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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惟의 航海錄
제1장 항해사(航海士)
5. 〈뱃멀미〉
— 바다의 현기(眩氣) 속에서 영혼은 깨어나고 —
고요는 바다의 허상이었다.
그날,
나의 배는 미세한 떨림으로 말을 걸었다.
앞으로, 그리고 뒤로—
좌현으로, 또 우현으로—
끝내 아래로 가라앉다 다시 위로 솟구쳤다.
마치 창해(滄海)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심장이
느리게, 그러나 집요하게 박동하는 듯하였네.
난간에 기댄 내 몸은
거대한 율동 속에서 흔들리는
작은 추(錘) 하나,
육신은 바다의 맥박에 맞추어
자신의 호흡을 조율하기 시작하였다.
멀미(暈海)는 그렇게 찾아왔다.
아아,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바다가 내게 건네는 첫 인사였네.
그 진동은 미세하되,
영혼의 가장 깊은 감각만은 결코 속일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풍랑이 아니었다.
경솔한 바람의 농담도 아니었다.
태평양의 심연이 내게 속삭이는,
무겁고 장엄한 언어였다.
그 말없는 음성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깊이란, 침묵 속에서 인간의 의지를 시험하는
하늘의 문장임을.
몸의 모든 감각은 하나의 수로(水路)가 되어
바다의 리듬을 헤아렸다.
그날 처음, 나는 바다와 말을 나누었다.
무언의 대화로,
육신의 떨림으로,
마음의 울림으로.
현기증을 넘어,
나는 대자연의 숨결과 합일(合一)을 시도하였다.
그것은 정체된 육지의 사유로부터
벗어나려는 영혼의 각성이었네.
옛 말에 이르기를—
“길은 일직선이 아니며,
굽이쳐 흐르는 길에 진리가 있다.”
골프공조차 결코 직선으로 홀에 들지 않듯,
인생 또한 경사와 바람의 결을 읽지 못하면
길을 잃는 방랑자와 같도다.
항해도 그러하였다.
파도와 한 호흡으로 일치하려는
끊임없는 정진(精進).
배가 기울면 마음의 중심을 옮기고,
멈추면 숨결을 가다듬었다.
그린 위의 공이 자연의 순리를 따라 굴러가듯,
나는물결속에서어긋남없는
조화(調和)를 배우고자 하였다.
선체가 흔들리는데
내 몸이 갑판에서 수직으로 서려 할 때,
멀미는 시작된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
모든 부조화는 고집에서 비롯되며,
해탈은 순응의 리듬에 있다.
파도를 따라 배가 가고,
배의 맥박에 따라 육신이 흐를 때,
고통은 사라지고,
그 속에서 평화가 싹텄다.
갈매기는 하늘을 가로질러
청명하게 울었고,
돌고래는 파도를 가르며
바다의 유희(遊戱)를 보여주었다.
그 천진한 생명들의 움직임 속에서
내 마음의 파도도 이내 잔잔해졌다.
순응의 지혜, 그리고 딸의 미소
세월이 흘러,
내 딸이 내 곁에서 첫 항해를 하던 날,
그 아이는 아무런 논리도 없이
멀미를 이겨냈다.
순수한 적응 속에
하늘의 도(道)가 있음을 그때 알았다.
그 깨달음은 삶의 여정으로 이어졌다.
변화는 더 이상 두려움의 바람이 아니요,
함께 가야 할 친구였다.
고정된 관념의 족쇄를 풀자,
새로운 길이 열렸다.
파도의 흔적 하나하나가
이제는 지혜의 지도처럼 내 마음에 새겨졌다.
그 지도는 내 손 안에 있었고,
태평양은 거대한 스승이 되어
잔물결마다 인사를 건넸다.
그날의 미세한 떨림은
더 단단한 영혼을 빚어냈다.
두려움은 숙련으로,
불편은 습관으로 변하여
항해의 일부가 되었다.
바다는 위대한 현자(賢者)였고,
멀미는 그 가르침의 첫 장(章)이었다.
멀미(暈海)는 인간이 ‘균형’을 되찾으려는
본능의 비명이다.
그러나 진정한 균형은 고정에서 오지 않고,
흔들림 속의 조화로부터 온다.
삶 또한 그러하리라.
저항은 고통을 낳지만,
순응은 깊이를 낳는다.
파도는 결코 멈추지 않지만,
그 리듬 속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듣는다.
바다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인간이여,
흔들림을 두려워 말라.
그 떨림 속에 너의 숨결이 있고,
그 숨결 속에 나의 진리가 있다.”
그리하여 나는 깨달았다.
멀미는 병이 아니요,
존재가 우주와 하나 되려는 첫 징후임을.
오늘도 파도는 쉼 없이 출렁이지만,
그 속에서 나는 고요히 서 있다.
이제 나는 바다를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 속에서
나 자신을 믿는다.
<고난의 노래 — 영혼을 벼리는 불길>
(The Song of Suffering — The Fire That Forges the Soul)
나는 고난(苦難)이다.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하고,
나를 원망하며,
나를 피하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대의 길 위에 서 있다.
나는 파괴자가 아니다.
나는 깨우는 자다.
내가 오는 순간,
그대의 세상은 무너지고,
그대의 믿음은 흔들리며,
그대의 손에 쥔 모든 것이 흩어지리라.
그러나 들으라,
무너짐이 끝이 아니다.
그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진짜 그대가 태어난다.
나는 그대의 영혼을 불 속으로 던져,
순금처럼 벼려내는 불길이다.
그대가 나를 처음 만날 때,
그대는 묻는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는 나를 원망한다.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고난은 이유로 오지 않는다.
고난은 깊이를 만들기 위해 온다.
빛은 그림자가 있어야 존재하고,
강물은 협곡이 있어야 노래한다.
나는 그대의 영혼에 깊이를 새긴다.
그대가 알지 못했던 진심의 자리,
그곳을 향해 내가 부른다.
“이제 외면하지 말라.
너 자신을 보라.”
절망은 그대의 적이 아니다.
절망은 단지 거울일 뿐이다.
그대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가장 잔인하면서도 정직한 거울.
나는 그대의 안으로 들어간다.
그대의 평온을 깨뜨리고,
그대의 확신을 무너뜨린다.
그대는 저항한다.
나를 밀어내고, 나를 부정하고,
나를 잊으려 애쓴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대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나 또한 그대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속삭인다.
“이 아픔은 너를 벌하는 것이 아니다.
너를 바꾸는 것이다.”
그대는 울고, 분노하고, 쓰러진다.
그러나 매번 다시 일어나려는 그 순간,
나는 그대 안의 새로운 힘을 본다.
고난은 시험이 아니라, 창조의 과정이다.
무너짐은 파괴가 아니라, 변형의 시작이다.
그대가 그 사실을 깨닫는 날,
나는 미소 짓는다.
“이제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그대는 마침내 나를 받아들인다.
아픔을 도망치지 않고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그대는 안다 —
상처가 깊을수록,
그만큼 넓은 이해가 피어난다는 것을.
나는 그대 안에서
불길이 되어 타오른다.
그 불은 파괴가 아니라 정화다.
가식이 타고,
거짓이 타며,
두려움이 연기로 사라진다.
남은 것은 단 하나,
순수한 존재의 중심.
그대의 눈빛은 달라진다.
그대의 걸음은 단단하다.
이제 그대는 고난을 견디는 자가 아니라,
고난을 지나온 자가 되었다.
나는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속삭인다.
“너는 나를 이긴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자란 것이다.”
고난이 떠난 자리엔
흉터가 남는다.
그대는 그 흉터를 바라본다.
그리고 미소 짓는다.
그 흉터는 패배의 표식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증거,
그리고 다시 일어선 자의 문장이다.
그대는 이제 알게 되었다.
고난은 삶의 그림자가 아니라,
삶의 빛을 더 깊게 하는 어둠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대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이제 이름을 바꾼다.
고난이 아니라 —
깊이(深度), 성숙(成熟), 자각(自覺)이라 불린다.
그대는 나를 통과했고,
그대는 새로 태어났다.
나는 고난이다.
나는 인간을 쓰러뜨리지만,
결국 일으켜 세우는 자.
나는 인간을 울게 하지만,
그 눈물 속에 지혜의 씨앗을 심는 자.
나는 인간이 완성되는 마지막 관문이다.
포부가 불을 붙이고,
의지가 그 불을 키우며,
인내가 그 불을 지키는 동안,
나는 그 불이 진짜인지 시험한다.
나는 고통의 이름으로 오지만,
사랑의 얼굴로 떠난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
그대가 지금 나를 겪고 있다면,
그대는 이미 변화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고난이다.
그러나 동시에 —
그대가 다시 태어나는 불의 스승이다.
<억압(抑壓)의 노래>
— 눌림의 그림자에서 태어나는 목소리 —
말하지 못한 것들이
내 안에서 층층이 쌓여
어둡고 깊은 방 하나를 만들었다.
그곳에는 이름 없는 감정들이
나지막한 숨으로 울고 있었고,
나는 그 울음 위에
또 다른 침묵을 얹었다.
억압은 외부에서 오는 매듭 같았지만,
사실은 오래된 내 안의 손이
스스로에게 채운 쇠사슬이었다.
보이지 않는 무게,
그러나 누구보다 익숙한 무게—
움직임을 가로막지 않으면서
천천히, 끝없이
나를 아래로 끌어당기던.
그 무게 속에서
나는 조용히 배우고 있었다.
어떻게 웃는 얼굴로
움푹 팬 마음을 감추는지,
어떻게 아무 말없으면서
천 개의 말들을 삼키는지,
어떻게 “괜찮다”는 목소리로
스스로를 속이는지.
그러나 억압은
침묵을 주문처럼 삼켜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지하수처럼 스며들어
꿈속의 균열에 물소리를 내고,
낮의 그림자에 흔들림을 남기며
가끔은 심장 아래에서
낯선 돌처럼 단단하게 뭉쳤다.
나는 알게 되었다.
억압이란
폭력이 아니라
천천히 조여오는 공간이며,
고통이 아니라
모양을 잃어가는 감각이며,
소리가 아니라
소리를 잃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러나 바로 그 장소에서
가장 약한 숨결이
가장 질긴 목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무게 아래 눌려 있던 말 한 조각이
먼지처럼 떨리더니,
마침내 떨림 자체가
노래의 시작이 되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 작은 진실이
내 안의 벽을 흔들었다.
억압은 결코 부수지 못했다.
그저 흔들렸을 뿐.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오래 묵은 침묵의 모양을 보았다.
그것은 슬픔인가, 두려움인가,
회피인가, 혹은 다정함조차
말로 내지 못한 나의 다른 얼굴인가?
억눌림은 나에게 물었다.
“너는 왜 너 자신에게도 말하지 않는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조차
이미 대답의 시작이었다.
무너짐은 때로
자유의 첫 형태가 된다.
균열은 빛을 위한 작은 문이 된다.
억압의 어둠은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가장 고요한 길이 된다.
이제 나는 안다.
의미 없는 눌림은 없고,
헛된 무게는 없으며,
억압조차
정체된 영혼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느린 기도였음을.
그래서 나는
이 무거운 노래를 부른다—
스스로를 눌러온 힘을
적으로 부르지 않고,
나를 잠재운 그림자를
다시 깨우는 하나의 원천으로 삼아
그 어둠에서
나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아, 억압(抑壓)이여,
더 이상 나를 가두는 손이 아니라
나를 깨우는 흔들림으로 남아다오.
네가 만들어놓은 좁은 방에서
나는 마침내 길을 찾는다.
그리고 이 눌린 자리에서 시작된 노래가
어느 날 내 안의 바다를 건너
진실의 언덕 위로
조용히 올라가길—
그때 비로소
나는 나의 목소리로
나를 부르리라.
<스트레스의 노래>
— 보이지 않는 무게가 지나가는 자리에서 —
스트레스는
폭발처럼 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엔 작은 모래알처럼
조용히, 거의 눈에 띄지 않게
가슴 어딘가에 떨어진다.
그러나 그 모래알은
아무것도 아닌 얼굴을 하고
하루에 한 알씩,
주머니에 돌을 넣듯
조금씩 무게를 더해간다.
처음엔
“괜찮아, 이 정도야.”
하고 넘겼지만
어느 날 문득
숨이 얕아지고
목이 굳고
눈이 흐리고
손끝에서 작은 진동이 일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내 몸은 이미
내가 말하지 않은 것들의
모든 무게를 알고 있었다.
스트레스는 때때로
이유 없이 몰아치는 바람 같아
잡을 수도
막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저 온몸의 신경에
바스라지는 소리를 남기고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스트레스는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조용한 신호다—
내가 나 자신에게
너무 오래 침묵해 왔다는,
나의 속도가
내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내가 쓰러지기 전
잠시 멈추라고
속삭이는 신호다.
스트레스는 가르친다.
압박 속에서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어떤 말은 삼켜도 되고
어떤 말은 말해야만 하는지,
나 자신을 어떻게 다루어야
내가 무너지지 않는지를.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스트레스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잊고 지낸 경계를
다시 그려주기 위해 온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스트레스를 적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찌르는 손이면서
동시에 나를 나로 이끄는
단호한 안내자다.
오늘도 나의 어깨 위엔
이름 모를 무게가 앉아 있지만
나는 안다.
이무게는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내가 흔들리며 전진한다는
조용한 증명이라는 것을.
스트레스가 깃들어 온 자리에서
나는 나를 다시 바라본다.
어떤 일은 내려놓고,
어떤 마음은 풀어주고,
어떤 상처는 다독여 준다.
그렇게 할 때
스트레스는
돌처럼 단단했던 형태를 잃고
조용한 물결처럼 흩어져
내 안에서 잔잔한 공간을 남긴다.
그 공간에서
비로소 나는 숨을 고른다.
아, 이것이 삶의 리듬이었구나—
압박과 해소,
긴장과 이완,
무너짐과 회복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파도의 숨결.
스트레스여,
너의 방문을
두려움으로 맞지 않으리라.
너는 경고가 아니라 신호,
파괴가 아니라 균열,
약함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다는
또 하나의 방식이니.
너를 알아차리는 순간,
나는 나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그 돌아옴에서
나는 조용히
다시 견딜 힘을 얻는다.

첫댓글
오늘도 귀한 발걸음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노을 진 하늘과 바다 그리고 배들과 등대
이젠 이 모든 것들이 꽤나 낭만적으로 다가옵니다.
옛날엔 안 그랬습니다.
고맙게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배멀미는 처음 배를 탔을때는 심했는데
몇 번이고 자주 타면
조금씩 덜해지더라구요.
아주아주 커다란 배 위에서
아주아주 드넓은 대양상에서
아주아주 천천히 흔들리며 다가오는 멀미와
아주아주 작은 배 또는 요트 위에서
아주아주 빨리 흔들릴 때 오는 멀미
아주아주 다른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육지와 가까워서 언제라도 내릴 수 있는 곳에서의 멀미
그리고 열흘 이내에는 도달할 수 없는 대양 한가운데에서
자포자기 상태에서 오는 멀미
또한 다른 것 같습니다.
바다의 리듬에 맞추어
인간의 육신도 떨림으로 응답하고
그래서 대자연에 합일이 이루지나 봅니다.
그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배를 타는 항해사가 아니면 누가 할까요.
잠시 멈추었다가 갑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귀한 발걸음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고집이나 집착과 관련이 있는 멀미를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