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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도행전 9:36-43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00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 사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제일먼저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고 장례일정을 정하고 아는 사람들에게 부고를 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장례를 치룰 생각은 안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사모를 살려주십시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왜 이 일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믿지 못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사실 그 때 저도 그 목사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니 사람이 죽으면 장사를 해야지 어떻게 죽은 사람을 살려 달라고 기도할 수가 있는가?
하나님이 부르셨으면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해야지. 이상한 목사님 아니야’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목사님은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분이었다. 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사모님은 다시 살아나지 않았지만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하면서도 장례를 미루고 살려달라고
기도를 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한 그리스도인이 있었는데,
이 여자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보면 세 가지 모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먼저, 다비다는 여 제자였습니다.
여 제자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이 곳에만 한 번 나오는데
여제자라는 말을 들을 만큼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다비다가 얼마나 많은 선행과 구제를 하였는지
그가 죽었을 때 많은 과부들이 울면서 다비다가 지은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며 안타까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히 많더니’ 하는 말을 영어성경에서는 ‘항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항상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선행과 구제의 삶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다비다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다.
다비다도 사람인 이상 병과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 죽음의 권세를 피할 수는 없는 줄 압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이 다비다를 장례할 생각은 안 하고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입니다.
그리고 룻다에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말하자면 이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베드로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다비다의 죽음이 얼마나 그들을 안타깝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죽음을 죽는 자가 가장 잘 죽는 자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죽은 후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평가는 그 사람이 죽은 후에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보통은 세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첫째가 ‘잘 죽었다’ 하는 말이고 둘째가 ‘죽을 사람 죽었다’는 말이고
셋째가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선천지역의 깡패였던 김익두가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된 후 사람들에게 부고를 돌렸습니다.
‘김익두가 죽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놈 잘 죽었다.
이제 마음 놓고 장을 볼 수 있겠구나.’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못된 짓을 했으면 그놈 잘 죽었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죽음은 정말 가치 없는 죽음입니다.
아울러 수를 다 누리고, 살만큼 산 사람이 죽었을 때는 ‘죽을 사람 죽었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흔히 이런 죽음을 호상이라고 하는데요, 별 슬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1900년대 초기에 상동교회를 담임했었던 전덕기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목사님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 선생의 신앙을 지도했고 김구 선생의 동지였던 분인데 이 분은 남대문 일대의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왔습니다.
장례 지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이 죽었을 때, 특히 악성 전염병에 걸려서 죽은 사람의 장례는 전덕기 목사님이 도맡았습니다.
이 목사님이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남대문 일대의 거지, 기생, 지게꾼, 인력거꾼, 이런 사람들이 뒤따르는데
그 행렬이 십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다비다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바로 세 번째였습니다.
‘왜 나 같은 사람 안 불러가고 불러가서는 안될 저 다비다를 불러갔는가’
다비다의 죽음은 온 욥바를 슬픔의 도가니로 만들었고 다비다의 죽음은 온 욥바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다비다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을까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그냥 우연히 되는 것은 없는 줄 압니다.
다 이유가 있고 다 원인이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두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또 하나는 그들이 엄청난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의 장례식은 상당히 간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날씨가 무더운 탓에 시신을 오래 둘 경우 썩기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장례를 치루는 것이 유대인들의 장례 관습입니다.
그렇다면 다비다가 죽었을 때도 빨리 장례를 치룰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엉뚱하게도 장례를 치룰 준비는 안 하고 먼저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불렀습니다.
그곳에서 애니아를 고쳤다는 소문을 듣고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부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죽었으니 빨리 와서 살려달라는 것이 당시 성도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다비다의 기적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이었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런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기까지에는
다비다의 선행과 욥바 성도들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참 하나님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영원한 왕이십니다.(렘10:10)
그러기에 죽은 자를 얼마든지 살릴 수 있고 병든 자를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나 고치지 않고 아무나 살리지 않습니다.
살릴만한 자를 살리고 고칠만한 자를 고치십니다.
누가 살릴만한 사람이고 누가 고칠만한 사람입니까?
다비다와 같이 안타깝게 죽은 자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 아직도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는 자를 하나님은 살리시기도 하고 고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에는 선행과 믿음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있었기에 다비다는 베드로에 의해서,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다비다의 모습과 성도들의 믿음은 어떻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먼저는, 다비다와 같이 선행과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사고에는 잘 살고,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살고,
돈 많이 벌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잘 살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하고 일찍 죽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살아야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을 통해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솔직하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살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편함과 자존심을 위해서 잘 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잘 살게 해 주셨을 때 진정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얼마나 일하고 수고 하고 헌신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다비다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생을 살았는데요,
그의 삶을 보면 잘 살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냈고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큰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적당히 구제와 선행의 시늉을 한 것이 아니라 아주 헌신적인 태도로 최선을 다해 구제와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즉 도르가는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참된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과부들을 위해 손수 옷을 지어 입힌 일은 정말로 큰 애정과 수고 없이는 하기 힘든 선행이었습니다.
정녕 그녀는 하나님께 구제와 선행의 은사를 받은, 욥바 교회에서 꼭 필요한 아름다운 성도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다비다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비다와 같은 구제와 선행이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욥바 교회의 목사가 누구인지 장로가 누구인지 기록은 없지만 삯바느질 했던 다비다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론 위대한 설교자 위대한 지도자도 필요로 하시지만
진짜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은사로
최선을 다해 변함없이 섬기는 다비다와 같은 성도를 원하십니다.
2.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도들은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놀라운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다비다가 죽었을 때 성도들은 장사할 생각은 안하고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오도록 사람을 보냈습니다.
또한 베드로 역시 다비다의 시체 앞에서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저 아픈 사람을 향해 일어나라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죽어서 다락방에 누워있던 시신입니다.
그 시신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했다는 것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욥바의 성도들은 죽은 자가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도 놀라운 능력을 베푸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18절에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17-18절)
또한 요한복음 14:11에서는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믿었던 제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놀라운 능력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했을 때 그 앉은뱅이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초대교인들은 예수의 이름이 병든 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기도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빌 존슨 목사가 쓴 ‘기적의 삶에 다가가라’는 책에 보면,
진공청소기를 파는 세일즈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진공청소기에 대한 성능에 대하여 잘 설명을 합니다.
‘이 청소기는 작은 먼지까지도 잘 빨아들일 수 있고,
소음도 크지 않고, 이것 하나만 있으면 청소걱정은 끝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이 청소기를 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그렇게 설명을 하고 난 후에 실제적으로 진공청소기의 성능을 보여줍니다.
전기를 꼽고 작동을 해 보니까 정말 성능이 좋습니다.
여러분,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많은 물건을 팔겠습니까?
빌 존슨 목사님은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하고 있는데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을 믿으면 이렇게 좋다.’
설명을 하고 그것으로 전도를 끝내는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설명을 하고 그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능력이 많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실제로 보여주면서 전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의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놀라운 능력을 행하였습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보여줌으로 많은 생명을 구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담대히 선포할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특권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세상에서 힘을 잃어버렸습니까?
그것은 교회가 구제와 선행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요 주님의 이름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도르가와 같은 선행과 구제를 하는 성도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아울러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고 살아계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줄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 두 가지를 회복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