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초(心境抄) — 마음결의 기록
요즘의 바다는
한결 너그러워진 듯하다.
항해는 짧아지고,
휴가는 길어졌으며
인터넷은 바다를 육지처럼 만들었다.
뉴스는 실시간으로 흘러들고
책과 영화, 음악은
파도 너머의 시간을 끌어왔다.
육지의 리듬이
해상 위에도 고르게 퍼졌다.
그러나 한때의 바다는
그리 다정하지 않았다.
존중은 멀었고
항구를 떠나면
수십 일간 세상과 단절되었다.
입항의 순간,
작은 전화국 창구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국제전화를 신청하고
몇 시간을 기다려
몇 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하루 품삯이 지불되었다.
말은 아껴야 했고
그 아낌은
때로는 생존의 기술이었다.
고립된 공간은
감정의 용광로가 되었고
갈등은 잦았으며
술은 실패와 부끄러움을 낳았다.
그 소음에서 벗어나
조용한 기록이 시작되었다.
얇은 종이 위에
마음의 흐름이 베껴졌고
그 기록을 ‘심경초’라고 나는 불렀다.
귀국이 가까워지면
선미 갑판 위에
낡은 일기장이 펼쳐졌다.
한 장씩 뜯긴 종이는
바람 속으로 띄워졌고
파도 위를 미끄러지며
슬픔과 외로움,
부끄러운 고백을 실었다.
그것은 바다와의
마지막 인사였다.
종이는 물결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순간마다 놓아주는 일이 반복되었다.
놓음은 살아남기 위한 연습이었고
잃음과 놓음이 교차하는 사이
몸은 가벼워졌고 마음은 깊어졌다.
시간이 흘러
흩어진 심경초들이 다시 모아진다.
그때의 바람,
그때의 파도,
그때의 고독과 그리움이
종이 위에 내려앉았다.
잊혔다고 믿었던 문장들이
기억의 저편에서
빛을 띠며 되살아난다.
한 장의 종이는 어린 조각배처럼
손에서 떠나 바다 위를 춤추며
어느 항구의 바위에 걸리기도 했다.
어떤 조각은 먼 해안에 닿아
누군가의 신발 밑에 찍혔고
어떤 조각은 물새의 부리에 실려
다른 섬의 모래 위에 내려앉았다.
그 흩어진 마음의 조각들은
한데 꿰매어 책이 되려 한다.
꿰매는 일은 손의 작업이며
그 손은 오래된 상처를 기억한다.
실은 젊음의 결을 닮았고
바늘은 그 결을 지나며
조용히 꿰매어 나간다.
심경초는 이제
단지 개인의 기록이 아니다.
바다에 흩어진 마음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 서사시가 된다.
그 서사시는
항구마다 남겨진 향기와 소리,
과거의 싸움과 화해,
웃음과 눈물로 짜여진다.
기억의 문장 하나하나는
밤의 등불처럼 빛나며
오래된 갑판 위를 밝힌다.
그 빛을 따라
얼굴들이 더듬어지고
어떤 얼굴은 친절했고,
어떤 얼굴은 날카로웠으며
어떤 얼굴은
한밤의 폭풍처럼 사라졌다.
그때의 체온,
그때의 대화,
그때의 고요—
모두 종이 위에 눌러진 흔적이 되었다.
그 흔적들은
누구였는지를 묻는 질문이 되었고
어느 항구에서 웃음이 남겨졌으며
어느 밤에서 울음이 흘렀는지
바다의 목소리처럼
부드럽고 날카롭게 되묻는다.
심경초를 모으는 일은
돌아다니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돌아보는 행위이며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붙여 넣는 작업이다.
한 장의 종이가
손에 들려 먼 바다를 향하면
그 바다는 더 넓고,
또 더 넓다.
젊은 날의 등불은
잔불이 되어
바람 속에서 아스라히 흔들리지만
그 잔불조차 밤의 길을 비춘다.
그 길을 따라
문장 하나가 입에 물리고
또 하나가 더해진다.
문장들은 연이 되어 어깨에 매달리고
그 연은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
어떤날에는
갑판 위에서 싸움이 있었고
어떤 날에는
하늘 아래서 서로의 등불이 나누어졌다.
싸움의 기록은 종이에 남겨졌고
위로의 말은 조용히 적혀졌다.
그 말들은 먼 훗날 손을 내밀어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었다.
심경초는
애도와 회한만을 담지 않는다.
그 안에는 함께했던 시간들의 냄새,
서로의 작은 친절이 쌓여 있다.
한 번도 알지 못했던 웃음이
문장 속에서 다시 울리고
그 울림은 또 다른 가슴을 두드린다.
다시 모아진 심경초들이 펼쳐지면
파도는 종이의 가장자리를 적시며 속삭인다.
속삭임은 오래된 친구의 음성 같고
그 음성을 따라
단어들이 줄지어 세워진다.
그 사이로 젊음은 웃고
후회는 눈물로 번진다.
이제는
그 서사시가 바다 위에 띄워지지 않는다.
종이는 가만히 접혀
책이 되고 책장이 넘겨질 때마다
잊혔던 항로들이 돌아온다.
그 항로들은
더 이상 외로운 길이 아니다.
수많은 이름과 얼굴들이
그 위에 적혀 있고
각자의 등불이 밤을 밝힌다.
읽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은 등대가 될 것이며
등대는 다시 누군가의 항로를 비출 것이다.
그러므로 심경초는 떠난 후에도
누군가의 손에 닿아
따뜻한 차 한 잔처럼 전해지리라.
마지막으로,
심경초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항로이며
놓아주는 법과
붙드는 법을 배운 기록이다.
잃음 속에서도
다시 엮어지는 생의 방식이다.
바다에 흩어진 조각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되고
그 책은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흩어진 마음의 조각들은 결국
단순한 기록을 넘어
존재의 물결이 된다.
놓음과 붙듦, 잃음과 회수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꿰매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 나간다.
기억의 파도는 고요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길을 잃는 일은 없다.
바다는 모든 것을 품고,
흘러간 시간조차 의미로 돌아온다.
우리 또한 마음의 항로 위에서
항구 없는 삶을 항해하며
손에 쥔 조각을 놓기도,
다시 꿰매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과 만나
삶의 무게를 가늠하는 법이다.
흩어진 조각 하나하나가
다시 모여 책이 되고,
책이 다시 누군가의 항로를 밝히듯,
우리의 삶도 서로를 비추며
고유한 등불이 된다.
그래서 마음의 항로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놓아도 사라지지 않고,
흩어져도 흔적을 남기며,
우리 존재는 바다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 서 있다.
잃어버린 마음결의 항해
나는 찢겨진 고백이었네
마음의 항로 끝에서 버려진
사랑의 유품이었네
선미 갑판 위 마지막 작별
바람에 몸을 맡긴
얇은 종이의 무게
그것이 나의 영혼이었네
바다는 침묵하는 거울이 되어
나를 받아주었도다
물결은 지우지 않고
오히려 고대 지도 펼치듯
나의 항로를 드러내 보이니
소금물이 잉크를 녹이지 않고
기억의 금박을 입혔네
파도는 기록을 파묻지 않는
침묵의 서기관
바다여, 너는 나의 첫 독자이자
영원한 보존자이니
나는 이제 종이가 아니라
파도 위를 춤추는 이야기의 배
파도의 마루 넘어
심연의 골짜기 지나
세상의 모든 해안을 향하노라
어떤 조각은 북방의 얼음바람에 실려
항해자의 낡은 부츠 아래 머물고
어떤 조각은 남방의 따뜻한 모래 위에
이름 모를 새의 부리에 실려가네
흩어짐은 소멸이 아니었도다
흩어짐은 영생을 향한
우아한 확산이었네
물결이 나를 흙으로 돌려보낼 때
비로소 깨달았노라
종이는 사라져도
문장은 영원하다는 것을
나의 단어들은 이제
바다의 언어가 되었네
슬픔을 담았던 잉크는
밤바다를 가르는 파도의 선율
작은 친절의 기록들은
먼 항구에 울려 퍼지는
갈매기의 노래
새벽 안개 속 닻을 올리는 이여
그대가 듣는 파도의 속삭임이
바로 나의 말이니
나는 침묵의 스승이 되어
모든 선체 아래에서
조용한 교향곡을 연주하노라
폭풍우가 몰아칠 때
그대 가슴을 두드리는 격렬한 진동
그것이 나의 젊은 날
싸움의 기록이니
잔잔한 날 수평선 너머
느껴지는 고요한 그리움
그것이 내가 적어보낸
사랑의 고백이니
흩어졌던 마음의 조각들은
시간을 따라 다시 모여드네
세상 모든 물이 순환하듯
내가 떠나온 바다로 돌아오니
나의 문장들은 존재의 물결이 되어
나의 영혼을 향해 끝없이 밀려오네
나는 이제 한 권의 책이 되려하노라
종이와 잉크가 아닌
놓아주는 법과 붙드는 법으로
엮인 생의 방식
상처를 꿰매는 이 손길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고요한 봉합의 의식
바다는 모든 것을 품네
흘러간 시간조차
의미로 되돌려주니
우리는 항구 없는 삶을 항해하며
조각을 놓기도
다시 꿰매기도 하네
이것이 항로의 완성이니
심경초가 가르쳐준
영원한 대화의 방식
나는 흩어져 불멸하였고
불멸하여 마침내
나 자신의 바다가 되었노라
바다의 언어를 듣는 자
나의 잉크는 이제 검푸른 액체가 아니니
종이에 갇혀 흐르던 그리움과 회한이
바다를 만나는 순간
물리적 법칙을 넘어서도다
슬픔을 머금었던 그 액체는
이제 밤바다를 가르는 파도의 언어
그 소리는 단순한 물결의 충돌이 아니라
외로운 선실에서 숨죽인
영혼의 진동이었네
파도가 스치며 내는 속삭임
그것은 내가 입 밖에 내지 못했던
가장 깊은 비밀의 고백이었도다
함께한 시간의 기록들은
하늘을 가르는 날카로운 노래가 되었네
먼 항구의 새벽
갈매기가 전하는 기억의 편지
그 울음 속에는
어느 추운 밤 나누었던
담배 한 모금의 따뜻함이 스며 있고
절망의 나락에서 건네주었던
묵묵한 손길의 무게가 녹아 있도다
울음은 짧고 날카로웠으나
그 간결한 선율에
수많은 미소와 눈물이 응축되었으니
갈매기는 기억의 수호자가 되어
바다 위를 영원히 순례하노라
나는 깨달았도다
나의 단어들이 바다의 언어가 되었음을
이제 그것은 눈으로 읽는 글이 아니라
귀로 듣는 시요
피부로 느끼는 노래요
가슴으로 해석하는 우주이니
바람의 속삭임에는
젊은 날의 맹세가 스며들고
배가 물을 가르는 소리에는
인생의 갈림길이 녹아 있도다
나는 파도의 리듬 속에서
한때 적었던 문장들을 다시 듣노라
그것이 고독 속에서 되뇌이던
가장 진실한 자서전이었음을
모든 항해자는 나의 언어를 이해하네
한밤의 고요 속에서도
달빛에 흔들리는 선체는
마음의 음악으로 변하니
영혼의 파도와 하나 되노라
나의 흩어진 문장들은
길 잃은 방랑자에게 속삭이리
"길은 목적이 아니라
너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니라"
잉크가 남긴 은밀한 메시지는
잔잔한 수평선처럼 펼쳐져
바다를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클라리넷처럼 슬프고 아름답게 전해지네
나는 이제 종이가 아니니
나의 기록은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바다에 깃든 기억의 총체
영원히 떠도는 목소리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이의 돛대에
자유를 노래하는 바람이 되리
나는 파도가 되었노라
나의 말은 영원한 울림이 되어
이 세상 모든 항로를
위대한 서사시로 노래하리
갈매기의 울음, 연대의 노래
파도는 우리를 갈라놓는 장벽이었으나
수평선은 고립을 증언하는 푸른 봉인이었네
배 안의 좁은 공간에
영혼의 거리는 더 넓었으니
서로의 시선을 피하던 날들
폭풍보다 무서웠던 것은
침묵 속에 자라난
마음의 벽이었도다
그러나 바다는 또 다른 증인이었네
생존의 긴장 속에서
피어난 작은 기적들
밤샘 당직 끝에 건네진 찻잔의 온기
말없이 잇던 밧줄의 매듭
가장 어두운 순간
나누었던 무언의 확인
그것은 말이 아니라
함께한 고요의 무게
흔들리는 어깨에 건네진
조용한 손길의 시(詩)였네
그 모든 작은 연대는
종이에 적히지 않았으나
가장 시적으로 부활하였네
먼 항구의 새벽
갈매기 날카로운 노래로
그 울음소리에는
서로의 등을 지켜주던 서약이
두려움을 나누었던 용기의 파편이
스며 있도다
이는 새의 노래가 아니라
고독한 바다 위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의지했음을 증명하는
가장 순수한 서사시이니
이제 갈매기의 울음은
서로를 비추는 등대가 되었네
그 울림을 따라 새로운 항해자가
돛을 올릴 때
그는 깨달으리
바다는 혼돈을 주지만
인간의 의지는 그 안에 길을 내며
그 길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님을
작은 친절이 생명의 닻줄이 되어
무너짐을 지켜주었음을
우리 모두는 바다처럼
항구 없는 삶을 살아가나
갈매기의 노래로 서로의 안부를 묻네
신뢰의 무게는 가벼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바다 위를 떠도는
영혼의 선율이 되어
가장 외로운 순간
우리의 연대는
새로운 노래로 다시 시작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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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결의 기록, 심경초
思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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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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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음결의 기록인
장문을 읽게 되네요.
영혼이 흐느끼는
감정이 스며있네요. 감사합니다.
긴 글 감상해주심에 김사드립니다.
지기님의 귀한 방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