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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2020년 2월 26일 코로나19로 온나라가 뒤숭숭하다.
초미세먼지,미세먼지 좋은 날이다. 오후 2시30분경에 사람이 별로 없고 조용히 산보할 곳을 찾다가 독산성 세마대가 생각나 봉담집에서 출발하였다.
코스:세마대 주차장[1.3km]→산림욕장[0.5km]→셋길[0.4km]→독산성둘레길서문[1.1km]→산림욕장[1.3km]→세마대주차장
시간:2시간30분 [중간에 쑥을 캔시간 포함]
독산성과 세마대에 대하여 알아 본다.
독산성은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성의 총 연장은 1,100m이며 내성은 350m이 달하는 아담한 산성이다. 독산성의 처음 축조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독산성의 위치적 특성이 용인, 양지 간에 있는 고성과 남한산성이 기각지세를 이루어 왕도의 문호를 굳게 한다는 전략상의 이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가 쌓은 고성이었고, 신라통일기나 고려시대에서도 군사상 요지로 되어 왔다. 독산은 본래 석대산, 향로봉이라고 불려왔고 조선시대에는 독산성이라 불려왔으나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폈던 진묘(眞妙)한 병법전략에 연유해 지금은『세마산』또는『세마대』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정상에는 이승만 대통령 친필의 세마대라는 현판이 붙은 누각 건물이 있다.
독산성은 군사기지로서의 주요 위치에 놓여있긴 하지만, 샘물의 부족이 흠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때문에 1593년(선조26) 명나라 원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남하함에 전라도 순변사이던 권율장군이 명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수복하고자 2만 명의 군사로 이곳에 진을 치고 대군과 대치한 독산성 전투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왜군은 이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탐정군사에게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냈다. 그러나 권율장군은 왜군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백마를 산 위에 끌어올려 흰쌀을 말에 끼얹어 말을 씻는 시늉을 하게 하였다. 이것을 본 왜군은 성내에 물이 많은 것으로 알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샘물의 부족한 단점을 권율장군이 슬기롭게 극복한 세마대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1957년에 복원되었다.
※ 1977년 간행된 전국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독산성 및 세마대지」의 연혁에 대해 백제때 축성된 고성이었고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중요한 요지로 되어 왔으며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주둔했고 변이중으로 하여금 화포를 발명, 제작케 하여 행주대첩에서 승전케 하였다. 또한, 임란후 조정에서 독산성에 세마대를 장엄하게 세우고 병기창을 두어 무예연습을 하게 하였으며 정조16년(1792년)에 독산성과 세마대를 중수하였다.
독산성 주차장
잣나무길
우측길로
신선교
중간에 우측 샛길로..
독산성 서문을 향하여..
오솔길을 400미터 걸으니 멀리 독산성 서문이...
서문
서문은 남문과 함께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정조14년 1790년 독산성에 행차한 정조가 서문을 통해 출입하였다.
이문은 순조 4년 1804년 현릉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폐쇄되었다.
파손 되어 있던 것을 1983년에 복원하여 정비하였으며, 바닥에 성문 고정시켰던 문확돌 2개가 남아 있다.
서문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서문에서 서쪽을 바라본 모습
우리 아파트가 보일 정도로 시야가 아주 멀리 보인다.
서남쪽 향남쪽을 바라보며...
오산 세마지구 모습
암문
암문은 평거식 성문으로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학석 2개가 남아 있다.
이문은 순조 4년 1804년에 현릉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서문을 폐쇄하는 대신 새로 지은 성문이다.
1985년에 복원하여 정비하였고 이후 2010년에 개거식 성문이 평거식 성문으로 복원 되었다.
독산성 모습
멀리 동탄 메타폴리스 건물이 우뚝기둥같이 보인다.
남문
남문은 독산성으 정문으로 진남루라는 문루가 있었다.
1831년 편찬된[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의 규모는 6칸 이었으며 남문을 영조,정조,순조때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 문으로는 말과 소가 다닐수 있었으며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하여 정비한 것이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학석 2개가 남아 있다
독산성과 세마대지를 발굴조사중 이다.
2018년 조사결과
- 조선시대 후기까지 생활한 흔적 확인
-협소한성에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축대로 여러단을 마련한 후
건물을 지음
-독산성 운영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건물지로 판단됨
-조선시대층 하부에서 통일 신란시대 층이 확인되어 선대문화층의 존재를 확인
독산성 양지바른 곳을 살펴 보니 소리쟁이 가...
분류 | 식물 > 쌍자엽식물 이판화 > 마디풀과(Polygonace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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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명 | Rumex crispus L |
북한명칭 | 송구지 |
본초명 | 금불환(金佛換, Jin-Fo-Huan), 야대황(野大黃, Ye-Da-Huang), 양제(羊蹄, Yang-Ti), 축(蓄, Xu), 토대황(土大黃, Tu-Da-Huang) |
다년생 초본으로 근경이나 종자로 번식한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들의 습지에서 자란다.
모여 나는 줄기는 높이 50~100cm 정도로 곧추 자라며 녹색 바탕에 흔히 자줏빛이 돌고 뿌리가 비대해진다.
근생엽은 잎자루가 길고 잎몸은 길이 15~30cm, 너비 4~6cm 정도의 피침형 또는 긴 타원형이며 가장자리가 파상이다.
경생엽은 어긋나며 잎자루가 짧고 장타원상 피침형으로 주름살이 있다.
6~7월에 개화하며 연한 녹색의 꽃은 원추꽃차례에 돌려난다.
열매의 내화피는 길이 4~5mm 정도의 난형으로 톱니가 없다.
‘참소리쟁이’와 달리 뿌리에서 돋은 잎은 원저 또는 설저이고 잎의 가장자리는 거의 톱니가 없거나 밋밋하다.
어릴 때에는 식용하며 사료로도 쓴다.
관상용으로 심기도 한다.
소가 잘 먹지만 초지에서 방제하기 어려운 잡초이다.
연한 잎은 삶아 나물로 먹고 초무침을 하거나 된장, 매실 진액에 무쳐 먹거나 된장국을 끓여 먹기도 한다.
3월말에 필 광대나물꽃이 벌써...
분류 | 속씨식물 > 쌍떡잎식물강 > 통화식물목 > 꿀풀과 > 광대나물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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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지 | 북아메리카, 아시아 |
서식지 | 한대~온대지역의 풀밭, 습한 길가 |
크기 | 약 10cm ~ 30cm |
학명 | Lamium amplexicaule |
꽃말 | 봄맞이 |
2년생 초본으로 종자로 번식하고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풀밭에서 자란다.
원줄기는 가늘고 네모가 지며 자줏빛이 돈다.
마주나는 잎은 밑부분의 것은 잎자루가 길지만 윗부분의 것은 잎자루가 없다.
잎몸은 지름 1~2cm 정도의 반원형으로 양쪽에서 원줄기를 완전히 둘러싸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4~5월에 개화하며 돌려나는 것처럼 보이는 꽃은 홍자색이고 열매는 3개의 능선이 있는 도란형이다.
‘자주광대나물’과 달리 포엽에 자루가 없고 꽃받침에 털이 밀생한다.
과수원이나 월동 맥류포장에 발생하여 잡초가 된다.
어릴 때에는 식용, 개화기에는 밀원용으로 이용한다.
관상용으로 심기도 한다.
봄 · 초여름 연한 잎을 데쳐서 무치거나 된장국을 끓여 먹는다.
꽃을 말려 차로 마시기도 한다.
말냉이 꽃이 벌써...
분류 | 식물 > 쌍자엽식물 이판화 > 십자화과(Brassicace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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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명 | Thlaspi arvense L. |
본초명 | 석명(菥蓂, Xi-Mi), 석명자(菥蓂子, Xi-Mi-Zi), 알람채(遏藍菜, E-Lan-Cai) |
2년생 초본으로 종자로 번식한다.
유럽이 원산지인 귀화식물로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들과 밭에서 자란다. 원줄기는 높이 30~60cm 정도로 가지가 약간 갈라지고 능선이 있으며 전체에 털이 없다.
모여 나는 근생엽은 사방으로 퍼지고 주걱형이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거나 약간 있다. 어긋나는 경생엽은 도피침상의 긴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4~5월에 개화하며, 총상꽃차례에 피는 꽃은 백색이다.
열매는 길이 15mm, 너비 10~12mm 정도의 편평한 도란상 원형으로 넓은 날개가 있고 끝이 오므라지며 소화경이 열매보다 길다. 종자는 길이 1.2mm 정도로 주름살이 있다.
‘다닥냉이속’과 달리 종자가 각 과실에 수 개씩 들어 있다.
월동맥류에서 문제잡초가 되나, 어릴 때에는 식용하기도 하며, 봄에 어린잎과 줄기를 삶아 나물로 먹거나 된장국을 끓여 먹는다.
데쳐서 무치거나 콩가루를 묻혀 국을 끓이고 찐 다음 무쳐 먹기도 한다.
독산성
독산성은 사적 제 1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성의 총연장은1,100m이며, 내성은 350m이 달하는 아담한 산성이다.
독산성의 처음 축조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독산성의 위치적 특성이 용인,양지 간에 있는 고성과 남한산성이 기각지세를 이루어 왕도의 문호를 굳게 한다는 전략상의 이점이 있는것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가 쌓은 고성이었고, 신라통일기나 고려시대에서도 군사상 요지로 돼 왔다.
독산은 본래 석대산, 향로봉이라고 불려왔고 조선시대에는 독산성이라 불려왔으나, 임진왜란때 권율장군이 폈던 진묘(眞妙)한 병법 전략에 연유해 지금은『세마산』 또는『세마대』라고도 부르고 있다.
날씨가 쾌청하니 수원시내및 화성 동탄 모습이 선명히...
보적사 유래
보적사란 이름이 지어진 것은 백제시대 보릿고개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겨우 쌀 두되만이 남아 있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러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한 후,
공양후 집에 돌아와 보니 곡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기적이 발생하였다고 하며 열심히 공양하여 보화가 쌓인 신통력 있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 명명 되었다고 한다.
1988년 7월 27일 전통사찰 제34호 지정되었다.
양산봉과 수원시내가 한눈에...
세마대의 유래
누각에 걸려있는 세마대 중건기(화성교육장 정형모 찬 1957)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남의 의용병 13만 대병이 일시에 독산성으로 집결하였던 요새로서 그 후 도원수 권율장군이 독산성에 진을 치고 백미로 백마를 목욕시키는 묘안의 병법으로 위기를 모면하였고, 3천여 명을 병마곡에서 격멸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정에서는 승전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세마대를 세우고 석대산이라 불리던 곳을 세마산이라 칭하고 병기창을 두어 군사 훈련을 하게 하였다.
이후 영조 26년(1750) 왕이 친히 독산성을 방문하여 군기수련을 강화할 것을 엄명하고 성을 둘러보며 가히 하늘이 내려준 요새라 하였다한다.
정조 16년(1792)에 사도세자를 현륭원으로 모시고 세마산을 향로봉이라 칭하였으며 세마대를 다시 중수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러 왜인들에 의해 세마대는 무참히 파괴되고 주민들은 각처로 흩어져 폐허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풍진풍우 50여년 만에 1957년 ‘독산성세마대 고적 중건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유희훈위원장을 중심으로 “무너진 역사를 다시 빛내고 민족 정서앙양에 무언의 지침이 되기를 기원”하며 자금난으로 누차 중단되었으나 각계각층의 협조와 지방민의 노력으로 천신만고 끝에 경비를 조달하여 준공을 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중건기에 기록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인 누각에는 이승만대통령이 행서체로 쓴 편액이 이 걸려있다.
보적사
용주사 본말사지에 의하면 보적사는 창건당시 이 세계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수소멸,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하고 부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의 진리를 터득케 한다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정전으로, 독산성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같이 했으나,
1990년 도광정운(道光正云)스님의 불사 때
석가여래불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창정전이 건립되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적사는 백제의 고성인 독산성 정상하단 동문 앞에 위치해 있는데, 삼국시대에 독산성을 축성한 후 성내인 현재의 터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한 중건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문
동문은 평거식 성문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이 각각 두개씩 남아 있다.
동문은사람만 다니던 문으로 성문 안쪽에 보적사가 있다.
보적사를 내려와 입구에 뒤돌아 보니..
산림욕장길을 따라...
산림욕장길에서 오솔길로 들어갔던 곳에 도착...
하여튼
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람잡는다
아니 나를 잡는다
아침밥을 먹으면
어딘가
훌쩍떠나려 무조건 집을 나서는데
갈수가 없다
기껏해야
동네
200미터가량의 낮은산을 찾는것이 전부다
그리고
친구넘들의 모임도
지자체에서 하는 일거리도
배움도
모든것이 연기가 됬다
비록 마스크를 쓰지만
매일같이 출근하는 셀러리맨이 부럽다
모든것이 정지된듯하다
대구신천지,경북 청도에서 창궐하고
서울,경기 비롯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죄악의 덩어리인
코로나
아니 우한 바이러스가 끝나려는지
세계 여러나라가
한국사람을 경계하니
우리경제 겨우
선진국 대열에 들어갔다고 하더니
어디까지 밀려날려는지
걱정된다.
국가적 위기 상황
우리민족은 해낼수 있다
정부의 지시에 잘 따라 주고
각자 개인 위생 수칙을 잘 지킨다면
우리는 이겨 낼수 있다!
힘 냅시다!
고맙습니다!
행복 하세요!
< 깨달음의 길 >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매 순간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이 지혜와 자비의 길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지녀 온
불성과 영성의 씨앗이
맑고 향기롭게 꽃피어난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명상과 나눔으로 맑혀야 한다.
사랑이
우리 가슴속에 싹트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진정한 탄생이고 부활이다.
세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얼굴이고,
우리 삶의 터전이다.
우리가 마음의 수양을 하고
개인의 수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만 멈추라는 것이 아니다.
- 법정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