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53]술을 다섯 마지기 댈 물만큼 마셨다니…
고향에서 최근 자주 어울리는 네 살 위 지인선배가 있다. 두주불사斗酒不辭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그 양반만큼 술을 “자유자재로” 많이 드시는 분은 잘 못봤다. ‘술꾼들의 집합체’라는 신문사 편집국에서도 말이다. 글을 쓰지 않아서 그렇지, 국보國寶라 호언하던 양주동 박사의 ‘문주반세기’나 변영로 시인의 ‘명정 사십년’에 못지 않게, 60년의 '음주세월' 가운데 그분의 에피소드도 차고 넘칠 듯하다. 게다가 끝도 갓도 없는 재담才談은 또 어떠한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현란하다면 과장일까? 아니다. 판판이 녹음을 해놓고 싶은 어록語錄투성이다. 그분이 할 수 있는 전라북도 사투리와 방언의 억양, 고저장단을 들으면 너무 재밌다. 그만큼 머리가 좋은 때문일 것이다. 체질적으로 알코올에 특화된 듯, 70이 넘어 거의 날마다 쐬주 5병을 마신다는 게 말이 되는가? 30-40대에는 쐬주가 아닌 막걸리가 5병이었다 한다. 그래서 별호가 ‘5병(오병이라고 말해야 한다)’. 성경聖經에 나오는 ‘오병이어五餠二魚’(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였다는 예수님의 권능)를 빗댄 민망하고도 불경스러운 별호이다.
최근 기가 막힌 음주량 산술법을 듣고 그야말로 빠아앙 터졌다. 50대 후반일 때 절친인 수학선생님이 농弄으로 계산한 당시까지 선배의 음주총량이 “논 서마지기 물댈 양만큼 마셨다”는 것이다. 누가 농사꾼 아니랄까봐 하필이면 논에 물을 댄 수량으로 빗대다니, 완죤히 어이상실이었다. 하루 5병 10리터, 한 달 300리터, 1년 3600리터, 30년 10만8천리터. 논 1마지기가 가로 80m, 세로 25m, 수량의 높이를 5전(cm를 꼭 일본어 ‘전’이라고 말한다)으로 쳐 계산을 하면 못할 것이야 없지만, 진짜로 웃기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 음주량이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는다. 20년 전의 상황이니, 지금으로 계산하면 5마지기가 다 돼 갈 것이라면서 껄껄 웃는 그는 누구인가.
이와 다르게, 우리는 BOD(생물학적 산소 요구량)에 빗대어 알코올 요구량(BAD:Biochemical Alcohol Demand)과 알코올 해독능력 등을 따졌다. 그런데, 이 양반은 오바이트는 말할 것도 없고, 다음날 한번도 속이 쓰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물론 40년 동안 새벽마다 다듬이 방망이로 두들겨패 끓인 ‘중전마마’의 황태북어국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결국엔 방망이가 부러졌다고 한다).
아무튼, 엊그제 임실 재래종 고추를 집에 두 두락 심었는데, 맛 좀 봐보라며 줄기를 하나 쭉 찢어줬다. 길이래야 5cm도 채 안되는 ‘똠방고추’, 보기에도 참 ‘월남고추’마냥 물짜게 생겼다. 지금은 완전히 멸종단계라는데, 용케도 선배가 그 씨를 어렵사리 이어오고 있는 모양. 임실 토종고추, 듣느니 처음이었다. 그런데, 된장에 찍어먹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원래도 매운 것을 무척 좋아하지만, 뒷맛까지 매움한 것이 나로서는 완전 ‘딱’이었다. 한두 개 먹으니, 나도 모르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배여나오지 않은가. 청양고추보다 훨 맛있다. 아하-, 이래서 토종이 최고로구나 싶었다. 오죽하면 그까짓 고추 몇 개 줬다고 고맙다는 전화를 바로 올렸겠는가. 가을에 말린 고추를 주겠다니, 내년엔 무조건 심어야겠다. 김장할 때에도 이 고추를 좀 넣어보라고 해야겠다. 얼마나 소중한 씨종자인가? 종자은행이 필요한 까닭을 알겠다. 우리 것은 조은 거시여! 흐흐.
임실을 흔히 ‘열매의 고장’이라고 한다. 맡길 임任자에 열매 실實자가 들어간 까닭이겠지만, 원래 ‘임실고추’하면 알아줬다. 이 물짠 토종 임실고추를 말하는 것은 아닐 터이나, 이 고추를 알게 되고 맛보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이런 고추씨를 소중히 보관하고 해마다 심어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이 선배가 기인奇人처럼 보인 까닭이다. 끼니끼니 5개씩 된장에 찍어먹는 맛이 일품이다. 이 선배, 술맛이야 주종을 불문하고 장소나 시간도 개의치 않지만(그저 연조가 상당히 차이가 나는 후배들이 전화해도 금방 달려오신다), 입맛은 완전히 고급이어서, 나같은 세미-식도락가는 명함도 못내밀 정도의 미식가이다.
어느 요리가 맛있다며 그 맛을 섬세하고 아주 디테일하게 설명하는데, 맛보지 않았어도 기막히게 맛이 있을 줄 알겠고 입에 침이 돌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한 분이다. 당신의 생업은 또 어떠한가? 소위 말하는 ‘스마트 팜Smart Farm’의 선구자이다. 유리온실 3000평에 수경재배로 키우는 과일(과일 이름을 대면 누군지 대번에 알겠기에 말하지 않는다)농사 현장을 견학한 적이 있는데, 이것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1년 농사를 지으면 상당히 쏠쏠한 수입이 떨어진다면서 한번도 ‘죽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어쩌다 인건비가 너무 올라 힘들다는 말은 한 적이 있지만(외국인 노동자가 없다면 한국 농업은 전면마비상태일 게 불보듯 뻔한 일. 상주하는 머슴의 월급 210만원, 최소 3명이 있어야 하니 630만원. 인건비 때문에 허리가 휘어도 생업인 것을).
어쨌거나, 그 선배를 떠올리면 배우 신구이던가? 광고멘트가 생각난다. 왜 있지 않은가? “유쾌” “상쾌” “통쾌”. 하여 선배에게서 술과 재담 그리고 입맛까지 한참 배우고 있는데 ‘새발의 피’임을 번번이 느낀다. ‘오병’이라는 별호도 좋지만, 나는 선배에게 ‘삼쾌三快(유쾌, 상쾌, 통쾌)’라는 별호를 선사하고 싶다. 지금껏 살면서 내 주변의 인간중 ‘삼쾌 인간’은 딱 두 명이었다. 한 명은 고교동창 친구로 지난 3월 전주에서 가진 나의 출판기념회때 서울에서 내려와 2시간도 넘게 재능을 기부한 ‘가파통(가든파이브 통기타) 밴드’ 리더인데, 그는 항암치료를 10번도 넘게 받으면서도 지리산 월출산 정상도 밟는 등 여전히 씩씩하다. 부디 암투癌鬪거사에서 하루빨리 승암勝癌거사가 되기를 빈다.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또 한 분의 삼쾌선배 건배乾杯를 빈다. 우리의 건배 구호는 “인생 뭐 있어?”라고 선창을 하면 모두 술잔을 높이 들고 “알코올이지!”라고 화답을 하는 것이다. 사는 것이 늘 유쾌 상쾌 통쾌해야 하거늘,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