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 위에서(선언)
/ 김병삼 목사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KBS 2TV의 ‘TV 유치원 하나 둘 셋’을 통해 밝은 웃음과 노래를 선물했던 중창단 ‘별 셋’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별 셋 모두 신앙 좋기로는 이미 소문나 있는 터. 그 중 김광진(신촌성결교회) 장로는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직을 16년간이나 맡았던 카리스마의 사나이였는데 그의 군대 신병 시절 얘기 중엔 믿기지 않는 사건도 있더란 얘기.
고참: (김광진의 뺨을 때리며) 내 담배 훔쳐간 놈이 너지? 찰싹! 찰싹!
광진: (배를 잡고 웃으며) 킥! 킥! 킥!
고참: (계속 뺨을 때리며) 예수 믿는다더니 너 미쳤구나?
광진: 고참님, 담배 훔쳐간 녀석은 딴 놈인데 제 뺨을 때리시니까 우습죠! 제 뺨이 얼얼한데 고참님 손바닥은 얼마나 아프겠어요?
고참: (갑자기 감동) 야! 나도 너처럼 예수 믿고 미쳐보자! 킥킥킥!
김광진 장로의 뺨 사건은 초등학교 시절에도 한 건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하굣길에 같은 반 아이하고 서로 뺨을 후려갈기며 쌈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로 코피가 터지고 얼굴이 울퉁불퉁 부어오르고 목숨 건듯 싸움을 하고 있으니 그 누가 막으랴? 이때 목사님이신 아버지께서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아빠: 아니, 광진아! 주님께서 마태복음 5장 39절 말씀에 뭐라 하셨느냐?
광진: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왼편 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아빠: 그런데 왜 싸우고 있어?
광진: 저도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글쎄 이 녀석이 왼편 뺨을 먼저 때리잖아요!
오른편 뺨을 먼저 때리면 참을 수 있었는데…
오늘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여섯 번째 말씀이 어쩌면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위대한 선언으로 들리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로마의 사형수로 처형을 받으시고 영혼이 돌아가신 나이가 33세였습니다. 당시 이단 중의 예수님의 삶을 실패로 규정하며 육신의 삶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실패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실패로 보지 않았습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어느 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읽다 보니 더 와 닿습니다. “It's done … complete”
33세의 나이면 대부분 사람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말하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임종 직전에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에서 얼마를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가 장례식에서 늘 하는 이야기지만, 어떤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죽음의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김용의 선교사님의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에 보니까, 아주 흥미로운 표현을 합니다.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가 소설이니까 아름답지, 벌레 먹은 이파리 하나가 끝까지 안 떨어지고 버티면서 파르르 떠는 모양이 현실적으로 아름답겠습니까?” 정말 우리 주변을 보면 인생을 살아가려고 바동거리는 사람들을 자주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면서 바동거리고 오래 산다고 복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우리 인생은 죽을 때가 되면 죽어줘야 하지 않습니까? 또 우리 주변에서는 나이가 들어도 늙지 않으려고 별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도 봅니다. 삶은 모양을 가꾸는데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이루어 가느냐가 아름다움이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 분명하게 배우게 됩니다.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최신식 주름 제거 수술을 받았는데, 잠잘 때 눈이 잘 감기지 않는답니다. 잠자다가 밤중에 깨서 남편이 그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놀랄 일이겠습니까? 주름을 제거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주름을 만드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어느 때, 우리가 “추하다!”라는 표현을 합니까? 생명이 없는 것이 생명 있는 것처럼 가장 할 때 그렇지 않은가요? 겨울에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가 크리스마스트리입니다. 그런데 철 지난 크리스마스트리, 눈 맞고 눈 녹아 먼지가 쌓인 채 길거리에 버려진 트리가 얼마나 추합니까? 전구도, 장식도 생명이 없기에 매달려 있는 것이 추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생명이 없이 사는, 아니 생명을 연장하는 삶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인가요? 얼마나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 할 수 있느냐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실패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가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고통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 당연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머문다면 반쪽자리 복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이지만, 승리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에는 피 흘림이 있지만, 부활이 있습니다.
무엇을 이루었는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책에서 헨리 블랙가비가 이런 말을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고자 할 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아마도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인생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행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것입니다. 저의 신학교 교수이시던 게인스 도빈스 박사님은 “잘못된 질문을 하면 잘못된 답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항상 틀린 답만 나올 때 우리는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선 답을 찾기 전에 과연 내가 올바른 질문을 하는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단순히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올바른 질문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면 나는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맞출 수 있습니다. 초점은 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향한 뜻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의 인생에 목적과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인생을 향한 그분의 계획은 그분이 이 세상에서 하고 있는 일에 근거합니다. 그분은 그분이 하고 있는 일에 당신이 말려들기를 열망하십니다. 그분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알면 그분이 당신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가장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죽음 앞에선 우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가야바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촛불 하나만 켜둔 캄캄한 배경에 앉아서 심문하는 가야바의 얼굴과 거기에 답하시는 예수님의 얼굴만이 보이는 그림이지요. 그런데 그 그림을 보면서 누가 누구를 심문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내용적으로는 가야바가 예수님을 심문하는데 예수님의 얼굴에는 놀랄 만큼 위엄과 고요한 마음이 넘치고 있고 가야바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불안과 초조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구를 심문하고 있습니까? 얼핏 보기에는 가야바가 예수님께 묻고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가야바의 양심에 묻는 소리에 답하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보세요. 세상에서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니, 패배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나온 영화가 있습니다.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는 이런 내용입니다. 2010년 2월, 아프리카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남수단의 자랑인 톤즈 브라스 밴드가 마을을 행진했다. 선두에 선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사진 속 한 남자… 마을 사람들은 톤즈의 아버지였던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딩카족이다. 남과 북으로 나뉜 수단의 오랜 내전 속에서 그들의 삶은 분노와 증오 그리고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졌다.
목숨을 걸고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딩카족. 강인함과 용맹함의 상징인 종족 딩카족에 눈물은 가장 큰 수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들이 울고 말았다. 모든 것이 메마른 땅 톤즈에서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사람, 마흔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故 이태석 신부다. 톤즈의 아버지이자, 의사였고, 선생님, 지휘자, 건축가였던 쫄리 신부님, 이태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온몸 다해 그들을 사랑했던 헌신적인 그의 삶이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아니 영화라기보다는 정말 아름다운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꽃 같은 청춘을 아프리카에서, 정말 보석 같은 달란트를 그곳에서 다 쓰고 간 사람.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암으로 세상을 떠나야 한다니요, 그런데 아무도 그 사람을 실패자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심문하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이 허무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It's done … complete!”가 아닐까요? 영화에 나오는 이태석 신부의 대사 중의 이런 것이 있습니다. “슬픈 이야깁니까? 아니죠, 행복한 이야기죠!” 누가 그의 삶을 실패라고 할 수 있나요?
예수님은 “다 끝났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져야 하는 것이 미완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6절을 보세요.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샘물은 거저 마시게 하겠다”
제가 설교하면서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어를 사용하는 적이 거의 없는데 오늘 이 말씀은 원어로 보면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인데 시제가 ‘미래 완료형’입니다. 당시에 사용했던 이 단어가 미래 완료형으로 사용되는 데는 4가지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1) 맡긴 일을 완수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주인이 종에게 어떤 일을 시켰을 때 그 일을 다 마친 종이 “주인님, 맡겨주신 일을 다 완수했습니다.”라고 할 때 쓰이던 말입니다. 완수(完遂)했습니다. Completed! It is finished!
2) 흠이 없고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제사장들이 쓰던 말이었는데 그 당시 제사장들의 임무 중 하나가 제사 드리기 위해 가져오는 제물을 검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제물이 눈이 멀거나, 다리를 절거나, 다른 흠이 없는지 자세히 살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무 흠이 없으면 그 제물에 대해 ‘테텔레스타이’ 즉 완전하다고 선언했습니다.
3)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 당시의 예술가들이 사용하던 말이기도 했습니다. 예술가들은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을 들여 구상하고 연구하고 생각하고 실험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심혈을 기울여 한 작품을 완성합니다. 이렇게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쓰이던 말이 ‘테텔레스타이. 완성되었다.’입니다.
4) 돈을 모두 지불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주로 상인들이 쓰던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지불완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죄인의 죗값이 ‘지불완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갚아야 할 모든 죄의 갚을 치르셨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작품이요, 우리가 그 작품의 하나라는 말입니다.
한 자매가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녀는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무겁고 힘이 들어서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이 자매는 예수님께 졸랐습니다. 예수님은 미소 지으며 그 십자가를 잘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더 졸랐습니다. 발걸음이 한결 가볍고 편안한 것 같았습니다.
한참 걷다 보니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강 앞에 다다르자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것을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매도 자기의 십자가를 강에 놓아보려 했지만, 십자가는 이미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아져 있었습니다.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십자가를 불평 없이 지고 가신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말씀! 누가복음 23장 46절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아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예수님의 사역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졌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무엇입니까? “영혼을 부탁하셨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보면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Father, I place my life in your hands!” 그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호흡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의 승리, 최후의 마지막 한 마디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보여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아버지의 손에 있습니다.” 영혼이 아버지의 손에 있다면 우리의 육신의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지 않을까요? 버린다는 것이 포기하거나 하찮게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삶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마지막 말씀 가운데 여러분에게 가장 와 닿는 단어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에게는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영혼을 부탁할 분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이 땅 위에 공생애를 지나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물었던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듯, 그래서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라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아주 유명한 답변이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아마도 성경에서 나오는 베드로의 가장 멋진 모습입니다. 소위 말하는 홈런을 친 것이죠. 예수님이 아주 기뻐 칭찬하시지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런데 그의 고백이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 그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순간에 배신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바로 나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 때, 이 의미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가 생각했던 구원자와 예수님이 구원하시기를 원했던 내용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시나요? 질병의 문제? 아니면 경제적인 문제로? 아니면 자식에 대한 기대?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버렸던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원했던 메시아는 영혼의 메시아가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아였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실 분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는 패배자의 모습이기에, 수치스럽고 무서워서 떠났던 것이지요.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대충 알았던 모양입니다.
김용의 선교사의 책에 보면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어느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데 성적이 늘 하위권에 머물던 아이가 갑자기 성적이 올랐습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앞에 일등 하는 아이가 앉아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선생님에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따로 불렀습니다. “네가 이번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더구나. 성적이 잘 나왔어.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봐, 특히 수학 20번 문제는 전교에서 단 세 명만 정답을 맞혔을 정도로 매우 어려웠는데, 네가 그걸 풀었다니 정말 놀랍고 신기하구나. 혹시 이 문제를 지금 다시 한 번 풀 수 있겠니?” 다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대충 누구 것을 보고 흉내 낼 수 없는 부분이 오늘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우리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우리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길 수 있습니까? 그 고백 앞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면 십자가는 고통이요, 실패의 상징이 아니었을까요?
잘 죽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잘 죽었다!”라는 말은 억양에 따라 아주 심각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죽음이야말로 잘 죽는 것이 아닐까요? 혹시 여러분은 잘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고통 없이 깨끗하게? 어느 날 잠자다가 평안하게? 비명횡사하지 않고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유언을 하고 찬송하며? 이 모든 것이 행복한 죽음이기는 하지만, “잘 죽는 것”의 정답은 아닐 듯합니다.
사실 전쟁에서, 자연재해로 참혹하게, 시신을 수습할 수도 없는 처참한 죽음을 본다는 것, 또 불치의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면 몸과 영혼이 피폐해지는 상황의 죽음도 많이 있습니다. 교통사고도, 때로는 물놀이를 갔다가 익사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죽음이 복되기에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잘 죽는 것의 기준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골고다 언덕에서 살인자들과 함께 벌거벗긴 채로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피를 흘리며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떻게 “잘 죽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은 다른 신앙적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잘 죽는다는 것”이 시간과 장소, 어떤 모양과 관계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을 보세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돌아 맞아 죽습니다. 사도 바울은 칼로 목이 베여서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순간에 이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는 것이 참다운 신앙일 뿐입니다. 이 신앙 앞에서 우리가 더욱 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지요.
석용욱 씨가 쓴 “빛과 먹선 이야기”라는 묵상 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나의 신념은 그저 고집일 뿐이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나의 자유는 그저 반항일 뿐이었습니다.” 참 멋진 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고집스럽게, 그저 반항하며 열심히 살았던 우리의 삶을 어떻게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에서는 때로 참고, 기다리고, 인내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인내는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나누는 또 다른 '대화'입니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 위에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는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대화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당신의 영혼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하나님과 “대화”하고 계시나요? 때로 침묵의 순간에도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상 칠언 중 6번째와 7번째가 동일하게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는 장면이 나오지요. 참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라는 표현이 아니라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는 “영혼이 떠났다!”라고 말합니다. 영혼이 떠났다는 말은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이지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혼이 하나님의 손으로 떠나간 것입니다.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신앙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멋진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타드 비머(Todd Beamer)라는 사람은 United Airlines 93호 여객기를 타고 있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이 갑자기 승객들을 비행기 뒤쪽으로 몰았습니다. 이때 타드는 일리노이스의 오크부룩(Oakbrook)에 있는 GTE 고객 담당 센터에 핸드폰을 걸어서 감독관인 리사 제퍼슨(Lisa Jefferson)과 비행기 납치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때 타드는 자기와 비행기 안에 있는 일부 승객들이 곧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타드는 리사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주기도문을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 타드는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하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타드와 일부 승객들은 시편 23편을 다함께 암송했습니다. 마침내 지금은 아주 유명해진 최후의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준비되었지요? 다 함께 돌격합시다."--"Are you guys ready? Let's roll." 나중에 비행기 조종실에서 수거된 블랙박스의 녹음을 통하여 이와 같은 최후 교신이 상세히 밝혀졌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타드와 일부 승객들의 영웅적인 행동 때문에 비행기는 국회 의사당이나 백악관으로 가지 않고 펜실베이니아 상공에서 추락했던 것입니다. 타드 비머와 승객들은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더 큰 피해를 사전에 막아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었기 때문에 담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잘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았던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사람이 죽었을 때 “떠났다.”(departed)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도착했다.”(arrived)라는 말을 쓴다고 합니다. 참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죽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되지만, 새로운 세계에 도착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가셔서 예비하고 계시는 천국에 도착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우리말에도 “돌아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손에 돌아가는 것,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신자의 죽음에는 다시는 죄와 죽음의 권세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정복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감리교회의 아버지 요한 웨슬리는 1791년 3월 2일, 런던에서 87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웨슬리는 2월 25일부터 고열에 시달리면서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3월 1일, 즉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에 웨슬리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해서 무엇인가 쓸려고 했지만, 아무 말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사람이 쓰고 싶은 것을 말씀해 주신다면 자기가 대신 받아 적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쓸 것도 없다.”(Nothing but that God is with us.)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오후에 웨슬리는 놀랍게도 다시 기력을 회복해서 이삭 왓츠(Isaac Watts)의 찬송시를 읊조렸습니다. 이때 웨슬리 주변에는 의사인 화이트헤드(Whitehead) 박사와 엘리자베스 리치(Elizabeth Ritchie), 찰스 웨슬리의 미망인과 딸, 그리고 다른 9명의 사람 등 모두 13명이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힘을 모아서 다시 한 번 외쳤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The best of all, God is with us!). 3월 1일 밤새 웨슬리는 자주 이삭 왓츠의 찬송 시 중의 "내가 찬양하리, 내가 찬양하리"(I'll praise; I'll praise)라는 가사를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날 아침, 즉 3월 2일 오전 10시에 웨슬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안녕!”(Farewell!)이라는 최후의 말을 외치고서는 조금의 신음도 내지 않고 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확실히 웨슬리의 죽음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아름답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둘러싸여서 평화롭게 숨졌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시간과 장소가 좋았다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의 신앙적인 태도에 달렸습니다. 하나님께 그의 영혼을 맡기고 찬송시를 암송하다가 죽어갔다는데 있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하나님이 함께 계실 때였다고 고백했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은 시편 31편 5절의 말씀, 즉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31편 5절의 말씀은 유대인 어머니들이 자녀가 잠자리에 들어가 일과를 마치고 잠을 청하기 전에 기도하도록 가르친 말씀이라고 합니다. “어두운 밤이 도착하기 전에 제 영혼을 주님의 손에 맡기나이다.”하고 아이들이 기도하도록 가르친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강력한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여러분의 삶과 죽음을 바꿔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우리가 마지막 때에 우리의 영혼을 담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마지막은 소리 없이 옵니다. 그때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출처 : |
╋예수가좋다오 |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
------------------------------------------------------------------
고 이태석 신부님의 예수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