지 않아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사망하였다.
3. 평가
리스트, 브람스, 망고레 등
여러 유명한 작곡가들이
이 사람한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리스트는 젊은 시절
직접 그의 연주를 듣고
나는 죽어도 저 사람의 연주 실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저 사람이 바이올린을 한다면
나는 피아노로서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하여간 듣는 이를
거품 물고 쓰러지게 만들 만한,
기교로만 따지면
바이올린 분야에서
피에트로 로카텔리 이후
참 오랜만에 나타난 세기적 천재였다.
그의 연주는 기교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마력이 있었다고 하며
그를 좋지 않게 보던 사람들도
그의 연주를 듣기만 하면
뿅가 죽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기절했다고 한다.
심지어 관객들이
집단으로 히스테리를
일으킨 적도 있다고 하니
파가니니가 말년에
루머에 시달린 데에
기교도 기교지만
이 점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쇼맨십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바이올린을 G현만으로
연주하거나
활 대신 나뭇가지를 써서 연주하고
개, 고양이, 당나귀 등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신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연주에
기교뿐이고
진지한 마음이 없다는 식의
혹평을 받기도.
도박에 손을 댔다가 빚을 져서
가지고 있던 바이올린을 처분했는데
한 사람이 파가니니 이외의
사람이 연주하지 않게 한다는 조건으로
과르네리를 넘겼고,
파가니니의
'내 바이올린,
내 영혼을 이제부터
영원히 제노바에 기증하노라' 라는
유언에 따라
이탈리아 제노바 시청에서
보관 중이다.
하지만 악기는 써 주어야
소리가 유지되기 때문에
Mario Trabucco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정기적으로 연주해 주고 있으며
악기 제작자 등,
여러 관리 위원들이
관리 해주고 있다.
또 5년 주기로 10월 12일에
Premio Paganini라는
콩쿠르가 열리는데
이 콩쿠르 우승자에게 여
러 부상, 또 녹음 기회와 함께
과르네리 캐논으로
연주를 할 수 있는
특권을 준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몇 개의 악보도 남긴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기타를 공식적으로
남들 앞에서 연주한 적은 없었는데,
바이올린처럼
압도적인 연주를 보여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그의 기타곡은
크게 자신을 후원해 줬던
귀부인들을 위한
중간 정도의 난이도를 가진 곡과
프로들을 위한 난곡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음악도
적극적으로 기타용으로 편곡되고 있다.
공연을 자주 나가서
돈은 많이 벌었지만
무리한 나머지 건강이 악화되어서
죽을 날을 앞당기게 되었으며
거기에 젊어서
여자를 여럿 후리고
다닌 나머지 매독까지...
말년에는
실력이 하도 사기적인 나머지
악마와 계약했다느니 하는
루머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런 그도 아들이 하나 있었다.
젊은 시절 마구잡이로 살던
그가 어느 여자인지도 모르던 이와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었다는 것.
늘그막에 이 아들을 되찾아
극진히 아껴주었고
10대 후반인 아들에게
마음껏 살라면서
좀 더 너에게 잘대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자주 말해줬다고 한다.
아들을 맡으면서
막장 인생을 좀 자제해서인지
제법 많은 재산을 남겨줬다.
파가니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은 아버지를
고향에 있는 교회 무덤에 묻으려 했으나
악마와 계약하여
안된다고 거부당했으며
결국 고향에 묻힐 수 있게 되기까지
아들은 엄청 로비한 끝에
1886년, 무려 46년이 지나서야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자기가 직접
그런 '악마' 소문을 퍼트렸다는
말도 있는데
"바이올린에 무슨 수작을 했기에
그런 소리가 나느냐?" 라며
시시콜콜 캐묻는 주교에게
짜증이 나서 대충
'내 바이올린엔 악마가 있고
내 활에도 악마가 있고
나도 악마니 알아서 하쇼!'라는
뉘양스의 말을 했다가
이런 참사가...
또 다른 설로는
당시에 기교가 만만찮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아서
크게 두각을 나타낼 수 없자
파우스트를 보고
악마를 컨셉으로 잡았다는
말이 있다.
또는 이미 주제페 타르티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기교를 얻었다는
소문이 퍼졌던 걸 보면
그런 스토리를
자신의 마케팅에
적절히 활용했을 수도 있다.
이런 뒷얘기로나 실력이나
생전의 행적을 놓고 보면,
능력에 비해
인성과 행적이 엉망인 예술가들에게
흔히 붙는 '악마의 재능'이란
꼬리표가 매우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를 다룬 영화는 여럿 있는데
심지어 그가 악령으로 되살아나
사람을 죽인다는 영화도 있다.
악령 파가니니
(Paganini Horror, 1989)라는 영화로
추억의 영화
라스트 콘서트를 감독한
루이지 코지가 감독하고
할로윈 시리즈에서
단골로 나온 배우 도널드 플레즌스가
나온 이탈리아 영화이다.
영화 수준은 그냥 그런 졸작.
파가니니가 사탄을 찬양하는
곡을 남겼다든지
고인모독급 소재가 나온다.
2013년에 그를 다룬
독일, 이탈리아 합작 영화
'파가니니 :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Paganini : The Devil's Violinist)'가
개봉했다.
감독은 베토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
호러영화 캔디맨으로 알려진
버너드 로즈.
주연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한
데이빗 가렛이 담당했다.
연기력은 꽤 아쉽지만
프로배우가 아니므로 어쩔 수 없고
바이올린 연주만은
파가니니의 실력을 제대로 재연하여
영화에서 밥값은 충분히 했다.
한줄로 연주했던 일화를 재연해냈다!
한줄로 연주한 곡은
모세환상곡이라는 곡으로
아예 G선만 쓰도록 되어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연주기법을
비밀로 붙였으며,
자신의 음악을 악보로 남기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던 데다가
제자도 '시보리' 한 명뿐이라서
그의 기법 중 상당수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작곡의 경우,
연주 분야만큼의
수준을 인정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때문에 그가 남긴 작품은
음악적으로 연주 실력만큼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특유의 강렬한
비르투오소적인 인상으로 인해서
지금도 그의 음악은
작품성과 별도로 많이 연주되고 있다.
아울러 타 음악가들에 의해
바이올린 외의 악기로 편곡되거나,
이에 영감을 받은 작품들도 적지 않다.
제노바 태생의 천재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
여기에 영면하다
묘비명
라 캄파넬라(바이올린 협주곡 2번) 연주 - 일리야 칼러 |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No.24 연주 - 다비드 가렛 |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No.5 연주 - 알렉산더 마르코프 |
베니스의 사육제 연주 - 다비드 |
4. 음악 목록
파가니니의 작품 번호는 MS를 사용한다.
Maria R. Moretti와
Anna Sorrento가 연구했다고 한다.
MS 작품번호가 붙지 않은 것도 있는데
자세한 것은 위키백과나
IMSLP 를 참고하길 바란다.
•바이올린 소나타
•바이올린 협주곡 1~6번
◦바이올린 협주곡 1번(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라 캄파넬라
•Op. 1, MS 25, 24개의 카프리스
(caprice) 1~24
◦카프리스 24번 A단조
•MS 19, 레스트레게(Le Streghe) -
발레음악을 모티브로 한 변주곡
•MS 23, 모세환상곡 -
정확히는 로시니 오페라
모세의 아리아에 의한
G선상의 변주곡이다.
줄여서 모세환상곡으로 불리며,
G현만으로 연주했다는 곡이
바로 이 곡이다.
•MS 59, 베니스의 카니발 -
변주곡의 형태이다.
영화에서 연주하다가
현이 3개 끊어진 곡이 바로 이 곡.
•MS 84, 기타를 위한 37개의 소나타
•MS 109,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칸타빌레
5. 일화
•8살 때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써놓고 자기도 어려워서
연주를 못했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파가니니의 연주 솜씨에 반해서
결혼을 하고 싶은 한 여가수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친구들이 알려주자
파가나니가 '아니 결혼?
바이올린 연주를 공짜로 들으려고 하다니...
이런 얌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어느 걸인이
바이올린 연주를 할 때
파가니니가 걸인을 대신해서
연주를 했더니
그 소리에 매혹되어
사람들이 걸인에게
많은 돈을 주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있다.
6. 여담
러시아의 헤비메탈 밴드
아리야(Ария)의 1989년 곡인
불꽃연주곡(Игра с огнём)이
파가니니에 관한 곡이다.
황제부터 거지까지
모든 사람들의 사악한 욕망을
까발리며
그 분노에 시달리고,
자신은 악마 따위에게
영혼 따위는 팔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는 것에
괴로워하는 파가니니와
그런 파가니니를 비웃으며
지옥으로 오라고 유혹하는
악마의 대사가 일품.
절대로 아이언 메이든 노래가 아니다
들어보면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 24 일부를
편곡해 집어넣은 걸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장미가 있는데,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신의 퀴즈 시즌 1에서 나온
대사에 따르면,
파가니니는
'앨러스-단로스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이 있었고,
오히려 이 때문에
손가락이 남들과는 다르게 움직여서
그 특유의 엄청난 기교를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1831년에 발간된
파가니니의 주치의
베나티의 회고록에 의하면,
파가니니의 일반적인 손의 크기보다
월등히 크거나 했던 것은 아니지만,
손의 각 부위가 상당히 잘 늘어나서
왼손의 포지션을 바꾸지 않은 채로
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를
구부릴 수 있었고,
거의 두 배 가까운 길이로
손을 뻗을 수 있었다고 한다.
베타니는 파가니니의 음악이
기본적으로 타고난 신체를 바탕으로 한
끊임없는 노력과 연습의 결과라고 말했다.
앨러스-단로스 증후군에 대해서는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수록되어 있어서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이나,
학자들은 거인병으로 널리 알려진
마르팡 증후군이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어쩌면 둘 다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구글에 의하면
파가니니의 공식 키는
5' 5"(약 165cm)이나,
묘사에 의하면 키가 일반인보다
월등히 큰 것으로 나온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시는 19세기판 위너였을 듯.
•DIAVOLO는 음악 자체가
파가니니의 곡을 어레인지했고,
제목의 유래도
'악마(Diavolo)의 바이올리니스트'란
파가니니의 별명에서 왔다.
•피아노 전공생들이
프란츠 리스트를 가장 어렵고
힘든 작곡자로 많이 뽑는다면,
현악 전공생들은 파가니니를
많이 뽑는다.
그 중 카프리스 24곡은
입시곡으로도 연주되는데,
이게 난이도가 대학과정 와서도
꽤나 힘들 만큼 어렵다는 것.
의외로 첼로를 위한 곡도 있는데,
그것마저도 한 개의 줄만 이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