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항해사(航海士)
1. 《화성호(火星號) 별이 되다》
나라의 그림자가 짧아지던 어느 아침,
빛을 그리는 장인의 손끝 아래
과거의 흔적과 새 꿈이
한 줄기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세월은 지나도 역사는 지워지지 아니하였고,
그 위에 다시금 더 아름다운 길이 피어났다.
개성 상인의 굳은 주먹 속에
부정 대신 정직이 피던 날,
먼 라스페치아의 조선소에는
조심스러운 희망이 이르렀다.
쇠와 불에 지친 유럽의 손길 사이로
우리의 결이 스며들었고,
현금 대신 신의(信義)를 약속한 계약서 위에
일곱 별의 이름이 아로새겨졌다.
십 년의 바다로 갚기로 한 약속,
수성과 금성, 화성과 목성, 토성에 이르기까지——
한양의 혼과 경주의 영광이
하늘의 별빛처럼 바다로 내려앉았다.
화성호는 작고도 뜨거웠다.
만 톤의 강철에 한 나라의 꿈이 실렸으니,
쇠내와 기름빛이 얽힌 새벽마다
삼등항해사 나의 첫걸음이 열렸다.
선원들의 굳은 손마디마다,
철판 이음새마다,
도면 위에 쏟은 밤샘의 계산마다
숨은 미래가 맥박치고 있었다.
이 배들은 채무의 배가 아니었다.
땀과 성실로 놓은 다리였으며,
산업의 혼을 바다로 띄운 수레였다.
햇빛에 달궈진 선체 위엔
여름 같은 사명이 내려앉았고,
부두의 바람은 우리를
계산보다 깊은 이름으로 불렀다.
몇 해 만에 모든 빚은 갚혔으나,
우리가 지킨 것은 숫자에 머물지 않았다.
그 성취는 조용히 대한민국의 심장에 스며들어
한 시대의 맥박이 되었다.
쇠와 불, 땀의 기록,
수많은 새벽의 응결된 결실——
그것이 곧 이 나라의 숨결이었다.
옛 유대의 격언이 이르기를,
“병아리를 빌리면 알은 내 것이요,
닭이 되면 원주인의 것이다” 하였으나,
우리의 배들은 그 알 속에서
스스로 깨어난 희망이었다.
항해의 매일은 시였다.
돛 아래 숨 쉬던 시간,
별과 폭풍의 얼굴,
선원의 친절과 분노——
그 모두가 배의 성정(性情)을 빚었다.
그날들의 기록은 이제
내 영혼의 닻이 되었다.
북서풍이 갑판을 스치던 날,
폭풍이 이마에 주름을 새기던 날,
모든 날들이 배의 이름을 완성하였다.
쇠는 식었으되 이름은 따뜻하였고,
그 울림은 지금도 내 가슴을
출항시키는 바람이 된다.
돌이켜보면 그 배들은
삶이 담긴 커다란 서랍이었다.
도면에는 남자의 꿈이,
엔진실에는 어머니의 기도가 깃들었다.
그 서랍을 열 때마다
나라의 새 얼굴이 하나씩 바다 위에 떠올랐다.
젊은 날의 떨림과 다짐,
밤새운 계산과 새벽 담배,
동료의 웃음과 말없는 고독——
그 모든 것이 항로가 되었다.
항해는 비로소 시작되었으나,
이미 그 갑판 위에는
나라의 혼이 실려 있었다.
세월은 내게 자리를 가르쳐 주었고,
이름은 가슴에 새겨졌다.
수성에서 토성까지,
한양에서 경주까지,
그 이름들은 이제
역사의 밤하늘에 영원히 빛난다.
내 첫 배, 화성호.
영문으로는 HWASONG——
붉은 별, 전쟁의 신 마르스 Mars.
그리스에서는 전쟁의 신,
로마에서는 명예의 신이라 하였다.
나는 스스로 물었다.
“첫 배가 전쟁의 신이라니,
이것이 우연인가, 혹은 예언인가.”
철갑은 무거웠고,
진동은 대지의 심장처럼 울렸다.
북서풍이 불어오고,
강철의 날개가 운명을 밀어냈다.
그때 나는 아직 젊었고,
삼등항해사의 모자 아래엔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컸다.
그 호기심은 첫 파도에서 세례를 받았다.
화성호는 말이 없었다.
거대한 선체는 묵묵히 바다의 중심을 갈랐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배웠다.
말없음이야말로 진정한 항해자의 언어임을.
그때 느꼈다.
이 이름이 단지 배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인생의 이름이 되리라는 것을.
그 속에는 분투와 인내,
그리고 명예가 숨어 있었다.
첫 폭풍이 닥쳤을 때,
나는 두려움 대신 이름을 불렀다.
“화성호는 꺾이지 않는다.”
그 믿음으로 파도 속 균형을 배웠다.
그리하여 알게 되었다.
화성이 내게 준 것은 전쟁이 아니라 의지,
승리가 아니라 견딤이었다는 것을.
그 이후의 모든 항해는
그 이름의 연장이었다.
화성호——
그것은 내 생애의 첫 파도이자,
가슴에 새긴 별자리였다.
그 별은 여전히 내 항로 위에 빛나며,
나는 지금도 그 별을 따라
삶이라는 더 큰 바다로 나아가고 있다.
終章 ― 삶과 항해의 동형(同形)
화성호의 첫 출항에서 배우는 교훈은,
항해가 단순한 기술의 숙련이나
목적지 도달이 아님을 보여주니,
파도와 바람, 폭풍속에서 균형을 잡는 과정은
곧 인간존재가 불확실한 세계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다.
삶 또한 정형화된 항로를 따르지 않으며,
모든 순간이 시험이자 학습이다.
폭풍 앞에서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그것을 넘어 이름을 부르는 믿음은
의지의 표상이 된다.
인간은 불가항력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지만,
자신의 내적중심을 잡고 선택을 지속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세운다.
화성호가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을 지녔다는 사실은,
인간의 삶 속 ‘힘’과 ‘투쟁’이
단순히 외적 승리가 아닌,
내적 인내와 의지의 실현임을 상징한다.
선체의 진동, 파도의 리듬, 바람의 속삭임—
모두 말이 없는 스승이다.
철학적으로 이는 체험 속 인식을 강조한다.
언어가 다 담아낼 수 없는 세상의 진리와 지혜는
경험과 몸으로 배워야 한다.
인간은 경험 속에서 세계를 읽고,
스스로 의미를 구성한다.
화성호에 실린 꿈과 노력,
별에 비유되는 이름들은 개인을 넘어
역사 속 불멸의 흔적이 된다.
이는 인간 삶의 연속성과 영향력을 상징하며,
인간 존재가 순간적이지만,
행위와 선택을 통해 시대와 우주적 차원에서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파도와 바람, 폭풍과 고요 속에서
발견되는 질서와 리듬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속에서도
미적 조화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인간의 존재는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호흡하며 조화를 이루는 것에 있다.
삶의 진정한 항해는 목적지가 아닌,
그 과정에서 배워가는 ‘견딤’과 ‘성찰’에 있다.
첫댓글
소설이라고 합니다, 오늘이...
건강 주의하십시요.
멋짐..보다는
장함..이라는 묵직함이 앞섭니다.
누군가의 일생을 엿보는 일.
漢詩안에는
여러방면의 스승님들이 많습니다.
나름 견딤?의 시간들은 보냈으니
내 어줍잖은 성찰의 시간에
많은 위로와 기준이 될 것이 확실한..
베프님 납심을 진심 반깁니다.
언제나 건강
이 순간도 건강
늘 건강하세요^^
저는 스승님들 근처에도 못가는 난봉꾼이었습니다.
마치 그리스 신 아레스처럼
요즘 겨우 정신이 좀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고맙게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휴일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귀한 발걸음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화성호!
꿈과 명예를 싣고 떠났다가
이제는
꿈과 노력을 바꾸어 싣고
무사히 돌아왔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덕담 슬쩍 남겨두고 다녀가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星號分蒼浪 화성호가 창랑을 가르니
思空得上功 사공님 큰 공력 얻으셨네
壯心成大業 장심, 대업을 이루어
懿跡入華宮 의적, 殿堂에 드나니
汽笛聲彌重 기적, 울림은 더욱 깊어지고
行船意益雄 행선, 의지는 더욱 굳세도다
今還非罷手 오늘 둘러봄은 멈춤이 아닌즉
餘燼再明東 남은 해 동녘 다시 밝히소서
=‘成爲火星號之星’讀後/隅川合掌
교수님의 한시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이런 우아한 작품으로 칭찬해주시니 몸둘 바 모르겠습니다.
제게 주신 한시는 다른 곳(제 졸저)으로 옮겨 보관하고자 합니다.
배도 잘 타셨지만, 글도 아주 잘 쓰십니다.
글을 접할수록 웅대함이 더해집니다.
감사합니다.
불민한 소생에게의
넘치는 칭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