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동창(東廠)>
조선에서 단종애사(端宗哀史)가 펼쳐지기 수십 년 전, 명나라에서 숙부가 조카의 제위를 찬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명나라판 수양대군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였다. 연왕(燕王)으로서 북경 지역을 다스렸던 그는 남경에 좌정한 조카 건문제가 자신의 형제들을 견제,숙청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반란을 일으켰다.
몽골군에 연전연승한 명장이었던 그는 남경을 함락시켰지만 조카 건문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새롭게 영락제로 등극한 주체로서는 찝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백방으로 건문제를 찾았다. 심지어 그 거창한 정화의 서방원정의 계기도 건문제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
꽤 유능한 황제로 역사에 남았으나 정상적이지 않은 경로로 황제가 됐던 영락제는 의심도 많고 의심의 대상에게는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건문제의 충신이었던 방효유를 죽일 때 9족을 멸하고도 모자라 10족, 즉 방효유가 살던 동네 사람들까지 몰살시킨 건 중국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사례로 남아 있다. 또 자기 같은 놈이 나오지 않을까 두려웠던 영락제는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사방을 감시할 도구를 만든다. 동집사창(東輯事廠), 줄여서 '동창(東廠)'이었다. 동창의 책임자는 다름아닌 환관들이었다.
그나마 황제가 좀 똑똑하면 괜찮았으나 만력제나 정덕제 같은 암담한 황제가 들어서면 환관들과 동창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로 세상을 주물렀다. 특히 천계제 연간, 악질 많기로 유명한 중국 환관 역사에서도 그 수위를 놓친다면 서러워할 최악의 환관 위충현이 동창을 지배할 즈음, 명나라의 최고 권력은 황궁이 아니라 동창으로부터 나왔다. 위충현과 그 주구들은 숫제 황제를 가지고 놀았고 황제가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였다.
천계 4년, 그러니까 1624년 6월, 위충현의 전횡을 보다 못한 좌부도어사 위충현의 24가지 대죄를 적시하며 “백성들은 황상은 이름 뿐이고 충현이 살아 있는 실제 권력이라고 여깁니다.”라며 직격 상소를 날린다. 그러나 목공예 외에는 관심이 없던 천계제가 상소를 뭉개버리자 위충현은 잔인한 복수에 나선다.
양련 이하 핵심 동림당원 (환관 세력 반대파)들은 대개 강직한 인물들로 뇌물이나 비리로부터 자유로운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위충현은 곧 약한 고리 하나를 찾아 낸다. 왕문언이라는 사람이었다. 다른 당파와 동림당 사이를 중개하는 수완가였고 동림당과도 친했으나 색깔이 많이 달랐다. 뇌물도 적당히 받을 줄 알았고 세상의 때도 더덕더덕 묻은 축이었다. 위충현과 동창의 저승사자들은 그를 잡아들인다.
“양련이 돈 먹고 관직 팔아먹은 혐의를 대라.” 무지막지한 고문이 가해졌다. 사람 꼴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얻어터지고 찢어지고 부르텄지만 동창은 뜻밖의 난관에 부딪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평생을 살았던 왕문언이 뜻밖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돈 처먹는 양련 같은 건 없소. 양련은 뇌물을 먹지 않았소.”
위충현의 심복들은 당황했지만 적절한 해결책을 만들어 낸다. “자백하지 않으면 자백을 만들어내면 되지.” 초주검이 된 왕문언 앞에서 위충현의 심복들은 왕문언의 ‘자백’을 써내려 간다. 가끔 “맞지?” 확인도 하면서. 왕문언은 귀신이 돼서라도 너희들을 볼 것이라고 절규하지만 동창의 악귀들에게는 모기 소리만도 못했다.
그렇게 쓰여진 ‘진술서’는 양련 이하 동림당원들의 확실한 저승길 티켓이 된다. 양련 역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살가죽이 떨어져 나가고 갈빗대가 다 부러지고 그 지경으로 무거운 흙더미에 깔리면서도 버텼다. 결국 동창의 심문관은 그 머리에 못을 박아야 했다. 그런 식으로 죽어간 사람들은 그야말로 부지기수였다.
위충현은 오호(五虎)', '오표(五彪) ', '십구 (十狗)', 십해아(十孩兒) 사십손(四十孫) 등의 사조직을 두었는데 그 충성심(?)에 따라 층층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다섯 마리 호랑이가 최상층, 그 다음이 표범, 그 다음이 열 마리의 개, 그 다음이 열 ‘아들’, 맨 아래가 마흔 ‘손자’였다. 이들은 서로 사람 잡기로 경쟁하고 위충현에게 아양 떨며 표범으로, 호랑이로, 아들의 등급으로 올라가고자 발버둥쳤다. 이미 그들은 명나라의 신하가 아니라 위충현의 심복이었고 황제의 수족이 아니라 동창의 조직원이었다.
황제가 사라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헌법상 권력의 출처라고 하는 ‘국민’의 이름을 황제 대신 넣어 본다. ‘국민의 이름으로 법을 사유화’하고 ‘패거리를 이루고 앞에서 끌어주며 뒤에서 밀며 자신들의 적들을 찍어내고 잡아가두고 망신을 주고 죽인’, ‘구미에 맞는 역적을 만들고 그에 대한 죄와 벌을 마음대로 정한’ 부류. 뭔가 어울리는 한 쌍이 떠오르지 않는가.
비스무리한 정보 사찰 기관들을 두었지만 종국에는 독점적 권력을 획득한 명나라의 동창과 대한민국에서 수십 년 세월에 걸쳐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은 집단.
‘오호, 오표 십구’로 불리며 사람 잡기 경쟁을 펼치고, 왕문언 같은 약한 고리를 잡아 어르고 협박하여 증거(?)를 만들어낸 동창의 악한들과 친구의 유서를 대신 쓰고 죽게 했다는 해괴한 혐의를 한 사람에게 들씌웠으며 사람의 약점을 찔러 다른 사람의 올가미로 만드는 데 익숙했던 파렴치한들. 더하여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남들 다 알아보는 비디오 화면의 아무개가 자기네들의 왕년의 상관이었는지는 죽어도 모르는 모지리들.
황제를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황제마저 우습게 봤던 동창의 문제는 역모를 탐지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시하는 본연의 권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구미에 맞는 역적을 만들고 그에 대한 죄와 벌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던 월권으로부터 비롯됐다.
그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법을 사유화했고 관리들에 대한 감찰권을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는 가시철망으로, 그리고 정적의 머리를 가르는 철퇴로 전화시켰으며 그 권력 아래에서 패거리를 이루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이들을 찍어내고 잡아가두고 망신을 주고 죽였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검.찰.처럼.
선거 때 어느 당을 지지하냐 지지하지 않느냐의 문제에 앞서서 나는 검찰이라는 집단의 개혁은 절대적으로, 시급하게, 오히려 늦었다 싶은 마음으로 손을 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눈에 거슬리면 어떻게든 손을 볼” 능력과 의사가 충만한 조직이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기증식하고 자가발전할 때 우리는 위충현 이상의 괴물과, 동창은 댈 것도 아닌 괴물도감을 만나게 될 것이다.
대통령이 몇 번이 바뀌고 정권이 어떻게 왔다갔다한들 그들을 새롭게 하지 못하면 우리 시대의 동창(東廠)은 여일할 터이고 그들은 환관처럼 충성스러워 보이나 사실은 자신들의 조직을 위해 충성할 것이므로.
위충현에게는 기이한 취미가 있었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후골(喉骨) 즉 울대뼈를 모아 수집하는 기벽이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탄핵하다가 죽음을 당한 충신들의 울대뼈를 갖다 놓고 깔깔대면서 말했다. “그래 잘 지내시오? 또 상소 올리시려오?” 또 누가 알겠는가. 검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압수수색 때 확보했다가 돌려주지 않은 기념품(?)들 깔아놓고 웃으며 얘기할지 “아 이거 중학교 2학년 때 쓴 일기장이었다네.... 잘 지내나? 낄낄. 그렇게 감히 우리를 개혁하니 마니 하나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