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9 - 킨카쿠지(금각사) 에 도착해 연못에 비췬 실루엣을 보며 옛일을 떠올리다!
2024년 9월 19일 딸과 손주등 7명 일행은 교토에서 긴카쿠지 (銀閣寺 은각사) 를 보고
철학의 길 哲學の道 을 걸은후 아라시야마 를 찾아 텐류지 天龍寺(천룡사) 절
과 아라시야마치쿠린 竹林 の小經(죽림노소경) 이라고 불리는 대나무숲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시가지를 남쪽으로 걸어 가쓰라강 에 놓인 다리 도게츠교
渡月橋 (とげつきょう 도월교) 를 건너서 강변의 보트 들을 구경하고는 다시 렌터카에 오릅니다.
도로에는 운동부 인듯 학생들이 여러명 달리는데.... 한참 앞쪽에 성인이 달려가기에 코치인가 했더니 서양인
으로 마침 저만치 앞쪽에 도착한 버스 를 탈려고 했던 모양인데..... 버스는 야속하게도 출발해 버립니다.
예전에 베트남 후에 교외에 자리한 왕릉군에서 민만황제릉과 카이딘 황제릉을 보고 뜨득 황제릉을 구경
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니 우리 일행들은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건물로 뛰는데도, 저 서양인들은
아랑곳 않고 구경 하더라만? 하기사 이번에 보니 니조성에서는 서양인들도 우산을 양산 처럼 쓰더라는....
20여분을 달려서 킨카쿠지(금각사) 에 도착하니 입구에서 관리인이 무어라 말하는데
5시 10분에는 주차장 이 문을 닫으니 차를 그 전에 빼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주차장에서 걸어서 킨카쿠지(금각사)로 가는데.... 사람들이 내려오기로 오르막 언덕길을 올라가니 이런?
여긴 출구 라 되돌아 내려 와서는 앞쪽으로 걸어서 모퉁이를 도니 거기에 참배로(진입로) 가 보입니다.
진입로를 걸어 문을 들어서 입장권을 구입해 안으로 들어가니 연못 저편으로 휘황찬란한 금빛
금각사 가 보이는데.... 태국 방콕의 왕궁이나 버마의 사원 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을 뛰게 하니 사진을 찍기 좋은 곳 이 보이기에 앞으로 나가서 사진을 찍으려 합니다.
앞으로 나가 카메라를 들면서 어쩐지 뒷꼭지가 근질 거리는 것 같아 뒤돌아 보니 거기에 일본인들이
30명 가량 줄을 서 있는데 자기 차례가 되면 그제사 앞으로 나가 연못 너머 금각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네요? 하기사 일본인들은 세계에서 줄 서는데는 제일 이라? 러시아나 중국인과는 다릅니다?
무안해서 뒤로 나와 줄 끝에 서 있으면서 살펴 보니 바로 앞쪽 좁은 장소만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나가서 사진을 찍는 것이고, 그 옆으로 엄청 너른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진을
찍는지라 줄에서 벗어나 조금 옆으로 나가서 금각사를 찍는데 연못에 비췬 실루엣 이 참 멋집니다.
물에 뷔친 모습을 넋을 잃고 보는데 실루엣( Silhouette) 은 창문에 비친 그림자, 또는 불빛에 비친 그림자
혹은 세부적인 부분의 디자인을 제외한 윤곽이나 외형을 지칭하는 단어라는데..... 말의 어원은
루이 15세 시대의 프랑스 대신이었던 실루엣 으로, 그는 자신의 초상화를 윤곽만을 그리게 했다고 하네요?
예전에 은각사를 가려고 택시 기사에게 "긴카쿠지" 라 했더니 "킨카쿠지(금각사)" 로 온지라
본적이 있는 킨카쿠지 (金閣寺 금각사) 의 원래 명칭은 로쿠온지 (鹿苑寺 녹원사)
이지만..... 금박을 입힌 3층 누각의 사리전(舍利殿) 이 명물로 킨가쿠(金閣) 라는
명칭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어... 오늘날에는 킨가쿠지(金閣寺) 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래 무로마치 막부 (室町幕府) 시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滿) 가 1397년에 지은
별장 이었으나.... 그가 죽은 뒤 유언에 따라 로쿠온지라는 선종(禪宗) 사찰 로 바뀌게
되었다는데 무로마치 시대 전기의 기타야마 문화 (北山文化) 를 상징하는 3층 건물 입니다.
킨가쿠(金閣) 는 각층마다 건축양식의 시대가 다르니 1층은 후지와라기, 2층은 가마쿠라기
그리고..... 3층은 중국 당나라 양식 으로 각 시대의 양식을 독창적으로 절충하였습니다.
킨가쿠(金閣 금각) 는 1층은 침전과 거실로 쓰이고, 2층에는 관세음보살 을 모셔 두었으며....
3층은 선종 불전 으로 이 가운데 2층과 3층은 옻칠을 한 위에 금박 을 입혔다는데 1950년
관광료 수입으로 운영되는 형태에 불만을 품은 승려 하야시 쇼우켄 (林承賢) 이 불 을 지릅니다.
옛날의 킨가쿠는 불에 타 없어졌으며 지금 건물은 1955년에 재건한 것이고 금박은 1962년 과
1987년에 다시 입혀졌으며 이후 매년 교토 시민들의 세금으로 보수된다는데,
미시마 유키오 가 1956년에 쓴 장편소설 "금각사(金閣寺)” 때문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31세에 발표한 《금각사》로 일본문단의 정점 에 도달하였는데 1956년 1월부터 10개월간
매월 1장씩 잡지 《신조(新潮)》 에 연재되었고 그후 단행본으로 나왔으니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세차례나 노벨문학상 후보 에 거론되었습니다만.... 1970년 11월 25일 과격하게 스스로 생을 마감 했습니다.
주인공인 ‘나’, 즉 ‘미조구치’ 의 고백 으로 일관하는 1인칭 소설로 몇가지 에피소드 후에 방화 에 이르게
되는데,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금각에 유별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일체감을
느끼던 미조구치가 여성과 만나려 할 때마다 금각의 방해 를 받게 되고 분노해 결국 금각을 불태운다는....
극단적 유미주의자 미시마 유키오 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으니 노벨상 후보자인 신경숙 씨인데
소설 “엄마를 부탁해” 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한 신경숙씨에 대해 이응준씨는 그녀가 쓴
단편소설 “전설” 이 미시마의 소설 “우국 憂國“ 을 표절 했다고 발표했으니 한국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2011년 신경숙씨의 "엄마를 부탁해" 가 미국에서 출판되자 뉴욕타임스 는 두차례나 지면을 할애해 서평을
실었으니 - 엄마의 헌신, 가족의 눈물어린 후회 - 뉘우침이 소설의 핵심, 제이미 포드는 아마존닷컴의
서평에서 "어떤 책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 책!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오프라 북클럽' 에
'이달 베스트북' 에 올리는등 기대를 한몸에 모았다가.... 하지만 금년에 한강씨가 노벨상의 한을 풀었습니다.
교토의 상징인 킨카쿠지 와 대한민국의 국보 1호 남대문 그리고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터키 서부 에게해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은 공통점 이 있으니...
"세상에 불만을 품은 자" 가 "세인의 주목" 을 끌려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절 만 말하자면 금각사 화재는 우리나라 최고의 단풍 명소 전북 내장사 (內藏寺) 화재 와 닮았으니
2021년 3월 5일 저녁에 다른 절에서 와서 내장사에 한달째 머물든 승려가 기존 승려의 푸대접
에 암심을 품고는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백제시대 부터 내려오는 천년고찰을 불태운 것입니다.
숭례문(남대문) 은 채종기씨가 택지 개발 토지의 보상액에 불만 을 가지고 2006년
4월 26일 창경궁에 불을 질러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300만원을 선고받고도 2년후 2008년 2월 10일 다시 숭례문에 불 을 질렀습니다.
20시 40분경 채종기씨는 시너를 부은 다음 라이터로 불 을 붙여서 일어난 불이 흰 연기와
함께 숭례문 2층에서 발생하였는데..... KT 텔레캅 은 남대문에 설치한 센서에
뭔가 반응 이 있었지만 경찰서와 소방서에 연락하지 않았고 근처 택시 기사가 신고 합니다.
남대문 은 조선총독부가 붙인 명칭이니 사용하면 안되는지라.... 원 이름 숭례문(崇禮門) 화재는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으니,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화재가 발생한후 40분만에
불길이 잡히고 연기만 나는 훈소상태가 되자 진화가 된 것으로 오판 했는데, 0시 25분에
2층이 화염에 휩싸였고 0시 58분 2층 붕괴후 1층까지 옮겨붙어서 1시 54분에 전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국보 1호 문화재 라는 중압감에 "누구 하나 책임을 지고 결단" 을 내리는 사람이
없었으니... 지붕 일부를 부수거나 구멍 을 뚫어 그 안쪽에 물을 쏘아 진압해야
하지만, 장차 닥칠 "책임을 두려워 하여" 소방청과 문화재청이 서로 상대방에게
결단을 미루다가 일부 파괴로 수습할수 있었던 것을 결국은 전소하도록 방치한 것이지요?
남대문은 예전에도 없어질뻔 하였으니... 1905년 한국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가
교통에 불편하다며 대포로 파괴 하려고 하자 주 경성 일본 거류민장 나카이 키타로
(中井喜太郞) 는 " 예전에 가토 키요마사가 입성한 문 이며, 당시 건축물은 두세가지 밖에
없는데 파괴하면 아깝지 않습니까" 하였더니 하세가와 장군이 받아들여 파괴를 모면합니다.
2년후인 1907년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통감부가 교통의 편리와 서울 시가지 확장 정비 를
위해 서울의 성벽과 서대문 등을 허물 때도.... 남대문은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 가
입성한 유적이며 또 동대문은 고니시 유키나가 가 입성한 유적이라 하여 보존이 되었습니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보물 을 정하면서 남대문을 조선 보물 1호 로 정하였고 이승만 정부는 총독부가
정한 보물을 국보로 이름만 바꾸니 남대문은 대한민국 국보 1호 가 되었는데..... 이후 1963년
에 보물을 정하면서 남대문과 균형을 맞추려고 했는지.... 동대문(흥인지문)이 보물 1호 가 되었습니다.
화재 후에 남대문(숭례문) 을 3년간에 걸쳐 복원해 지었는데 복원후 반년 도 안되어 누각에서 100개가 넘는
균열과 변색 에다가 현판 나무에 새긴 그림과 글씨가 갈라지고 일어나 떨어지는 박락 현상 이 발생합니다.
균열과 변색에 그림과 글씨가 갈라지고 일어나 떨어지는 박락 현상은 단청 작업에 들어가는 재료
인 아교 나 조개 껍데기를 갈아 만든 백색 안료인 호분 에 문제가 생긴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저런 전통 안료를 생산하는 기술이 단절 되고 일본과 중국에서
안료를 수입 해서 써 왔는데.... 숭례문 복원에는 국민의 관심이 워낙 크다 보니
일본에서 안료를 수입하는 대신에 전통 재료를 살리려고 3년 을 애쓰다가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다가 완공 예정일이 닥치니 급한 김에 외국에서 안료를 수입 해 완공 기일 을 맞추려고
서두르다 보니 현판 나무도 제대로 말리지 못하면서 저런 불상사가 생긴 것이라! 일반
페인트를 사용하는 단청은 수명이 3년이지만 전통 안료인 호분을 쓰면 100년 이 간다나요?
일본에서 옻칠을 하는 장인의 칠붓의 재료는 18~20세 여성의 긴 머리털 이라고 하는데.... 파마나
염색을 하지않고 샴푸로 감지 않은 머리카락 이며, 해초를 먹은 여성의 머리털 을 최고로
쳐준다나요! 요즘 세상에 그런 머리카락을 어디가서 구한담? 하지만 일본에서는 가능한
것이..... 백여년 전에 그런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절에서 미리 기증을 받아 보관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남대문이 화재로 불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상실 했으니 대한민국 국보 1호 에서 남대문을 빼고
대신에 한글이나 반가사유상 또는 금관등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 지자
정부는 국보에서 1호, 2호, 3호.... 하는 호칭을 없애버리고 모두 그냥 “국보 ” 라고만 부르기로 합니다.
일본에서는 “국보 성” 이 있는데.... 히메지성, 히코네성, 이누야마성, 마쓰모토성과 마쓰에성 5개 이며, 우리
에게 익숙한 구마모토성과 오사카성에 나고야성과 도쿄성(황거) 등은 국보가 아닌 것은 저들 성이 파괴
되어 현대에 들어 다시 지었기 때문이니 그런 기준에 따른다면 남대문은 국보에서 제외 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러고는 주차비 400엔을 내고 차를 몰아 교토 시내로 들어와서는 윤동주 시비 를 보기 위해
황거 바로 앞에 자리한 도시샤 대학교 를 찾아가는데, 학교 인근에 차를 주차하고는 학교로
들어가서는 옛날에 벚꽃철 에 한번 온지라.... 그때를 생각하고 찾으니 얼른 발견하지 못합니다.
여기 저기를 찾아다니는 중에 수위가 나와서는 어떻게 왔느냐고 묻기에 “윤동주 시비와 도꼬
데스카?” 라고 한국말과 일본말을 섞어 물으니 종이에 프린트를 해서 비닐로
코팅 한걸 보여주는데 여긴 도시샤여자 대학 이며 도시샤 대학은 나가서 길 건너편에 있답니다.
도시샤 대학은 붉은 벽돌 고풍스러운 건물 인데 엣날 벚꽃철에 왔을때는 지하철 이마데가와 今出川(금출천)
역에 내려서 3번 출구로 나와 교토 고쇼 (京都御所 황거) 건너편에 자리한 이 대학교에 왔음에도.....
도시샤 여자대학이 따로 있는걸 몰랐기 때문인데, 두 학교의 건물이 너무나도 유사해서 생긴 해프닝 입니다.
학교를 나가서 길을 건너니 거기에 도시샤 대학 이 있기로 들어가서는 직원에게 다시 조금전에 물은
“윤동주 시비와 도꼬 데스카?” 를 되풀이 말해서 방향을 안내 받은후 드디어 시비 를 찾습니다.
대학 교정에는 윤동주 시비 (尹東柱 詩碑 ) 와 정지용 시비 (鄭芝溶 詩碑) 가 나란히
있으니.... 태극기와 편지 등 먼저 방문한 사람들이 남긴 물건들이
많은데, 저번에 우리 부부만 왔을 때는 벚꽃 이 참 아름다웠다는 기억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