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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도 씨를 뿌리자
□ 본문 : 시편 126장 1-6절
누구나 열매를 원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저 사람은 참 좋겠다. 어떻게 저런 복을 받았을까?’ 이렇게 사람들은 그 사람이 맺은 열매를 보며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뿌리지 않고 거두는 열매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와 같은 열매를 맺은 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땀과 눈물의 씨앗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나는 별로 뿌린 것이 없는데 왜 이런 열매를 거두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누군가가 뿌린 씨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목회의 복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많이 심어서 그렇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닙니다. 저는 정말 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말을 듣고 그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럼 누군가가 목사님을 위해 심었겠지요.’
그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부족하고 허물 많은 제가 그래도 이렇게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저를 위해 심었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고모할머니가 저를 위해 많은 눈물의 기도를 심으셨습니다.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셨습니다. 제가 목사가 된다고 할 때 드디어 우리 집안에 목사가 나왔다고 제일 기뻐하셨습니다.
할머니가 저를 위해 심으셨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하신 그 기도의 열매를 지금 제가 거두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위해 심으셨습니다. 새벽마다 눈물로 저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을 때에도 제 이름으로 일천번제헌금을 드리셨습니다. 여러 번의 수술로 몸이 좋지 않고 통증이 심한데도 지금도 새벽마다 저를 위해,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번 여름에 한국에서 안식월 기간 중에 만난 분들 가운데 두 분이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두 분 만이겠습니까? 직접 말씀하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분들이 저와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위해서 씨를 뿌렸기에 제가 지금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로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마치 내가 열심히 해서 거두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정말 주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좋은 성도님들과 교회를 섬기고 있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시편 126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3절, 그리고 4∼6절입니다. 1∼3절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바벨론에 의해 나라는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꿈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벨론을 무너뜨린 바사 왕 고레스가 칙령을 내립니다. 바벨론에 남아있는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원하는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너진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꿈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얼마나 기쁜지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넘쳐났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이것을 보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25:11-12,29:10)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역사는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회복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36:24,28,37)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놀라운 역사를 위해 기도의 씨앗을 뿌리라는 말씀입니다.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의 씨앗을 뿌린 사람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니엘입니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단9:2-3,17)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돌아온 꿈같은 역사를 경험한 것은, 그들이 기적 같은 열매를 거두며 웃음이 가득하고 찬양이 넘쳐났던 것은, 이와 같이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의 씨앗을 뿌린 믿음의 세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부모세대가, 그리고 그 윗세대가 기도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이 뿌린 기도의 열매를 자신이 거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해서 그 기도의 응답으로 예루살렘 땅을 밟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기도의 씨앗만 뿌렸지 그 열매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헛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뿌린 씨앗이 때가 되면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가 뿌린 기도도 때가 되면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세대가 기도의 씨앗을 뿌렸기에 70년 후의 세대가 그 열매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만약 바벨론 포로세대가 기도의 씨앗을 뿌리지 않았다면 70년 후의 세대는 꿈꾸는 것 같은 기적의 열매를 거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 목포 사랑의교회 백동주 목사님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백 목사님의 어머니는 너무 가난하고 힘들게 살 때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간 첫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로 어머니는 늘 기도로 살았습니다. 새벽마다 나가서 기도하고, 철야기도 하고, 농한기에는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백동주 목사님에게는 기도하는 어머니가 하나도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중학교에 다니는 자신의 등록금 때문에 교회 집사님에게 돈을 꾸러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새벽기도 나가지 않는 집사님이었습니다. 새벽기도 나가고 철야기도 나가고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자기 어머니가, 기도하지 않는 집사님에게 돈을 빌리는 것을 보면서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벽마다 밤마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그런데 백동주 목사님은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늘 병치레를 하며, 그것 때문에 공부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도 하지 않고 철야기도도 하지 않는 다른 집사님들 아이들은 아프지 않고 건강합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기도해도 소용없네, 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이제부터 교회 나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세요?’ 물었더니 아무 말씀 안하시고 방에 들어가시더니 대성통곡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이제 교회 나가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며 기도해도 아무 소용없네, 라고 말합니다. 기도해도 형편 달라진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오히려 기도하려는 사람들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교회 기도문 가로막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 교회 나가지 않겠습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이 백 목사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모양입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그렇게 기도도 많이 하는데 이루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 말을 듣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정말 그랬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가지 않고 집에서 기도하셨는데, 한 열흘 정도 지나고 나서 다시 교회에 가신다고 하시기에 ‘어머니, 왜 오늘은 교회에 가시나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집에서는 기도가 안 돼. 그래서 다시 교회에 가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로 사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렇게 기도하셨던 문제들 중에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말 기도해도 소용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백동주 목사님이 목회를 하면서 돌아보니 모든 것이 어머니 기도의 응답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응답받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어머니의 기도가 실패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그 아들에게, 그리고 아들이 목회하는 과정 하나하나에 엄청나게 응답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만약 백동주 목사님의 어머니께서 기도해도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다고 더 이상 기도의 씨앗을 뿌리지 않았다면 지금 백 목사님이 응답받고 있는 열매는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바벨론 포로세대가, 바벨론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을 보았다면 기도의 씨앗을 뿌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바벨론 포로세대가 지금만을 보았다면 결코 기도의 씨앗을 뿌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을 보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보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바벨론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믿음으로 계속해서 기도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바벨론 포로세대는 지금을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만을 보는 사람은 기도의 씨앗을 뿌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뿌리는 기도의 씨앗이 풍성한 응답의 열매로 나타날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지만, 이 때가 지나가면 반드시 다가올 회복의 때 축복의 때를 바라보았습니다. 이 소망으로 계속해서 기도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와 같이 바벨론 포로세대가 믿음으로 소망으로 기도의 씨앗을 뿌렸기에 70년 뒤의 다음세대가 꿈꾸는 것 같은 기적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축복의 열매는, 우리의 부모세대가 뿌린 기도의 열매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부모세대가 믿음으로 소망으로 기도의 씨앗을 뿌렸기에 우리 세대가 이와 같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부흥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나눈 것은 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바벨론 포로세대의 기도의 씨앗을 통해 꿈꾸는 것 같았던 기적의 열매를 경험한 지금의 세대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4∼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1∼3절까지가 바벨론 포로세대가 뿌린 기도의 씨앗으로 꿈꾸는 것 같은 열매를 맺은 것에 대한 기쁨과 감격의 노래였다면, 4∼6절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부터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노래한 것입니다.
‘남방’의 원어 ‘빤네게브’는, ‘네게브’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네게브’는 팔레스타인 남부의 광야지대를 가리킵니다. 당시 네게브는 평소에는 메말라 있지만 우기가 되면 강이 흐르는 와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남방 시내들’은 우기에 되면 강으로 변하는 네게브의 강들입니다. 4절 말씀을 현대인의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르듯이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소서.”
바사 왕 고레스가 포로귀환 칙령을 내린 그 다음 해인 B.C. 537년 스룹바벨을 선두로 포로들이 귀환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보다 바벨론 땅에 남아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더 이상 포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지금의 예루살렘은 옛날 그 화려하던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무너진 성전을 재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변 이방인들의 위협과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10년 동안이나 성전재건 사역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만약 시편 126편이 성전재건 후에 부른 노래라면 성벽을 재건해야 하는 사명이 남아있습니다. 비록 성전이 완공 되었다고는 하지만 성벽조차 없는 예루살렘은 황폐한 땅이었습니다. 그때의 예루살렘의 상황이 느헤미야 1장 2절, 3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는 것은 육적으로 고생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넓은 길을 떠나 좁은 길 험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 않고 바벨론 땅에 남아있었습니다.
에스라가 중심이 된 2차 포로귀환이 B.C. 458년에 있었는데, 1차 포로귀환 후 79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느헤미야가 중심이 된 3차 포로귀환은 무려 93년 후였습니다. 그러니까 1차 포로귀환부터 3차 포로귀환까지 93년이 걸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70년보다 더 깁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단합니다. 예루살렘이 온전히 회복되기까지 기도의 씨앗을 뿌리겠다고 말입니다. 바벨론 포로세대가 기도의 씨앗을 뿌려 자신들이 포로귀환이라는 기적의 열매를 거둔 것처럼, 이제는 자신들이 기도의 씨앗을 뿌려 아직도 바벨론 땅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그래서 예루살렘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들은 기도의 씨앗만 아니라 헌신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수고하고 희생하며 자신들의 인생을 심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 이 노래를 불렀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2차, 3차 포로귀환 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은 남방 시대들이 말라있습니다. 현실을 생각하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이스라엘 백성이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1차 귀환세대는 바벨론 포로세대들처럼 믿음으로 소망으로 기도의 씨를 뿌립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헌신의 씨를 뿌립니다.
5절, 6절 말씀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차 귀환세대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립니다. ①슬프기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기 위해 바벨론의 모든 것을 내버리고 귀환했는데 여전히 예루살렘은 황폐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탄 상태로 있기 때문입니다.
②아프기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주변 이방인들로부터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③낙심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남방 시내들이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사람들이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환해야 예루살렘의 영광이 회복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슬퍼서 아파서 낙심이 돼서 그래서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도 1차 귀환세대가 흘리는 눈물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인생은 황폐합니다. 우리 가정은, 우리 자녀들은 황폐합니다. 그래서 슬픕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영의 황폐함입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과 능욕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수많은 환난을 당합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슬픔보다 아픔보다 더 힘든 것은 낙심입니다. 아무리 슬프고 아파도 소망이 있으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본의 부흥, 교회의 부흥, 다음세대의 부흥을 그렇게 갈망하는데 현실은 여전히 말라버린 남방 시내들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눈물을 흘려도 기도의 씨앗을 뿌리는 일은 멈출 수 없습니다. 눈물을 흘려도 헌신의 씨앗을 뿌리는 일은 멈출 수 없습니다. 슬퍼서 울더라도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아파서 울더라도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낙심으로 울더라도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슬프다고 아프다고 낙심이 된다고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뿌리지 않으면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뿌리지 않으면 아무 열매도 없습니다. 그래서 울더라도 씨를 뿌려야 합니다.
실재로 팔레스타인의 농부들은 비가 올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씨를 뿌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가지고 있는 씨앗으로는 굶주림을 피할 수 없습니다. 며칠은 배불리 먹겠지만, 아끼고 아끼면 한 동안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씨앗으로는 절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가 올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씨를 뿌렸습니다. 그것만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뿌리는 기도의 씨, 우리가 뿌리는 헌신의 씨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기도 하지만 그 눈물은 추수의 기쁨으로 바뀝니다.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 된 후에도 무려 72년 동안 예루살렘 성벽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 포로세대가 70년 동안 기도의 씨앗을 뿌렸던 것만큼, 1차 포로귀환세대도 기도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요? 그래도 그들은 힘들고 어려워도 바벨론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의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기도의 씨를, 헌신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뿌린 기도의 씨가 2차, 3차 포로귀환의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뿌린 기도의 씨가 예루살렘성벽이 재건되는 기적같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특새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씨앗을 뿌리는 특별한 시간을 주셨습니다. 마음이 슬픈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그러면 기쁨으로 추수할 때가 옵니다.
큰 고난으로 사람들의 능욕으로 아픈 성도들이 있습니다. 몸이 아픈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그러면 고난과 능욕은 영광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 아프고 병든 육신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낙심으로 기도할 힘조차 잃어버린 성도들이 있습니다. 백동주 목사님의 간증처럼 우리의 기도가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헛된 기도는 없습니다. 포로세대는 자신들이 뿌린 기도의 열매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를 통해 70년 뒤의 포로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재건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1차 귀환세대도 자신들이 뿌린 기도의 열매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를 통해 2차, 3차 포로귀환의 역사가 일어나고, 예루살렘 성벽재건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헌신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현실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도 믿음과 소망으로 기도의 씨앗을 뿌리면, 묵묵히 헌신의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둡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