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거실 소파에 옥사나 알페로바(41)가 술에 취해 자고 있다. 벽시계는 정오를 가리켰다. 그보다 22살 많은 한국인 남편이 그 옆에 의자를 놓고 기타를 쥐었다. 옥사나가 사진에 나와야 돼. 그게 리얼리티야. 이게 로큰롤이라고 한대수(63)는 말한다.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사진작가, 시인, 그리고 영원한 히피로 불리는 한대수의 거처는 신촌의 56㎡(약 17평)짜리 오피스텔. 2004년 그가 뉴욕을 떠나 서울에 다시 정착했을 때만 해도 그 절반 크기였다. 한대수는 59세에 딸 양호(4)를 낳자 오피스텔을 한 칸 더 얻어 두 방을 텄다.
1948년 핵물리학자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지금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러시아인 아내를 간호하며 늦둥이 딸을 키우고 있다. 송창식·윤형주·조영남과 함께 1968년 세시봉에서 데뷔했지만, 43년이 지난 지금 한대수는 돈도 인기도 별로 없는 데뷔 때 모습 그대로다. 14장의 음반과 6권의 책을 펴낸 그는 8월 23일 국립극장에서 대중음악인으로서는 처음 국립국악단과 협연하고, 10월엔 사진 에세이집 '나의 해골'을 펴낼 계획이다.
두 번째 아내 옥사나는 그녀 나이 스물두 살 때 뉴욕에서 만났다. 아주 예쁘고 늘씬했다. 게다가 월스트리트의 증권회사에서 연봉 10만 달러를 받는 관리부장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다. 한 여자(옥사나)는 환자지, 또 다른 여자(딸 양호)는 꼭 보살펴줘야 하는 네 살짜리지, 나는 두 여자의 늪에 빠졌다.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이게 바로 로큰롤이다.
한대수는 1974년 동갑내기 디자이너 김명신과 결혼해 뉴욕으로 건너갔으나 89년 이혼했다. 이후 뉴욕에서 만난 옥사나와 92년 재혼했다. 모스크바에서 간호대학을 졸업한 옥사나는 크렘린에서 간호사로 일했었다. 기회의 땅 미국으로 간 뒤에 언어와 문화 장벽에 부딪혀 가정부 일을 하며 살던 중 한대수를 만났다. 이후 월스트리트에 비서로 취직, 매년 승진하며 승승장구하다가 알코올중독에 빠졌고 한대수를 따라 한국에 정착했다. 그의 전처 김명신 역시 펑크(punk) 문화를 사랑한 독특한 예술가로, 한대수와 이혼 후 독일인과 재혼했다가 다시 이혼했다. 그 후 90년대 중반 프랑스 파리로 이사한 뒤로 소식이 끊겼다.
그는 현재 CBS FM의 '손숙·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세시봉 멤버가 벼락인기를 얻자 MBC에서 출연요청이 왔지만 음악적 방향이 달라 거절했다. 당시 유명한 프로듀서였던 이백천씨 소개로 세시봉에 서게 됐는데, 송창식·윤형주는 하모니 위주의 팝송을 불렀고 조영남은 톰 존스 노래를 성악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한대수는 첫날 자신이 작곡한 '행복의 나라로'를 불렀다. 미국에서 온 한대수는 한국 노래를 불렀고 정작 한국 사람들은 팝송을 불렀다. 그래서 그는 외계인 취급을 받았고 그때부터 한국의 밥 딜런이란 말을 들었다.
.
밥 딜런은 자신이 유대인인 걸 감추려고 이름을 바꾸고(밥 딜런의 본명은 로버트 짐머만이다) 바하마에 섬을 두세 개나 갖고 있다. 부자인 것이 못마땅한 게 아니라 진실하지 않다. 음악에 절박함이 없다는 얘기다. 음악은 절박함 속에서 뱀이 껍질을 벗듯이 해야 하는 것이다.
한대수의 1969년 남산 드라마센터 리사이틀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깊게 각인된 공연이다. 이날 공연은 조명을 모두 끈 암흑 속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 어디선가 향이 피어오르고 한대수가 커다란 톱을 연주하며 등장했다. 이날 한대수가 들려준 노래 중 상당수는 그가 18세 때 작곡한 것들이었다. 팝송 번안곡이 대중음악의 거의 전부였던 때, 한대수의 무대는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이 공연은 69년을 '한국 포크의 원년'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그는 세시봉에서 데뷔했지만 세시봉 세대로 분류되지 않는다. 뉴욕에서 히피 문화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였던 그는 너무나 앞서간 나머지 소외되었다. 데뷔 앨범(1974년) 재킷에 얼굴을 원숭이처럼 일그러뜨리고 일부러 초점을 흐려 찍은 사진을 쓴 것만 봐도 그는 대중친화적이지 않았다. 그의 관객은 서울에 있었지만 그의 세계는 여전히 뉴욕에 머물러 있었다.
노래는 여러번 부르면 점점 더 나빠진다며, 그는 항상 원 테이크(한번에 녹음을 마치는 것)방식을 주장한다. 마치 연애처럼 처음의 열정과 사랑으로 한 번에 끝내야 된다며, 약간의 실수가 있더라도 음악에서는 그게 매력이고 재미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는 자서전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에서 이렇게 썼다. "음악은 진실로 마약이며, 한번 중독되면 돌이킬 수 없다. 우리가 음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한대수의 생애는 화려하다 못해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가족사에 비하면 별로 독특할 것도 없다. 그의 부친 한창석(2009년 작고)씨는 서울 공대 재학 도중 미국 코넬대로 유학을 떠났다가 7년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백방으로 찾았으나 아무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10년 뒤 한대수가 17세 되던 해, FBI가 찾아낸 한창석씨는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하워드 한이라는 이름으로 백인 여자와 결혼해 살고 있었다. 핵물리학자였던 그는 인쇄회사 사장이 돼있었다. 한대수의 가족이 찾아갔을 때 부친 한씨는 가족을 알아보긴 했으나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고 지난 10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마지막 소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지만 영어로 '과거는 잊어버리세요. 미래를 생각합시다'라고 말했다. 한번은 아버지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다가 내가 아들로서 알 권리가 있다고 묻자 아버지는 '늦었다. 이제 집에 가자'는 말만 했다. 아버지가 코넬대에서 촉망받는 핵물리학자였고 에드워드 텔러 박사(수소폭탄의 아버지)가 선발한 학생이었다는 사실을 추측해 보면 핵무기 개발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뒤 그 기술을 한국에 가져갈까 봐 브레인워싱(brainwashing 특정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을 당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대학 다니다가 유학 간 사람이 한국말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까?
그의 조부 한영교 박사는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연세대를 설립한 사람으로, 이 대학의 초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냈다. 한대수가 생후 100일 됐을 때쯤 부친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또 실종됐기 때문에 그는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이 밖에도 한대수의 가계에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뛰어난 업적을 쌓은 사람이 무척 많다. 그의 조부의 형제만 따져도 부산 최초의 양의(洋醫)이자 독립운동가 한흥교 선생, 부산 최초의 고아원인 애린원 원장으로 고아의 아버지란 칭송을 들은 한정교 선생이 있다. 한흥교 선생의 아들 한형석은 독립군가를 작곡한 항일예술가이며, 연세대 조한혜정(63) 교수 역시 한대수의 외육촌간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캐터고라이즈(categorize·범주화)하길 좋아한다. 이 사람은 좌파다, 우파다. 우익적인 정신을 갖고도 어떤 행동은 좌파적으로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좌파이면서도 또 어떤 때는 부르주아가 된다. 어떻게 좌파다 우파다 그렇게 간단하게 사람을 평가한다는 말인가. 이름만 알면 되지. 자꾸 그렇게 박스에 넣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히피가 자유롭고 세계 평화를 사랑하고 비즈니스 마인드보다 예술창작 마인드를 더 높게 쳐주고 그런 건데, 성적으로 문란하고 마약하고 뭐 이런 것만 히피라고 생각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유학 갔다가 실종되면서,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재혼하자 하이엔드(hi-end) 클래스의 자손인 한대수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세상 사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그러다가 사진에 매력을 느끼고 음악에 빠져 1968년 한국에 들어와 싱어송라이터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재혼한 어머니 집에 얹혀살다가 불붙은 연탄 한 장과 기타 한대 덜렁 메고 나온 한대수는 돈을 벌기 위해 디자이너와 영자신문 기자로 일했다. 75년 두 번째 음반 '고무신'이 나오자 당국은 이 음반을 통째로 압수했다. 체제전복적 음악이란 이유였다. 중앙정보부는 이어 '물 좀 주소'가 실린 1집 음반도 시비를 걸었다. '물 좀 주소'가 물고문을 풍자했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던 한대수는 77년 다시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한대수가 한국에 머물던 10년 사이 뉴욕은 완전히 달라졌다. 히피들은 모두 사라지고 대신 여피(yuppie)들이 활보했다. 청년들은 모두 넥타이를 매고 증권회사로 출근했다. 뉴욕을 떠날 때만 해도 미국의 청년문화는 돈 싫고 명예도 싫고 우리가 알아서 살겠다는 것이었는데 말쑥한 정장 차림의 청년들이 재등장했다. 그게 바로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였다. 한대수는 그러나 여피로 변신하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소박하게 살겠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미니멀리스트라고 불렀다. 히피들이 주도했던 플라워파워(Flower Power)는 70년대 들어 시들해졌지만 한대수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삶의 방식이다. 그는 상표가 밖으로 드러난 옷은 절대 입지 않고, 불필요하게 많은 돈을 벌지 않는다. 그는 시 '자연주의'에서 "하나, 자연에 복종할 것/ 둘, 테크놀로지를 최소화할 것/ 셋, 자기 교육을 최대화할 것/ 넷, 결혼하지 말 것·이혼하지 말 것/ 다섯, 별을 바라볼 것/ 여섯, 집에서 죽을 것"이라고 썼다.
미국 국제시인협회 상임위원이기도 한 한대수의 문학과 철학, 예술은 책과 음악으로 가득 찼던 어린 시절에서 시작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히브리어, 라틴어, 독일어, 영어책이 가득 찬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놀았으며 바흐와 모차르트를 들으며 자랐으며 문학과 시를 좋아해 미국 학교에서도 모든 성적이 엉망이었지만 영어만큼은 늘 A+를 받았다. 부산에 있는 목장을 운영하라는 할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뉴햄프셔대 수의학과에 진학했지만 그는 중도 포기했고, 이후 사진에 매료돼 뉴욕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 내 창작에 끝없는 자양분이 됐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그리고 성경과 코란을 읽었어요. 이 책들은 항상 베스트셀러이며 선악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들입니다." 책 쓰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는 여러권의 책을 썼다. "이번에 나올 책은 내 머릿속의 세계관념, 남녀관계와 물질문화, 신(神)과 나의 대화, 컨슈머리즘을 다룰 거예요. 아주 양호할 것 같아요." 딸 이름을 '양호'라고 할 만큼 그는 양호라는 말을 좋아한다. "어릴 때 제일 좋은 데가 양호실이었다. 공부하기 싫으면 배 아픈 척하고 양호실 갔다. 그러나 그는 자서전에서 1997년 일본 후쿠오카 공연을 앞두고 캐나다에서 연습할 때 즐겨 찾았던 토플리스 바(topless bar)를 '양호한 곳'이라고 부르며 입에 붙은 말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2002년 잠언집 '침묵'에 짧은 글들과 사진을 실어 펴냈다. 이 책의 수많은 구절 중 'To know that you don't know takes a lifetime to know(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데 한평생이 걸린다)'와 'We are all sentenced to life(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강렬하게 와 닿는다. 우리는 서로 1등이 되려고 싸우고, 더 넓은 집에 살고 싶어 하고, 더 좋은 차를 사려고 발버둥치며 산다. 그런데 생각대로 잘 안 된다. 인생은 꼭 바가지 긁는 마누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불평불만으로 일생을 보내다가 뭔가 이룰 만하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