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책으로 배울때나, 혹은 드라마로 볼때는 폐비 윤씨의 행동과
연산군이 나쁘다고만 생각 하고 있었는데..
실제 조선 왕조 실록에 적혀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알고, 그기에 관련된
서적을 읽어 보니까..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폐비 윤씨를 먼저 괴롭힌 내용이 있더군요.
우선 인수대비의 잘못 1- 권력을 위해서 아들 성종의 상당부분 섭정(수렴청정은 아니지만)
했습니다. 폐비 윤씨를 폐비로 만드는 것도 사실은 성종의 뜻과 상관 없는 일이 였고,
사약을 내린것 역시, 성종의 두 후궁의 의한 계락(반성을 안 한다는 보고를 함)
첫째 아들 월산군을 세자로 올리지 않고 둘째 아들 (성종)을 올린것을 보면 둘째 아들여야
자신의 뜻대로 섭정을 하기 쉽다는 판단을 한것이고
사실, 용안에 상처를 낸일로 사약을 내린다는것은.. 권력욕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되네요.
인수대비는
이미 사가로 윤씨를 내 쫏을때 부터 어떠한 이유를 대서건,사약을 내려서 죽일 예정이였을 거라고
거의 100% 추측이 됩니다. 폐위한 바로 사약을 내리면, 말들이 많으니까.. 사약을 내려서죽이기 까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기 위한 시간을 마련해 둔것이지요?
역사상 폐비의 자식이 왕이 된 사례는 거의 보기 더문데.. 아무리 연산군이 적장자이고 원자였다고는 하나
연산군이 왕이 된것을 보면, 성종이 연산군을 보호했다고 밖에 설명할수 없습니다.
만약 성종께서 일찍 돌아가셨다면, 100% 연산군은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수대비의 두번째 잘못 2 - 연산군이 성격 파탄자로 변한것은 인수대비 탓이라고 봄
쬐그만한 어린애가 뭔 잘못이 있다고, 폐비윤씨를 닮았다며, ...구박하며 사랑을 못 받고 컷습니다.
이때 연산군을 키워준 정현왕후 만이라도 연산군을 가엽이 여겨 달래 줬다면, 우리 역사의 이런 비극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덥니다.
인수대비는 권위로써 차갑게 폐비윤씨와 연산군을 대하기만 했지?..참고 기다려 주는 인내는 없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인수대비의 세번째 잘못 3 - 지나친 집안,가문, 예절을 따짐..
저는 장영실이 인수대비때 태어 났으면, 장영실이 과학자가 되지 못하고, 노름꾼이 되었을 거라 생각 합니다.
<내훈> 이라는 책을 지어서.. 행동하기를 가르쳤지만, 폐비 윤씨가 천한 출신이라는 얘기를 하여
콤플렉스를 건드립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화를 거의 안내고, 욕심 안 부리면서, 성욕도 엄격히 절제하는,
좋은 집안 출신이면서, 인품도 너그러운 그런..
인간이 몇 %나 되겠습니까? 적당한선에서 어느정도의 허점을 그냥 인정했다면, 폐비윤씨도, 연산군도
그런 상태까진 되지 않았을것..을...
폐비 윤씨가 세종대왕을 만났다면..집안이 천한 출신이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마음씨가 아름다우니.. 극진히 성종을 모셔라.!그러면 중전 역할을 다한것이니, 출신은 생각 하지 말아라..
.. 연산군에겐... (만약 연산군이 엄마가 사약받아 돌아간걸 안다면)..그대가 외롭게 컷다. 나 또한 짐의
태종 선왕의 인하여 부인이 폐위되고 (장인) 되시는 분을 잃었다. 하면서... 공감을 해줬을 것 같은데..
세종실록을 읽어보면, 세종 대왕은 신하들이 정말 화나다 싶을 정도로 발언을 해도, 다 들어 줬습니다.
하지만,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의 결과적으로 행동한것 만으로 윤씨를판단하고, 연산군의 천성이 나쁘다고만 했죠.
독선적이라는 것이지요? 자신이 깐깐하게 차갑게 대하고, 했던것은 고려 하지 않은채.. 상대방은 도인의
자세를 요구하니까요?
인수대비 말고도 우리나라 역사상, 문정왕후,세조, 한명회,등등... 싫어 할만한 행동을 한 인물들은 많으나?
그래도 이들은 역사상에서 왕위찬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까...
하지만 연산군과 폐비윤씨는 너무 나쁜점만 부곽되고, 인수대비와 후궁들.. 의 잘못은 역사에서 지적이
안되는것 같아서 글을 적어 봤답니다. 연산군을 그래도 임금으로 생각해준 사람을 보면 그나마 김처선(죽음을 각오하고
연산군에게... 전하!..이러시면 안됩니다)라고 한 신하가 유일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성종.. 그 둘만 빼곤 연산군을
잘 이끌어준 사람이 없었던것 같아요
첫댓글 역사글 잘 읽었습니다. ^^*
1번글에 대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권력욕 맞습니다. 또한 용안에 상처를 냈다는 자체로 조선시대의 시대상황을 봤을때 그냥 죽여도 할말이 없는 상황입니다. 다만 신분이 왕후이기에 딜레이가 있을 수 밖에 없는게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에는 중앙집권체제 이기때문에 왕에게 모든권력이 모이게 되어있죠. 그런 왕에게 상처를 냈다는건 흔히 말해 '나 죽여주세요' 라는 상황밖에 되지 않습니다. 연산군 왕이 된 건 연산군의 왕재가
그만큼 뛰어났다고 볼수 있습니다. 어디 기록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연산군의 세종이후 성군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재라고 평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2번에 대한 반론을 드리자면 제가 글을 단 것에 대한 마지막에 보시면 세종이후 성군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재라고 써놨는데요. 그런 인재에게 막대했다?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왕실에서는 엄하기 훈육을 하는 탓도 있지만 권력에 대한
이해도도 많이 필요합니다. 연산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었을때 비호해줄 세력이 없었던거죠. 차갑게 대했다기 보다 흔히 말해 외척세력이 뒤에 없었기 때문에 생겼다고 볼 밖에 없습니다.
또한 인수대비는 인내심이 지독하게 강한 사람입니다. 아시겠지만 인수대비는 세조의 며느리입니다. 즉 왕세자비까지 올랐던 사람이며, 남편이 죽으면서 사가로 물러납니다. 그리고 예종이 책봉된수 인수대비의 아들(성종)이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다시 돌아오게 되죠
그기간이 짧지만은 않으며, 왕세자로 책봉되기 위한 권력적 암투를 생각했을때는 심계가 깊다고 밖에 평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인내는 권력을 잡기 위한 인내이지.. 자비하고는 상관없는 인내라고 사료됩니다. 어쨋던 반론을 제기해준것 감사합니다. 누군가 제글에..반론을 제기해주길 기다렸습니다. 인수대비란 인물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한없이 화가 나요 저는..
3번의 경우 인수대비의 집안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인수대비의 집안은 세종때부터 세도가 집안입니다. 집안에서 명나라 황제에게 후궁을 들이게 했으며, 세종과도 사돈관계에 있었죠. 말그래도 사대부 집안에서 자란 여식입니다.
그때 당시 시대 상황으로 봤을때는 인수대비의 가치관이 되려 보편적인 가치관입니다. 세종대왕께서 오히려 깨어있었던 거죠. 그것도 파격적으로.. 조선시대의 시대상과 사대부가들의 일반적 가치관을 봤을때는 인수대비의 가치관은
오히려 정상적으로 봐야합니다. 또한 실록이 좋은 기록이지만 역사는 승자가 쓴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AND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는거죠...OTL
인수대비는 윤씨를 폐위 시키기전에, 윤씨 아들 연산군을 궁밖으로 피접 시켰습니다. 두 후궁의 모략의 영향으로 봐야
합니다. 천륜을 끊은것이지요. 전 폐비 윤씨가 쫏겨 났다면, 엄소용과 정소용도 같이 궁에서 쫏겨 났어야 했다고 생각 합니다. 그 두 후궁도 폐비 윤씨 못지 않은( 원자 연산군 이융 죽일려 했고, 윤씨를 못살게 굴고 투기도 했으니..)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들은 벌하지 않았죠? 즉,캬이얀님 말씀대로 성군 연산군을 폭군 연산군으로 만든게 인수대비의 잘못된 관리라고 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 이미 세조와 한명회로 부터..연산군이 탄생된거라고 저는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