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14】
김일성은 ‘최승희 무용연구소’ 개소식에 참석하여 “극장은 인민 교육의 도장이요, 거기서 공연하는 예술은 인민의 교사”라고 연설했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한에서 최승희의 무용 예술은 그 출발부터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영위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선전을 주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정부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조국 해방을 위한 혁명투사로서 전쟁 의지를 고무시키는 전령의 임무를 부여했다.
최승희는 위문공연에 파견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할 무렵
최승희는 대규모의 ‘방소예술단’ 조직의 일원으로 소련에서 한창 무용 공연에 전념하고 있었다.
북한의 국립예술극장과 인민군 합주단에서 선발한 국악인, 관현악단, 합창단과 독주자, 독창자, 그리고 최승희 무용연구소 단원들로 구성된 ‘방소예술단’은 100여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조직이었다.
이들이 1950년 6월 7일 평양을 출발하여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우크라이나 등지를 순회하면서 공연을 하고 있을 때 조선 인민군은 서울을 함락하고 한강 이남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가 역전되면서 유엔군과 한국군의 평양 입성이 임박해지자, 1950년 11월 최승희는 베이징으로 탈출하여 중국희극학원의 원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김일성은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부탁하여 1951년 3월 최승희가 베이징 중국희극학원 무도반 교수로 일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었다.
아울러 저우언라이의 후원으로 ‘최승희 무도연구소’를 설립해 중국 희극 무용을 연구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이때의 작업은 훗날 최승희가 중국의 신무용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최승희가 베이징 무대에 처음 올린 작품은 ‘어머니’였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 중 미국이 평양을 폭격했던 일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포탄이 떨어지는 평양의 한복판에서 어린 딸을 잃어버린 어머니가 우여곡절 끝에 딸을 찾아냈지만 미군의 폭격을 맞은 딸이 숨을 거두자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으로 유격대에 들어가 미군과 싸워서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1950년 12월 4일 중국 문화부와 전중국문련이 공동 주최한 베이징 호텔 만찬공연에서 첫 선을 보이면서 중국 정부의 호평을 받았다.
이 공연을 관람했던 저우언라이는 훗날 ‘어머니’에게 표현된 사상성과 예술성을 격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51년 8월 5일부터 19일까지 동독에서 개최된 제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최승희의 딸 안성희가 ‘장검무’로 금상을 수상한 데 이어 최승희의 ‘어머니’를 개작한 ‘조선의 어머니’라는 무용극을 공개한 ‘최승희 무용단’이 1등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후 폴란드 바르샤바, 체코 프라하, 불가리아 소피아 등지에서 순회공연을 지속하는 등 한국전쟁의 한가운데서도 최승희는 여전히 관록을 과시하고 있었다.
최승희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와중에도 상하이와 난징을 비롯한 중국 각지에서의 순회공연을 지속했다.
그러나 1952년 11월 중국 정부의 초대 계약이 만료되자 최승희는 북한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북한 귀국 후의 첫 공연을 인민군 위문을 위한 것이었다.
글의 출처
제국의 아이돌
이혜진 지음, 책과 함께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