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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661 ~ 1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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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의 하나는 당쟁(黨爭)이다. 그것은 국정 운영은 물론 사상적 지향과 교유·혼맥 같은 인간 관계에 이르는 여러 현상의 향배를 결정한 핵심 요소였다.
편가름과 거기서 기인한 갈등은 인간의 숙명에 가깝다. 그리고 거기에 부정적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발전의 한 원동력은 차이와 논쟁이다. 순수하고 일치된 사회는 폭압적 전체주의와 멀지 않다.
그러므로 조선의 당쟁은 일단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핵심적 문제는 그런 편가름과 갈등이 어떤 요인으로 발생했고 어떤 과정과 결과로 이어졌는가 하는 측면일 것이다.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숙종의 치세를 요약하는 단어는 ‘환국(換局)’이다. ‘정치적 국면의 전환’이라는 의미의 그 표현은 당파의 교체와 정책의 변화, 인명(人命)의 처분 등을 수반했다. 희빈(禧嬪) 장씨와 관련된 익숙한 주제는 그 과정에서 발생한 대표적 사건이었다.
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은 현종의 외아들로 모후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다. 휘는 이순(李焞)이고, 자는 명보(明普)다.
그는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674년 8월 23일 13세의 나이로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해, 그때까지 가장 긴 기간인 46년 동안 재위한 끝에 1720년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했다. 명릉(明陵.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소재)에 모셔져 있다.
숙종은 인경(仁敬)왕후·인현(仁顯)왕후·인원(仁元)왕후로 이어지는 세 왕비를 두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왕자를 얻지 못했고 희빈 장씨와 숙빈 최씨에게서 각각 경종과 영조가 되는 왕자를 낳았다. 그 치세의 한 특징인 궁중의 복잡한 갈등은 이런 객관적 조건과 밀접히 관련된 결과였다.
앞서 말했듯이 숙종대의 중심적 사건은 세 차례의 환국이었다. 그 해의 간지를 따라서 경신(1680, 숙종 6)·기사(1689, 숙종 15)·갑술환국(1694, 숙종 20)이라고 부르는 그 사건의 주체는 물론 국왕이었다. 이런 측면은 숙종의 왕권이 매우 강력했음을 보여주지만, 그 판단력과 사건의 필요성에는 여러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먼저 경신환국(庚申換局)은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등용된 사건이었다. 남인은 1674년(현종 15)에 일어난 갑인예송에서 승리해 조정을 장악한 상태였다. 바로 그 해에 즉위한 숙종은 13세로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일단 부왕 때의 주요 신하들을 계속 신뢰했다. 아울러 김석주(金錫冑)를 중심으로 한 외척을 중용하고, ‘삼복’으로 불리던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들은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인데, 복선군이 가장 촉망을 받았다.
숙종 초반 남인의 영수는 영의정 허적(許積)이었고, 외척의 중심 인물은 병조판서 김석주였다. 이 두 축을 중심으로 한 정국 운영이 급변한 것은 재위 6년(1680)이었다. 표면적인 발단은 허적의 불경한 행동이었다.
그해 3월 허적은 조부 허잠(許潛)이 시호를 받은 것을 기념해 잔치를 열었는데, 그날 비가 내리자 궁궐의 유악(油幄- 기름 먹인 천막)을 무단으로 가져다 사용했다. 영의정이라는 지위와 국왕의 신임을 믿은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변수가 개입했고, 사건은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숙종도 비가 오자 영의정에게 유악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했는데, 이미 그가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고 대노한 것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허적의 유악 사건이다(이 사건은 야사에는 나오지만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거대한 사건은 우연하고 사소한 계기로 촉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때 그런 계기를 근본적 원인과 직결시키는 것은 표피적인 관찰이기 쉽다. 경신환국 또한 정권을 장악하려는 김석주의 의도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숙종의 판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환국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첫 조처는 병권의 교체였다. 숙종은 국구(國舅- 국왕의 장인)인 김만기를 훈련대장에, 신여철(申汝哲)을 총융사에, 김익훈(金益勳)을 수어사에 임명해 병권을 서인에게 넘겼다(3월 28일). 주요 관직도 대거 교체했다. 김수항(金壽恒)을 영의정에, 정지화(鄭知和)를 좌의정에, 남구만(南九萬)을 도승지에 임명하고 삼사도 대부분 교체했다(4월 3일).
경신환국을 파괴적 결과로 이끈 사건은 그 이틀 뒤에 발생했다. 그것은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다. 앞서 말했듯이 ‘삼복’은 복창군·복선군·복평군인데,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그들(특히 복선군)과 결탁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접수된 것이다(4월 5일). 남인과 종친이 연루된 중대한 사건이었다.
사건은 즉각 처리되었다. 두 주모자인 복선군과 허견은 사형에 처해졌다(4월 12일). 복창군도 사사되었고 복평군은 유배되었다(4월 26일).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남인의 핵심적인 두 인물인 허적과 윤휴(尹鑴)가 사사되었다는 것이다(각 5월 5일과 5월 20일). 얼마 뒤 훈련대장 겸 총융사로 병권을 장악했던 유혁연(柳赫然)도 사약을 받았다(9월 5일). 남인은 삼복의 변이 일어난 지 석 달도 안 되어 주요 인물이 대부분 제거되는 심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정국은 당연히 급변했다. 주요 관직은 서인으로 교체되었다. 국왕은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불러 최상의 예우를 베풀었다(10월 12일). 공교롭게 국혼의 변화도 비슷한 때 일어났다. 1680년(숙종 6) 10월 인경왕후가 별세하자 이듬해 5월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인현왕후)로 맞은 것인데, 그녀 또한 대표적인 서인 가문 출신이었다.
이로써 서인은 국혼과 주요 관직을 대부분 장악했다. 이런 상황은 10년 가까이 이어졌다.
균열은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당시 숙종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아직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기사환국 전까지 국왕은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았지만, 왕실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국왕의 부담과 조바심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곧 해결되었다.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소의 장씨(뒤의 희빈 장씨)가 마침내 왕자(뒤의 경종)를 출산한 것이다. 27세였던 숙종의 기쁨은 지극했다.
그런 기쁨은 다소 성급한 조처로 이어졌다. 이듬해 1월 그 왕자를 원자로 삼고 장씨를 희빈에 책봉한 것이다. 세자의 책봉은 국본(國本-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 것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대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다.
서인은 당연히 강력하게 반대했다. 표면적으로는 국왕과 왕비가 아직 젊어 왕자를 충분히 생산할 수 있다는 이유였지만, 핵심적인 까닭은 희빈 장씨가 남인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그런 전례는 중국에도 없다면서 국왕의 의도에 정면으로 반대했다(2월 1일).
숙종은 다시 전격적이고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우선 바로 그날 송시열의 관직을 삭탈하고 외방(外方- 서울 이외의 지방)으로 쫓아버렸으며(2월 1일) 그를 탄핵하지 않은 대간을 교체했다(2월 2일). 권대운(權大運)·목래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삼정승에, 민종도(閔宗道)를 대사헌에 임명하는 등 주요 관직도 남인으로 교체했다(2월 10일).
서인의 주요 인물은 사사되거나 처벌되었다. 영의정을 지낸 김익훈(金益勳)과 김수항은 옥사하거나 사사되었고(각 3월 11일과 윤3월 28일) 남구만은 유배되었다(4월 13일). 앞서 처벌된 주요 남인의 신원도 이뤄졌다. 허적·윤휴·유혁연 등은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기사환국에서 서인에게 가장 충격적인 조처는 이이(李珥)·성혼(成渾)의 출향(黜享- 문묘에서 축출함. 3월 18일)과 송시열의 사사(賜死- 국왕이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 자진케 함. 6월 3일)일 것이다. 그들은 서인을 상징하는 과거와 현재의 인물이었다. 특히 송시열을 유배지에서 압송하다가 정읍에서 사사한 것은 숙종의 정치운영 방식과 개인적 심리를 깊이 보여주는 조처로 생각된다.
국왕은 사건의 원인이었던 왕실 문제를 처리함으로써 이 환국을 마무리했다. 숙종은 중전 민씨를 서인(庶人)으로 폐출해 사가로 내보낸 뒤(5월 2일)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고 종묘사직에 알렸다(5월 13일).
이로써 서인이 장악했던 국혼과 중앙 조정은 일거에 남인으로 교체되었다.
마지막 환국은 숙종 중반에 일어났다. 남인은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했지만, 집권세력에 합당한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허적·윤휴처럼 무게 있는 대신도 없었고, 거듭된 환국의 경험 때문에 국왕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기사환국이 그랬듯이, 갑술환국의 핵심적 요인도 궁중의 문제였다. 그때 궁궐의 중요한 변화는 1693년(숙종 19) 4월 숙원 최씨(뒤의 숙빈 최씨)가 책봉되어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중전 장씨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진 것이었다.
1694년(숙종 20) 역시 고변으로 갑술환국은 시작되었다. 3월 29일 유학 김인과 서리 박귀근 등은 중전 장씨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숙의 최씨(숙빈 최씨)를 독살하려고 했다고 고변했다.
그 뒤의 과정과 결과는 기사환국을 그대로 뒤집은 것이었다. 우선 김익훈·김석주·송시열 등이 복관되고(각 4월 3일과 6일) 이이·성혼은 다시 문묘에 종사되었다(6월 23일). 영의정 권대운을 비롯한 주요 남인은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처벌되었다.
핵심적 문제였던 중전의 교체도 즉각 이뤄졌다.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민씨는 중전으로 복귀했다(4월 12일). 그동안 총애 받았던 숙의 최씨가 얼마 뒤 왕자(뒤의 영조)를 생산했다는 사실도 기억할만하다(9월 20일).
권력을 둘러싼 궁중의 갈등은 7년 뒤 비극적으로 종결되었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승하했는데(8월 14일), 그동안 희빈 장씨와 그 일가가 주술 등의 방법으로 왕후를 저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숙종은 즉각 장씨를 사사하고(9월 25일) 장희재를 처형했다(10월 29일).
그 뒤 숙종의 치세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있었지만, 서인이 주도하면서 종결되었다. 그러나 주도적인 당파를 일거에 교체한 환국이 보여주듯이, 가장 강력한 권력자는 숙종이었다. 그는 조선 후기의 한 정치적 특징인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두드러진 예외였다. 그러나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궁극적으로는 궁중의 갈등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고, 감정적인 요소가 개입해 돌발적이고 과격하게 진행되었다는 측면도 적지 않았다. 이것은 숙종의 치세를 평가할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으로 지적된다.
조선 제 19대 왕 숙종과 제 1계비 인현왕후·제 2계비 인원왕후의 능 명릉(明陵).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인원왕후의 능이 오른쪽 언덕에 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소재. 사적 제 198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46년에 걸친 긴 치세 동안 숙종은 여러 업적을 남겼다. 우선 대동법(大同法)을 경상도(1677)와 황해도(1717)까지 확대한 것이 주목된다. 강원도(1709)와 삼남 지방(1720)의 양전(量田- 과세 대상인 토지를 조사ㆍ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함)을 실시해 서북 지역의 일부를 빼고는 전국의 토지를 측량한 것도 중요한 시책이었다.
주전(鑄錢)을 확대한 것도 의미 있는 업적이다. 1678년(숙종 4) 1월부터 사용된 상평통보(常平通寶)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폐로 유통되었다. 이런 정책들은 조선 후기의 경제와 상업 발달에 상당히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훈련별대(訓鍊別隊)와 정초청(精抄廳)을 통합해 금위영(禁衛營)을 신설함으로써 오군영 체제를 확립했다. 이것은 임진왜란 이후 추진된 군제 개편을 완료한 조처였다.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마련해 1~4필로 균등하지 않았던 양정(良丁)의 군포 부담을 2필로 균일화한 것도 의미 있는 성과였다(1704). 북한산성을 크게 개축해 도성 방어를 강화하기도 했다(1712).
일본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통신사를 파견하고(1682, 1711) 왜관(倭館)무역에서 사용하는 왜은(倭銀)의 조례(條例)를 확정했다. 특히 막부(幕府)에게서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아 울릉도의 귀속 문제를 확실히 한 것은 주목된다(1696~1698).
조선 후기의 한 특징은 성리학이 심화되면서 명분과 의리가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명의 은혜를 갚는다는 대보단(大報壇)을 창덕궁에 설치하고 여러 민감한 사건의 피해자를 신원(伸寃)한 것은 대표적 결과였다. 단종과 사육신·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의 복권은 후자의 대표적 사례였다.
서원의 남설(濫設)도 이런 흐름과 밀접한 현상이었다. 숙종 때 서원은 300여 개가 신설되고 131개가 사액(賜額)되었는데, 지방의 학문 진흥이라는 긍정성도 있었지만, 당쟁과 경제적 특권의 온상이 되었다는 부정적 측면이 더욱 많았다고 지적된다.
숙종의 통치에는 일정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부분은 환국의 타당성과 실효에 관련된 것이다. 전근대의 왕정에서 국왕의 독단에 따른 전면적인 정치적 변화는 그 정체(政體)의 원리상 항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 때의 환국은 본질적으로 정책의 대립보다는 궁중의 정쟁에서 기인한 측면이 컸고, 그 방식이 지나치게 돌발적이었으며, 그 결과 또한 파괴적이고 소모적이었다는 측면에서 부정적 성격이 더 크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당시의 가장 큰 폐단인 양역(良役- 양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공역) 문제를 긴 치세 동안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도 중요한 한계였다. 모든 가호에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는 양반들의 반대로 결국 좌절되었다.
끝으로 널리 알려진 도적인 장길산이 이때 활동했다는 사실도 덧붙일 만하다. 장길산 일당은 처음에 황해도에서 출몰했지만, 1692년(숙종 18) 무렵에는 평안남도로 옮겨갔다. 조정에서는 해당 관찰사와 병사에게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리고 많은 상금을 걸었지만, 그들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그를 홍길동(洪吉童)·임꺽정(林巨正)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꼽았다.
조선 후기의 당쟁을 살펴보면서 각 사건의 그 구체적인 피화(被禍) 규모를 정확히 검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을 조선 전기의 정치적 숙청(대표적으로 일련의 사화)과 비교하는 것은 두 시대의 전체적인 성격을 가늠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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