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191㎞ 떨어진 서해 최북단 백령도. 장산반도 10㎞ 앞의 이 섬은 북한으로서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다. 섬의 곳곳에서 느껴지는 해병대의 임전태세, 눈앞에 펼쳐진 북한 섬 등을 보면서 우리 안보현실을 절로 체험하게 된다
해변 길이 3㎞, 폭 250m의 사곶비행장은 전 세계에 두 곳밖에 없는 천연비행장이다. 필자제공 ▶ 적의 옆구리에 비수를 들이대다 백령도는 북한 옆구리를 겨눈 비수의 형상이다. 김일성은 6·25전쟁 발발과 동시에 북한군 400명을 백령도에 상륙시켜 신속히 점령했다. 북한군은 많은 반공인사를 학살하고 주민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다가 후퇴했다. 뒤이은 1951년 1·4후퇴. 수만 명의 평안·황해도 피란민들이 백령도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고향을 되찾고자 하는 청년무장단체가 결성되면서 유엔군 유격부대가 생겨났다. 현대판 의병부대의 탄생이다. 이들은 ‘동키부대’ ‘8240부대’ ‘켈로부대’ 등으로 불리면서 20여 개 부대 3만여 명이 동·서해안에 포진했다. 아직도 당시 유격부대 막사와 연병장·우물터·벙커·충혼비 등이 백령도의 곳곳에 안보유적지로 남아 있다.
▶ 해병·유격부대와 NLL 설정 해병41중대는 1951년 4월 말께 백령도를 점령하고, 이어 6월에는 대동강 하구의 초도·석도까지 점령했다. 청천강과 대동강 하구의 주요도서는 유엔 유격부대 혹은 한국 해병대가 거의 장악했다. 이런 상황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됐다. 교동도 유격부대장 박상준(89)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북방한계선(NLL) 확보는 사실상 유격부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북한은 해·공군의 완전 괴멸로 서해바다를 통제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공산 측은 해상분계선을 한강에서 서해로 직선으로 긋자는 억지를 부렸다. 또 서해 5개 도서와 황해도 중간기선을 분계선으로 하자는 유엔군 제안(현 NLL선)을 북한은 거부했다. 즉, 북한의 협상목표는 38선 이북도서와 서해를 확실하게 확보하는 것. 결국 우리는 청천강·대동강 부근의 모든 도서를 휴전 직전 고스란히 넘겨 주고 말았다.” 유엔군의 북방한계선 선포(1953. 8. 31) 통보를 받고 김일성은 쾌재를 불렀다. 북한 공식문서 ‘조선중앙연감’에도 NLL선을 해상분계선으로 분명하게 표기했다. 또한 북한은 1973년 전까지는 단 한 차례도 NLL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항상 이 해상분계선을 인정하고 협상에 임해 왔던 것이다.
6·25전쟁 당시 유격(동키)부대 본부 막사. ▶ 알려지지 않은 유격부대 전설 북한지역에서 신출귀몰하는 유격부대 활약상은 실로 눈부셨다. 고향의 가족·친지들은 목숨을 걸고 이들을 도왔다. 약 1600명의 대원이 항시 북한 내륙에 은거하고 있었다. 적지에 추락한 약 1000명의 항공기 승무원 중 3분의 1 이상을 이들이 구조했다. 또한 적 사살 6만9000여 명, 첩보수집, 아군함포 및 폭격 유도 등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당시 북한 노동신문은 유격부대(특무·공중비적 등으로 표기)에 관련된 기사를 거의 매일 언급하고 있었다. 백호유격부대 전우회장 민병렬(84) 씨의 증언이다. “우리는 백령도를 발진기지로 하여 황해도에서 치열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장비는 빈약했고 보급은 열악했다. 그러나 작전이 계획되면 대원들은 앞다퉈 지원했다. 명단에서 빠진 사람은 막사 밖으로 나와 통곡하기도 했다. 침투는 야간에 주로 범선을 이용했다. 속도는 느렸지만 적 레이더망을 피할 수 있었다. 1951년 6월, 장산반도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우리 대원들은 분산됐다. 그러나 그는 부상당한 동료 김태성(작고)을 차마 남겨 두고 올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바위틈에 숨어 수일간 버티다가 포위망을 뚫고 극적으로 백령도로 귀환했다.” ▶ 5인의 불사조 적진을 돌파하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 그러나 북한 내륙의 일부 유격대원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평양 부근에서 작전 중인 최일성 외 4명은 뒤늦게 전쟁이 끝난 것을 알았다. 이미 본대와의 연락은 두절된 상황. 그들은 구월산(937m)에서 예성강을 거쳐 휴전선으로 퇴출하기로 했다. 현재 유일한 생존자 최일성(83·수원시 거주) 씨의 회고담이다. “구월산을 출발해 끈질기게 추격하는 북한군을 따돌리며 약 200㎞의 적지 내륙을 돌파했다. 며칠씩 예사로 굶으며 풀뿌리·콩·고구마로 겨우 연명했다. 오직 애타게 기다리는 전우들만을 생각하며 모든 난관을 극복했다. 1953년 10월 14일, 결국 중부전선 휴전선의 아군에게 발견돼 5명 모두 구출됐다.” 그후 최씨는 한국군으로 4년간 더 복무했다. 그러나 적지 활동에 대한 기록 부재로 현재까지 무공훈장 하나 받지 못했다. 물론 별다른 포상이 없었던 것을 그는 조금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처럼 영웅적인 유격부대 이야기는 백령도 전적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해마다 열리는 추모행사 참석자는 최근 눈에 띄게 줄었다. 이들이 신세대에게 바라는 작은 소망은 “이 전적비가 증언하는 처절했던 전쟁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줬으면···”하는 것이다. ▶ 천연비행장과 가 볼 만한 관광명소 길이 3㎞, 폭 250m의 사곶해안은 천연비행장 겸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이탈리아 나폴리와 이곳뿐인 천연비행장은 규모 면에서 세계 최대다. 특히 이 비행장은 6·25전쟁 때 수송기 이·착륙장과 피격당한 아군기 불시착 장소로 긴요하게 활용됐다. 또 백령도는 1896년 한국에 세 번째로 세워진 중화동교회, 형형색색의 조약돌이 뒤덮고 있는 콩돌해안, 서해의 해금강 두무진, 심청각 등 가 볼 만한 많은 관광지가 있다. <신종태 전쟁과 평화연구소 연구위원·군사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