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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묵상글 (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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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느님은 끝날까지 언제나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고,
세상이 있기 전부터 사랑으로 계시던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세상이 있기 전에도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분이십니다.
사랑의 존재이시기에 사랑의 행위를 하실 때
사랑하시는 성부께서 계시고 그 사랑을 받으시는 성자가 계셨으며,
성부와 성자 간에 오가는 사랑이신 성령께서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한 분이 셋이 되실 수 있으셨고,
사랑으로 셋이 완전한 하나를 이루실 수 있으셨습니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이제는 삼위일체로 우리를 창조하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은 삼위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창조로 이어집니다.
이는 남녀의 사랑이 자녀의 출생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께서 육신으로는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靈)으로는 당신과 비슷하게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것으로 사랑을 그치지 않으시고,
당신 사랑을 계속하시기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창조에서 구원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고,
낳아놓고 내버려 두는 사랑이 아니라 구원까지 책임지시는 하느님 사랑이며,
이것이 창조 때부터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것이 육화하신 주님이요 임마누엘 주님이시고,
이것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돌아가시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이시고,
돌아가신 다음에는 성령을 보내시어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어떻게 한 분 하느님이 세 분이 되시고,
세 분이 하나가 되셨는지 골머리 아프게 쓰지 말고,
다만 삼위일체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과 사랑을 느끼고 감사할 것입니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느님,
삼위일체로 창조하시는 하느님,
삼위일체로 구원하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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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있었던 갑곶성지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여름 태풍에 쓰러지는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나무가 쓰러질까요? 키 작고 약한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는 모두 키가 큰 나무였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아름드리 거목들이 태풍을 잘 견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옆에 있는 키 작고 약한 나무들이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태풍에는 자신을 낮추고 굽힐 줄 아는 나무만 살아남습니다. 보란 듯이 자신을 과시하는 나무는 쓰러지고 맙니다. 한 그루의 거목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러나 태풍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강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연약해 보이는 볼품없는 풀잎은 어떨까요? 너무 약해서 그냥 날아가 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태풍이 지나가고 얼마 뒤에 누워 있던 풀잎은 다시 고개를 듭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기를 높이고 과시하는 것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갈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태풍 앞에 고개 숙이는 풀잎만이 살아남듯 주님 앞에 고개 숙이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풀잎의 삶을 기억하고 또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기억하고 또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입니다. 성부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으며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성부께서 세상에 보내신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성자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시면서, 교회를 성화하고 인도하도록 성령 하느님을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세 위격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해 우리는 나의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도 일치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나의 이웃들과 어떻게 일치하고 있을까요? 혹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면서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면서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이웃과의 일치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우리 역시 머무르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신비 안에 머무는 사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더 큰 은총과 사랑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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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주변이 어둡다고 투덜대지 말고 네거 먼저 촛불을 켜라(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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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신비입니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워도 참으로 벅찬 사랑의 신비입니다. 너무 깊어 헤아려지지 않아도, 오히려 다 헤아려지지 않기에 더 깊이 매료당하는 신비입니다.
흔히들 “삼위일체”를 알아듣기 힘든 신비라고들 여깁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신비”의 내용을 알아듣는 데는 한계와 어려움이 있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는 이 사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그 신학적 의미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선 하느님께서 “삼위로서 일체이신 분”이시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신비입니다. 곧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축복의 신비’요,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말해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곧 이 신비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과 그 사랑으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축복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참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참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 생명의 진리가 나타나게 하시고, 당신의 숨결인 성령께서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음과 실천으로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지금 바로 이 자리에 현존하신다.”는 사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함께 한다”는 “함께 친교 안에 머문다”는 의미를 품고 있으며, ‘함께 일하신다(활동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사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있음”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삼위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 이름마저도 ‘항상 함께 계시는 분’, ‘임마누엘’이시듯이,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함께 있음”, 그 자체가 이미 사랑입니다. 함께 있는 것, 그것은 유대와 연대의 관계 맺음이요, 관계 맺는 것, 그것은 함께 만나고 사귀고 친교를 나누는 일입니다. 곧 벗이 되는 일이요, 우정을 나누는 일이요,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동행자로 삼으시고, 벗이 되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함께 있음’, ‘사랑으로 서로 속해 있음’, ‘사랑으로 서로의 것이 됨’, 이는 참으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오늘 이처럼, 우리가 “함께 있음”도 사랑입니다. 이 “함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은총인지! 참으로 큰 행복인지! 그러나 우리는 함께 있지 못하게 될 때라야 이를 더 잘 알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함께” 여기에서 만나 ‘한 분이신 주님을 찬미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함께” 있을 뿐 아니라 “안에” 함께 계시며 ‘상호내주’(perichoresis)하시며, 사랑으로 서로 “속해” 계십니다. 서로에게 자신을 바치고 비우시면서 섞이되 혼동되지 않으시며 ‘하나’를 이루시며, 자신을 통해 자신 안에 계신 타자를 드러내십니다. 곧 성부께서는 자신을 말씀으로 내보내시니 성자요 숨으로 내보내시니 성령이십니다. 성자께서는 성부를 드러내는 얼굴이시오 성령을 내보내십니다. 성령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성부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구원경륜을 이루십니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계시는 지를 밝혀줍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결코 분리될 수가 없는, 깊이 관계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친교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동행’하시는 하느님임을 말해줍니다. ‘동행’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심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사랑의 생명을 꽃피워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을 실현하는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이토록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토록 거룩한 일입니다. 참으로 축복입니다. “함께 있음”,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삼위일체시오 사랑이신 하느님!
늘 함께 하시는 당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늘 곁에 머물러, 당신 눈길 속에 저를 담고 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품으시고,
숨(영)과 말씀의 양손으로 쓰담쓰담 어르시고 달래십니다.
오늘 전부를 비우시고 건너오시어
제 안에서 사랑으로 사라지시는 당신은
저의 생명으로 차오르십니다.
그 사랑 안에, 저가 녹고 사라져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소서.
오, 경탄하오는 사랑이시여!
저를 차지하소서. 저를 비우소서.
오롯한 당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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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큰 사랑으로 우리를 빚어 만드셨고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이 시간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으로 계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태양 자체를 성부로, 지구까지 오는 빛을 성자로 그 빛이 따뜻하게 하고 자라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성령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 다 부족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앞에 계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고 목표이며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위해 외 아드님을 넘겨주신 분입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분입니다. 죄인의 대변자요, 억압받고 소외 받는 이들의 변호자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고 새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각기 역할이 구별되면서도 하나이신 하느님을 사랑 안에서 만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단순히 믿을 교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위한 존재가 되는 삶의 방식을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성부는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성자 역시 아버지가 없으면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항상 아버지의 아들로 존재합니다. 성령은 성부의 영이시며 성자의 영이십니다. 이렇듯 삼위일체는 하나가 타자 없이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런 다음 성부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15). 성령께서도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선포하시고 성부를 드러내십니다. 성부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시고 온전히 성자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서로에게 열려 있는 관대함을, 타자에게 열려 있음을 봅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타인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십니다. 우리도 나와 너, 우리라는 사랑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매일 긋고 있는 십자성호를 통해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십자성호를 그으며 목숨을 바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감싸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고 이웃사랑의 소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더욱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으로서 함께 계신다니 가슴 벅찬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미야1,6)하며 예언자 직무를 거절할 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미야1,8)고 하셨고, 모세도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4,10)하고 직무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내가 너희를 도와 주겠다”(탈출4,15)고 하셨습니다. 에제키엘서 2-3장에 보면 에제키엘이 소명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도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하셨고 에제키엘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는 약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는 할 일을 주시고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한 사람은 믿음의 눈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사도행전이 바로 그것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을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더욱 다져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커지길 원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살아내야 합니다. 큰 믿음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은 사랑하십시오.
서로 간의 관계에 이해타산이 끼어들면 힘들어집니다. 나도 피곤하고 상대도 피곤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이듯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그곳에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많이 행하게 될 것이고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아직 주님이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분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결단을 내리는데 있습니다”(소화 데레사).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기 코드를 빼어 놓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많은 은총을 주시고자 해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코드를 빼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먼저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힘들고 지쳤을 때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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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제는 매일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강력한 하느님 체험은 모세와 함께한 ‘출애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했어도 뉘우치면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갈 때면 예언자를 보내 주시어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성자이신 하느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기쁜소식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들이 머무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쁜소식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병자들은 치유되었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은 성령의 하느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협조자 성령의 하느님입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이제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것에 맛 들일 수 있는 슬기로움을 주는 은사, 교리의 어려운 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은사, 어떤 일이 옳고 그른 일인지 더욱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열렬히 섬기게 하며, 죄악과 악마를 거슬러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능력이며 순교까지 하면서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는 은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분별케 하는 은사,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자녀다운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을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사랑하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섬기게 하며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하며, 죄를 피하게 하며 영생에 대한 희망을 주는 은사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체험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사랑과 은총 그리고 친교로 일체를 이루신다면 본당에서 성직자와 수도자와 신자들도 사랑과 은총 그리고 친교로 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직자가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어 준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 준 것이다. 모범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수도자가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것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수도자에게서는 ‘청빈, 정결, 순명’의 향기가 넘쳐납니다. 신자들이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면서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었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과 가정은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직자의 겸손, 수도자의 기도, 신자의 회개가 삼위일체를 이루면 본당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넘쳐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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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한 분이심을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 분께서 한 분이실까요? 이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계시고, 또 성령과 함께 계셨다는 것을 성경에 찾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이 세례받으실 때 기억나세요?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고, 그때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 이예요. 이 부분이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이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삼위의 하느님께서 어떻게 한 분이신지에 대한 것입니다. 세분이 한분이 되실 수 있는 이유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가족끼리 하나가 되는 이유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할 때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사랑이 둘을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도 성령께서도 사랑이지요. 그래서 완전한 사랑인 세분이 하나가 되어, 또한 완전한 사랑이 되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잠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과 우리도 하나가 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려면 진정으로 우리는 사랑 안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어야 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람들 안에 우리가 머무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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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두 아빠 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아빠 곰에게는 각기 아들 곰이 있었습니다.
한 아빠 곰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물고기를 잡아다 먹였습니다. 아들은 열심히 그 물고기를 받아먹었습니다.
다른 아빠 곰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아들 곰은 힘든 낚시에 투덜거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빠 곰은 인내를 가지고 아들을 훈육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두 아빠 곰은 노쇠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물고기를 받아먹던 아들 곰은 투덜거렸습니다. 더 이상 신선한 물고기를 먹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물고기를 잡을 줄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낚시를 배운 아들 곰은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나아가 그의 자녀를 위해 낚시를 했습니다. 신선한 물고기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하려고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넘어지지 않는 방법이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을 통해 우리를 넘어지게 하십니다.
‘일어나보라고, 별것 아니라고, 안 넘어질 수는 없으니 잘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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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가정과 사랑의 일치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마태오 19, 5-6)
가정의 일치
1+1+1을 하나라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는 셋일까요? 하나일까요?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자녀가 태어난다면 분명 셋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연결된 가족은 나와 너의 구분이 없습니다.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이고, 우리의 행복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하나된 우리 가족의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가족은 하나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신비’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었지만 서로의 자아는 잃지 않고 그 본성을 유지하는 것 그 또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과 일치는 서로 비례합니다. 서로를 사랑할수록 일치됨의 깊이는 점점 커지지만, 서로를 미워한다면 한 지붕아래 살더라도 서로의 간극은 점점 멀어져 더 이상 하나가 아니라 셋이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치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표현할 때 ‘사랑으로 일치된 성 가정’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된 가정의 모습을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체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은 광대한 사랑이지만 우리들 가족의 사랑은 한 방울 물과 같습니다. 마치 얇은 투명 비닐을 사이에 둔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밀착되어 하나이지만 또 어느 순간 깨져버릴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족안에 함께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행복의 근원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치된 사랑으로 살고 다시 그 행복을 온 세상에 나눠 주기를 바라셨기에 최후의 만찬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 20-23)
그리고 교회를 향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이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여 주소서”
주님, 절대 행복의 비결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게 하여 주소서. 가족과 공동체 안에 있는 우리들이 이기심을 버리고 화합의 삶, 하나된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그럼으로써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가정과 공동체가 되게 해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기도 중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진정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고자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3.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 그대로 아드님 예수님을 만드셨습니다. 나도 과연 주님과 같은 사랑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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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
-늘 하느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은 영광받으소서”(묵시1,8)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기도가 무엇일까요? 날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바치는 성호경 기도입니다. 이 기도와 더불어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도 날로 깊어집니다. 미사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과 함께” 삼위일체 하느님 고백의 인사로 시작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바칠 수 있는, 온몸에 삼위일체 하느님을 각인하며 바치는 이 짧고 강력한 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가 된 이후 얼마나 많이 바쳐온 자랑스러운 성호경인지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람임을, 우리 신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기도요, 우리 삶의 방패이자 하느님과의 일치를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는 성호경 하나로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끄럼없이 성호경을 그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는 기도를 바치십시오! 저 역시 날마다 기상하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성호경과 더불어 만세칠창을 바치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는 만세삼창에 이어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이어지는 만세사창, 도합 만세칠창을 바치기 시작한지 9개월이 됩니다. 작년 성모승천대축일이자 광복절인 8월15일부터 시작됐고 살아 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기도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오늘 성무일도시 아침 찬미가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성삼의 그신비는 깊고도깊어 누구도 알아들을 길이없으니
하늘의 시민들은 성삼뵈옵고 드높이 노래하며 기뻐하도다”
하늘의 시민들인 우리 역시 믿음의 눈으로 성삼의 하느니 뵈오며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 안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어렵다고 하는데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이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은 공동체 하느님이요, 우리 누구나 만날 수 있는 활짝 열려있는 개방의 하느님이요, 성령안에서 성자의 인도하에 성부를 향한 인생 여정을 살게하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삼위일체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우리들이요, 이렇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바로 살아 있는 삼위일체 하느님 체험인 것입니다.
체험으로 이해하여야 할 삼위일체 교리를 머리로 이해하려니 그리도 어려운 것입니다. 죽은 화석같은 삼위일체 교리가 아니라 이미 우리와 하나되어 살고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세 개의 말씀의 배치가 참 고맙습니다. 모두가 생생한 체험적 고백입니다.
첫째, 살아 계신 성부 하느님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의 모세는 당대의 백성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불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당대의 백성들에게는 정말 실감나는 살아계신 하느님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당대의 백성들의 체험을 오늘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은총이 있었기에 이렇게 장구한 세월 기적같이 살아온 한민족입니다. 곳곳에 순교성지들 가득한 나라, 순교성인 숫자로도 손꼽힐 순위의 대한민국이요, 하느님을 찾는 구도적 열정은 산티아고 순례지에서도 손꼽힐 순위의 대한민국 사람들입니다. “오늘”부터 하느님 신앙을 새롭게 하여 살아가라는 모세의 말씀이 신선한 충격입니다.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강조되는 바,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오늘입니다. 오늘 바로 이런 하느님을 마음 깊이 새기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며 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하느님을, 계명들을 잊고 살아온 우리들이요 바로 이것이 재앙의 근원입니다. 늘 새롭게 바로 “오늘” 체험하고 살아야 할 성부 하느님입니다.
둘째, 살아 계신 성자 예수님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의 열한 제자는 물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자 예수님 말씀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성부 하느님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신명기의 모세와 흡사합니다. 모세를 통해 성부 하느님을 새롭게 체험했듯이, 우리는 성자 예수님을 통해 성부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성부 하느님을 환히 드러내는 성자 예수님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성자 예수님이심을 잊지 맙시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성자 예수님의 이 약속 말씀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정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성자 예수님 역시 모세처럼 신신당부하는 바, 우리가 명령받은 바를 잘 배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 계명의 실천입니다. 계명의 실천, 말씀의 실천을 통해 풍요로운 하느님 체험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셋째,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 사랑의 성령입니다. 늘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고 인도하시고 깨달음을 주시고 자유롭게 하시는 참 고마운 성령입니다. 성령을 통해 일하시는 성부 하느님, 성자 예수님입니다. 바오로의 가르침이 참 고맙습니다. 한숨에 읽혀지는 주님의 말씀이요 우리의 복된 신원을 깨닫게 하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상속자입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공동상속자로 만드는 성령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값싼 영광, 값싼 은총, 값싼 구원은 없습니다. 그분의 영광에,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 성령의 인도하에 사는 것, 그리고 주어진 계명을 질 지키며 책임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이자 청소년 주일입니다. 참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닮아 그 영혼은 나이에 상관없이 영원한 청춘의 청소년입니다. 신비가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삼위일체 하느님 교리,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한없는 위로와 평화를 주는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성서 곳곳에 삼위일체 하느님의 흔적이 널려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충만한 행복을 살 수 있음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렇게 사랑 중에 살고 있음이 삼위일체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사랑의 성령 안에서 성자 예수님을 따라 성부께 이르는 “하닮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구원의 약속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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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삼위일체>
당신과 나
나뉘면서 갈림 없는 까닭은
당신 안에 언제나 내가 머물고
내 안에 언제나 당신을 품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나
다르면서 같은 까닭은
당신 언제나 나만을 드러내고
나 언제나 당신만을 드러내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나
홀로이면서 함께인 까닭은
당신 언제나 나만큼 존재하고
나 언제나 당신만큼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나
구분되면서 하나인 까닭은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요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나
앞서거나 뒤서지 않는 까닭은
당신 있는 곳이 내 자리요
내 있는 곳이 당신 자리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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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교회는 성령강림 대축일 다음 주에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삼위일체는 하나의 실체(實體) 안에 세 위격(位格)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의 신비를 말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삼위가 계시다는 신앙교리입니다. 이 신비는 인간의 지혜로는 완전히 알아듣기 힘들지만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바대로 한분이신 하느님께서 세 위격, 즉 성부이신 하느님과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으로 계심을 말합니다.
이는 마치 태양과 태양에서 나오는 빛과 그 빛에서 발하는 열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우리 또한 일상의 삶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삼위일체적인 삶을 사는지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삼위일체적 삶을 드러내는 사람은 참된 회개를 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참된 신앙이며 살아 있는 성인일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얘기하는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삶은 하느님의 영, 특히 분별의 영으로 인도될 때 가능합니다.
분별의 영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특별히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인도합니다.
분별의 영은 절도 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분별의 영은 모든 사람과 상황과 사정에 올바른 태도와 자세를 취하게 합니다.
분별의 영은 현명하고 지혜롭게 비밀을 간직하게 합니다.
분별의 영은 사람과 사정에 따라 잘 생각하여 배려하게 합니다.
분별의 영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조심성 있게 대하게 합니다.
이렇게 분별의 영이 생각과 말과 행동에 깃들게 되면 영으로 충만하여 그다지 말을 많이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게 되고 자연 스럽게 절제 있는 말이나옵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에서 오는 이 분별의 영으로 인도되는 삼위일체적 삶은 다른 이들이 지켜 보지 않을 때에도 언제나 행동에 항구적 성실성을 지니며 어떠한 비판이나 아첨에도 동요되지 않는 평화를 간직하게 됩니다. 행동은 생각과 말씀의 결실이며 존재의 문이며 창입니다. 우리가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이되어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명령하고 가르치는 것을 말과 표양으로 드러내는 복음의 증거자가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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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거룩한 첫영성체에 의해 갑자기 병이 회복되다
프랑스-1860년
제구르(Mgr.de Segur)가 기록하였듯이, 나 자신은 불행에 처한 데니스(Denise)라는 소녀를 알고 있다. 그 아이는 1860년 9월 20일 성체성사로 인해 병이 치료되었다.
그 어린 데니스는 불행하게도 학교 체조시간에 철봉에서 떨어져 머리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또 몸의 다른 부분에도 상처를 입었다. 많은 의사들이 그 소녀를 치료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병세는 악화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가혹한 시련을 겪는 이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얼마 더 살지 못할거라는 말을 의사로부터 전해 들었다.
데니스는 첫영성체를 하게 되는 것을 매우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제 첫영성체를 하는 주일이 점점 다가오자 소녀는 친구들 처럼 구세주 예수를 맞이할 수 있도록 성당에서 거행되는 성찬식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부모에게 간곡히 부탁하였다.
“제발 저를 성당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리고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곧 건강해지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하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조차 없는 데니스는 부모님께 애걸하였다.
의사와 아버지는 소녀를 성당으로 운반해가는 도중에 머리와 척추의 상처로 인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식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했다. 결국 그들은 그 소녀를 침대에 눕혀 마차로 성당까지 데려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하얀 영성체복을 입은 소녀의 친구들은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데니스는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혀 소년 소녀 친구들과 함께 사랑하올 구세주를 받아 모셨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동안 그녀는 주님께 자신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는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데니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님께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소녀의 어머니와 미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매우 놀라며 기뻐하였다. 첫영성체를 한 이 행복한 소녀는 완전히 병이 치료된 것이었다.
성당에 한번도 간 적이 없으며 신앙심이란 전혀 없는 소녀의 아버지는 그렇듯 중병을 앓던 데니스가 성찬식을 마치고 기쁘게 뛰어와 그에게 매달렸을 때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다음 날 데니스는 이전과 같이 학교에 가게 되었다. 이러한 기적이 있은 이후 그녀의 아버지는 성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계시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회개하게 되었다.
성스러운 성체에 의하여 갑작스럽게 병이 낫는 일은 순례지인 루르드(Lourdes)와 파티마 (Fatima), 그리고 다른 순례지에서도 매우 종종 일어나곤 한다. 수백 수천의 성체의 기적이 현재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어떠한 책으로도 성체의 기적을 모두 다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다.(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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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장엄히 선포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중요한 대목을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는 수동형 문장으로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일이 아버지에게서 위탁되고 주어진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신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제1독서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늘 인간과 함께 계셨던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함께하시고자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십니다.
더욱이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함께하심’이 ‘예수님과 우리가 공동 상속자’라는 내용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려고 어떠한 일들을 하셨는지 그 구원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 역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인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준엄한 약속으로 마무리됩니다.
육화하신 ‘성자’께서는 구약 내내 인류와 함께하신 ‘성부’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계시이시고, 이렇게 성자 안에 성부께서 온전히 드러나셨음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를 ‘신비’라고 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애매함 때문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사랑을 통한 체험으로 인식되고 확인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삼위일체의 결정적 신비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선언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지금 내 삶과 주변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삼위일체의 관계적 신비는 당연히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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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합시다!
강론하기 참으로 힘든 주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돌아올 때마다 지난 시절, 생뚱맞고 엉뚱한 이단 교리를 선포한 것이 떠올라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입니다. 하느님께도 크게 송구스럽고, 적절치 않은 예로 인해 고개를 갸웃거리셨을 교우들에게도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둘러싸인 하느님, 오묘하신 하느님을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언어로 설명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대축일이 다가올 때 마다, 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틈만나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고백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호경을 통해서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며 성호경을 긋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성삼위로 존재하고 계심을 믿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미사 시작 때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이렇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은연중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지식에 있어서 둘째 가면 서러워할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 찬가’를 부를 때 아주 겸손한 신앙 고백으로 시작했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로마서 11장 33~34절)
결국 하느님은 파악이나 결론을 내릴 대상이 아니라 신비와 신앙의 대상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방식, 접근 방식 역시 더없이 신비스럽고 심오하며 불가사의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양식과는 완전 다른 초월적·신비적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역시 이런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은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훨씬 초월적이고, 훨씬 풍요롭고, 훨씬 조화롭고, 더없이 뜨겁고 극진한 사랑인데,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삼위께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상호 일치 안에서 통합된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보내시는데, 곧 성삼위의 사랑입니다.
우리네 인간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강한 정복 욕구입니다. 적정선에서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끝끝내 파헤쳐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 어떤 오지이든 탐험하고 깃발을 꽂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마저도 인간의 머리로 딱 떨어지는 공식이나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연구의 대상도 아닙니다. 신비 그 자체입니다. 알량한 인간의 머리로 파헤쳐지고 결론이 딱 떨어지는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실체가 명확하게 설명되고 낱낱이 밝혀진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신비하며 불가해한 하느님의 영역은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게 현명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 우리는 더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 자체이신 성삼위 존재 앞에 더 뜨겁게 그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더 깊이 동료 인간들을 사랑할 때, 삼위일체의 신비는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교리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4항)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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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보관을 위해서 2024. 5. 28. 추후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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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주십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예수님께서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단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각각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됩니다.
접속사 '그리고'는 단어를 나란히 연결하는 접속사로
연결되는 단어들은 문장 안에서
그 비중이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어느 한 위격이 다른 한 위격보다 높지 않고
서로 같은 위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를 주는데
아버지의 이름으로만 주는 것도 아니고
아들의 이름으로만 주는 것도 아니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한편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세례를 통해 삼위의 관계성 안으로
우리가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동등한 위격으로
일치를 이루는 것처럼
이제 우리도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각각 그 삼위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 관계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말씀으로도 표현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삼위이시라는 것에서
하느님께서 관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관계성은 이제 삼위의 관계를 넘어
우리까지도 그 안에 포함하려고 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느님과 관계가 없이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함께 하는 사이임을 보여줍니다.
혼자 놓아두면 살 수 없기에
돌봄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놓지 못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물론 인간이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그것보다는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있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의 하느님께서
서로 사랑의 관계 안에 머무시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향하면서
우리 안에 머물려고 합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그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까지나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 사랑 안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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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8,16-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부활시기가 부활의 가장 큰 결실인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끝났다. 이렇게 부활시기가 끝난 후 바로 삼위일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모든 구원질서의 원천은 삼위일체이며,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삼위일체의 업적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와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 그리고 성령강림의 신비가 발하는 빛들이 삼위일체에서 구원의 업적이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시인 단테는 “신곡” 천국 편 제33곡 85-87에서 내세에서의 상징적인 모험 여행의 결론으로 모든 것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에 귀결시키고 있다: “그 깊이 속에서 나는 보았노라. 조각조각 우주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 한 권에 엮어져 있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신학적인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신비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4,39). 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의 책임을 충만히 지고 계신 분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함께 하므로 하느님의 생명에 함께 참여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생명에 신비롭게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아들의 차원으로 우리가 들어갔고, 그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즉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서 부르고 계신 그 이름, “아빠!”를 우리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 때문에도 “삼위일체”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처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우리가 “새로운 인간”(갈라 6,15; 2코린 5,17 참조)으로 “변화”하고 우리의 생활이 윤리적, 영적으로 변화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삶 속에서 항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노력에 성령의 이끄심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언제나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우리 마음을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복음에서는 명확하게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19절)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그 신비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종속되는 그런 멍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성 삼위께로 가는, 그 신비에 참여하는 움직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이 신비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께서는 하시고 계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가르쳐라!”(19-20절). 이렇게 이루어진 공동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봉헌된 믿음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여 그 생명을 누리는 이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리고 생활의 증거로써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 영광을 받으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20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로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성령 안에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구원의 은총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기 확산적 사랑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사랑은 하나가 되어, 서로가 주고받는 사랑이 완전한 모습이며, 그 사랑은 당신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창조와 구원의 역사로, 그리고 아들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로, 그리고 성령강림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이 구원의 신비를 다시 한번 묵상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날이다.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진정한 친교를 나누려면,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적인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여러 식구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 분명하게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닌데,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이시다. 즉, 사랑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에도 우리 가족 사이에도 진정한 사랑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여럿이라도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것이며, 그 신비를 체험할 수 있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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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1) 우리가 미사 때 바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리스 신경’에는
삼위일체 신앙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그리고 ‘삼위일체 감사송’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사실 삼위일체 교리 자체가 어려운데, 위격, 본체, 본성 같은
용어들 때문에 더욱더 알아듣기 어려운 교리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용어들을 다른 쉬운 말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적당한 용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2)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신경이나 감사송이나 교리서에 있는 대로 말하면 되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삼위일체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고
깨달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자기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해했다고 착각했거나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이해한 척 하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삼위일체 신비는
당연히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는데,
하느님 체험과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체험한다고 해서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삼위일체 교리는 이해해야만 하는 교리가 아니라,
믿어야 하는 교리입니다.
이해를 못해도, 또는 이해가 안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하느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해서 계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의 대상’이신 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찬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면(묵시 22,4),
‘모든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종교입니다.
바로 이 신앙이 삼위일체 교리의 출발점입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콜로 1,15-17).”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믿는 신앙과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신앙을 하나로 묶고, 다시 성령에 대한 신앙을 합해서,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한 용어가 삼위일체입니다.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성경에 없는 것을 믿는다고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데,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삼위일체 신앙은 성경에 아주 많이
표현되어 있고, 고백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교회가, 또는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계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삼위일체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내려 주신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18ㄷ-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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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 28, 19)
사랑은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깨닫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을 배우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되는
일치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깊어집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우리가
존재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느님 사랑의
놀라우신
업적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다름 아닌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개별적이면서도
고유한 활동성으로
우리의
참된 구원을 위해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넘치는 생명력으로
구체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의 삶또한
삼위일체의
지극하신
사랑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삼위일체는
어제의 신비가
아닌 살아있는
오늘의
신비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 사랑을
닮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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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데 위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교리의 설명은 간단한데, 그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어렵습니다.
차라리 구약에서는 ‘하느님께서 고대 근동의 여러 신들과는 다르게
오직 한분이시다.’라는 가르침은 알아듣기 쉽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사실 그럴까요?
구약의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두 단어 '엘로힘(Elohim)'과 '야훼(Yahweh)로
나타나십니다.
창세기는 우주의 창조의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1,1) 여기에서
하느님(elohim)은 엄격히 말하면 엘(el)의 복수(plural)입니다.
창세기 첫 장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한분의 신(神)입니다.
시나이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과의 계약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은 다른 신과는 다른 절대 신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4,39)
또 하느님께서 단수가 아닌 복수로 나타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시편저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존귀하게 창조하신 사실을 찬미하는 노래에서
이런 구절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시편 8,6)
여기서 하느님과 구분되는 '엘로힘' 같은 단어를 쓰는데 새 성경에서는 '신들'로,
또는 공동번역에서는 '천사들'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엘로힘'의 단어가 어떻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한분의 하느님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이집트와 고대 근동의 다신(多神)과는 구분하여 한 분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시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2-3)
구약에서는 하느님 자체의 정의 보다는 인접국가의 신들의 숭배를 경
계했던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성자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으로 확실하게 구분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
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분명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의
관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6-17).
예수님의 삼위일체을 가르치고 지키는 일은 사실 역사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둘러싸고 많은 주장과 또 이단은
많은 어려움과 혼란을 주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중에 에비온(Ebionites)파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구약율법의 준수를 고집하면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부정하고 인성(人性)만 인정하려 하였습니다.
반대로 영지주의(Gnosticism)에 근거하여 신성(神性)만 인정하고 인성(人性)만을
부정하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의 주장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마르치온주의(Marcionism)인데 정통교리를 반대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정통교리를 세우고 지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혼란스러움에서도 정통의 교리를 잘 지켜 왔고
제1차 니체아(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 라틴어: Trinitas)교리를 정립해 놓았습니다.
패트릭 성인(389-495께서 이 삼위일체와 연결되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스코틀랜드 던바턴(Dunbarton) 근처 킬패트릭(Kilpatrick)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16세 때에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붙잡혀서 북 아일랜드 앤트림(Antrim)에서 6년 동안 양치기 생활을 하다가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사제가 되고 432년에 주교 수품을 받고 아일랜드로 파견됩니다.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원주민들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한 강한 거부를
받습니다. 그러나 성인께서 클로버의 일종인 '샤므록(shamrock)' 잎으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쉽게 이해 시켜서 전 아일랜드를 그리스도교가 될 수 있게 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St.Patrick's Day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샴므록(shamrock)'을 병에 꽃고,
초록색으로 옷, 장식등을 한다고 합니다.
구약의 하느님의 복수로 된 이름 ‘엘로힘’과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의 진리는 인간 이성(理性)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 안에서만 하느님의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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