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선교사 지방 전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셀라 목사는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통하여 학원선교
에 힘쓰면서 일반 전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우선 자기와접촉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리고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시도하였고 이수정
과 로쓰목사가 번역한 복음서와 전도문서등을 제시하여 읽으라고 권고하였
다. 드디어 1887년 6월 24일 성경의 진리를 학습한 배재학당의 한 학생이
세례받기를 지원하였다. 아펜셀라목사는 비밀히 자기집에서 그 학생에게 세
례를 베풀었다. (The Gospel in All Lends forDecember 1887.P.525)
언더우드 목사는 1887년 봄, 황해도 솔내에서 상경한 서경도,최명오,정공
빈의 세 사람이 세례받기를 간청하므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이 세례
식이 진행되는 동안 육영공원의 교사 헐버트(Hubbert)는 대문에지켜서서 일
이 발각되지 않도록 망보았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L.H. Underwood, Underwood of Korea,P61)
1888의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셀라목사는 서울을 떠나 관서지방으로 평양
으로 향해 여행을 떠났는데, 그 도중에 서울로 귀환하라는 긴급연락이 왔
다. 천주교에서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동에 성당 건축을 강행하고 있
어 관민이 격분하여 그 보복 조치로 일체의 기독교 사업에 금지령을 내렸다
는 내용이었다.
예로부터 왕궁을 내려다 보는 높은 장소에나 왕궁보다 크게 짓는 집은
국법으로 건축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가을에는 이러한 사정이
약간 완화되어 아펜셀라목사는 혼자서 평양을 거쳐 의주에까지 방문하여
박상모와 송상하 두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뒤에 스크랜튼과 죤스
(George H.Jones) 목사가 이곳을 방문하여 의주에서 또다른 세사람에게 세
례를 베풀었다.
스트랜튼 의사는 원산까지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자신의 의료선교
정책에 관하여 의견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진료와전도를
겸한 의료전도대 (Medico-Evangelistic Trio)를 조직하여 시골깊숙히까지
들어가는 것이 효과를 크게 발생하였다]라고 (Annual Rep-ort of the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f-or 1887,P.315)
언더우드 목사는 1889년 3월, 신혼여행이라는 명목으로 부인 릴리어스 홀
튼(Lillias S,Horton) 과 함께 압록강 하류에 있는 의주와 강계 지방에까지
다녀왔다. 그때 언더우드 목사는 여행을 떠나기전에 정부로부터유람 이외의
기독교 선교행위는 해서 안된다는 제재를 받았고, 또 미국공사도 한국인을
상대한 종교 의식은 삼가라고 충고하였다.(L.H.Under-wood, Fibteen Yers
Among Top-Knots,P 56) 그러나 그가 의주에 도착하여 보는대로 세례를 받으
려는 요청이 너무나 간절하여 이 요구를 도저히 물리칠 수 없었다.
그는 압록강 한가운데 배를 띠워 강물을 떠서 백홍준 조사의 사돈되는 김
이련 진사를 비롯하여 사위되는 김관근과 33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4월
27일에 거행된 이 세례식이야말로 한국교회사상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는
말로 불리어 매우 유명하다.
1888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에서는 네사람의 한국인 전도자를 선정하여
선교사들의 전도사업을 돕게하였으며 백홍준은 관서지방을, 서상륜은 경기
지방을 정공빈과 최명오는 해서지방을 각각 담임 관할케하였다.
그들은 한국 최초의 유급교역자가 된 셈이다. 1893년 관서지방의 전도구
역은 교세가 많어졌으므로 양분하여 평안북도는 의주 전도사 김관근이가,
평안남도 일대는 평양전도사 한석진이가담당하게 되었다.
북감리교 선교회에서도 1888년 두사람의 한국인 전도사를 임명하였다. 강
재형은 지방 전도사업을 위하여 조한규는 교육사업을 위하여 배재학당에서
일하게 하였으며 1892년 강재형은 인천지방 전도사로 파견되어인천교회 개
척에 적지않은 공을 세웠다. 선교사들은 속히 한국인 교역자를 양성하여 한
국민속으로 뿌리깊게 복음이 침투되기를 희망하였다.