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따뜻한 하루 뉴스레터
1951년 4월 13일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한 강뉴부대 파병 출정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돕고자 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
약한 나라의 서러움을 너무나 잘 아는 그들은
6.25 전쟁이 발발한 아시아의 또 다른 약한 나라를
돕기 위해 출정에 나섰습니다.
강뉴부대는 16개국 참전군인 중에서도 가장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5차에 걸쳐 6,037명의 강뉴부대원들이 참전하였고,
123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기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만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53번의 전투에서 전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강뉴부대원중에는 월급 일부를 에티오피아로 보내지 않고,
'보화원'이라는 보육원을 만들어 전쟁고아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잠을 잘 때는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 곁에서 지켜줬다고 합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때문에 가족을 뒤로했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다해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중 형제가 전쟁터로 향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Desta와 Mekonen, 세계 평화를 위한 집단안보를 실천하기 위해
황제근위병이란 멋진 자리도 버리고, 만류하는 가족들까지 뒤로한 채
죽음이 기다리는 땅을 향해 형제가 뜻을 같이한 것입니다.
빛바랜 사진 뒤에는 그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습니다.
'한국의 상황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열악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생전 처음 겪는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였으나,
그에 따른 추위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쟁터에서 형 Desta씨는 싸늘한 주검이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조국을 위한 것도 아니고, 가족을 위한 것도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그렇게 목숨 걸고 싸웠지만, 휴전이 되어 에티오피아로 돌아왔을 때
목축업으로 살아가던 에티오피아에서는 7년간 계속된 가뭄으로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해 어려운 상황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소득이 80$가 채 되지 않았을 때,
에티오피아의 국민 소득 3,000$가 넘었던 나라가
그렇게 기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게다가 멩게스투라는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국가가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싸우겠다고 스스로 지원했던 참전용사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과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뉴부대원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에티오피아,
그 에티오피아에서도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 되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우리 중 누구라도 나서야 했습니다.
따뜻한 하루는 지난해 처음으로 강뉴부대원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없이 부끄럽고 감사했습니다.
과연 대한민국 국민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가슴 아픈 역사를 알고 있을까요?
지금도 강뉴부대원 분들은 우리를 피를 흘린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옳은 일을 했다는 자부심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지하무덤에 쓸쓸히 잠들어 계신 123명의 전사자분들과
아직 생존해 계신 참전용사와 그들의 후손들...
그리고 6,039명의 강뉴부대 전 대원들의 희생을
우리는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따뜻한 하루가 다시 그분들을 만나러 갑니다.
오는 2월 21일 따뜻한 하루 가족 8명과 KBS 다큐멘터리 방영을 위한
영상팀이 함께 에티오피아로 떠납니다.
강뉴부대원들 한 분 한 분을 직접 찾아뵙고,
많은 분을 대신하여 감사의 인사와 후원금 전해드리겠습니다.
또 후손들로 이루어진 강뉴합창단을 응원하고,
결연 아동 가정도 방문할 예정입니다.
* 무통장 후원계좌- 국민은행 : 757101-04-132242 (사단법인 따뜻한 하루)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평화를 위해 열심히 싸워주신 분들,
그러고도 가장 비참하게 사셨던 분들을
이제라도 기억하고 조금이나마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계속해서 그분들을 도와주시고, 따뜻한 관심 부탁드립니다.
따뜻한 하루가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뉴스레터에 나왔는데, 정말 몰랐던 내용이라 가져왔어요. 이번 글이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길)
+ 파견 과정 추가 설명 (출저 : 국민일보)
“어느 나라가 침략군에 침략당한다면 다른 나라가 도와줘야 한다.” 1950년 7월 중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으로부터 한국군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자 즉각 지원을 약속했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을 당시 국제연맹에 지원요청을 했지만 어느 나라도 도와주지 않았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다른 나라를 도울 형편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시 이탈리아로부터 무장해제를 당해 군사장비는 낙후됐고, 1950년 영국의 지원을 받아 10개 대대를 창설했지만 대부분 황실근위대여서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셀라시에 황제는 황실근위대에서 1200명을 차출해 1개 대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들은 영국군 교관들로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뒤 1951년 4월 16일 수송선에 올랐다. 셀라시에 황제는 1069명으로 구성된 1진 부대에 ‘강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격파하다’는 뜻의 단어다. 20일간 항해 끝에 5월 6일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 제1대대는 2개월간 미군 교관들의 집중적인 훈련을 받고 미 제7사단 32연대에 배속돼 6·25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강원도 화천 북쪽 노동리에 배치된 이들은 전방에 배치된 지 3일 만에 중공군과 격전을 치렀다. 9월 16일에는 적근산 일대 삼현 부근에 적이 장악한 700고지와 602고지를 공격해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602고지 탈환으로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부대표창을 받기도 했다. 1952년 3월 29일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 제2대대는 중부전선 삼각고지에서 중공군과 싸웠고, 1953년 4월 16일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 제3대대는 휴전 때까지 강원도 춘천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고지전을 치렀다. 에티오피아군은 3차례에 걸쳐 6039명이 참전해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다. 이들은 월급을 본국에 보내지 않고 부대 안에 ‘보화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에티오피아는 극심한 가뭄 등으로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1971년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 참전용사들은 심한 핍박을 받아야 했다. 공산주의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을 겪은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보은(報恩)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첫댓글 ㅠㅠㅠ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잊지 않을게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치 ㅠㅜㅜㅜ 도와준건 얼핏 들은것같은데 나도 자세하겐몰랏어 진짜로 ㅠㅠ 내가 미국에서 연수할때 에티오피아 아줌마랑 5개월 살앗거든 정말 유쾌하고 다들 재밋고 정많더라 ㅠㅠㅠㅠㅠㅠㅠ 흡
마쟈 춘천에 에티오피아 참전기념관 있어 .. 어렸을땐 에티오피아란 나라조차 생소해서 지나다니면서 저게 뭘까 그랬는데 ㅜ 알고 나니까 지날때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야 ㅜㅜ
헐...춘천갈때가볼걸 알앗더라면 ㅠㅠㅠㅠㅜ후 나중에가봐야겟다 좋은정보고마워여 ㅠㅜㅜ 그러게 진짜 월급을 우리나라에쓰시고 좋은자리까지버리고오셧다니...정말 대단하셔
감사합니다 어렴풋이 어디서 들은 기억만 있었지 제대로 몰랐어ㅜㅜ죄송해요 기억할게요
아 가까이 있고 위치도 알고있었는데도 정확히 몰랐어 진짜 부끄럽다.
감사합니다 ...
너무 놀랐어.. 진짜 처음 알게 된 얘기고 지금 막 어렵게ㅜ사신다는 얘기 들으니까 너무 안타깝고 그렇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